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IREFLY
“애슐리!”
아샤 맥길로이는 부름에 뒤를 돌았다. 작은 몸을 감싼 로브가 물바람에 펄럭였다. 곁에서 간식을 받아먹던 어린 세스트랄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저만치로 달아났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그 짐승, 고작해야 작은 소년과 반 뼘이나 차이가 날까. 아샤는 아쉬운 눈초리로 멀어진 짐승을 곁눈질하다가 양동이를 내던지고 자신을 부른 가족, 에드릭 맥길로이에게 달려갔다. 소년의 손가락이나 양동이 안이나 채 굳지 않은 핏자국과 희멀겋게 얼어버린 지방질 따위가 덕지덕지 묻어 엉망이었다. “에드릭!” 정작 그 신난 화답의 대상은 그것에 영 질색을 하며 아샤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작은 몸을 높이 들어 올렸다. 깔깔 웃는 소리가 흐린 하늘을 울린다.
“여태 여기 있었어? 아직 겨울이야.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난 빨리 파이어플라이랑 친해져야 한다고 했잖아.”
“알아. 곧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 맞지?”
아샤는 알면서 뭘 물어보냐는 듯 자신의 형제를 바라보다가, 짓궂은 픽시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에드릭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고개를 치웠지만, 한참 장난에 여념이 없을 시기의 동생을 안은 채로는 피해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얼마간의 옥신각신을 거친 뒤 에드릭은 고깃덩이의 흔적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문질러 닦아냈다.
“이 고약한 작은 땅신령 같으니. 저녁 먹을 시간이야.”
장난의 대가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힌 뒤 우는 체를 하던 소년의 손은 반강제로 깨끗해졌다. 그리고 가족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두 형제의 뒤로 사락거리는 바람이 흩날리자 호수와 잔디가 공명하듯 떨렸다. 에드릭의 목에 양팔을 감은 채로 아샤는 뒤를 바라본다. 살코기를 씹으며 아샤의 머리에 콧등을 비비던 작은 짐승은 어느덧 부모 사이에 서서 소년을 마주 보고 있었다.
미처 친구가 되지 못한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나였으면 그렇게 좋아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그 날개 달린 말을 볼 때마다 내가 봤던 죽음이 생각날 것 같거든.’ 실은 한 번도 생각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저 짐승이 가장 좋다고, 아주 상냥한 눈을 하고 있다고 부러 말하고 다니던 것은 일종의 되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쟤네는 잘못이 없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내 손등을 핥아주던, 착하고 순해 빠진 짐승인걸. 계속해서 떠올릴 필요 없어……. 자신이 죽음에 ‘과도한’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제대로 봤으면 조금 달랐을까? 할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게 되는 건 싫다고, 영 고집을 부리다 흰 관에 담긴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문득 차갑게 목을 틀어막던 검은 호수의 온도가 떠올라 아샤는 형제의 목을 단단히 껴안았다. 손목을 당기던 차가운 손도. 그건 아샤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죽음과 가장 가까운 경험이었다. 다시금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자 에드릭이 등을 토닥였다. “그러게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니까.” 아샤는 별달리 말을 더하지 않고 그저 세스트랄 무리를 보고 있었다.
이제 아샤 맥길로이는 이전을 생각하며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자신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던 호그와트의 유령들을 보고 울컥거리는 속을 느끼지도 않았으며, 세스트랄이 정말로 불운을 부르는 동물은 아닐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형제의 말처럼 ‘어차피 언젠가는 다 죽는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다만 노력할 뿐이었다. 후회를 덜기 위해, 매 순간을 충실하게 좋아하도록.
‘잘 있어. 또 올게.’ 아샤가 속삭인다. 파이어플라이의 은색 눈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그 눈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다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새로 구운 호밀빵, 양고기와 감자를 넣은 수프, 크리스마스 이브에 먹다 남은, 오븐에 구운 거위. 저녁 식사를 끝낸 맥길로이 네 식구와 집요정 파이브는 <더 데미가이즈> 와 브라운관 TV의 연말 방송이 섞인, 혼란한 배경음 사이에서 각자의 할 일에 몰두했다. 스스로 그릇을 솔질하는 수세미가 곧장 행주 위로 그릇을 던졌다. 거품이 부드럽게 닦이고 그릇은 차곡차곡 찬장에 쌓여갔다. 꽉 닫힌 창문 바깥에는 가벼운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여러 겹의 나무로 된 지붕은 간간이 바람에 부딪혀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깔끔하게 빈 식탁에는 성 뭉고 병원에서부터 보내진 가족의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새파란 눈의 노파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읽던 신문을 탁 내려놓았다. “파이브, 진작 저 지붕을 고치지 않고 뭘 한 거니?” “주인님. 파이브는 어제도 그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하늘이 흐리지 않은 날에 저랑 같이 올라가 보기로 했고요, 엄마.” 노파는 입술을 우물대며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의 기억력을 되돌아보는 대신 가족에 대한 불평과 불만에 가까운 소리였다. 중년의 여자는 집요정과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등을 맞댄 채 뾰족하고 마른 손가락과 지팡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한 크리스마스의 흔적을 거둬내는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겨울의 모습.
“...그랬더니 레너드가 곧바로 마을 지붕 위로 스치듯 날아버린 거야.”
부엌의 소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샤가 외쳤다. 길쭉한 가죽 소파에 엎드린 채였다. 괴물들을 위한 괴물책은 작은 팔꿈치에 눌린 채 맥을 못 추며 낑낑댔다. 책장은 어느덧 T의 테보와 천둥새를 넘어 W의 웜퍼스 캣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릭으로 말하자면, 그는 소파의 팔걸이에 등을 댄 채 망가진 휴대용 라디오의 나사를 조이며 끊임없는 동생의 수다에 간신히 어울려내는 중이었다. 열 한살의 크리스마스를 런던 해크니의 <델마와 루이스> 라는 펍에서 지내고 온 후로— 정확히 말하자면 호그와트에 가서 새로운 친구와 형제들을 만난 후로 아샤는 이전보다도 수다스러워졌다. 이 작은 가족이 전혀 귀찮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아샤 없는 가을을 처음으로 겪은 에드릭은 이 정도가 딱 괜찮다고 생각했다.
“진짜 겁도 없지!”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책을 한 장 더 넘기는 손가락에 새롭게 선물 받은 반지가 반짝였다.
“겁이 없기로는 저번의 걔도 만만치 않던데. 캐롤?”
“캐-럴. 캐럴이 캐럴이라고 했잖아. 바보 에드릭.”
“그래. 성가시기 짝이 없던 캐럴—그The—스미스. 그리고 애슐리 맥길로이. 너희 둘 때문에 마구간 벽을 다시 달아야 했던 건 알지?”
아샤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에드릭이 큭큭 웃는 소리를 내기 전까지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모두가 축복받아 마땅한 크리스마스 당일이 들이닥치기 전. 슬리데린의 두 소년은 시릴 만치 푸르른 겨울 바다와 호수에서 차가운 바람을 잔뜩 맞고 난 뒤 집에 돌아와 마당의 디리코울과 마주쳤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누가 먼저 저 가엾은 새를 붙잡나 내기를 시작했고, 약초 화단과 말린 만드레이크를 널어놓은 널빤지를 가로질러 밟으며 뛰어다니기에 이르렀다. 변수는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에 늙은 니즐 한 마리가 맥길로이 부인의 방에서 튀어나와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아샤는 커다란 털뭉치 같은 짐승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아샤와 캐럴과 니즐— 세 말썽꾸러기가 한데 뭉쳐 데굴데굴 굴러 마구간의 간이 문에 처박히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잠을 청하려던 아브라산 중 한 마리가 소란에 깜짝 놀라 뒷다리를 걷어찼고, 그에 날아간 널빤지가 하필이면 오크통 하나를 정통으로 맞췄다. 셋은 아브라산용 위스키를 뒤집어썼고, 서로의 꼴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샤는 입을 삐죽였다.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다, 뭐.”
“그런 걸로 치자. 어쨌든 무너진 곳을 고치는 건 나랑 파이브였으니까.”
에드릭은 늘 그렇듯 ‘내가 참아준다’ 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어쩐지 그 모습이 얄미웠던 아샤는 어깨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러다 입을 쩍 벌렸다. “그럼 걔한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 거 진심이었어? 언제든 와도 된다고 약속했는데!” 여태껏 동생을 놀리며 웃음을 참아내던 에드릭은 결국 크게 웃었다. “조그만 얼간아. 그 귀엽고 성가신 캐럴 스미스도 농담인 걸 알고 갔는데 왜 너만 모르냐?” 그리고 다시 어깨를 퍽 치는 소리.
아샤가 진정할 때쯤에는 망가졌던 작은 라디오가 얼추 이전의 모양을 갖춰가는 중이었다(이것으로 말하자면 에드릭이 친구에게서 받아 아샤에게 물려주었으나 호그와트에 입성하는 순간 망가졌던 바로 그 물건이다). 에드릭은 연결된 헤드폰을 들어 아샤의 한 쪽 귀에 대어 주었다. 익숙한 음악이 들렸다. 간혹 지직거리는 잡음이 끼어들긴 했지만 이제 본래의 기능을 이행할 수는 있게 된 것이다.
“엔지에게 알려 줘야지.” 아샤는 형제에 의해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난 뒤 중얼거렸다. 물론 저것을 다시 호그와트에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에드릭은 엔젤의 시도와는 다르게 지극히 ‘비마법사적인’ 방법으로 저것을 수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얘기를 들은 에드릭은 생각했다. ‘완전히 마법사 꼬맹이가 다 됐군.’ 에드릭은 아샤를 보면서 자신이 모르는 동생에 대해 상상했지만, 호그와트라는 기묘한 학교를 뛰어다니는 동생은 도무지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없었다. 그동안에도 아샤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몇 번이고 호그와트와 새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뒹굴 몸을 굴러 등받이에 다리를 올리고 쿠션 속에 상체를 파묻는 것이다. 그런 행동도 에드릭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그는 어딘가 어색한 기분으로 턱을 긁적였다.
창문이 콩콩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낯선 부엉이가 창틀에 앉아 눈을 맞아 조금 젖은 채 집 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곧바로 퉁겨지듯 일어난 아샤는 창문으로 뛰어가 그 부엉이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새는 충실하게도, 아샤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들고 먼 길을 날아온 것이었다. 아샤는 창틀에 놓인 부엉이 간식을 집어 들어 부리에 물려준 다음 새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 일을 끝낸 부엉이가 도로 날아 떠나는 것을 본 뒤, 아샤는 편지의 양면을 돌려 보다가 인장을 떼어냈다. 그리고 조금 뒤…….
“레이가 나보고 루마니아에 가재!!!”
그 커다란 소리에 에드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의 할머니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들은 소리의 진위를 파악하던 노부인이 ‘거기가 어디라고’ 부터 시작하는 고함을 지르기 직전, 아샤는 활짝 웃으며 편지를 끌어안았다.
1972년 겨울, 한 해가 막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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