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가희 1

어머니, 저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왜 우는 거예요? 왜 웃지 않는 건가요?

경가희는 말 그대로 오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오만함의 출처는 자신의 믿음이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으니까, 경가희는 오만해질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는 무서울 정도로 잘 내리던 경가희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온 세상을 손에 쥐고 주무를 수 있을 만큼의 확언과 자신감. 경가희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하지만 경가희에게도 모르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사람의 감정이었다. 모른다기보단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않는다가 아닌 못한다는 것이 정답인 인물. 사람들이 왜 우는지 몰랐고 왜 웃는지 몰랐으며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렸을 적의 경가희는 5살의 나이에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부단한 노력과 상담 덕에 사람들의 얼굴의 움직임과 표정으로 감정을 추론해내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찡그려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채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감을 잡기 힘든 감정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슬픈 것 같기도 하면서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또 화를 내는 것 같기도… 1은 1이다, 처럼 사랑은 사랑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교육받았다. 경가희의 어머니도 모든 감정을 알려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저 세뇌시킨 것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나와 경나희를 사랑한다. 딱 이 정도. 사랑이라는 감정의 크기도 수치도 모른다. 하지만 사는 것에 지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 지루한 로맨스 영화도 웃는 얼굴로 보면 사람들은 어련히 넘어갔고, 애절한 로맨스 영화도 옆자리 사람에 맞춰 눈물 닦는 척을 하면 어느 정도 사회와 섞여 들어갔다. 경가희에게 사랑이란, 하등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유범영의 얼굴을 본다.

이상했다.

요즘따라 유범영의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다. 무표정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닌 게 무슨 감정인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범영에게 계속 물어봤다. 범영아, 화났어? 범영아, 좋은 일 있었어? 범영아, 범영아. 쏟아지는 질문에 유범영은 친절하게도 답을 해줬고 모든 대답은 아니. 였다. 행복한 것도 슬픈 것도 화난 것도 우울한 것도 짜증 난 것도 기쁜 것도 아니라면 유범영은 나를 보며 대체 무슨 감정을 품길래 그런 표정을 지을까.

후배들에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유범영의 눈이 찡그려진다. 내가 유범영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보고 싶다고 통화를 하면 유범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다른 친구들과 놀러 가면 유범영은 화가 난 표정을 짓는다. 경가희는 예전에 사둔 감정 표현 책을 펼쳤다. ㄱ부터 나열된 감정단어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이윽고 손가락이 멈춘 곳은… 사랑하다.

경가희는 책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웃음이 새어나갈 정도로 웃었다. 우스웠다. 유범영의 사랑이? 사랑을 얕봤던 내가? 아니, 자신이 하는 것이 비로소 사랑임을 깨달은 오만한 자의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유범영을 바라보며 미세히 내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더라니, 이것이 사랑이었다니, 유범영의 사랑을 이제야 깨달았다니… 웃겼다. 타인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구는 경가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잡아내지 못했다. 모든 걸 잡아낼 것처럼 굴었던 경가희가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선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윽고 천천히 생각한다.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했던 질문을 상기한다. 어머니, 저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왜 우는 거예요? 어머니의 대답은 간결했다. 가희야, 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사랑해서 우는 거야.

사랑해서 행복하다, 사랑해서 운다, 사랑해서 화가 난다 사랑해서, 사랑해서… 모든 감정의 이유가 되는 사랑을 이해시키려 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했는가. 상담선생님도, 경가희의 부모도, 쌍둥이 동생인 경나희도 이해시키지 못한 것을 유범영으로 인해 깨닫는다.

아, 이것이 비로소 경가희가 받은 유범영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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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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