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共鳴)


―에메트셀크는 기억한다. 그 연민 어린 눈빛을. 연민은 강한 자가 약자에게 품는 감정. 에메트셀크는 불쾌했다. 그런 감정은 그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에메트셀크는 약자도 아닐 뿐더러, 눈앞에 있는 저놈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이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 같은 존재였다. 오히려 그가 저 되다 만 것과 그의 무리를 그렇게 쳐다봐야 할 것이었다.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도 그 눈빛은 거둬지지 않았다. 뒤돌아선 그의 등을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기억한다. 대체 왜. 에메트셀크는 혀를 찼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에게 너무 많은 감정이 일어났다. 

언제였을까, 아모로트에 관한 말을 처음으로 그놈에게 꺼냈을 때였을 것이다. 가만 얘기를 듣던 그놈은 어이없는 말로 기어코 에메트셀크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 귀걸이. 나한테 줄 수 있어?」

「…….」

「굳이 네가 하고 있는 게 아니어도 돼. 대충 손가락 튕겨서 똑같은 거 만들어주면 되지 않아?」

「……되도 안 해. 안 줘. 싫어. 내가 왜?」

순간 큰 목소리를 낼 뻔했다. 저놈은 정신머리도 절반의 절반의 절반 정도인 모양이었다.

―수정공이 아닌, 그라하 티아는 기억한다. 아씨엔 에메트셀크와의 결전이 이뤄지기 직전,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게 서 있던 영웅의 모습을. 하지만 영웅의 얼굴에는 결연함만이 있지 않았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표정. 그라하는 그 표정을 잘 알았다. 레이크랜드, 크리스타리움에서 수없이 본 얼굴이었다.

슬픔.

그라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팡이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보통 사람의 몸에서는 나지 않을 소리가 울렸다. 끼기긱, 그의 팔에서 수정이 바스러졌다.

영웅의 슬픔을, 모두의 슬픔을 끝내야 한다.

더없이 익숙한 저 감정,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라하가 맨 먼저 눈에 담을 웃는 얼굴은, 영웅과 그의 동료들이 될 것이다.

영웅도 그러하길 바랐다.

―알리제 르베유르는 기억한다. 장신구를 좋아하던 그 사람의 귀에 못 보던 귀걸이가 걸린 때를. 정확히는… 아주 잘 아는 모양의 귀걸이였다. 무시하기엔 거슬렸다.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그런 귀걸이를 하고 다니느냐고. 난 그 사람, 이해할 수 없어. 스스로가 듣기에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웃었다. 웃고 싶어서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다양한 표정을 봐 온 알리제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잠깐 드리운 그리움 - 혹은 비애 - 을. 그 사람은 천천히 손을 귀걸이에 가져다 댔다.

「모든 사람이 알리제처럼, 앞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지 않아. 누군가는 나아가기보다 돌아가는 걸 택하기도 해. 물론, 나는 알리제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서 좋아해.」

그 사람은 알리제가 잘 아는, 웃는 얼굴로 말을 끝냈다. 알리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물은 게 아냐! 됐어! 버럭 외치는 알리제를 향해 그 사람은 웃었다. 알리제도 웃었다. 그래, 그의 귀에 뭐가 걸려있든 상관 없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알리제가 살아있는 한. 알리제는 언젠가 그를 뛰어넘어, 그를 멋지게 지키는 검이 되고팠다.

―빛의 전사 - 어둠의 전사는 기억한다. 하데스의 말을.

「그렇다면, 기억해라. 우리는…… 분명 살아 있었다는 걸.」

빛바랜 황동 같은 눈동자는 진중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데스의 입에 걸렸던 것은 미소였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눈빛에 연민이 섞이지 않았으리란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데스는 웃었다. 보나 마나 속으로는 '끝까지 그 눈빛으로 나를 보는군.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가 불쌍했다. 슬펐다. 안쓰러웠다. 그 감정을 떠안고 홀로 오랜 시간을 살았을 그가. 최고(最古)의 마도사를 그런 취급하는 것은 아마 자신밖에 없으리라.

이제 세상에 남은 원형은 없다. 모두 자신의 손으로 토벌했으니까. 그러나 아직 그곳은 남아있었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고대의 그때를 아스라이 유지하고 있는 곳이.

어둠의 전사는 그곳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리 없는데도, 귀걸이가 괜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귀걸이를 잠시 매만졌다.

순간을 기억하고 사는 것은 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 못 할 일이겠지. 그렇다지만 그도 참 웃기는 고대인이었다. 그도 결국 순간에 얽매였다는 것이, 이렇게 커다란 증거로 존재하고 있으니.

원래도 은은했던 이곳의 불빛은 거의 꺼지기 직전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그의 에테르가 소멸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얼마 있지 않아 이곳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아주 서서히. 그때까지는 자주 이곳에 오고 싶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피아노 소리도, 바닷물이 공기 방울 위에서 휘돌며 나는 소리도,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를 자극하는 건물들도, 되도록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또, 그러고 싶으니까.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하데스처럼 너무나 고독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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