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 재

문호와 알케미스트 2차 창작

泡沫 by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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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7일 디페스타 배포

문호와 알케미스트 2차 창작

A5 / 8p

 * 이름 없는 창작 사서가 등장합니다.

 

 

  

하나, 사카구치 안고와 종합 자료실

 

오늘의 건배사를 읊기 전에, 너희에게 무뢰파 좌담회 ver. 한여름 밤의 납량특집을 제안하고자 한다. …정색들 하지 말고, 일단 들어나 봐. 이 무더운 열대야에 괴담만큼 서늘한 안줏거리가 어디 있겠냐? 마침, 좀 전에 제법 기묘한 사건을 겪고 온 참이거든. 노상 떠들어 온 어둠의 여자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너희들도 알다시피, 도서관의 표면적인 업무에는 가끔 문호들이 돌아가며 차출되기도 하잖냐? 오늘 종합 자료실 담당은 나와… 익명 차원에서 이니셜을 대자면, K였어. 폐관 시간이 되자 우리는 남은 열람객을 내보내고, 반납대에 쌓인 책더미를 분류 번호별로 구분했어. 카트에 책을 한가득 싣고 K는 100번대 책장부터, 나는 900번대 책장부터 정리를 시작했지.

600번대 책장까지 왔을 무렵, 건너편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어. K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무 책이나 서너 권 뽑아 든 뒤 그 틈새로 건너편을 들여다봤거든. 아니나 다를까, 웬 세일러복 차림의 단발머리 소녀가 등진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니겠냐?

내보낸 뒤에 마저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뽑아 든 책을 다시 밀어 넣으려는 차에 소녀의 어깨너머로 K와… 정확히는, 400번대 책장 너머에서 책꽂이 틈새를 통해 마찬가지로 500번대 칸을 들여다보는 K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어. 평소 미소녀와의 조우를 간절히 추구해온 K답게, 드러난 눈썹과 눈꼬리가 꿀에 녹은 양 부드럽게 휘어 있었지. 하관은 책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뭐어. 표정이 대충 가늠 가지 않냐? 미소녀 좀 봤다고 아주 헤벌쭉이구만. 나는 혀를 쯧 차며, 책장을 빙 돌아 반대편 칸으로 넘어갔어.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소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야.

“뭐야, 그새 나가버린 거야? 말도 못 붙여봤는데!”

“당신 말이야….”

뒤늦게 반대편에서 넘어온 K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불만을 토로했어. 핀잔을 줄 요량으로 입을 뗐는데 이어지는 말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

“그래서, 어땠어? 쿨계? 아니면 큐티계? 하아, 뒤태만 봐도 정석의 미소녀인데! 어떻게 고개 한 번 안 돌려준담?”

그도 그럴 게, K의 한탄은 내가 목격한 바와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였거든. 말인즉 K의 시야에서는 예의 그 소녀가 자신을 등진 채 줄곧 내가 있는 방향과 마주 보고 있었다는 거지. 앞뒤가 안 맞지 않냐?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책꽂이 너머로 대체 무얼 보고 있었던 거지?

이건 깊이 파고들 만한 게 못 된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가타부타 더 말 얹지 않고 서둘러 정리를 마무리했어. K는 그 뒤로도 수차례 말을 붙여오다, 내게서 별다른 답을 얻지 못하자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어.

종합 자료실의 문을 잠그고 별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K는 그런데 말이야, 하고 운을 떼더니 대뜸 기묘한 물음을 하나 던져왔어.

“너, 왜 그렇게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었던 거야?”

…K가 본 책장 건너편의 나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도서관이 사연 있는 폐건물 따위를 인수해 도서관으로 개조한 게 아닌가 하는 추리를 내렸다. 너네 의견은 어떠냐?

 

둘, 다자이 오사무와 보존 서고

 

사연 있는 폐건물이라니, 쓸데없이 구체적이지 않아? 그보다, 언젠가 사서에게 신축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으음, 떠오르는 사건이 한 가지 있기는 하거든. 보존 서고에 주인 없는 그림자가 돌아다닌다는 소문,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먹구름이 낀 어느 오후였어. 나와 츄야는 전날 밤에 벌어진 소동의 주범으로서, 사서실에 불려와 나란히 서 있었어. …나는 그저 옆 사람의 술주정에 휘말린 일개 피해자에 불과한데, 어째서 같이 혼나야 하는 거야? 불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애지중지 키운 화분을 다섯이나 떠나보낸 사서의 싸늘한 낯을 보니 입이 절로 다물어졌어.

사서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우리에게 보존 서고의 정리를 맡겼어. 라벨이 붙은 열쇠를 건네받으며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리는데, 그날 조수였던 유메노 씨가 가만 지켜보다 불현듯 찬물을 끼얹었어.

“거기, 나온다더군요.”

…뭐가? 되물으려는 차에, 츄야가 얼른 해치우고 오자며 내 뒷덜미를 낚아채서는 곧장 보존 서고까지 끌고 갔어. 막연히 G의 출몰 정도를 예상한 나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쳤지만, 그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없었어. 배계, 유메노 큐사쿠 선생님. 이 자리를 빌려, 경고하시려거든 다음부터는 육하원칙에 맞춰 상세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발 들인 보존 서고는, 분위기가 영 음산했어. 차광을 위해선지 창마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곳곳에 어수선하게 쌓아 올린 책과 종이 더미에서는 낡고 퀘퀘한 냄새가 났어. 내부를 희끄무레하게 밝히는 유일한 빛은, 입구 쪽 천장에 붙은 노란 등 하나가 다였어.

2,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서고 정리는, 사방에 흩어진 서류를 추슬러 연도와 목적별로 분류하는 데에만 2시간이 꼬박 걸렸어. 다섯 뼘은 족히 되는 높이의 각 서류 뭉치를 월별로, 거기서 또 일별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눈앞이 깜깜해졌어. …츄야? 진작 한구석에 나가떨어졌지.

파업! 더는 못 해! 안 해! 하고 소리치며 입구 맞은편의 책장에 털썩 기대앉아 숨을 고르는데, 문득 발밑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눈에 띄었어. 정수리의 삐친 털이 고개를 까딱일 때마다 가늘게 흔들렸어.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다, 문득 모순을 깨닫고 얼어붙었어.

앞서 말했듯이, 서고를 비추는 광원은 입구의 등 하나가 전부야.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으니, 그림자는 당연히 뒤로 드리우는 게 이치에 맞지. …그렇다면 발치로부터 뻗어 나온 이 검은 그림자는 대체 뭐야?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어. 침음을 삼키며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떼려는데, 불현듯 그림자가 품에서 날붙이를 닮은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스스로의 목을 보란 듯이 겨냥했어. 아무것도 닿지 않았을 턱 아래에서는, 거짓말처럼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머릿속 경종이 빨갛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무지 달아날 수가 없었어. 누구든 좋으니 제발 살려줘…! 속으로 간절히 비는 순간, 거짓말처럼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츄야가 손에 쥔 술병을 수직으로 기울여서는, 그림자 위로 술을 몽땅 부어버리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서고 마룻바닥에 물도 아니고 알코올을 흥건하게 쏟았는데, 뻔한 결말이잖아! 뭐어, 위기에서 구해준 보답으로 자처해서 뒤집어쓰긴 했지만.

어디서 귀신 들린 인형 따위라도 주워온 거 아냐? 왜, 사서실 소파에 놓여 있는 낡은 곰인형 있잖아. 왼쪽 눈의 단추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덜렁거리는 게… 으, 소름 끼쳐.

 

셋, 오다 사쿠노스케와 연구실

 

그 곰인형, 사서가 꽤 아끼는 녀석 아이가? 듣기로는 잘 때도 끌어안는 애착 인형이라 카던데. 그보다 막상 떠들라 카이,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없구마. 어디 보재이…. 켓케케. 그러고 보이께, 마지막으로 조수를 맡은 지도 제법 됐제.

뒷산의 벚꽃이 만개했을 무렵이니께, 세 달도 더 됐을기다. 그날은 통창으로 쏟아지는 봄볕이 하도 뜨시가꼬, 나른하이 깜빡 잠이 들어뿟다 아이가. 30분쯤 졸았나,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단잠을 확 깨비대. 놀래가꼬 몸을 세우다 고마 발이 엉켜가 요란스레 자빠졌는데, 우야다 보니 수화기도 같이 널짜가 끊기기 전에 간신히 받은기라. “예, 제국 도서관 사서실입니더.” 통상의 멘트를 뱉으니께, 스피커 너머에서 관장님이 오다인가? 하고 확인차 묻더니

「미안하지만, 사서의 연구실에서 녹색 끈으로 봉한 남색 서류봉투를 찾아와 줄 수 있겠나?」

하고 부탁해오더라 안 카나.

와, 알다시피 사서의 연구실은 큼지막한 책장 옆짝에 붙은 쪽문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아이가. 가끔 열려있는 건 봤드만, 드가는 건 내도 처음이었데이. 잠겨있으면 우야지, 싶었는데 문고리를 쥐고 당겨뿐게 가뿐히 열리는 기라. 발 들이자마자 웬 종이 뭉치가 신발에 치이는데, 가만 둘러보니 안고 방맨키로 혼잡은 게 아이겠나. 하이고 절단났네, 여서 우예 찾으라는 기고? 싶으면서도 우선은 왼편에 놓인 벙커 침대의 책상 우에부터 뒤지는데, 난데없이 뒤짝서 뭔가가 등을 툭, 치는기라. 고개를 돌리니께, 가운을 걸친 얇은 팔이 철제 난간 밖으로 비져나와 흐느적대고 있는 게 아이겠나? 어쩐지 오늘따라 사서가 와 눈에 안 띄나 싶었드마, 거 기어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대. 평소였다면 얼굴을 비쳤을 낀데, 전날에 보고서 쓰느라 밤을 샜다더니 엥간치 피곤했는갑제. 나는 침대 하단의 나무판을 콩콩 두드리고서, 관장님이 찾던 서류의 행방을 조심스레 물었데이. 그랬드마, 대꾸 없이 그저 검지를 세워 맞은편의 책장을 가리키는 기라.

책장에 가로로 쌓인 책더미 틈에서 관장님이 말씀한 서류봉투를 발견해가, 연구실을 나서자마자 곧장 전화를 거니께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금세 받는기라, 10분 내로 도착할 예정이니 도서관 현관 앞까지 나와달라고, 부탁하는 관장님 뒤로 그 중요한 서류를 두고 오면 어떡하냐고 매섭게 타박하는 아카의 잔소리에 유쾌하게 웃어제끼는데, 가만 들이니께 옆에서 달래는 목소리가 영판 귀에 익대. 아오는 아인 것 같고, 누꼬? 싶어서 고민하는데 상대가 전화를 바꿔 들더니,

「덕분에 살았어요, 오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인사를 전해오는 게 아이겠나. 목소리의 주인이 사서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통화가 끊긴 뒤였구마. 정신이 퍼뜩 들어가, 발을 돌려 곧장 되돌아간 연구실에는 사서가 침대 위로 아무렇게 던져놓은 가운의 빈 소매만이 철제 난간에 걸쳐진 채였데이.

마, 이런 데는 역시 고전적으로 공동묘지 터였다든지, 하는 거 아이겠나?

 

넷, 단 카즈오와 정원

 

근처에 절이나 민가가 없어서, 공동묘지 터로 쓰였다기에는 입지가 다소 애매하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도서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일이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어.

도서관에 온 이래, 처음으로 맞이한 휴일이었어. 전골에 넣을 고기와 양배추를 사러 나갔다가, 다채로운 식재료의 향연에 이성을 잃는 바람에 그만 양손 가득 짊어진 채 돌아오고야 말았지. 저녁 메뉴를 다시 선정해야 할 것 같아서 이 메뉴, 저 메뉴를 떠올리며 정원을 한참 서성이던 차였어. 수풀 사이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가까이 가 봤더니, 연못 한가운데 선 신페이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더라고.

“…신페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아, 단 군! 갸와즈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 버렸는데, 통 돌아올 생각을 않아.”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아직 더 놀고 싶은가 봐. 신페이는 드물게 곤란한 낯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어. 듣고 보니, 늘 개구리 인형을 끼고 있는 왼손이 웬일로 비어 있었어. 신페이의 비유에는 가끔 톡 튀는 구석이 있으니까 어쩌다 연못에 실수로 빠트린 모양이다, 그렇게 해석한 나는 수색에 손을 보탤 요량으로 허리를 굽혀 단화의 매듭을 풀었어.

신발에서 발을 마저 빼는 순간, 나는 뇌리를 스치는 위화감에 우뚝 멈춰 섰어. 이상하지 않아? 기억하기로 그 연못은, 전날 술에 취해 성가시게 구는 츄야를 제압하려다 실수로 빠트렸을 때 녀석이 잠기다 못해 선 채로 가라앉을 만큼 수심이 깊었거든.

나는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신페이를 쳐다봤어. 신페이는 연못에 무릎까지 빠진 채, 수면에 팔을 집어넣고 한참을 첨벙거리며 휘젓다 불현듯 연못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렸어.

“찾았다, 갸와즈!”

…글세. 무어라고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허공에 번쩍 치켜든 그것이 갸와즈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어. 신페이는 그것에 대고 한참을 무어라 말을 붙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홱 돌려 내게 말을 건네왔어.

“갸와즈가 친구들의 개굴개굴 연주회에 초대하고 싶대. 단 군도 같이 가지 않을래?”

어디로? 혀에서 굴리던 물음을 입 밖으로 뱉는 대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양을 표했어. 미안, 지금은 좀 바빠서,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 내 답변에 신페이는 아쉬운 낯으로 “단 군이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하고 응수하고는 이내 발밑이 꺼지듯 순식간에 물 아래로 가라앉았어. 연못의 수면은 파동이 크게 한 차례 일었다, 이내 잠잠해졌어.

노을이 질 때까지 그가 사라진 연못을 말없이 주시하다,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되돌아왔어. 불이 켜진 담화실 앞을 지나치는데, 안쪽에서 신페이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힐끗 들여다본 담화실 안에서는, 난키치와 신페이가 막 곤과 갸와즈에게 새 모자를 씌워주는 참이었지. 후일 듣기로 둘은, 정오부터 줄곧 슈세이 씨에게 손 바느질을 배우고 있었다는 모양이야.

굳이 장소나 사물 따위에 의미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존재하는 하나의 개념을 단지 우연한 계기로 인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몰라.

 

 

 

 

 

재[在] : 1. 있다, 존재하다(存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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