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그날그냥...

https://youtu.be/1a3ptECYNoI?si=cLmdqUAl9cJ2tUbl


그날의 하루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인파 속 노란 머리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가 혀를 차며 피했다. 로비 대리석에 닿는 구두 소리가 요란하게도 느껴졌다. 임원 엘리베이터에 '점검중' 이라는 빨간 글씨가 굳게 박혀 급하게 사원용으로 걸음을 돌리고 몸을 싣자마자 인원 초과 소리가 삐- 울렸다. 욕지거리를 씹으며 비상계단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새어나왔다. 땀에 젖은 서류가 계단에 떨어졌는지 한 장 비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점심으로 나온 불고기 반찬은 퍽퍽하고 국은 입맛에 맞질 않아서 물만 벌컥 들이켰다. 다른 부서로 넘겼던 일에 차질이 생겨 회장실에서 타박을 듣는 중 조상무가 걸어오는 기싸움에도 지쳐버렸다. 밥을 굶어서 그런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 나온 회장실의 수상한 낌새에 은밀한 대화를 엿들으려 벽에 귀를 붙였으나 업무 전화에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자리를 떴다. 사무실에 쌓인 서류 하나를 없애면 또 쌓이길 반복이라 해가 넘어 달이 오르고 새벽 동이 틀 때까지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못했다.

고향에서 성룡이 불러왔던 오광숙. 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종일 꺼이꺼이 소리 내 울기를, 당연한 일이었다. 군산에서 다방일 하며 싸구려 커피를 타던 광숙을 성룡이 제대로 사무실 일을 하게 해줬다고 한다. 광숙에게 성룡은 옛적부터 의인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지쳐 쓰러지면 하경이 마른 얼굴로 뚝뚝 눈물을 흘리며 응급실로 향했다. 하경의 집에 머물고 있던 게 참 다행이었다.

하경은 어땠던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허무한 죽음 앞에선 어떤 사람이든 껍데기를 깨고 물러졌다.

하경에게 성룡은 여전히 경리부 김과장이었다.

명석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와선 의외로 누구보다 의젓한 얼굴로 제 어머니 곁을 지켰다. 어쩔 줄 몰라 흔들리는 동공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이 그가 성룡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이라 짐작하게 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명석에게 성룡은 인생의 스승같은 사람이었다.

오래 전부터 지독히 익숙한 얼굴도 왔다. 동훈의 평소 입는 정장 차림 행색이 유독 초라하거나 서글퍼 보였다. 다를 바 없음에도 그 옆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무너지는 가은을 부축하는 핼쑥한 얼굴이 보기 좋진 않았다. 가은은 검은 옷을 차려입을 시간도 없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동훈과 가은에게 성룡은 좋은 동료였다.

조상무가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박회장의 옆에 섰다. 잘도 가증스러운 눈물을 훔친다.

그들에게 성룡은 눈엣가시였다.

서율의 오늘 하루 모든 불행은 이걸 위해서였나 보다.

서율은 여전하다. 일하고 밤새고, 일하고, 밤새고. 그때는 어땠던가. 이젠 2년도 더 된 일의 기억을 이어 붙이는 취미는 없었으나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두꺼운 책을 덮었다.

서율에게 성룡은.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형광등이 나간 사무실은 취조실 같은 분위기나 다름 없었다. 내가 나를 심문하길 꼬박 며칠째였다. 어지간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율은 눈을 감았다. 깜빡이던 탁자 위 작은 조명마저 어두워졌다. 오직 도시 야경에 파묻힌 별빛만이 사무실의 커다란 창문 틈으로 공간을 밝혔다. 뜬눈으로 지새는 밤을 넘어 새벽녘이 밝아올 때까지도 별이 타올랐다. 그건 꼭 기억과도 같았다. 연소되어 없어질 때까지 몇억광년은 걸릴 것이다. 내가 죽어도 기억은 하염없이 타오르겠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던 형광등에 다시금 제대로 불이 들어오자 하나둘 켜지는 건물 불빛에 별은 하나둘 죽어갔다. 기억이 꺼진다.

피곤한 눈을 비벼 간신히 뜨고 창문 앞에 섰다. 그곳엔 연속된 야근으로 흰자가 벌겋게 충혈된 회사원 한 명이 서있다. 다 떨어진 믹스커피를 채워놔야지, 생각한 지가 벌써 일주일 전이었던가 아니면 고작 어제였던가. 2년이면 정말 긴 시간이었다. 손가락 열 개를 다 세어도 모자랐고, 누군가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누구는 이제 입시가 힘들다며 우는소리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턱없이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형광등 불이 꺼졌다 들어오는 순간의 몇 초 같기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몇 분 같기도. 별보다 느리게 타는 서율의 시간은 또 다시 긴 밤과 하루 같은 1년을 보내고 나서야 천천히 식어갈 것이다.

아침 해가 밝아도 새카만 무중우주 속에서 별자리는 언제나 같은 길을 그리며 타오르는데.

너의 별은 저문 지 오래였다.

서율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길 나흘째였다.

나는 아직도 여전하다.

4년이 더 흘렀다.

나는 아마도 너의 나이와 같아졌다.

TQ 그룹 박현도 회장의 비리는 낱낱이 알려졌다. 해체된 경리부 일원들의 도움이 컸다. 그가 세간에서 잊혀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삶을 사느라 바빴다. 뉴스에선 더 이상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 시대였다.

하경은 회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꿈을 찾는 건지 항상 바삐 걷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소프트볼 실력은 여전했다. 오늘도 서율은 10점 내기에서 4점도 따지 못하고 패했다. 명석은 난장판이 된 회사를 가꾸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성룡이 봤다면 녀석 많이 컸네, 하고 어른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서율은 그 대신 피식 웃었다. 아, 참. 경리부는 무사히 다시 모였다. 하경이 없는 게 아쉽기는 해도 새로운 인턴이 들어와 하루하루 따분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광숙은 작은 카페를 차렸다고 한다. 그곳은 동훈과 가은의 단골 카페가 되었다. 2층은 하경과 같이 지내는 집이었는데 검찰청 근처라 사건사고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좋아라했다. 서율이 알아봐준 건물이었는데 거기서 뭘 하고 지내는지도 잘 몰랐다. 놀러오라는 말을 듣고도 모른 척, 샐쭉한 얼굴을 하고 떠나왔으니까. TQ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서 서율은 재무 이사직을 관뒀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걸 되돌리기에 이미 늦어버린 걸 알았어도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국선 변호사 일을 계속했다.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영원히 갚지 못할 빚도 있더라.

변호사로 일하면서 이상한 사람들을 참 많이 봤다. 화내면서 책상을 치다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아니라고 하는 사람, 수상할 정도로 무던한 사람, 웃음이 많은 사람. 검사일 땐 흉악한 얼굴들만 봤는데 여전히 세상은 색다른 것 투성이었다. 그래도 너만치 이상한 것은 없다. 너처럼 통통 튀고 밝고 노란색을 내는 것은 없었다. 벌써 개나리가 필 때인가. 사무실로 향하는 골목마다 별이 곳곳에 핀다.

한국은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팔랑 넘어가는 서류 대신 바람에 나부끼는 잡초가 손을 간질였다. 풀 냄새가 싱그럽다. 고요한 휴식을 방해하는 진동이 울렸다. 버튼을 몇 번 눌렀더니 목소리가 뚝뚝 끊기다가 제대로 들린다. 전화 너머 목소리가 반, 양 떼들 풀 뜯어먹으며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 반.

선배! 거긴 어때요?

"십노잼이다. 있는 거라곤 풀이랑 양 떼밖에 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요. 선배가 여행 간다고 했을 땐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맨날 일, 일, 일... 일한다고 아무데도 안 가던 사람이. 다음 목적지는 정했어요?

"몰라. 아직."

여기보다 별은 잘 보이죠?

서율은 고개를 올려 까만 하늘 촘촘하게 박힌 점들을 눈으로 이었다.

"훨씬 잘 보이지."

손을 쫙 펴고 별자리의 각도를 재듯 손바닥을 하늘에 댔다. 누군가 하이파이브! 하고 신나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슬쩍 웃어버리곤 전화를 끊었다. 숨이 폐를 지나 다시 빠져나올 때 그 공기가 덥게 느껴져 가슴을 부풀리곤 한참 숨을 머금었다. 내뱉는 건 들판 언덕 너머 마을까지 들릴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후련한 한숨을 불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타박하는 말이 들려도 잘만 후련했다. 가이드가 눈도 못 뜨고 헐레벌떡 뛰어나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몽골의 까만 밤하늘 아래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별빛만이 수놓인 이곳은 별이 쏟아질듯 가득해서 혹시나 여기에 네가 지나간 흔적도 있을까 하고. 서율은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별을 셌다. 여기서도 참, 여전하다.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선 게르가 참 작았다.

네 개의 계절을 건너 하얀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젠 내가 너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멀었고 딱히 설레는 일 없이 춥기만 한 11월이었다. 올해는 첫눈이 빨랐다. 푹 파인 자국 없는 눈밭을 밟을 때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 쌓아놓은 그릇을 닦는 거품 같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시렸다. 아침 일찍부터는 사람이 없었다. 앞에 놓인 꽃을 수거해가는 직원들과 가벼운 묵례를 하고 지나치며 수많은 이름이 적힌 벽 사이를 걸었다. 바람 한 번에 이름 모를 꽃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발등에 앉았다. 쭈그리고 앉아 꽃 주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 꽃 주인 찾아줘요? 언제 이렇게 심성이 고와졌대.

김성룡.

이름 석자가 박힌 작은 유리창은 겨울 살얼음이 잔뜩 서려있었다. 손끝으로 코트 자락을 잡고 뿌연 김을 지우면 그 안으로 언젠가 사무실 의자에서 잠들었던 성룡의 모습이 서율을 반겼다. 꼭 오늘같은 일상이었다. 안쪽 액자에 광숙과 하경의 스티커 사진이 붙어있는 걸 보니 벌써 왔다 간 모양이었다. 찬 유리창에 그때 별자리를 재듯 손바닥을 댔다.

이사님 표정이 왜 그래. 뭐 힘든 일 있어요? 일이 많이 바빠?

"...그러게. 나 힘든가보다. 일이 좀 많은가 봐, 내가."

뭐가 잘 안 풀리나보다, 그쵸.

"이게 맘대로 잘 안되네."

그래도 먹소는 엄청 잘 하고 있는 거야.

"그런가."

안아줄까요?

"....."

....미안. 표정 엄청 이상해졌다.

"..목은 이제 안 아파?"

목이 왜 아파? 뭐야. 나 지금 말 많다고 꼽주는 거죠!

"그런 거 아니야."

아님 됐구~ 바쁠텐데 얼른 가요.

"........"

이사님, 좀 많이 웃고 살아요. 난 그게 좋을 것 같아. 신파 영화보단 코미디 영화가 훨 재밌더라.

"김성룡. 나 이제 이사 아니야. 변호사 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당연하게도.

7년만에 와서 진상만 부리고 가네.

너나 나나.

잘 살아라.

나도 잘 살게.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래도 서율은 그냥 그렇게 두고 떠났다.

말이 허공에 흩어지도록 두고 갔다.

"얼른 오세요!"

"헉, 아니, 왜 이렇게... 허억.."

나무 그늘에 멈춰선 하경은 서율의 허약한 체력에 고개를 저었다. 짭짤한 소금내가 날 것처럼 땀이 쏟아졌다. 따가운 여름 햇살과 눈가까지 내려온 앞머리가 따끔따끔 눈을 찔렀다. 하경이 건넨 이온 음료를 마시며 땀을 훔치자 흐리던 풍경이 이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곳도 있구나.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희미했다. 언덕은 너무 높았고.

"거의 다 왔어요."

하경의 말은 믿을 게 못 됐다. 거의라는 말이 언제부터 40분이었던가. 언덕은 정말... 높았다. 여기 서면 멀던 파도 소리도 한 눈에 보인다. 만화 영화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둥근 언덕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웠다. 아마 이 장면부터 서정적인 영화 ost가 깔리기 시작할 것 같았다. 코미디 영화라면 그런 것보단 쾌활한 노래가 더 어울리려나. 서율의 발이 삐끗, 언덕을 굴렀을 때 우스꽝스러운 효과음 대신 하경의 웃는 소리가 장면을 채웠다. 누가봐도 신파 영화는 아니지. 노란 풀꽃이 몸에 눌려 납작해진 게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옷을 털면서도 못내 신경 쓰였다. 이온 음료 줘도 될라나. 안 좋지 않을까요? 요새는 꽃집 일도 돕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까진 자세히 몰라요. 그래도 이 꽃이 어지럼증 해소에 좋다는 건 알죠.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예요? 다 배울 데가 있어요. 풀꽃들 틈으로 서율과 하경의 대화가 살랑거렸다. 결국 이온 음료를 뿌려주곤 손으로 흙을 고르게 두드렸다. 날씨를 보면 금방 마를 것 같았다.

"아, 취업 축하해요. 이번엔 어디였더라."

"작은 구단 운영팀이에요."

"적성에는 잘 맞아요?"

"구단 앞에 배팅 연습장이 있어요."

"딱이네."

"재밌어요. 예전에 하던 운동도 생각나고."

그렇구나. 하는 답으로 끝맺힌 대화는 나무 그늘 아래 부는 바람의 근원지로 던져졌다. 여름 바다는 하늘을 꽉 담아놓은 유리병처럼 파랗다. 짠 냄새도 나고, 비린내도 난다. 정말 여름의 냄새가 난다. 저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아주 진동을 한다.

우리는 여전했다.

부단히 애쓰고 속절없이 그립고.

어쩌면 두 단어의 어원이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

여전하지 않은 게 있다면.

내 방 천장에는 별 모양 야광 스티커가 붙었다.

몽골 길거리에서 사온 것치곤 소박했는데 불을 끄면 낮에도 반짝반짝 빛을 냈다. 역시 몽골의 별은 더 밝은 게 분명했다.

나중에 봤는데 포장지에 made in Korea 라고 써있더라고.

이래서 길거리에서 함부로 뭐 사지 말라고 하나. 몽골에서부터 날아온 한국산 야광 스티커. 좀 짜친다.

너는 대체 나한테 뭐냐...

때늦은 질문을 중얼거렸다.

시원하다.

여름인데 겨울바람처럼 차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보리차를 몸에 쏟은 것 같다.

있잖아.

소금향이 묻은 바람이 불어오면

너라고 생각할게.

난 괜찮으니까.

오늘만 조금 서글플게.

잠깐만 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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