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내 일생의 운명에게

From. 당신의 유일한 영원이.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닌 실존세계에 존재하는 인물에 대해 유일한 신도가 사랑을 기도하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조건 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갈 곳 없는 맹목. 비이성적인 행동이 이어지고 이것을 속죄하기 위해선 신에게 다시 사랑을 기도하는 것밖에 없는, 폭력성이 짙은 유일무이한 종교.

이영원은 왜 사람들이 오래 살고 싶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천애 고아였고 남겨진 이름도 지어진 이름도 없어 4살까지는 대명사로 불리던 아이였다. 위생이라곤 몰라 길거리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것으로 행복했던 인간이 삶의 행복 따위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신께서도 이런 이영원이 안타까웠는지 구원자를 하나 내려주시니 그 사람이 주강하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쓰레기장에서 주운 너덜해진 영단어 카드를 제 목숨인 것처럼 간직하며, [eter·nal : 1.영원한 2.끊임없는] 이라 적힌 카드를 내밀었던, 5살의 아이는 그 순간부터 이영원이 되었고 헌 옷 수거함에서 사이즈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었던 세월 대신 조용하고 깨끗한 고아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영원은 충분히 이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당장이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이, 기차, 자동차, 강아지라는 단어보다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더 빨리 깨우친 삶이 이것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순 없었을 거라고. 다 크고 난 뒤 이영원이 가끔 어릴 적을 생각하면 이런 감상평을 내놨다. 그러니 오래 살고 싶은 이유가 없었다. 삶이 나아졌음에도 선천적으로 박힌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도 이 세상에 혼자라는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감은 이영원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이대로 고아원을 나가도 찾을 사람은 없다. 뛰쳐나가 차에 치여도 슬퍼할 사람은 없으며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도 없다. 그러니 혼자가 편하다고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감히 남에게 정을 주기 싫었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써버린다면 그것이 꼭 영원인 줄만 알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다시 버려지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든 벽을 치고 살았는데. 그 누구에게도 우호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10살까지 살아왔는데.

주강하를 처음 본 모습이,

네 이름은 이제 이영원이야, 라고 말해준 사람과 너무 닮아버려서… 난 그게 꼭 영원인 줄만 알고…….

주강하를 처음 만난 날 하루 전은 어린이날이었다. 후원자들이 단체로 선물한 장난감들을 아이들이 나눠 가진 후 남은 것 중 하나를 가져왔다. 지극히 평범하고 털이 부드러운 토끼인형이었다. 변신 로봇이나 공주 장신구를 자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영원은 이 인형 하나면 충분했다. 처음으로 갖게 된 나만의 것이니 소중히 여기자며 인형 꼬리표 구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영원, 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5월 6일, 주강하를 처음 만난 날. 생일도 없던 이영원이 그날이 생일이 된 날, 우호적이지 않았던 한 아이가 처음 본 친구에게 자신이 아끼는 인형을 내밀며 이걸 주면 나도 너랑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말했을 때. 이영원의 삶의 선은 기하급수의 속도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너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 너랑 평생 같이, 오랫동안 살고 싶어…. 이영원의 생애 첫 소원이었다.

사랑이었는가. 잘 모르겠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이영원은 거의 친자식이 되었고 주강하와 가족이 되었다. 매일 이영원의 시선에는 주강하가 있었다. 여전히 오래 살고 싶었다. 처음으로 직업을 갖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현장에 겁도 없이 나가 요절해버리는 가이드, 같은 수식어는 더는 이영원과 어울리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안전하고 평온한 삶을 살리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안정감 있는 인생. 자신이 애정 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삶. 그래, 이거면 충분했다. 아무것도 없는 아이에게 이 정도의 삶이면 넘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영원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으로 굴던 인간이.

제 눈 앞에 주강하가 항상 보였던 이유는 주강하가 그만큼 이영원을 좋아했기 때문임을 알았다. 늦게까지 센티넬 숙소에서 가이딩을 하는 날이면 문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주강하. 새벽녘까지 공부하는 제 옆에 앉아 이영원을 바라보던 주강하. 조금만 아파도 무슨 일이든 다 버려두고 달려오던 주강하. 이영원 인생에서 주강하를 빼고 말한다면 이영원의 삶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영원은 무서웠던 거 같다. 감히 내 인생의 전부를 함부로 사랑해버리면, 헤어진 후에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건 주강하가 있었기 때문에 이영원이 여태까지 살았다는 것. 그리고 작은 욕심이 생기고 생겨 주강하와 미래를 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어떻게… 이영원이. 주강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 영원, 평생이라는 단어는 무겁다. 너무나 무거워 사람들이 쉽게 입에 담지 못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주강하 앞에만 서면 이 단어들은 한없이 가벼워져 이영원은 몇십 번이고 읊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영원은 깨달았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구원을 감히 사랑이라 착각하지 아니하고 동정을 이젠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는다. 주강하의 애정을 이제야 체감한다. 주강하의 사랑을 몇십 번이나 곱씹고 생각하고 기억하다… 이영원은 웃었다. 강하야, 그거 알아? 나는 네 앞에서만 웃어. 웃음 하나 없는 내가 네 앞에만 서면 저절로 웃음이 나와. 널 사랑한다는 증거인 것처럼…

“강하야. 네 영원을 영원토록 붙잡아줘. 너랑 사귀고 싶어. 사랑해, 강하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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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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