남빛 봄 한 가지

남빛 봄 한 가지 / 01.

藍春の一枝

502 by 티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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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의 노을은 늘 짧고 붉었다. 땅거미가 길게 드리울 쯤이면 삼삼오오 모였던 아이들은 으레 그렇듯 집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퇴근길에 오르는 직장인들이 좀비처럼 거리에 듬성듬성 나타났다. 연령대가 극단적인 마을인데도 어디선가 젋은이들이 툭 툭 튀어나왔다. 이 마을에서 젊은이라는 명칭이 포함하는 연령대가 폭 넓기는 해도, 어쨌든 평일 대낮만 되면 텅 빈 마을에 잠깐 활기가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캠핑장을 옆에 끼고 다리로 향하던 시마 또한 그 젊은이 중 하나였다. 여름방학이 끝난 지 한 달이나 지났지만 여름은 여즉 밍기적거리는 중이었다. 양쪽으로 언덕과 수풀이 우거져 그늘이 드리운 덕에 덥지는 않았다. 간혹 숲이 습하고 짙은 풀내를 훅 불 때, 여름은 그곳에서 나타났다. 매미가 비명을 질러대던 지난여름을 잊지 말라는 듯이.

“어! 새 선생님이다!”

“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막 다리 초입에 들어선 시마는 등 뒤를 확인했다. 부활동이 방금 끝났는지 등에 악기 가방을 멘 학생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다니는 오쿠타마중학교 학생들이었다. 가슴팍에 올까 싶은 작은 아이들이 그의 앞에 기웃거렸다. 알아볼까? 모를까? 호기심과 기대를 품은 눈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천진하게 빛났다.

“하시모토, 그리고 사와다. 맞지?”

“와. 벌써 외우셨나 봐.”

“어떻게 알았지?”

사람을 코앞에 두고 신기해 한 아이들이 곧 시마를 올려다봤다. 눈빛이 또랑또랑한 게, 이대로 그냥 보내줄 기세가 아니었다.

“근데 쌤은 어디 가요?”

“에? 지금 시간이면 저녁이지.”

“야채 아저씨네 튀김 맛있는데. 쌤 아실라나?”

불러세우길래 이야기나 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정작 본인한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않고 자기들끼리 문답을 이어갔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시마는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야채 아저씨?”

“역 앞에 정식집 있어요! 거기 채소 키우는 아저씨가 하시거든요.”

“거기 가지튀김 엄청 맛있더라.”

“너 가지 안 먹잖아. 흐물흐물 싫다며.”

“거기는 달라!”

“근데 가지튀김 살 엄청 찐대. 기름을 다 흡수해서.”

“맛있게 먹으면 안 찐댔어.”

“좋겠다. 난 다이어트 해야 돼.”

“너 미다미 봤어? 걔 엄청 말랐잖아.”

“미다미는 건드리면 부러질 거 같아.”

중학생의 대화는 좀처럼 시마가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교내에 존재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조각상처럼 선 시마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저기, 얘들아. 선생님 이제 가도 될까. 그보다 성장기에 웬 다이어트. 건강에 안 좋다고. 목끝까지 잔소리가 차올라 삼키는데 두 아이가 불쑥 그를 쳐다봤다.

“근데 쌤 왜 안 가세요?”

“맞아. 배 안 고파요?”

할 말을 잃은 시마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역시,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음, 그래. 가야지. 너희도 점심 맛있게 먹고.”

“저흰 아까 먹었는데요?”

“아하하! 쌤도 맛있게 드세요!”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아이들이 멀어져갔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지만, 시마는 아이들이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자리에 서성였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무거운 악기 가방을 메고도 폴짝거리는 뒷모습이 해맑았다.

“나도 슬슬 가볼까.”

다리를 마저 건너는 동안 강바람이 불었다. 선선하니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가을이나 봄에 유독 화창하다는 수식이 자주 붙는 이유를 알 법했다. 노을은 붉게 익은 색으로 떨어지는데, 강변에서 보내는 바람은 시원했다. 나뭇잎이 벌써 물들었나 싶다가도 자세히 살피면 초록이 생생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다리를 건널 때마다 땡볕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는데. 숨이 턱턱 막혔던 첫 방문으로부터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잘하고 있는 걸까.

사색은 다리와 함께 끝났다. 시마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전거를 탄 순경과 딱 마주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라?” 하고 열심히 구르던 발을 멈췄다. 자전거가 헛돌면서 차르르 굴렀다.

“처음 보는 얼굴!”

시마의 머릿속 혼잣말이 순경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초면인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인가? 당황한 시마가 반응하기도 전에 순경이 자전거에서 가뿐하게 내렸다. 여간한 몸놀림이 아니었다. 내리고도 자전거처럼 빠르게 다가온 순경은 요모조모 사람을 대놓고 뜯어 보더니 씩 웃었다.

“이사 오셨어요?”

“아, 네. 한 달 전에 왔습니다.”

“헉. 왜 몰랐지?! 아무튼 반가워요! 제 또래 분이 오는 건 엄청나게 오랜만이에요! 아참, 이부키 아이입니다. 여기 파출소에서 일해요.”

잽싸게 그의 손을 잡은 이부키가 셀프 악수를 시도했다. 심지어 악수로 끝나지도 않았다. 무슨 락이나 힙합하는 사람처럼 현란하게 움직이는 길쭉한 손마디에 시마는 정신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교직에 35년이나 있었다던 고참 교사의 분필 투척 솜씨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나? 합리적인 의심을 가진 시마는 손이 자유를 되찾고 나서야 겨우 인사했다.

“시마 카즈미입니다. 오쿠타마중학교 교사고요.”

“아!! 그 새로 오셨다던 사회쌤이시구나!”

시마는 얼떨떨하니 끄덕였다. 좁은 동네라 저에 대한 소문이 퍼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파출소 순경다운 친절에 시마도 꾸벅 인사했다. 보통은 이쯤이면 인사치레가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어딘가 이상한 순경은 등을 돌리거나 옆을 지나쳐 가는 대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이래. 뭔데. 꼭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비슷한 시선에 부담스러워진 그는 어색하게 물었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반가워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흐흥 하고 웃는 낯이 해맑았다. 도시사람은 깍쟁이고 시골 사람은 순박하다는 편견에 대해 회의적인 사회교과 선생은 잠시 그 편견이 빅 데이터를 수집한 결과가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말 그대로 잠깐이었고, 그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여상하게 대꾸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씩 웃은 이부키가 순찰 중이라 가보겠다며 훌쩍 떠났다. 덩그러니 남은 시마는 뒷머리를 괜히 매만지다 돌아섰다. 뭘 부탁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경찰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지. 특이하긴 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그가 그 순경이 동네에서 가장 젊은 순경이고 솔로이며, 꽤나 사고뭉치라는 점을 알게 된 건 딱 하루 뒤였다.

바람이 부쩍 더 선선해졌다. 과열된 아이들의 열정을 식혀주기 좋은 바람이었다. 곧 다가올 10월 문화제로 학생이고 교사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 시마는 주말을 맞아 한껏 늘어지기로 했다. 2층에 테라스가 있어 빨랫대에 이불을 널어두고, 그늘진 곳에 선베드를 펼쳤다. 작은 낙원이 손쉽게 완성됐다. 선베드에 드러누운 그는 오후 2시의 햇살을 만끽했다.

오쿠타마도 도쿄도에 속하지만 시골이라 도심 한복판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보다는 확실히 여유로웠다. 그때는 담임도 아닌데 주말까지 바쁜 날이 잦았다. 학부모의 교육열과 진로 문제로 인한 경쟁율이 높은 만큼 스트레스가 심했고, PTA도 극성이라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진상’ 학부모다. 제 자식만 소중한 이기적인 인간들이 발에 차일 만큼 흔했다. 그런 곳에 비하면 오쿠타마중학교의 스케줄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때문에 빠르게 적응을 마친 그의 최근 관심사는 낯선 순경이었다.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모르는 듯한 그 순경은 시마가 보기에 꽤 유명인사였다. 이 좁은 동네에 이름 하나 안 알려지고 은거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부키는 적어도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불량아는 ‘귀찮은 짭새’. 평범한 학생은 ‘좀 이상하고 웃기고 엄청 빠른 경찰 아저씨’. 교사는 ‘경찰보다는 양키’. 그리고 극히 일부 사람들은 ‘좋은 사람’.

크게 분류를 하자면 이렇고, 시마는 그 분류에 포함되지 않았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단정짓는 편은 아니지만, 이부키에 대해 굳이 논하자면 ‘특이하지만 성실한 경찰’이었다. 그 경찰은 오가며 인사를 나눌 때마다 10년은 알고 지낸 사람마냥 환하게 웃었다. 멀리 지나가도 ‘엄청 빠른 경찰 아저씨’답게 쫓아와서 굳이 얼굴을 비추고 돌아갔다. 음주 단속 중에 도보로 지나가는 제게 경광봉을 붕붕 흔들며 인사하다 옆에 선 소장에게 쥐어박힌 적도 있었다.

어릴 때 경찰을 꿈꿨던 입장이니만큼 이부키가 얼마나 특이한 경찰인지 알 수 있었다. 뭐, 엉뚱한 사람이라 해도 경찰학교에 들어가 수료하고 정식으로 경찰이 될 수는 있겠지. 그렇게 대충 넘기다가도 이부키에게 흔히 붙는 ‘양키’라는 수식은 단순히 그의 사나운 외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 듯했다. 뭐랄까. 자세나 말투, 기세, 눈빛.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수집하기 좋은 정보들로 보면 이부키는 진짜다. 혹은 진짜였거나.

“뭐… 진짜였어도 지금 경찰이면 장한 거지.”

본래부터 성실하게 자란 사람이 경찰이 되는 건 그리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허나 한 번 바닥을 친 사람이 타인을 돕는 일에 뛰어든다는 건 쉽지 않다. 남의 삶을 일반화해 재단하려는 게 아니다. 교사로서 겪으며 누적된 데이터였다. 아무리 이끌어도 끝까지 잘못된 길로 가는 녀석도 있는가 하면,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의 바닥을 딛고 일어나는 녀석도 분명히 있다.

그 녀석도 잘 딛고 일어났을까.

문득 떠오른 얼굴에 시마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테라스 너머에서 자전거 쳇바퀴가 굴렀다. 멈춘 채 공연히 돌아가는 소리. 제 집 앞인 듯해 난간에 다가서자 저 아래에 익숙한 실루엣이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어라, 들켰네.”

이부키였다. 씩 웃은 그가 경찰모를 뒤로 살짝 젖힌 채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쌤!”

주말에도 활기찬 인사에 시마도 마주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상대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양심이 살짝 찔렸지만 모른 척했다.

“주말에도 열심이네요.”

“뭐, 경찰이니까요.”

체념보다는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주말까지 학교에 나가 문화제 준비에 한창인 학생들과 열정의 농도가 비슷하달까. 주변을 둘러본 시마는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시간 됩니까?”

“에?”

“잠시만. 3분이면 되니까.”

“응? 응. 괜찮아요.”

시마가 테라스에서 사라졌다. 이부키는 자전거에서 내린 뒤 킥스탠드를 차 세워뒀다. 담장 대신 손바닥만 한 정원만 있는 2층 집이라 구경할 건 딱히 없었다. 몇 번 주변만 두리번거린 이부키는 곧 대문이 열리자 고개를 홱 돌렸다. 시마가 한손에 뭘 가득 쥔 채 나오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레몬색의 매끈한 비닐이 반질거렸다.

“좋았어. 1분 지났군.”

어쩐지 즐거운 기색인 시마가 다가왔다. 그가 손을 내밀기에 이부키도 자연스럽게 마주 내밀었다. 손바닥에 샛노란 빛이 투두둑 떨어졌다.

“에? 사탕?”

레몬사탕이었다. 가운데는 투명하고 양쪽 끝만 레몬색을 입힌 비닐 포장지로 싼 사탕. 하나만 입에 넣어도 침샘이 가득 고일 듯이 청량한 노란빛이 손바닥 위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시마 쌤 사탕 좋아해요?”

“가끔 필요할 때만 먹어요. 애들한테 가끔 선물로 주기도 좋고.”

“아. 문제 맞추면 하나씩 주는 그런 거?”

“정답. 이부키 학생, 선물로 하나 더 드리죠.”

주머니에서 한 개 더 꺼낸 시마가 수북한 사탕더미 위에 쌓아줬다. 이렇게 사탕을 많이 받아보기는 처음인 이부키는 얼떨떨하게 겉포장을 읽었다. ポジターノ. 며칠 전에 지나가면서 떠들던 아이들의 수다가 퍼뜩 떠올랐다. 포지타노 수업 개 어려워, 진짜.

“아. 그거 시마 쌤이었구나.”

“응?”

“포지타노. 애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하?”

이부키가 사탕을 하나 들어보였다. 포장지에 적힌 글씨가 시마의 눈에도 확연하게 읽혔다. ポジターノ. 이탈리아의 유명 도시명이자 사탕 이름이었다. 아마 자신이 수업 때 간간이 뿌린 선물 덕분에 얻은 별명인 듯했다. 예전 별명을 떠올린 시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방지턱보단 낫네요.”

“에? 그런 별명도 있었어요?”

“방해 전문이었거든요. 출제도 어려운 편이고.”

이부키가 무슨 뜻이냐는 듯 갸우뚱했지만 시마는 손목시계를 확인할 뿐이었다. 약속한 3분이 이제 막 지나가고 있었다.

“3분 지났네요. 그럼 이만.”

“어라? 에? 그냥 이렇게 보내는 거?”

“용건은 끝났으니까요.”

“우와. 칼 같아.”

-여기는 오쿠타마.

마침 무전이 쩌렁쩌렁 울렸다. 시마가 거 보라는 듯 무전을 향해 턱짓했다. 무전에 대답부터 한 이부키는 사탕을 순찰용 조끼 주머니에 챙겨 넣더니, 자전거에 곧바로 올라탔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엔 더 길게 봐요!”

페달을 밟은 그가 두 바퀴를 돌리기도 전에 멈춰 섰다. 집에 들어가려던 시마는 가다 말고 멈춘 손님에 의아하게 쳐다봤다. 상체만 겨우 돌린 이부키가 사탕 하나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잘 먹을게요!”

다시 페달을 밟은 이부키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혼자 남은 시마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성이다 집으로 들어갔다. 햇살을 내내 맞은 등허리가 뜨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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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검색하는 서벌

    전 왜 이렇게 티오트님의 계절과 온기에 대한 묘사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입심 둘이 어떻게 엮여갈지 넘... 기대되네요.... 잘 읽구 감미다......

  • 독창적인 판다

    두근두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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