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이(Ai)

안녕, 아이(Ai) 外傳 1

안녕, 시마(Shima)

나의 바다 by 라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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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U404 이부키 아이 x 시마 카즈미

* 이부시마 교류회 M-TRIP에 낸 글의 외전입니다.

* 시점은 원작 이후로 원작과 무관하며 내용은 허구임을 밝힙니다.

* 2023. 03. 10 개장판 업로드

미약한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방안. 불현듯 시마는 눈이 떠졌다.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둬 시간은 모르지만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오랜만의 긴 수면 탓에 뻑뻑해진 눈을 두어 번 끔벅이던 시마는 시야에 비친 인영에 깜박임조차 잊고 조용히 바라봤다.

아직 자고 있는지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시마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베개에 얼굴을 반은 묻고 있었고,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가 얼굴의 남은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정리하자 평소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긴 눈꼬리가 유순하게 내려가 있는 게 보였다. 숨을 내뱉는 입술도, 유려하게 뻗은 콧대도 하나하나 눈에 담은 시마는 그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했다.

“이부키.”

나직한 부름이 고요한 방안에 툭 떨어졌다. 한 번 놓쳐버렸던 손을 꼭 잡고 그의 집으로 돌아와 같은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시마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여간 쌓인 피로와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가 멀쩡한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으니 그리 생각이 들 만도 했다. 피로가 가시고 잠기운이 물러난 머리는 그가 만지고 있고, 보고 있는 이가 꿈에서도 그리던 이부키 아이라고 속삭였다. 퍼석하게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금세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이부키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이는 게 싫어 손으로 훔쳐내도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멈추지 않았다.

“시마…?”

“…응.”

“왜 울어?”

예민한 감각에 걸린 기척에 잠에서 깬 이부키는 눈앞에 울고 있는 시마가 보이자 어쩔 줄 모르면서도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줬다. 다시 봤을 때도 멈출 줄 모르던 눈물은 이번에도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이럴 때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잘 몰라 이부키는 일단 시마를 꽉 끌어안았다. 이부키를 꼭 안아주던 어느 날 밤의 시마처럼 끌어안고 커다란 손으로 등을 도닥였다. 시마는 갑자기 훅 끼쳐오는 체향과 온몸을 덮는 평균보다 높은 체온에 되레 심장만 빠르게 뛸 뿐 진정되진 않았다. 맞닿은 어깨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갔다.

“울지마, 시마. 내가 잘못했어. 응? 울지마아….”

“뭘, 네가… 뭘 잘못해.”

“다. 전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마.”

주인의 눈치를 보는 대형견처럼 쩔쩔매는 이부키에 시마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봐도 이부키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행동 탓이었다. 온몸을 덮는 온기와 귓가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고 눈물만 이제까지 흐르지 못한 게 다 흐르기라도 할 듯 쏟아졌다.

“이부키.”

“응, 시마.”

“얼굴 좀 보게 떨어져 봐.”

“어? 으응.”

그 말에 이부키는 주춤주춤 시마를 놓아줬다. 그러다 보인 양 뺨이 다 젖도록 흐르는 눈물에 커다란 개처럼 낑낑거렸다. 양 뺨을 붙잡고 눈물을 닦아주는 커다란 손과 연한 눈동자에 어린 걱정과 애정에 시마는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부키가 사라진 후로 시마는 숨을 쉬어도 숨이 모자랐다. 물 밖으로 내쫓긴 생선처럼 호흡이 가빠진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런 그의 세상에 쪽빛이 돌아왔다. 물속으로 돌아온 생선은 그제야 숨을 되찾았다.

“이부키.”

“응, 시마.”

“돌아온 거야?”

“응. 돌아왔어.”

'어떻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났던 노란 고양이와 고래는 어떻게 됐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묻겠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온전히 이부키가 돌아왔음에 기뻐하기로 했다.

“보고 싶었어.”

“…….”

“매일, 매 순간, 네가 보고 싶었어. 달리는 내 앞에 네가 없어서 멈춰 서고 싶었어. 숨 쉬는 게 힘들어서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어.”

“시마….”

담담한 말투완 어울리지 않는 아픈 말에 이부키는 앓는 목소리로 시마를 불렀다. 시마는 그 후에도 일상을 살아갔다. 그 안에 이부키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 너무, 지나치게 다르지 않아 힘들었던 시간. 이부키의 예상보다 더 힘들었음을 이야기하는 새까만 눈동자가 비수처럼 돌아왔다. 그래도 역시 시마를, 시마가 사랑하는 세상을, 시마를 사랑하는 세상을 지키고 싶었기에 다시 돌아가 선택한다고 해도 이부키는 같은 선택을 할 거였다. 그게 이부키 아이의 사랑이었으니까.

“그래도 달렸어. 뛰어들지 않았어. 네가,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내 일상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으니까.”

“응, 응. 시마….”

“그러니까 이부키.”

“응….”

“내가 죽은 후에도 내 곁에 있어 줘.”

보통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은 평생을 곁에 있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시마는 삶이 끝난 후에도 이부키가 제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죽어 잿더미가 된 시마의 옆자리엔 이부키가 죽어 남긴 잿더미가 있길 바라며 부탁하는 거였다. 그 안에 담긴 함의를 모를 수 없던 이부키의 눈엔 파랑(波浪)이 일렁였다. 그 순간의 반짝임이 시마는 좋아 온 얼굴 가득 햇살을 담아 웃었다.

“그렇게 해줄래, 이부키?”

“응, 응. 해줄래, 시마. 해줄 거야. 죽은 후에도 시마 곁에 있을 거야.”

울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가장 바라는 말을 건네주었다. 온 우주가 시마의 것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새 훌쩍이는 이부키를 시마는 꽉 안아주었다. 쪽빛이, 세상이, 우주가 제 품에 가득 찬 순간이었다.

서로의 체온에 불안이 잠식되고 울기까지 한 탓인지 두 사람은 끌어안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퉁퉁 부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크게 웃으며 어린애처럼 놀리기 바빴다. 한참 침대 위에서 서로를 놀리다 둘의 뱃속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에 또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일어나 이부키를 먼저 욕실로 들여보낸 시마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봤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 안은 그야말로 전멸. 머리를 긁적이며 간편 식품이라도 없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전무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외식이었다.

“시이마아아.”

“왜?”

“속옷이 없어.”

“아. 기다려.”

욕실 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반쯤 내민 초조한 얼굴의 이부키에 시마는 낮게 웃으며 드레스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옷과 양말 등을 정리해둔 서랍에서 이부키의 속옷을 꺼내고 가볍게 입을 흰 티셔츠와 바지를 같이 들고 욕실로 다시 향했다.

“자.”

“고마워! 에? 어…?”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나가야 하니까 빨리 씻고 나와.”

“어? 어. 응.”

시마가 건넨 걸 받고 구명줄이 내려온 것처럼 좋아하던 이부키는 낯설지 않은 속옷과 티셔츠에 의아해하다 궁금증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탁. 욕실 문이 닫히자 스르륵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은 시마의 귀 끝이 그곳에 사랑이 모인 듯 유난히도 붉었다. 그땐 이부키가 남기고 간 것을 하나라도 더 제 울타리 안에 넣기 바빠 생각지 못했던 게 무척이나 부끄럽게 다가와 시마는 조금 있다 떠들어댈 이부키의 입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막막해졌다. 아, 정말. 나이 38에 무슨 짓을 하는 중인지 모르겠다. 사춘기 때도 안 해본 유치한 사랑에 빠져 정신이 혼미했다.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뛰어 귓가를 시끄럽게 했다. 그게 나쁘지 않다는 게 제일 큰 문제인데 사랑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은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드니까. 겨우 붉은 귀 끝을 가라앉힌 시마는 이부키가 내놓은 옷을 가지고 세탁실로 향했다. 빨래를 분류해 넣고 세탁기를 돌린 후 마른 옷을 챙겨 드레스룸으로 가지고 가 정리했다.

“시마-. 다 씻었어!”

“어. 옷은 저 방에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 입어.”

“응응~”

밀린 집안일을 대충 보이는 순서대로 처리하던 시마는 어딘가 엄청나게 신나 보이는 이부키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와글와글. 표정이 대신 시끄러웠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귀여워 정말 사랑이란 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인정하고 마는 시마였다. 시마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이부키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 채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욕실로 들어간 시마는 뭔가 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세수와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래선 안 됐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법이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온 이부키는 몇 번 오지도 않았으면서 익숙하게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부터 말렸다. 빗질하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작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안을 둘러보던 이부키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꽉 줘야 했다. 정리된 옷은 한쪽은 누가 봐도 시마 옷이었고 한쪽은 이부키의 옷이었다. 또 진열장엔 익숙한 선글라스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먼지 한 톨 앉아 있지 않았다. 모를 수 없는 애정의 흔적에 이부키는 와글와글 시끄럽게 울어대는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크게 외치고 싶은 것도, 당장 시마를 끌어안고 싶은 것도 꾹꾹 눌러대느라 몸을 웅크리던 이부키의 시선에 구석에 숨겨둔 쇼핑백이 보였다. 그의 감이 당장 저걸 열어보라고 종용했다. 시마가 막을 틈도 없이 그렇게 꽁꽁 숨겨두었던, 전해주지 못한 선물이 선물 주인의 손에 들렸다.

“이부키?”

씻고 나온 시마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도 남았을 이부키가 거실에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바닥에는 쇼핑백이 놓여있고 이부키의 두 손에는 흰색 재킷이 들려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게 무엇인지 깨달은 시마는 후다닥 달려가 손에 든 것을 뺏으려 했다. 잽싸게 제 품 안으로 숨긴 이부키 탓에 미수에 그쳤지만.

“이부키, 당장 내놔!”

“싫어! 이거 내 거잖아!!”

“그건 맞지만…! 준 게 아니니까 아직 네 거 아냐!!!”

“그럼 지금 주면 되잖아!!”

“그…!”

말로 어디 가서 져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이부키에게 말로 지다니 시마의 완벽한 패배였다. 새빨개진 얼굴을 수건에 묻은 채 주저앉는 시마의 앞에 슬금슬금 다가간 이부키도 그 앞에 수그려 앉았다. 혹여나 뺏어갈까 여전히 손에는 흰 재킷을 꼭 쥔 채였다.

“시마. 시마아아아. 시이마짜아아앙.”

“…왜.”

“나 이거 입어도 돼?”

“…네 거라며. 네 맘대로 해.”

“그치마아아안. 응? 응? 시마아아아.”

어떻게든 해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녀석을 밀어내는 법을 시마는 몰랐다. 알았다면 애초에 휘말릴 일도 없었을 거였다. 눈만 들어 이부키를 보자 소중하게 재킷을 꼭 쥔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저 눈은 반칙이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러든지.”

“시마아아아!”

“떨어져, 떨어져!”

“너어무우 좋아아아아!”

“알았어! 알겠다고!”

주인이 너무 좋아 커버린 덩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애정을 표하는 대행견처럼 이부키는 온몸으로 시마를 끌어안았다. 훅 밀려오는 힘에 시마는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말로는 시마가 이부키를 많이 좋아한다고 하면서 이부키도 시마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느낄 때마다 시마의 세상에 꽃이 피었다. 커다란 해바라기와 작은 달맞이꽃이. 어느새 무성하게 피어버린 노란 꽃밭이 푸른빛 세상 한편에 자리했다.

“이부키, 비켜. 배고프다고.”

“아. 미안, 미안. 얼른 나가자!”

배고프단 한마디에 호다닥 이부키는 한 손으로 아직 주저앉아 있는 시마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힘에 이끌려 일어난 시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얼른 재킷을 걸칠 생각에 들떠 옷을 고르는 이부키에 한숨 쉬듯 웃었다. 배고팠던 건 맞기에 시마는 별말 하지 않고 머리를 말렸다. 말린 머리를 대충 빗어 정리하고 근처에 둔 미니 청소기를 들어 바닥을 정리하다 여전히 옷을 고르고 있는 이부키가 보였다. 시마가 보기엔 똑같아 보이는데 무슨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는 티셔츠 두 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부키.”

“응.”

“늦으면 두고 간다.”

“너무해-! 매정매정마인!”

“그래, 그래.”

설렁설렁 대답해주며 시마는 최근 날씨를 가늠해 반소매 티셔츠와 연 청바지에 즐겨 입는 여름 가디건을 걸쳤다. 그사이 고민을 마쳤는지 이부키도 좋아하는 락 페스티벌 티셔츠와 회색 조거 팬츠에 시마의 선물인 흰 재킷을 걸쳤다. 의기양양해 보이는 폼을 보니 그 스스로 무척 마음에 들어 보였다. 괜스레 쑥스러워져 먼저 드레스룸을 나간 시마는 침실로 들어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현관 앞에서 멀뚱멀뚱 이부키가 서 있었다. 그날 이부키가 입고 있던 옷마저 사라졌으니 핸드폰도 지갑도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시마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간 김에 핸드폰도 사자.”

“에? 나 지금 돈이 없는데.”

“그 정돈 괜찮아.”

“그래도….”

“없으면 내가 불편해. 잔말 말고 그냥 사.”

“…응!”

박력 넘치는 말에 이부키는 작게 꺄악- 비명을 질렀다. 네가 여고생이냐고 핀잔을 준 시마는 신발장을 열었다. 안에는 이부키가 모아두었던 운동화가 시마의 신발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또 감격의 포옹을 하려는 이부키를 간발의 차로 막은 시마는 겨우 신발을 신었다. 이번에도 한참 운동화를 고르려는 이부키를 닦달해 밖을 나오니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흐어어. 더워어어.”

“여름이니까.”

“이건 살인이야, 살인!!”

“뭐, 살인적이긴 하지.”

체온이 높아 여름에 유독 힘들어하던 이부키는 이번에도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걸친 흰 재킷에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부키가 선물해준 운동화를 신고 나온 저도 저이기에 시마는 별말 하지 않았다.

“시이마아, 우리 시원한 거 먹자아아.”

“좋지. 어떤 걸로?”

“냉우동! 절!대! 냉우동!!”

“이럴 때도 우동이냐.”

“먹고 싶은걸!”

“그래, 그래.”

시마도 우동을 싫어하지 않아 두 사람은 맨션을 나가 가장 가까운 우동 가게로 향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오래된 우동 전문 가게였다. 아직 식사 시간 전이라 한산한 가게에 들어가자 가게 주인이 바로 맞아주었다. 덥다고 아우성치는 이부키를 위해 자리는 에어컨 바람이 바로 오는 곳으로 잡았다. 아직 점심 전이지만 점심 특선이 된다는 안내에 두 사람은 고민도 하지 않고 냉우동과 튀김 세트를 시켰다.

음식이 나올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멸망이 지나간 후 코코노에가 얼마나 이부키를 찾아다녔는지, 찾지 못한 이부키를 사망 처리가 아닌 실종으로 처리하기 위해 키쿄 대장과 코코노에가 얼마나 애썼는지, 시마가 어떻게 이부키의 짐을 떠맡게 되었는지, 혼잡한 세상에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그 외에도 이부키가 없던 사이 있었던 일들을 시마는 차근차근 이야기 해줬다. 이부키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청취자로서 적절하게 호응해주고 적절하게 들어주었다. 그게 그리웠다고 말하면 또 울까.

“냉우동과 튀김 세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으! 너무 그리웠어!!”

“먹기나 해.”

“응응!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왁! 맛있어!!”

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이부키는 차가운 육수부터 들이켰다. 시원하다 못해 머리가 띵-하게 울릴 정도로 차가운 육수가 속을 짜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차가움에 되려 행복해진 이부키는 곧장 가지튀김을 하나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튀김옷 뒤로 가지 특유의 말캉함이 씹혔다. 단숨에 행복이 차오르는 맛에 커다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시마는 면을 먼저 후루룩 먹고 커다란 새우튀김을 한 입 먹다 무척이나 행복해하는 이부키를 보고 저도 모르게 큭 웃어버렸다.

“웅? 시마?”

“아냐. 먹어, 먹어.”

“웅웅!”

웃음소리에 의아해하던 이부키는 시마의 말에 후루룩 면을 마저 먹었다.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행복해하는 게 만면에 다 보여 시마도 웃으며 우동을 먹었다. 이부키의 행복함이 이해될 정도로 냉우동은 시원했고 튀김은 바삭하고 재료 특유의 맛이 느껴져 맛있었다. 날이 더워서 한 선택이었지만 무척이나 마음에 든 선택이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뒤 가게를 나와 두 사람은 우선 이부키의 핸드폰을 맞추러 갔다. 현대 사회에서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었기에 가장 가까운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이전과 똑같은 모델이면 된다는 이부키와 기왕이면 새로 나온 모델로 맞추는 게 좋다는 시마가 한참 입씨름했다. 승리자는 결제하는 시마였다. 굉장히 비싼 가격에 이부키는 안절부절못했으나 시마는 괘의치 않았다. 오히려 앓던 이 하나를 뺀 듯 속이 시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장을 봐서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를 훌쩍 지나 있었다. 땀을 많이 흘린 이부키는 먼저 씻으러 들어갔고 시마는 꺼두었던 에어컨을 틀어두고 장 봐온 것을 하나, 둘 정리해두었다. 이부키가 나오자 시마도 씻고 나왔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두 사람은 벌써 방전되어 거실 소파와 바닥에 드러누웠다.

“흐어. 여름 너무 싫어.”

“동감. 장마가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두 사람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기력은 빠져도 입을 움직일 힘은 또 따로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애써 채워보려는 것도 있었다. 다 채우진 못하더라도 아쉬움은 남지 않았으면 해서 두 사람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응?”

“너 실종 처리 취소해야지.”

“아- 그러네. 그냥 대장에게만 연락하면 되나?”

“되겠냐.”

“에? 그거론 안돼?”

“안돼. 우선 키쿄 대장과 큐짱에게 연락부터 해야지. 그다음에 대장에게 연락하고, 진바 씨에게도 연락해야지.”

“웅- 시마짱이 해줄 거야?”

“넌- 하아. 기다려.”

“응!!”

시마는 내버려 두었던 핸드폰을 찾아 우선 키쿄와 코코노에에게 연락했다. 어제 퇴근길에 이부키를 찾았고, 상태가 좋지 않아 우선 쉬다가 이제야 연락해 미안하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키쿄는 별말 없이 찾아서 다행이라며 처리는 자기가 해두겠다고 전화를 끊었고, 코코노에는 한참 말이 없다 이부키의 인사를 듣더니 펑펑 울었다. 이부키는 또 한참을 우는 코코노에를 달래느라 애썼다. 시마는 도와달란 눈빛에도 괘씸한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정…말… 제가 얼, 마나 찾으러 다녔는지 아십니까, 이부키 씨….”

“응응. 시마에게 다 들었어. 고마워, 큐짱.”

“조만간 꼭, 제가, 만나러 갈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꼭 큐짱 만날 테니까! 그만 울어!”

그렇게 곧 만나자는 약속에 다짐까지 받고서야 코코노에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 한 통에 진이 다 빠진 이부키는 킬킬거리며 웃는 시마에게 대응할 기운도 없어 소파에 푹 파묻혔다. 한참 이부키를 놀리던 시마는 남은 두 사람에게도 연락했다. 기수 대장은 미리 키쿄에게 전달받았다며 내일 중으로 경시청에 한번 들리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고, 진바도 코코노에에게 전화를 받았는지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언제 넷이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끊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부키는 어쩐지 속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순순히 부시죠, 이부키 순사부장님.”

“윽-! 진짜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이 완전 못생겨졌는데?”

“너무하잖아, 시마아악!”

어떻게든 숨겨보려 했던 이부키는 계속 이리저리 찔러대는 시마에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그렇다고 바로 말하기엔 조금 시간이 필요했기에 이부키는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시마는 기다리는 건 익숙했기에 이부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툭. 소파에 늘어져 있는 이부키의 등 위로 시마의 머리가 얹어졌다. 그 무게와 온기가 이부키 안으로 침입했다. 마지막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마 앞에선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처음이라서….”

“처음?”

“응. 이렇게… 걱정할 줄 몰랐어….”

힘없이 웅얼거리는 말의 의미를 시마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부키는 시마의 일상을 지키고 싶어 그런 선택을 한 거지만 그 기저엔 그 누구도 자신을 걱정할 거란 생각하지 않은 거였다. 못한 것에 가깝겠지. 항상 그랬을 테니까.

“이부키.”

“응?”

“넌 좋은 사람이야. 좋은 형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

“…….”

“그러니까 넌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거야.”

“시마….”

“울지 말고.”

“…응!”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와도 시마는 애써 모른 척해줬다. 여기서 굳이 장난치거나 말을 더 얹을 필요는 없었다. 완전히 받아들이긴 당장은 힘들어도 이부키는 알아들었을 테니까. 시마는 이번에도 기다렸다. 훌쩍임이 잦아들 때까지.

“준비는 다 끝냈어?”

“응!”

“그럼, 가자.”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맨션을 나섰다. 오늘은 경시청에 들러 기수 대장에게 보고하고 이부키를 보고 싶어 한다는 키쿄의 연락에 유타카와 하무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시간은 넉넉했기에 두 사람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날이 무척 더워 이부키는 덥다고 난리였다. 시마도 더운 건 질색이었기에 대충 맞장구쳐주었다. 1시간 같은 15분을 걷고 나자 익숙한 분주소가 보여 이부키는 잠시 멈춰 섰다.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4기수로 처음 출근했던 날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이부키를 옆에서 지켜보던 시마는 툭 어깨를 건드렸다.

“뭐해. 가자.”

“어, 응!”

커다랗게 눈을 뜬 이부키가 귀여워 정말 중증인가 보다 생각하며 먼저 앞서가는 시마의 뒤로 쫓아오는 이부키의 발소리가 들렸다. 꼭 주인을 따라가는 개처럼 이부키는 시마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기수 대장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먼저 이부키를 들여보내고 시마도 뒤따라 들어갔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장!”

“죄송합니다.”

“됐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지 뭘 사과해. 몸은? 괜찮고?”

“네! 꽤 튼튼하니까요?”

“병원은 가봤나?”

“아뇨. 둘 다 정신이 없어서 바로 집으로 가서 쉬었습니다.”

아무리 젊어도 그러면 못 쓴다고 대장의 잔소리가 1절에 2절, 3절로 줄줄 이어졌다. 이부키는 단번에 괴로운 표정으로 몸을 베베 꼬았고 시마는 예의 사회적 가면을 쓴 채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어서 끝나길 바랐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잔소리는 때마침 보고하러 온 다른 기수에 의해 겨우 멈췄다.

“관사는 지금 여유가 없어서 바로 입주는 어려운데 괜찮나?”

“네. 지금 시마의 집에 신세 지고 있어요.”

“다행이군. 여유가 나면 바로 연락 갈 수 있도록 해주겠네. 그리고 당분간은 휴가이니 시마와 함께 출근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가봐. 또 사고 치지 말고.”

“넵, 대장!”

인사까지 하고 겨우 나온 두 사람은 어쩐지 진이 빠진 느낌이라 잠시 분주소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시바우라서 뒤편에 자리한 익숙한 분주소에 들어가자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어 이부키는 저도 모르게 훌쩍였다. 감성 충만한 파트너는 내버려 두고 시마는 소파로 가서 지친 몸을 누웠다. 이부키는 분주소 안을 둘러보다 주방으로 들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고 치는 건 아닌 것 같아 시마는 그저 가만히 천장을 본 채 누워있었다. 그 위로 그림자가 지기 전까지는.

“자, 시마.”

“뭐야?”

“응? 커피!”

“하?”

커피 특유의 고소하고 쌉싸름한 향이 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갑자기 웬 커피인가 싶었다. 이부키를 바라봐도 싱글싱글 웃을 뿐 말이 없어 별수 없이 시마는 자리에 앉아 잔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뭘!”

히죽 웃으며 옆에 앉는 이부키를 한번 보고 손에 든 커피를 보고 나서야 시마는 그가 뭘 하려 했던 건지 깨달았다. 사라지기 전, 매일 같이 아침에 시마의 손에 커피를 쥐여줬던 걸 오늘도 했던 거였다. 대형견이 주인에게 칭찬받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서 시마는 낮게 웃었다. 시마가 웃으니 이부키도 같이 웃었다. 둘뿐인 분주소 안에 웃음소리와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이부키!!!”

“유타ㅋ, 억!”

“바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으- 미안, 유타카. 미안해. 잠시, 음- 멀리 갔다 왔어.”

분주소에서 쉬다가 약속 시간 전에 나온 두 사람은 유타카와 하무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뒤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여 긴 팔을 휘적휘적 흔들어 인사하던 이부키는 난데없이 폭격기처럼 달려든 유타카에 휘청이며 그새 더 커버린 아이를 받아들였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우는 유타카를 달래는 이부키의 곁으로 하무가 다가와 시마와 인사를 나눴다.

“벌이야!! 종일 목말 태워줘!!”

“유타카 그러면 안 돼.”

“좋-아! 그럼 당장 태워줘 볼까~ 으-쌰!”

“놔두세요. 이부키도 괜찮으니까 해주는 거니까요.”

염려하는 하무를 시마가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그사이 이부키의 키보다 훌쩍 높아진 시야에 언제 울었냐는 듯 유타카는 즐거워했다. 그걸 본 하무와 시마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자며 성화인 유타카에 맞춰 밥 먹기로 한 식당으로 향하는 이부키의 뒤로 하무와 시마가 말없이 뒤따라갔다. 유타카를 위해 어린이 정식 세트가 있는 함박스테이크 식당으로 미리 정해뒀기에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꺅꺅 웃는 유타카의 웃음소리와 함께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려온 유타카는 자리도 이부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 가면 자기가 붙잡을 거라는 이유를 듣곤 세 사람은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럼 시마 네 집에서 자는 거야?”

“응. 당분간만 신세 질 거야.”

“나도 가고 싶어!”

“오늘은 안돼. 그건 나중에 엄마에게 허락부터 받자. 응?”

“그래. 허락받으면 와, 유타카.”

“웅- 알겠어. 그럼 허락받으면 꼭이야!”

“응. 약속.”

시마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하고 나서야 유타카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유타카의 속도에 맞춰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자 시마와 이부키는 키쿄도 보고 갈 겸 두 사람을 데려다주기로 했다. 이부키의 목말을 더 탈 수 있어 유타카는 좋아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키쿄의 퇴근이 일러 시마와 이부키는 그를 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대장의 잔소리도 덤으로 얻고 돌아갔다. 그래도 그게 애정에서 어린 말이라 이부키도 시마도 군말 없이 들었다. 하무는 그런 두 사람이 꼭 잘 훈련된 대형견 같다는 생각에 나직이 웃었지만 웃음의 의미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쉬는 날은 시간이 유독 순식간에 지나간다. 유타카와 하무를 만난 후에 어렵사리 시간을 낸 코코노에와 같이 휴가를 만끽하고 있던 진바와 만나 한바탕 술도 마셨다. 술을 못 마시는 코코노에가 만나자마자 술을 반쯤 들이켜서 세 사람을 기함을 토하게 했다. 결국 금세 취한 코코노에가 이부키를 붙잡고 펑펑 울기 시작해 이부키는 또 쩔쩔맸고, 진바는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으며, 시마는 그 옆에서 안주를 먹으며 진바와 같이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코코노에가 곯아떨어지고 나서야 끝났다. 코코노에와 진바를 각각 택시에 태워 보내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대충 씻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깨어나고 보니 오후에 속이 쓰려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두 사람은 배달 음식으로 해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나고 난 후에야 이부키는 가마 씨를 만나기로 했다. 자신의 실종 사실을 가마 씨에게도 전달했다는 시마의 말을 듣고 한참 고민하다 매달 면회 갔던 날짜가 다가왔다. 습관적으로 차입물을 고르다 멈칫거리는 이부키에게 시마는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차갑게 질려버린 제 손을 꼭 잡아주는 온기에 이부키는 희게 웃었다.

“잊은 건 없어?”

“응. 여기 다 챙겼어.”

“다녀와, 이부키.”

“다녀올게, 시마.”

무더운 날씨를 뚫고 겨우 도착한 교도소 앞에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심이 선 이부키의 등을 시마는 툭 밀어주었다. 다정한 배웅과 말 없는 응원에 힘입은 이부키는 결연한 표정으로 교도소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대기 순번을 뽑아 기다리고 순번이 불리면 창으로 다가가 차입물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함은 늘어갔다. 늘어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대기는 죽어도 싫어도 기다렸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번호가 불리자 이부키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창으로 다가갔다.

“가마고오리 시게오 면회 거부입니다.”

“…그렇군요.”

“대신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교도관은 차입물 위로 작게 접은 흰 종이를 올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색에 그게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울렁이는 속을 겨우 삼켜낸 이부키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차입물과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시마는 휘청휘청 위태로운 걸음으로 나오는 이부키를 보고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이부키?”

“시…마….”

“응, 이부키.”

“가마 씨가…, 가마 씨가….”

위태로운 이부키의 상태에 더 눈이 가 시마는 손에 들린 차입물만 보고 오늘도 면회가 거절됐다는 걸 알았다. 다만 이부키의 상태가 면회 거절이 이유가 아닌 거 같아 이부키의 말을 기다렸다. 시마를 바라보는 연한 눈동자엔 슬픈 건지 서러운 건지 기쁜 건지 쉬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차입물 위로 겹쳐 있는 흰 종이가 보였다. 시마는 그저 말없이 이부키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해줄 수 있는 말도, 위로도 없었기에. 그 다정한 품 안에서 이부키는 한참을 슬픔과 서러움과 기쁨과 죄책감을 떨구어냈다. 유난히 맑은 하늘 아래 두 사람이 선 땅만 젖어갔다.

그 후 남은 휴가는 그저 쉬기만 했다. 날이 더워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남은 휴가가 짧았기에 그저 둘이서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둘이서 나눠 청소도 하고 해가 지고 더위가 가면 가볍게 산책도 했다. 어떨 땐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에 관한 이야기했다. 이부키는 역시 관사 자리가 나면 나가겠다고 했으나 시마는 어차피 방도 남으니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 지난 며칠을 같이 지내며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주저하는 이부키에게 시마는 하나하나 같이 살면 좋은 점을 꼽았다. 첫 번째로 연인-여기에서 이부키는 꺅하고 비명을 질렀다-이라는 점. 두 번째로 시마의 맨션은 넓고 쾌적하며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있고 심지어 방음도 완벽하다는 점. 세 번째로 퇴근 후에도 같이 있을 시간이 많이 늘어난다는 점. 네 번째는 없었다. 없어도 됐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이부키는 말로 시마에게 이기지 못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붙잡아도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에 휴가도 끝났다. 오랜만에 당번인 날이라 두 사람은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이부키는 항상 빠짐없이 하던 러닝으로 아침을 시작했고, 시마는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난 김에 가벼운 아침을 준비했다. 러닝에 돌아온 이부키와 아침을 먹고 뒷정리하고 나자 나갈 시간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현관에 선 두 사람은 색이 다른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선글라스를 쓴 이부키가 씨익 웃으며 시마를 바라봤다. 그 당당한 웃음에 피식 시마도 웃었다.

“준비됐어?”

“응. 시마는?”

“나도. 그럼, 갈까?”

“응!!”

망설임 없는 네 개의 발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기수 404, 오늘부터 다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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