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야차개

동맠

신은 광야에서도 만나를 내리셨으니

  

그들에게는 성이고 이름이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정정, 아주 많다. 인류가 제 한 몸 건사할 곳을 지구상에서 찾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부터 그들이 자신을 거쳐간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 됐다. 왜냐하면 수억의 인구가 제 발자국 아래 있었으니까. 칠십오억이 단숨에 십칠억이 되기까지, 거대한 지구의 바다가 핏덩어리와 시체 썩은 물로 더럽혀질 때까지 고작 십 년이 걸렸으니까. 제4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대테러로 인해 핵이 터지고 돌연변이가 출현하고 인류가 그 사이에서 질척한 점액으로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몇몇 족속들은 태어났으니까. 태어나자마자 플라즈마에 휩싸인 그들이 기어이 목숨 붙어 살아가며 아기를 낳고 또 그들이 기어이 자라 아기를 낳았으니까. 지옥의 땅에서 태어난 삼 대째의 첫 아기는 핵폐기물 위로 기어올라 맨몸으로 뒹굴며 온종일을 까르르 놀았다. 제 자식을 구하려다 몸이 녹아 죽은 어미의 시체를 곁에 두고서. 

인류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서 꿈틀대며 진화의 역사를 반복한다. 수없이 많은 윗세대의 목숨값을 타고 태어난 아기들의 손에는 뼈대가 채 올라오기도 전에 총기가 들렸다. 모든 형태의 핵에 내성을 지닌 전무후무한 인간 서른두 명 전원은 하나의 부대로 온전히 뭉쳤고, 국제정부를 집어삼켰다. 그 애들이 가차없이 오십팔억 명의 사람을 몰살하는 데 걸린 시간이 딱 십 년이다. 폭발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날아오는 온갖 잔여물들을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쳐내며 즐겁다는 듯 깔깔 웃는 그들을 누군가는 야차라 이름붙였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신처럼 숭배했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야차들. 세계를 전부 녹여버릴 야차들. 우리를 집어삼키고, 아아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야차들. 전쟁을 끝낼 죽음의 사신들. 

  

서른두 명의 구원자들.

파괴자들. 

  

이동혁은 여섯 살의 나이에 총과 핵을 쥐었다. 죄책감과 무서움이 뭔지 배울 나이에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인간을 학살하고 다녔다. 숨쉬듯 터뜨리고 죽이고 짓밟던 동혁은 열여섯의 나이에 세상의 꼭대기에 군림했다. 보십시오, 나의 구원자들이여. 넓은 지구에 인간의 이름이 붙은 생명체라곤 고작 십칠억이 남았습니다. 살아남아 애걸하는 인류를 서른한 명의 형 누나들과 함께 내려다보았다.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죽음의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고 섬뜩한 소년. 막내 야차.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에게는 성이고 이름이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서로조차 그러했다. 그래서 동혁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녀의 이름에 ‘윤’ 이 들어간다는 것밖에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건 윤은 동혁에게나 윤이라고 불렸으니까. 동혁보다 고작 다섯 살 많았던 윤은 동혁이 자랄 동안 내내 곁에 있었다. 꼬질한 어린애를 십 년간 제 곁에 달고 다녔다. 오십팔억이 죽고 지옥도 같았던 인류 말살의 역사가 끝나는 날, 윤은 웃으며 동혁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동혁아, 우리는 세상을 구한 거야.

속삭이면서.

  


  

서기 2569년.

  

눈을 뜬다. 깜빡인다. 방안은 고요하고 어둡다. 창틀을 비집고 들어온 외풍 때문에 꼭 닫혔던 암막커튼이 흐트러진 모양인지 어둡고 매끄러운 뺨에 희미한 빛이 반짝 반사됐다. 누운 채로 희미하게 형체만 보이는 방 안을 시선으로 더듬으며, 동혁은 숨을 들이쉬고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코끝에서 미약하게 탄내가 났다. 피부 가죽이 벗겨질 만큼 박박 씻고 잠들어도 살에 밴 매캐한 향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동혁이 묵직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십 헥타르짜리 땅덩어리 위에 폭탄을 터뜨리고, 그 반경 세 배가 되는 땅을 뒤집어엎어 가며 정찰하느라 삼 일 밤을 샜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출정했음에도 그 지역에서 찾던 것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쉴새없이 움직이느라 쌓인 피로에 답답함과 허무함이 겹쳐 두통이 가시질 알았다. 

…….

방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자 길게 그림자가 늘어진다. 동혁이 창가로 다가가 무심한 손길로 커튼을 걷었다. 붉지도, 노랗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인공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서 천천히 밝아지며 동이 트는 중이었다. 이제 햇빛과 달빛은 쉴새없이 피어오르는 시꺼먼 핵 연기를 뚫고 지구에 와 닿지 못했다. 물론 동혁은 인공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은 것들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다. 죽음의 연기 사이로 천천히 흐려지고 마침내 자취를 감추는 태양을 보며 캡틴의 품에 안겨 무료히 손장난을 치던 유년 시절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인공태양의 선명한 테두리를 잠시간 쳐다보며 동그랗고 순한 눈을 두어 번 끔벅인 동혁이 깔끔한 동작으로 도로 커튼을 닫았다. 

방안에는 이십사 시간 돌아가는 컴퓨터 두 대를 빼고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동혁이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검은 화면에 흰색의 열 자리 숫자가 반듯하게 떠 있다. 십오억 천삼백구십이만 칠천칠백육십, 오십구, 오십사, 삼십……. 빠르게 줄어드는 컴퓨터 모니터의 숫자가 시야에 들어차 머리를 쥐어잡고 뒤흔드는 듯해 동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지 벌써 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새로 태어나는 수보다 더 빠르게 죽어나갔다. 다른 것들을 없애기 위해 터지는 폭탄에까지 영향을 받아 픽픽 녹아내리는 거다. 그러나 야차들에게는 인간을 보호할 의무 따윈 없다. 알아서 살아남도록 두는 것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축복. 동혁이 다시금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발길을 돌려 방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막내 안녕.”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며 방을 나선 동혁이 다정히 날아오는 인사에 응, 하고 대답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복도에 늘어선 서른두 대의 냉장고. 제 것을 찾아 문을 연 동혁이 그 안에서 약통과 물을 꺼냈다. 식사하니. 제 옆 냉장고 문을 열며 묻는 청년 야차에게 동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약통 뚜껑을 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캡슐 알약이 까무잡잡한 손바닥 위에 올라온다. 한 손으로 물통을 열어 익숙하게 알약을 꿀꺽 삼킨 동혁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옆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식사를 마친 야차가 빙긋 웃으며 동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생일 축하해. 응. 동혁이 말끔한 얼굴을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머리 많이 아프니?”

“어제보단 나아. 형은?”

“나야 뭐.”

짧은 대화가 두어 번 오고 가자 야차의 왼팔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든다. 깨끗하지만 산발이 된 머리칼, 구릿빛 피부를 가진 키 큰 여자다. 늘 그랬듯 무감정하고 무표정하다. 동혁은 묘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여자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보자마자 좀 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곧장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야차가 소리죽여 제 파트너를 조곤조곤 달랬다. 레이. 그거 나한테만 하는 거라고 했잖아. 방으로 가자. 눈 감고. 옳지.

오늘은 동혁의 스무 살 생일이었다. 애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 막내가 드디어 성인이 되는구나. 시간이 참 빠르다 그렇지. 새삼스럽단 듯이 되뇌는 서른 명의 형 누나들 중 막내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다. 동혁 또한 그렇다. 야차들은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각자의 생일 또한 기억할 필요가 없었으나, 스무 살만큼은 예외다. 드디어 짝이 생기는 날이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몇 명 남았는데?”

“다섯도 안 돼. 어떡할까.”

“일단 쓸만한 걸로 골라서 데리고 와 봐. 막내 또래로.”

누나 한 명이 손에 든 열쇠를 짤랑이며 몸을 돌렸다. 동혁은 본부 정중앙에 올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던 야차들이 걸어나가는 이를 위해 슬쩍 몸을 돌려 길을 터 준다. 밤사이 이능력자들이 대거 탈출했다. 겨우 이십여 명을 끌어모았더니만 그중 반을 훌쩍 넘는 숫자가 반군에 합류하러 탈출한 모양이었다. 골치아프단 듯 관자놀이를 긁던 캡틴이 살짝 굳은 표정의 동혁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뒷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와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는 윗입술. 큰형 같은 캡틴의 걱정 어린 얼굴과 마주한 동혁이 커다란 손바닥에 은근슬쩍 제 머리를 부볐다. 

“걱정하지 마. 웬만한 애들은 남아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럼. 이런 일이 한두 번이니.”

“그래도 찝찝해.”

구겨진 동혁의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펴준 캡틴이 막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괜찮을 거야, 어차피 네가 직접 만져볼 거잖아. 그제야 겨우 동혁의 인상이 풀렸다. 머리가 아팠다.

  

사실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반려 없는 야차에게 두통은 일상이다. 괴상하게 태어난 목숨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야차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총칼을 쥔 지 칠 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너나할 것 없이 밤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야차는 선택받은 자들. 

신은 광야에서도 만나를 내리셨으니.

  

십 년에 걸친 인류 대학살이 끝난 뒤, 핵이 퍼지고 인간이 녹아내린 자리에서는 피어오르는 플라즈마를 먹고 괴상한 것들이 자라났다. 외형적인 면으로는 눈이 없는 사슴. 뒷발이 없는 캥거루. 다행히도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나, 머리가 네 개인 사람 같은 것들. 그들은 세상에서 쓸모없는 생명 중 일순위였던 인간이 충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야차들의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야차들과 비슷한 방면으로 발전하는 것들도 있었다. 몸의 내부로 침투한 플라즈마. 속에서 끓다 인간의 몸을 변형시키는 어떤 흐름. 야차들이 육백사십두 번째로 터뜨린 핵폭탄의 잔여물을 뒤적이며 반경 천 킬로미터 내에 살아 있는 존재가 있는지 확인하던 중에, 그것들은 빠끔 모습을 드러냈다. 

  

이능력자의 존재를 가장 처음 발견한 이는 윤이었다. 머리를 쪼갤 듯 밀려오는 두통에 잠을 못 이룬 세월이 야차들 중 누구보다도 긴 여자. 그녀는 지옥도 같은 주택의 잔해 안에 파묻혀 깨끗한 살결을 하고 방싯 웃던 일곱 살배기 아이를 안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깨닫는다. 이건 아무래도 저희들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저를 향해 팔을 뻗은 아기의 손가락 끝에서 파직, 하고 전기가 튄 순간 안개 드리운 듯 검고 무겁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맑아졌기 때문이다. 막연히 죽음을 점치던 야차들 앞에 나타난 첫 이능력자였다. 

이능력은 쌓인 두통을 풀어 소멸시키는 진통제였다. 윤은 어린애의 전기에 감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애를 끌어안을수록 충만해졌다. 야차들은 폐허가 된 세계를 샅샅이 뒤져 이능력자들을 모았다. 스물서넛 된 인간부터 갓난아기까지 다양했다. 몸 안에서 전류가 만들어지는 아이, 내키는 대로 주변 공간을 뒤틀어 사람의 숨통을 조를 수 있는 아이, 몸의 일부분이 강한 산성이라 살아있는 것을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있는 아이. 그렇게 모아 온 어린 이능력자들을 한데 세워 두고, 동혁을 제외한 야차들은 한 명씩 제 반려를 배정받았다. 돌아가며 손을 쥐어 보고 끌어안았을 때에 가장 충만해지거나, 이능력이 통하지 않는 개체가 제 차지였다. 아수라에서 살아남은 짐승 같은 사람들. 무엇이든 물어뜯을 수 있으나 보호받지 못하고 자란 이들. 그러므로 제 목줄 쥔 주인에게만큼은 충성하는 이들. 어쩌면 제 주인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일지 모를 사냥개 같은 존재들. 

  

동혁은 다시 윤을 생각한다.

  

“…….”

눈앞에 주저앉은 인간은 숨을 거칠게 쉬었다. 손발목이 묶이고 입이 막힌 채였으나 올려다보는 눈알만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사방에서 걱정을 담은 형 누나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동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이 짐승은?”

가감 없는 평가가 산뜻하게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짐승이 뭐니 인간한테. 어디선가 그런 타박이 툭 튀어나왔지만 대체로 고요하다. 어느 정도는 다들 수긍할 만한 외양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동혁은 한층 더 매서워진 얼굴을 마주 쳐다봤다. 느슨한 눈빛이 잠시간 이채를 띠었다. 까맣고 큰 눈동자가 알사탕 같다. 누가 쟤 입 좀 풀어 줘라. 캡틴의 말에 그 짐승을 끌고 온 야차 둘이 뒤통수에 묶인 재갈의 매듭을 풀어 냈다.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재갈 뒤로 고집 세 보이는 입매가 드러났다. 말을 시키기도 전에 입술이 열린다. 

  

  

공기가 부푼다. 그대로 터져 나간다. 충격은 바로 앞에 서 있던 동혁의 몸을 덮치며 위아래 양 옆으로 퍼져 나갔다. 발화점 없이 터진 폭발에 사방으로 훅 밀려난 야차들이 날카롭게 소리 지른다. 하체에 힘을 주고 버티느라 신발 밑창 끌리는 소리가 끼기긱 끼기긱 살벌하게 울렸다. 말로 표현 못할 어떤 공간의 파편들이 비산한다. 틀어박힌다. 죽을 것처럼 압박해 온다. 강화 철로 만들어진 본부의 벽조차 뒤로 밀려나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강력하다. 

이능력의 파장은 핵에 맞먹는다. 한 명의 이능력자가 가진 물리력은 한 도시를 일격에 날려 버릴 만큼, 혹은 그를 능가했으며 정신력은 모두를 미혹해 서로를 주살시키고도 남는다. 인간들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육신이 있는 존재였기에 야차들이라고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위력에 야차들의 눈이 순간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서른 명의 목울대에서 살기어린 울음이 동시에 그르렁대며 끓는다. 그러나.

언령言靈이 내뿜던 기세는 생각보다 쉽게 수그러졌다. 음운 단위로 쪼개진 문장이 순식간에 식어 흩어졌다. 야차들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뽑아들었던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 결을 찾아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짐승을 찾아냈다. 커다란 눈에 당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채 제 앞의 야차를 바라보는 이능력자는 무릎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망연한 표정이다. 입으로 거칠게 내쉬는 숨 사이에는 피어오르다 만 열기로 인해 아직도 연기가 고여 있다. 미동도 없이 그 앞에 서 있던 동혁은 가볍게 손등으로 귓가를 문질렀다. 그러다 두 손을 제 머리칼 속에 집어넣고, 그러쥐더니, 마음껏 헤집는다. 길고 커다랗게 후우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 몸짓이 무얼 뜻하는지 아는 캡틴이 찡그렸던 인상을 간신히 펴며 다가와 동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때.”

“끝내준다.”

이 좋은 걸 여태 형들 누나들만 했단 말이지. 신음에 가까운 음성이 환희로 젖어 있다. 어, 됐다. 됐다.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만에 매치야? 운도 더럽게 좋네. 막내야 축하해. 언제 살기를 띠었냐는 듯 서른 명의 야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다퉈 축하를 전한다. 동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고, 선을 넘은 해방감에 푹 젖어 버린 눈으로 제 앞의 이능력자를 바라봤다. 다행히도 완벽한 인간에 가까운 모양새. 튀어나온 눈썹뼈와 마른 탓에 살짝 패인 볼을 제외하면 의심할 것 없이 동양인. 언령을 쓰는구나. 물리력과 정신력 그 중간 어드메에 있는 축복받은 능력.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 가늠도 못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주의 말을 능력 담아 내뱉다니. 야무진 얼굴에 다부진 몸이지만 시종일관 표정이 멀겋다. 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 이를 처음 만났겠지. 무력함을 실감하는 일이 처음이었겠지.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이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은 동혁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놀람과 당황으로 물들었던 눈빛이 순식간에 모멸감으로 얼룩진다. 동혁은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유쾌하다.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 줘

       

“형. 언어 폭력도 폭력이에요.”

“…….”

“네다섯 세기 전에 규정됐대. 내가 형 패요? 안 패죠? 폭력은 나쁜 거라니까. 근데 형은 왜 나 자꾸 말로 패요. 그거 나쁜 거라고.”

죽 어 ! 마크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개의치 않고 다시 한 번 외친다. 순간 공기가 폭발하고 책상 위의 물건들이 세차게 밀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주절주절 연설을 늘어놓던 동혁이 순간 정수리를 후려치는 짜릿한 느낌에 말을 멈추곤 안마 받은 사람마냥 끙, 하고 기분 좋게 앓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소용 없다니까 그러시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동혁이 책상 위에서 티슈를 두어 장 뽑아들었다. 침대 위에 손발이 묶여 눕혀진 마크에게 다가가 이를 악문 입가 옆으로 죽 흐르는 선혈을 닦아주며 궁시렁댄다. 하지 말라니까요. 다 튀었어 침대에. 베개 까만색 아니었으면 어쩔 뻔. 

마크는 그대로 으드득 이를 간다. 이제 제 능력이 동혁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지 숫제 개처럼 다가오는 손가락을 물려고 들었다. 동혁은 요령 좋게 딱딱거리는 잇새를 피하며 피가 튀어 엉망이 된 마크의 퍼석한 얼굴을 꼼꼼히 닦아 냈다. 그게 어지간히도 기분 나빴는지 결국 와락 표정이 구겨졌다. 꺼져! 저도 모르게 능력을 담아 외쳤는지, 마크가 또 다시 역류하는 핏덩이를 꿀꺽 삼켜냈다. 그 꼴을 내려다보던 동혁이 결국 와락 성질을 냈다.

“아, 하지 말라니까요! 누가 나 좋자고 이래? 반대거든?”

“……,”

“목 상한다고.” 

형 목 상하니까 그만 좀 소리 지르라고요. 큰일난다고, 그러다가. 마크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동혁이 할 말이 남은 듯 입가를 씰룩대다가, 결국 하, 하고 한숨을 놓으며 마크의 턱 아래에 뭉친 휴지를 가져다 댔다. 마크는 동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에 고인 핏물을 마저 뱉었다. 옳지. 잘 알아듣는데 말은 왜 이렇게 안 들었을까. 제 손가락이며 손바닥에 번진 핏자국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동혁이 붉게 물든 휴지를 정리했다. 애지중지 기르는 짐승, 혹은 돌봄이 필요한 어린애를 대하는 태도다. 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마크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동혁이 협탁 위에서 물컵을 들었다. 컵 가장자리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다급하게 목울대가 일렁인다. 

“…….”

동혁은 컵을 기울이다 말고, 물이 입술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어쩌나 볼 심산이었다. 마크는 눈만 들어 흘끗 동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혀를 내밀었다. 망설임없이 찰랑이는 수면을 할짝인다. 원래 그런지, 아니면 조금 전에 피를 토해서 그런지 혓바닥이 붉다. 동혁은 곧장 한 손을 뻗어 마크의 턱 밑을 받치고 컵을 기울여 물을 먹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이 거둬진다. 꿀꺽꿀꺽 물 넘어가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미안해요. 장난 안 칠게. 동혁은 아무도 혼내지 않았는데 제 발 저린 어린애마냥 굴었다. 

  

동양인으로 보여서 제1지구에서 왔을 거라 확신했는데, 캡틴은 마크를 제3지구에서 주웠다고 했다. 그곳이 동쪽과 먼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의외다. 압송되어 오는 내내 몇 번이고 재갈을 물어뜯고 언령을 쓰는 바람에 비행기가 추락할 뻔했다며, 마크를 본부까지 이송한 딜리버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다 말고 한숨을 삼켰다. 동혁은 그 고생을 알 만 하다고 생각하며 수고했어요, 덕분에 살았어요, 하고 치하의 말을 남겼다.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너무 건방지지만, 만에 하나 가능하다면……. 복잡하고 끈적한 공용어의 발음이 귓가에 꽂힌다. 동혁은 조금 짜증 난다고 생각하며 역시 공용어로 대답했다. 안전지구로 이사하세요. 잠시간 침묵이 흐르던 수화기 너머에서 끅, 하고 울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에겐 생존이 중요하다. 이것은 동혁이 태어나 이십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명제다. 동혁은 열 살 무렵 캡틴의 주도 하에 지어진 안전지구를 싫어했다. 본부에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그곳은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음울한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 같기도 하고, 산화된 철에서 나는 비린내 같기도 한 것이 공중에 떠돌고 사람들은 절박함과 체념을 번갈아 연료 삼아 태워 가며 그 공기에 독성을 더했다. 야차들의 은혜를 입어 안전지구로 이사한 이들은 오히려 죽음의 위험에 만면 노출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야차들을 두려워한다. 제 아들과 딸, 배우자를 두 팔 안에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경멸과 경외가 섞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인간들. 살아남은 자들. 방독면과 방호복을 쓰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감정이 호의적인 종류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어린 동혁도 모를 리 없었던 터였다. 

살려야지, 동혁아.

그래야 더 많이 죽이지. 캡틴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동혁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잘 몰랐으므로 캡틴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안전지구의 사람들은 싫었다. 살아남으려고 저러는 거야, 이 완벽한 세상에서 기어이 인간 따위로 살고 싶어서. 윤은 동혁의 어깨를 감싸며 조금 가여워하는 듯도 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동혁은 윤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치며 어디 한 지점을 힘주어 노려본다. 이쪽을 바라보던 일가족이 황급히 집 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것들이 누나 노려봤어. 죽일래. 입을 삐죽이며 투정 부리던 동혁에게 윤은 웃었다. 참아. 지구엔 인간이 많으니까. 쟤들 말고도 죽어야 할 것들은 많아.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러니 야차는 야차인 것이다. 동혁은 자신의 사고 체계가 뭇 인간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죽이거나 살리는 존재. 그 중 이능력을 가진 것은 우리의 무기. 동혁은 사람의 살결보다 손끝에 감기는 개조 핵폭탄의 까끌한 표면 마감재가 더 익숙했다. 그랬기에 이것은 야차로서의 이동혁이 살린 첫 목숨이다. 안전지구로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딜리버로 일한 지 삼 년이 넘었다던 그 남자는 앞으로 일 년을 못 버티고 폭발이나 전쟁이나 피폭 후유증에 의하여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마크는 동혁이 방 벽에 달린 아날로그 수화기를 도로 제자리에 얹어 두는 모습을 마땅찮은 표정으로 내내 노려봤다. 

“계속 그런 표정으로 있을 거예요?”

“…….”

“배 안 고파요?”

내려가서 밥 먹고 옵시다. 나도 갈 데가 있어서. 침대로 뚜벅뚜벅 다가온 동혁이 마크의 손발목을 묶은 구속구를 망설임없이 풀어 내렸다. 마크는 오른손목이 풀려나자마자 동혁에게 주먹을 날렸으나, 동혁은 예상했다는 듯 왼손으로 가볍게 손목을 낚아챘다. 분명 물리적인 힘은 마크보다 동혁이 훨씬 약했고 그 사실을 둘 모두 알고 있었지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려던 마크는 순간 입술을 악 깨물고 팔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동혁의 눈에 순간 불그스름한 빛이 어린다. 풀숲 속 짐승의 눈알 같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순식간에 희게 질린 마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동혁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무 과격하게 안 굴었으면 좋겠어요.”

“…….”

“내가 아직 어려서 제어가 잘 안 돼요.”

온몸을 휘도는 방사선 부유물들이 근육 사이사이를 잡아 비튼다. 하나에 십 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무게추들이 관절 위를 짓누르며 혈로를 막는 느낌. 동혁은 표정 없이 마크를 응시했다. 고통보다 강한 압력을 버티느라 마크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손목을 놔준 동혁이 소매를 늘여 젖은 이마를 찍어냈다. 제 얼굴을 정성스레 훔치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며, 마크가 오른쪽 어깻죽지를 가만히 문질렀다. 무언가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야차는 야차죠?”

“…….”

“핵 속에서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너무 쉽게 보는 것도 안 좋아요. 난 몰라도 우리 누나들은 건방진 걸 싫어하거든. 경고라기엔 다정했고 농담이라기엔 웃음기 없다. 마크가 흘끗 시선을 들어 벽을 바라봤다. 십오억 팔백칠십육만 천오백구십, 칠십오, 육십삼, 오십이……. 거대한 모니터 속에서 빠르게 줄어드는 숫자들. 동혁은 잠깐의 대치만으로 탈진 직전까지 간 마크의 머리를 가볍게 몇 번 쓸어넘기고, 힘 빠진 오른손 대신 왼손에 물이 반쯤 남은 물컵을 들려 주었다. 얼마나 오래, 단단히 묶여 있었으면 손목이며 발목에 남은 두 겹의 구속구 자국이 흉터처럼 선명했다. 그 자국을 내려다보는 동혁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본부 지하의 식당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들 중 구속구를 푼 채 돌아다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은은하게 푸른 안광을 내뿜는 눈은 그들이 이능력자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야차도 몇 있었으나 대부분 제 반려를 데리고 있었고,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혼자 돌아다니는 이들은 대부분 양손과 양 발목에 아주 얇게나마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손에는 식판 하나씩을 들고, 조리된 음식을 거기에 옮겨 담으며 돌아다니는 누군가의 반려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이능력자들. 마치 구세계의 학교나 회사 구내식당 같은 모습이다. 마크는 생소한 풍경에 동혁의 등 뒤로 바짝 붙어 걸었다. 양 손목에는 구속구 대신 붕대가 감겨 있다. 

푸른 눈빛과 붉은 눈빛이 같은 종류의 호기심을 담고 산발적으로 날아와 꽂힌다. 당연했다. 격리실에서 처음 나와 야차와 반려 맺어진 이능력자는 아주 오랜만이었고 동시에 이게 마지막일 터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반려 맺어진 막내 야차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쳐 걸었다. 이능력자들은 동혁과 몸이 부딪히려 할 때마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몸을 작게 틀어 피했으나, 마크에게서는 진득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살갗이나 옷깃을 스치고 지나치며 슬쩍슬쩍 능력을 흘리기도 했다. 

세 번째로 누군가의 어깨에 거칠게 밀려난 순간, 마크가 확 뒤쪽을 돌아보며 작게 이를 드러냈다. 키 큰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 돌아보며 큰 눈을 치떴다. 푸른 안광을 흘리는 두 이능력자의 목울대에서 동시에 같은 으르렁 소리가 끓어 나왔다. 마크의 입가로 조금씩 푸른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목구멍으로 짤깍짤깍 웃는 소리를 낸 맞은편 이능력자가 양손을 쥐었다 펴자 손목까지 온통 화염이 어룽거린다. 식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당장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마크의 눈에서 천천히 이성이 휘발됐다. 그러나, 

형. 가볍게 부르는 소리에 마크가 순간 주춤했다. 

“스물일곱이라며.”

“…….”

“직장도 다니고 있었다던데.”

사람으로 이십칠 년 살았으면서 왜 이렇게 개처럼 굴어. 

나직한 타박이 폐부를 꾹 찌르고 들어왔다. 마크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열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어 연기를 날린 마크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동혁이 손짓하는 대로 제 반려의 등 뒤에 붙어 섰다. 붕대 감긴 손목을 칭찬하듯 한 번 쥐었다 놓은 동혁이 마크를 향해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어 보이곤 뒤를 돌아보았다.

“……!”

동시에 뒤틀린다. 무릎 꿇는다. 방금 전까지 불이 끓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빙글빙글 웃던 이능력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온몸의 관절이 기묘한 방향으로 꺾인다.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빨려들어가는 듯한 압력이 점점 거세져, 가까이에 서 있던 이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직감에 마크가 다급하게 동혁의 팔을 낚아챘다. 돌아보는 얼굴은 여전히 고요하고 침착했으나, 눈은 붉게 빛나고 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마크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지 마. 속삭이는 말에는 의도했는지 아닌지 몰라도 얕게 언령이 담겨 있다. 동혁은 웃는 낯을 지운 채 묵묵히 마크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한 번 적셨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힘을 갈무리했다. 사위를 옥죄던 압력이 느리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막내야.”

점점 사그라들던 압력이 전부 사라져 가고 쓰러졌던 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을 때쯤, 저 멀리서 캡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혁이 고개를 돌려 길을 비켜 주는 사람들 사이로 여유롭게 걸어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빨리 좀 다니지,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 있다 와? 짜증과 투정이 반쯤 담긴 목소리가 날카롭게 식당을 울렸다. 캡틴은 씩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동혁의 머리를 한 번 헝클고 마크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려 쓰러진 이에게로 걸었다. 

“좀 참지 그랬어.”

“우리 형이 안 참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마크 씨 보기보다 성격 있네?”

캡틴은 하하 웃으며 남자를 일으켰다.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잔뜩 주눅 든 표정을 한 남자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면서도 연신 캡틴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이쪽 반려라서요. 애가 키만 컸지 아직 어려서 버릇이 좀 없어요. 이해해요. 마크는 잠시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자길 보고 한 얘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동혁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 움직임을 따라 캡틴의 녹색 눈동자가 매끄럽게 굴렀다. 잠시 조용하던 캡틴이 혀를 쯧쯧 찼다. 

“아직 적응도 덜 된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야, 이누.”

“미안, 캡틴. 그게 실은.”

“변명 그만.”

이따 마저 들을게. 시무룩해진 이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캡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매달렸다. 엄한 표정으로 제 반려를 한 번 돌아다본 캡틴이 마크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다음에 다시 봐요, 마크 씨. 실례했어요.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받은 마크가 본능적으로 동혁의 팔을 붙들었다. 캡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동혁이 자연스레 돌아서며 마크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어느새 무덤덤하게 돌아온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조금 예민해진 것도 같았다. 

“맘 풀어요, 형.”

“……, 그렇게 화 많이 안 났어.”

“저 형 아마 많이 혼날걸요.”

캡틴이 무서울 땐 되게 무서운 사람이라. 나도 평소엔 저 형이 사고 치면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요. 혼날까 봐. 주절주절 이야기하며 빈 식판을 하나 집어든 동혁이 대답 없는 마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럼 방금 일은 웬만하지 않았다는 거지. 상대가 누구였건 간에 당연하단 듯이 편을 들고, 심지어는 대신 보복할 만큼 기분이 상했었다는 거지. 마크가 손목에 감긴 붕대를 손끝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동혁이 내민 식판을 받아들었다. 제 반려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뒤 돈 마크가 성큼성큼 배식대 쪽으로 걸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역시 그들을 헤치고 걸어 나아가야 했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감히 시비를 걸어 오는 이가 없었다. 동혁은 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마크의 뒤를 느리게 따랐다. 

  

  


  

갈 데가 있다는 말을 흘려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동혁이 자연스레 방으로 돌아가는 길의 반대편 복도로 걸어갈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동혁은 마크를 문 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싫든 좋든 동혁이 가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가야 하는 줄 알았던 마크는 복도에 머쓱하게 남겨져 철제 문을 바라보며 동혁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실 속은 끓다 못해 천불이 나 터지기 직전이었다. 야차를, 그것도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야차를 반려랍시고 맞은 것부터, 마주앉아 식사를 한 것(물론 동혁은 한 입도 먹지 않았다), 그걸로 모자라 그 애가 나오기를 멀뚱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가 숨통 턱턱 막힐 만큼 짜증났다. 기다려 연습하느라 얌전히 주인 기다리고 앉은 강아지도 아니고.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크는 대책 없이 부딪히고 보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생긴 지 몇 년 안 된 이능력에 적응이 덜 되어 몸뚱이 통제가 힘들기는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사실 애초에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여기서 튀어 봤자 건물을 벗어나기도 전에 붙잡힐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야차의 반려고 뭐고 즉결사살이다. 시도할 수 있으면 해 봐도 좋아요. 우리 사냥개들이 얼마나 빠르고 잔인한지 제대로 알게 될 테니까. 물론 대가는 좀 치르겠지만. 처음 잡혀왔을 당시에 캡틴이라던 자가 입에 단단히 재갈을 물리며 했던 말이라 잊혀지지도 않았다. 그때의 모멸감이 생생히 떠올라 표정을 구긴 마크가 발뒤꿈치로 바닥을 툭 찼다. 

체감상 삼십 분이 훌쩍 지나도록 동혁은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몇몇 야차들과 방호복을 입은 직원들이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는 마크를 흘끔거리며 지나쳤지만, 식당에서의 일이 벌써 여기저기로 퍼진 듯 아무도 시비를 걸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동혁은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하게 안쪽에서 문이 몇 번 더 텅 텅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어깨로 무거운 문을 밀고 나온다. 마크는 한 마디 할 심산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동혁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뭘 하고 나온 건지는 몰라도 표정이 아주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선 둥근 얼굴상이 웃지 않으니 한없이 날카롭다. 동혁은 철문의 자물쇠를 채우고 키를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을 때까지 내내 말이 없다가, 돌아서서 마크를 마주하고는 씩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심심했겠다. 자연스럽게 마크의 어깨를 감싸며 걷기 시작한 동혁이 옷의 솔기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지작댔다. 묵묵히 동혁과 보조를 맞춰 걷던 마크가 동혁의 반대쪽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가볍게 턱짓했다. 

“그건 뭔데.”

동혁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마크의 어깨를 그저 한 번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나름 고민하다 물은 건데, 질문이 무시당하자 마크의 눈빛에 슬쩍 불쾌감이 어렸다. 타이밍 좋게도 동혁이 코너를 돌자마자 등장한 쓰레기통에다 들고 있던 봉투를 통째로 쑤셔 박았다.

“그냥.”

“…….”

좀……, 보기 싫은 게 들어 있어서요. 이를 악문 목소리는 낯설다. 마크는 눈동자만 굴려 동혁을 흘끗 살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동혁이 소리 없이 웃으며 아 형 괜히 데려왔다 여기, 하고 들릴락말락 중얼거렸다. 눈밑이 도톰하게 접혔다. 

문득 동혁이 한 발자국 성큼 걸어 마크를 가로막았다. 마크는 느릿한 호흡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겠거니 싶었다. 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마크는 그 틈을 타 동혁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까만 피부. 한쪽 얼굴에만 콕콕 박힌 점. 열감 있어 보이는 눈. 전체적으론 여전히 앳되다. 갓 스무 살이 되었다는데,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이런 애가 전투에만 들어가면 미친 짐승이 된다는 거지. 어쩐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동혁은 마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툭 물었다. 

“형 내 이름 뭔지 모르죠.”

“아무도 안 알려 주던데.”

“당연하죠.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 줘.”

동혁이 낄낄 웃었다. 마크는 오묘하게 불편한 표정을 하고 동혁을 본다. 딴 사람들은 몰라도 형은 알아야지. 나는 형 이름 아는데 형이 몰라서 쓰나.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동혁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저는 제1지구에서 태어났어요. 이름은 동혁이에요.”

이동혁. 성이 이고 이름이 동혁. 마크의 눈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한반도식 이름이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동혁이 직접 마크의 오른손을 잡아 올려 아래위로 가볍게 흔들었다. 인간들은 인사를 악수로 한다며. 흉내라도 좀 내 봅시다. 

“첫만남이 엉망이었어서 미안하고요. 잘 부탁해요.”

“…….”

“형은요.”

마크는 대답 없이 손을 놓았다. 그러나 떠올린다. 문을 잠그고 뒤돌자마자 변하던 표정. 슬픔에 가까운 분노가 번진 얼굴을 순식간에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가까이 붙어 오는 몸의 온기와 반쯤 장난스럽고 반쯤 살가운 목소리. 손바닥 뒤집듯 빠르고 손쉬운 태도 변화가 마냥 기껍지만은 않았다. 

걱정이 되거나 안쓰럽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자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좀 나아진 것 같은 반려의 표정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마크는 동혁이 제 어깨에 다정스레 팔을 두르는 걸 쳐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맞닿은 팔뚝과 목덜미 사이로 동혁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적절하고 따뜻한 인간의 온기였다.

  

너네는 안 죽는다며, 이 야차야

    

야차들의 탄생과 동시에 반군은 생겨났다.

원래는 국제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반군의 존재 이유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야차들이 하나의 부대가 되고, 그 부대가 탄생한 지 오 년 만에 국제정부를 집어삼킨 뒤부터 반군은 반反야차군으로 그 모양새가 바뀌었다. 반군 전력의 삼 분의 일은 이능력자였다.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은 아니고, 열다섯 명의 이능력자가 수천에 달하는 저항군만큼의 위력을 낸다는 뜻이었다. 개중 셋은 반군 내에서 발현했고, 둘은 발현 후에 합류했으며, 열은 국제정부에서 반군으로 적을 옮긴 이였다. 다시 말하면, 야차의 반려 혹은 반려 후보자가 될 사람들이었다는 것. 

제 반려에게나 통하지 않는 것이 이능력이다.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이송된 이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그들은 감시가 헐거워진 틈을 타 탈출한다. 사전 협의는 없다. 그러라고 정해 놓은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차들은 늘 이능력자들을 잃었다. 날이 갈수록 감시가 삼엄해진 탓에 탈출을 시도하다 개중 한둘이 죽거나 심각하게 다치는 한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정부에서 벗어나기에 성공한 이들 대부분은 종적을 감추고 일부는 반군에 합류한다.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야차의 반려가 되면 피폭되어 죽을 일은 없다. 반려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이능력자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들만큼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맺어지기 전에 도망친다. 벗어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죽어 발견되는 경우도 많았다. 모든 야차들이 답답함과 분노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으나 캡틴만은 평온했다. 캡틴은 어린 동혁에게 이능력자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이라 그렇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무모함과 인간의 두려움과 인간의 이기심을 전부 갖고 태어난 탓에 야차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지른다고. 그게 인간이라고.

그리고 얼마 전, 세력의 균형에 거대한 금이 갔다. 6월 6일, 동혁의 스무 살 생일 새벽. 본부로 이송되어 구금되어 있던 스무 명의 짝 없는 이능력자 중 열다섯 명이 탈출한 뒤 그대로 반군에 합류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세력 파악이 얼추 되는 상대였기에 싸우기 수월했으나, 더 이상은 아니다. 위협적이다 못해 위험하다. 야차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대등한 수의 대등한 힘. 긴장하지 않으면 목이 잘린다. 

그러나 야차는 야차. 서른한 쌍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너울거린다. 반군의 이능력자 수만 해도 도합 서른이다. 몇 개의 작은 나라를 쥐 잡듯 뒤져도 나오지 않는 귀한 무기가 서른. 이제 제각기 반려도 있겠다, 반쯤 죽이고 반쯤 생포하자. 나눠 갖자. 마약을 배분하는 중독자들처럼 희열에 가득 차 전쟁을 준비하는 야차들 틈에 동혁도 있었다. 싸우러 떠나는 길엔 형들 누나들과 핵들을 한 주머니씩 나눠 쥐고 농담을 주고받고 힘껏 웃다가 잠시 제 방문을 돌아본다. 

  

“…….”

마크도 동혁의 방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동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깥이 아닌 안쪽이라는 것.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힘껏 노려봤다는 것 정도. 커다란 두 눈동자에서 순간 푸른빛이 반짝 빛났으나, 마크는 입을 열려다 그만두었다. 타오르려던 불씨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연기가 푸스스 목을 타고 올라온다. 담배 연기를 뱉듯이 입 속에 고인 연기를 훅 불어내 날린 마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동혁의 물건인데도 그 애의 체향이 희미했다.

동혁을 만난 지 삼 주가 꼬박 지났다. 원칙대로라면 반려를 맞은 야차는 당분간 작전이나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야 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동혁은 시도때도 없이 몰아치는 비상상황에 매번 동원되었다. 동혁은 어제 새벽에 나가서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말은 방안에서 혼자 집 지키는 개처럼 무료히 보낸 시간이 하루 이십사 시간 중 이십 시간 정도 되었다는 뜻이었다. 

동혁이 전투로 인해 방을 비운 동안에는 방문이 굳게 닫혔다. 끼니때가 되면 문이 열렸지만, 그땐 식당으로 향하는 길을 제외하곤 전부 닫히고 막힌다. 탈출 흉내도 내 볼 수가 없었다. 방에서 혼자 보낸 첫날 밤, 마크는 목에서 피를 한 움큼 쏟을 때까지 문에 대고 악을 썼다. 열려. 열어줘. 부서져. 뒤틀려. 죽어. 죽어, 죽어! 문은 주인 닮아 요지부동이다. 문 주변의 물건들만 사방으로 쓸려나가 엉망이 됐다.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전투에서 돌아온 동혁은 엉망이 된 방 꼴을 한 번 둘러보곤 묵묵히 널브러진 물건들을 치웠다. 피 묻은 휴지를 버릴 땐 눈살을 한 번 꾹 찌푸렸으나, 애써 제 눈을 피하는 마크에게는 씩 웃어주고 그걸로 끝이다. 그게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이제는 전부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마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으로 옮겨온 이후부터 마크는 악몽을 지나치게 자주 꾸었다. 아마 마크는 본부니 야차니 반려니, 그런 것들이 아니라 지겹고 머리 아픈 악몽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꿈 속에 등장할 것은 차고 넘쳤다. 주삿바늘, 옥시미터, 우는 엄마, 어디서 일어났는지 모를 폭발과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죽음, 이런 것들. 그러나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몸이 굳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동혁이 뜨끈한 손바닥을 두 눈 위에 덮어 깨웠다. 저도 모르게 악지른 소리 때문에 깼다는 건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았다. 

동혁은 눈 옆으로 흐른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두드려 돌아눕혔다. 마크는 악몽을 꾼 밤을 지나고 난 뒤의 아침마다 은근히 동혁의 눈치를 살폈으나, 동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커튼을 열고 제 몫의 식사를 한 뒤 마크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조잘조잘거리는 이야기들 속에 간밤의 일은 없었다. 하루 종일 함께 있다가 저녁만 되면 굳이굳이 숙소 아래층 사격 연습장에 간다고 방을 나섰다. 마크는 제 등 뒤로 손을 흔들며 갔다 올게요, 하고 인사하는 동혁을 돌아보지 않았으나 동혁이 늦는 날에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 옆자리에 조심히 실리는 사람의 무게를 감각하고서야 잠들곤 했다. 쟤는 총 쏠 필요도 없다면서 사격은 왜 하러 가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마크는 하릴없이 이불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지난밤은 동혁 없이도 꿈을 꾸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오늘 밤도 괜찮아야 할 텐데. 이 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을 나가고 싶어한 주제에, 나약한 걱정이 멍해진 머릿속을 비질비질 비집고 올라왔다.

옆으로 돌아눕자 시야에 창문 밖의 인공 태양이 들어왔다. 빛나는 구는 똑바로 쳐다봐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다만 잔상은 좀 남는다. 눈앞이 깨진 모니터 화면처럼 지직거리는 느낌에 눈을 비비려 손을 드는 순간, 먼지나 티끌 같은 게 날려 들어간 듯 왼쪽 눈이 따끔해 온다. 아. 무심코 낸 신음성에 놀란 마크가 곧장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자연스레 목소리에 섞여 나오던 언령이 내부로 삼켜진다. 성대와 식도와 폐부를 따라 이능력 에너지가 타고 내려간다. 간신히 그걸 전부 삼켜내고 후, 하고 짧게 날숨을 끊은 마크가 다음 순간 닥쳐 오는 고통에 다급하게 제 목을 부여잡았다. 

“끅.”

피부에 손톱을 박아 넣고 내리눌렀다. 아픔은 터지듯 시작된 이후로 줄어들 기미가 없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초 단위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버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마크가 다급하게 동혁의 책상 위를 더듬어 약통을 찾았다. 붉은 라벨이 붙은 진통제 통 뚜껑을 열고 두 알을 꺼내 입 안으로 밀어 넣는 동안에도 덜덜 떨리는 왼손은 목울대를 압박하듯 누른 채였다. 물도 없이 알약을 아작아작 씹어 넘긴 마크가 침대 위로 쓰러지듯 털썩 몸을 뉘었다. 침착하게 호흡하려 노력하자 풍경이 뒤틀린다. 이불이며 책상, 창문이 전부 점점이 까맣게 얼룩졌다. 들불을 진화하는 강물처럼 뱃속부터 진통제의 기운이 타고 올라와 목에 퍼졌다. 아픔이 얼음 녹듯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녹아내린다. 제때 약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오랜만에 피를 토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이 하얘질 만큼 갑작스럽고 심각한 통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개중 대부분은 억지로 버티면 얼마 안 있어 나아졌지만 진통제를 쓰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지속될 때도 있었다. 가라앉는 아픔을 면밀히 감각하며 긴 심호흡을 마친 마크가 그제야 입 안을 찌르듯 느껴지는 쓴맛에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맛없어.

시야가 도로 맑아지고 나자 방 안이 제대로 보인다. 쓰레기통은 방 한가운데를 구르고 있고, 컵들은 죄다 쓰러져 있다. 용케 가구들은 제자리를 지켰다. 소리를 참는다고 참은 거였는데도 저 모양이다. 전부 속이 비어 있어서 망정이지. 마크가 질린다는 듯 두 눈을 두어 번 비비고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서 내려와 컵을 도로 세우고 쓰레기통을 주운 마크가 책상 밑에 쭈그려 앉았다. 다시 넘어지지 않게 제대로 두어야겠다 싶어서였다. 

책상 아래의 안쪽 구석으로 깊숙이 쓰레기통을 밀어 넣던 마크가 순간 핑 도는 머리 때문에 중심을 잃고 삐끗한 탓에 앞쪽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마크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손을 뺐다. 손가락 마디와 손톱 사이사이에 거뭇한 먼지 같은 것이 끼어 딸려 나왔다. 

“…….”

이거……, 설마 흙인가. 마크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손끝을 내려다보다, 이내 방바닥에 두 무릎을 딛고 상체를 낮췄다. 합금 판으로 막혀 있는 책상 아래쪽으로 팔을 더 뻗고 손가락을 밀어 넣자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물체의 끄트머리가 잡혔다. 

마크는 손에 들려 나온 물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도자기나 플라스틱 같은 구소재로 만들어진 것 같은 원기둥형의 둥근 통 안에 말라비틀어진 흙이 반쯤 차 있다. 기억이 맞다면 이건 구세계 사람들이 식물을 키울 때 썼던 그릇이다. 배양한 인공 작물이 아닌, 진짜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호흡을 하고 뿌리를 내리는 자연의 식물. 귀하고 비쌌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크가 손가락을 넣어 흙의 표면을 가만히 헤집었다. 이삼 센티 정도 파고든 손끝에 다 죽고 바싹 말라 버려 잘게 부서지기 직전인 식물의 줄기가 만져졌다. 사각사각거리는 소리 위에 동혁의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 줘. 뭔가가 웃긴 듯도, 어쩐지 씁쓸한 듯도 하던 어투. 

문 쪽에서 철컥. 하고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흘끗 바라보니 저만치 해가 진다. 벌써 저녁시간인 모양이었다. 마크는 잠시 망설이다가, 흙 표면을 정갈히 골라 정리한 뒤 도로 몸을 숙여 들고 있던 것을 책상 아래 합금판 너머로 깊숙이 밀어넣었다. 

언젠간 얘기해 주겠지. 그 애는 그러고 싶은 게 많아 보였으니까. 마크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대강 정리된 방 안을 휘 돌아보고는 뚜벅뚜벅 걸어 문 쪽으로 향한다. 공중에 부옇게 날리던 고운 먼지가 마크가 앉아 있던 자리 위로 가만가만히 내려앉았다. 


 

혼자 식당에 가는 일은 점차 익숙해졌다. 다만 동혁이 곁에 없는 동안 재갈 대신 차야 하는 구속구만은 꾸준히 불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인 있는 이능력자에게 채워지는 구속구는 팔찌만큼이나 얇았다. 이럴 때마다 정말이지 개새끼 꼴을 면할 수가 없다. 마크는 대충 음식을 담아 온 식판을 식탁 위에 던지듯 올려두고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긁었다. 찰랑거리는 구속구는 목소리를 낼 때마다 찌릿거려 사람 성질을 뒤집어 놓았다. 이능력 쓰지 말라고 이딴 식으로 만들었겠지, 이거. 언령이 제어가 되면 좋을 텐데 아직 거기까진 힘들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너 오늘도 혼자야?”

“?”

“나도 그런데.”

밥 같이 먹자. 누군가가 제 식판을 마크의 앞자리에 올려놓고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마크가 멀뚱한 표정으로 제 앞에 앉아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오는 이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알아봄과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이누가 푸학 웃으며 제 양 손목을 모아 들어 보였다. 

“걱정 마. 볼래, 이거?”

마크의 손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구속구가 두 겹이다. 벌써 몇 번이나 실수했는지 손목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다. 마크가 의뭉스런 눈을 뜨자 이누가 머쓱하게 웃었다. 너한테 시비 걸었다가 막내한테 털린 날부터 이러고 있다. 말뜻을 가만히 되짚던 마크의 얼굴이 살짝 창백하게 질렸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의 결정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캡틴의 반려 정도면 전투에 나갈 만도 한데, 왜 남아 있나 했지. 

캡틴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 사실은 동혁보다 마크가 더 잘 안다. 그 사람 자기 반려에게도 다를 바 없구나. 마크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식사는 제2지구식이었다. 주먹밥 표면을 감싼 양념 묻은 튀김옷을 포크가 아닌 젓가락으로 재빠르게 벗겨낸 마크가 이누를 흘끗 쳐다보곤 별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인 이누가 입에 숟가락을 물고 눈을 빛냈다.

“너 몇 살이야? 나보다 나이 많지?”

“…….”

“아! 나는 스물다섯이야.”

숟가락으로 진득한 스튜 국물을 한 입 떠먹은 마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두 살 많다고?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형이네. 근데 그냥 편하게 부를래. 고작 두 살 차이에 뭘. 너도 제3지구에서 왔다며? 그럼 이름이 더 편할 거 아냐. 이누는 말하다 말고 숟가락으로 고기 덩어리를 잘라 입안 가득 물었다. 주의력 결핍 강아지 같다. 첫인상과는 완전 딴판이다. 깡패, 양아치, 들개, 혹은 개새끼, 뭐 그 정도 감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누는 밥을 절반쯤 먹을 동안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본부를 떠날 생각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발현되자마자 사 년 전부터 캡틴과만 살았고, 그전의 삶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고. 바깥세상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온몸이 녹아내려 죽는 가족들의 얼굴이었는데, 가끔 피곤한 날엔 꿈에 나온다고, 그래서 야차들보다 본부 밖으로 나갔다가 피폭돼 죽는 것이 더 겁난다고 했다. 무거운 말을 가볍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마크는 묵묵히 식사만 했다. 오래오래 씹어 천천히 삼켜야 했기 때문에 말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이누와 속도가 묘하게 들어맞았다.

“맞다. 막내랑은 좀 어때?”

마크가 고개를 휙 들었다. 와, 반응 빠른 거 봐. 너 걔한테 반했지? 이렇게 빨리 반려한테 맘 주는 애는 또 처음 보네. 이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어라 놀렸다. 건수 잡았단 표정이 아니꼬워, 마크는 입에 든 걸 탐탁찮은 표정으로 우물거리며 어깨나 한 번 들썩하고 말았다. 이누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걔 사연 알아?”

“…….”

“아직 아무것도 못 들었나 보네.”

마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심사가 복잡했다. 동혁은 전부 줄 것처럼 굴면서 이름을 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웃거나, 다정하게 돌보거나, 밥을 챙겨 주고, 바깥세상 이야기를 한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들은 실수로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누가 마크의 안색을 살피곤 잠시 머뭇거리다 똑같이 어깨를 한 번 들썩해 보였다. 사실 나도 잘 몰라. 캡틴은 자세히 얘기 안 해 줘. 그래서 나는 내가 본부 들어오고 나서부터 본 막내 얘기만 해 줄 수 있어. 한 사 년 전쯤부터. 

“들을래?”

가벼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누의 표정이 아주 살짝 가라앉았다. 동정과 동경이 반쯤 섞인 얼굴이다. 

“그것만 해도 얘기가 길걸.”

마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식당 한쪽에 커다랗게 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번 접전지는 본부와 꽤나 멀리 있는지, 피어올라 하늘을 가리는 핵구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기 어드메에서 핵을 쥐고 뛰어놀고 있을 이동혁. 정 많은 얼굴을 지우고 그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이름 모를 인간의 목숨을 거둬들일 이동혁. 꼬박 이십 년 동안 동경하고 혐오하던 괴물. 막내 야차.

내 반려.

  

마크는 동혁이 전투에서 돌아오기를 밤새워 기다린 적이 없었다. 사실 기다릴 이유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다. 약해진 몸에는 밤이 깊어 갈수록 밀려드는 수마와 싸워 이길 체력이 없었다. 마크가 이미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동혁 또한 밤늦게 들어올 때마다 최대한 소리내지 않고 조심히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파고들어 죽은 것처럼 잠을 청하고는 했다. 진압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능력자는 밤에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혁은 마크가 지독한 악몽을 꿀 때가 아니라면 먼저 깨우지 않는다. 

“형.”

그랬기 때문에 동혁이 한밤중에 깊게 잠든 마크를 흔들어 깨운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형, 깨워서 진짜 미안한데요, 제가 진짜 안 이러려고 그랬는데요. 목소리가 이상하다. 마크가 고개를 휘저어 잠을 떨치려 애쓰며 손을 뻗어 탁자 위 수면용 조명을 켰다. 퍼져 나가는 빛이 유약하게나마 방을 밝혔다.

동혁은 입술이 죄 터진 채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는 보이지 않아도 옷도 아직 갈아입지 않은 채다. 순간 밀려드는 매캐한 냄새와 비린내에 숨이 턱 막혔다.

“나 머리가.”

너무 아파서.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린다. 동혁은 말을 맺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다. 잇새로 그르렁대는 신음이 옅게 흘러나왔다. 그 틈을 타 마크가 재빨리 동혁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물리적 상처가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급한 건 그쪽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떡해야 하지. 어떡해야 하지. 마크는 순간 멍해지는 머리에 동혁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이불을 거세게 쥐어잡았다. 그저 당황한 것뿐이었는데, 동혁은 그 동작에서 다른 무언가를 읽었는지 간신히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애써 안심시키는 자의 눈이다.

“형.”

“…….”

“반군이었다면서요.”

마크는 입술을 짓씹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들을 줄은 몰랐던 이야기였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래 사실은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 하고 외치며 달려들어야 하는지, 그런 게 절대 아니니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는지, 아니면 밉보이지 말고 얌전히 치료나 해 주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러고 나서는 혼란이다. 

왜 죽이고 싶지 않았지?

동혁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굴었다. 아니, 정정하자면 마크의 태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동혁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그 와중에도 모니터의 숫자는 쉬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깜박거리는 숫자들의 희고 미약한 빛이 동혁의 얼굴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시시각각 표정이 일그러진다. 얼굴에 번진 고통의 빛이 농도를 더해 간다. 

“무리한 거 부탁 안 할게요. 그래도 명색이 반려인데.”

이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그거면 돼요. 내 이름 알잖아요. 내가 형한테 알려 줬잖아요. 동혁은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다른 쪽 손으로 잡아 누르며 웃었다. 웃다 말고 밀려오는 고통에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목울대를 울리며 다시금 신음한다. 아니, 필요 없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욕을 해도 좋고 소리를 질러도 좋아. 죽으라고 해도 괜찮아. 한 마디만, 딱 한 마디만 제발……. 마크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돌리자 열린 방문이 보인다. 너무 견고해서, 아무리 열리라고, 부서지라고, 가루가 되라고 욕을 해도 열리지 않던 방문. 반쯤 열린 방문 밖에서 고요가 밀려들어온다. 지금이라면 이 애를 때려눕히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운이 좋으면,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목이 몇 개 층을 지날 동안만 제 기능을 해 준다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마크는 다시 동혁을 내려다본다. 어린 야차의 이름을 곱씹는다. 동혁. 이동혁. 그렇지.

  

나한테만 알려 줬지, 너의 이름. 

  

그러나 그것을 지금 부르긴 싫다. 확신이 들고, 그와 동시에 잠이 온통 달아났다. 이제 정말로 무얼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마크는 동혁의 손을 잡았다. 두 눈이 푸르게 불 붙듯 빛났다. 동혁이 야트막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들리는 방 안에서, 마크가 다른 손으로 땀범벅이 된 제 반려의 이마를 짚는다. 가만히 속삭인다.

“사라져.”

마크의 입에서 부드럽게 떠나 손등을 타고 올라간 언령이 동혁의 이마에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동혁이 숨을 허억, 들이마셨다. 부서져라 왼손을 움켜쥐어 오는 압력을 느낀 마크가 괜찮다는 듯 동혁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동혁은 눈을 질끈 감고 가볍게 몸서리치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커다랗게 내쉬는 숨 사이에 옅게 물기가 섞였다. 내내 동혁을 괴롭게 하던 고통이 사라졌음을 직감했음에도 마크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을 타고 내려간 손이 무언가에 강하게 쓸린 듯한 왼뺨의 상처에 멈춘다. 얜 또 왜 이래. 나직이 타박하자마자 피딱지 엉겨붙어 벌어졌던 상처에 고요히 새살이 돋기 시작한다. 턱과 목, 어깨를 지나 팔뚝으로 내려온 손끝이 베이듯 갈라진 상처에 아무렇게나 붙여 고정해 둔 반창고를 떼어냈다. 피고름이 반창고에 엉겨붙은 탓에 아무리 살살 당겨도 상처가 벌어져 조금씩 선혈이 새어나왔다. 동혁이 어쩔 수 없는 아픔에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이건 흉 지기 전에 붙어야겠다. 말 끝나기 무섭게 상처를 따라 움직이는 마크의 손끝을 따라 살이 말끔하게 붙었다.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내려다보던 동혁이 천천히 눈을 들어 마크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많이 다쳐.”

“형.”

“너네는 안 죽는다며, 이 야차야.”

“마크 형.”

“근데 왜 이렇게 상처가 많아.”

멀쩡한 데가 없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푸른 이능력 에너지를 담고 동혁에게로 조심스럽게 스며든다. 이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또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야차. 마크는 수순처럼 이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야차들. 그러나 야차들의 본능적 두통은 핵에 내성이 강해질수록 그들을 더 심하게 괴롭힌다고 했다. 그들 중 제일 긴 시간 아파했다던 막내 야차. 동혁은 근 삼 주, 그러니까 제 반려가 억지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간 동안은 고통이 찾아와도 이 악물고 진통제 삼켜 가며 버텼을 거랬다. 이미 한 번 이능력의 치유를 경험한 몸은 마약이 금단 현상을 일으키듯이 송곳처럼 파고드는 아픔을 이동혁에게 떠안겼을 거라고. 

그걸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던 이동혁. 밤에 악몽을 꾸면서 내지르는 소리에나마 잠깐잠깐 치유받을 만큼 아파했으면서, 정신 차리자마자 곧바로 손 잡고 이마 짚으며 깨워 주던 이동혁. 그 애가 애원한다. 저를 뺀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사정한다. 

마크는 가슴이 뻐근하게 저며 오는 것을 느끼며 동혁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진통제 밀어넣듯 마크의 에너지를 받아 삼키던 이동혁이 곧장 마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칠 줄 모르고 꾸욱 눌러 들어오는 머리통이 가슴을 눌렀다. 마크는 말리지 않았다. 미는 대로 밀려 주며, 틈 없이 등을 끌어안는다. 목덜미에서 들고 나던 숨이 점차 규칙적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야차들. 세계를 전부 녹여버릴 야차들. 우리를 집어삼키고, 아아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야차들. 전쟁을 끝낼 죽음의 사신들. 서른두 명의 구원자들. 파괴자들. 

  

마크는 동혁에게, 너는 진실로 야차가 맞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아마 네 얼굴이 이렇게 선명히

    

야차 이동혁은 웃는 얼굴로 유명했다. 반군기지에 폭탄을 터뜨리고, 손가락을 까닥해 죽어가는 이백오십여 사람의 목을 한 번에 비틀고, 상대의 이능력에 당해 팔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늘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놀이터에 놀러 나온 어린애 같다고들 했다. 예닐곱 살 때부터 개미 죽이듯 인간들을 죽여 가며 아수라에서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반군 소속 이능력자들은 필수적으로 야차에 대해 배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야차의 수는 고작 서른둘이다. 당연하게도 마크는 아주 어렸을 무렵, 그러니까 동혁의 반려가 되기 전부터 동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서른한 명의 광인들, 혹은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서른하나의 괴물들.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막 알려질 무렵 태어난 막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야차들의 손에 키워졌으니 스무 살이 넘으면 개중 가장 강해질 것이라고 평가받던 한반도 남부 출신의 어린 괴물. 그때 여덟 살이었던 마크는 동혁의 탄생을 기억했다. 살아남은 세상은 그것을 축복이라 칭송했으나 마크는 저주라 배웠다. 그렇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름 앞에서 야차를 떼면?

  

이동혁은 똑부러진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었다. 이것은 인간 이동혁을 반려로 맞아들인 마크의 감상이다. 전투를 쉬는 기간의 동혁은 마크에게서 도무지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캡슐 알약으로 식사하는 야차들과 달리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마크에게 직접 뭘 해 주겠다고 설쳤다. 식사를 할 일도 없는 몸으로 요리는 또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동혁은 식당에 내려가 요리사를 협박해 쫓아낸 뒤 밥과 국물이 있는 동양식으로 꽤 봐줄 만한 한 상을 뚝딱 만들어 마크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갖다 바쳤다. 그러면서 매번 거르지도 않고 수저를 빼먹어 식당에 한 번 더 내려갔다 올라오곤 했다. 

사격장에 내려가면 기본으로 서너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총을 쏘다가 매번 시간을 넘기고 잠긴 문 안에 갇힌다. 생체통신기로 SOS를 쳐 순찰을 돌던 다른 야차들에게 구출된 것만 해도 벌써 대여섯 번이라고 했다. 밍숭맹숭한 인간 같은 야차. 인간의 몸으로 야차가 된 야차. 마크는 가끔 제 반려의 멍한 표정을 관찰할 때마다 가볍게 헛웃음을 짓곤 했다. 이런 게 야차라면 인간에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지.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엔 얼마나 걸려?

이번에도 열흘 좀 더 걸려요. …… 형.

왜.

좀만 더 길게 말해 주면 안 돼요?

처음으로 마크에게 치료받은 날 이후로 동혁은 묘하게 풀어진 듯 굴었다. 늘 삐뚜름하게 미소를 걸친 얼굴만 보여주더니, 이젠 가끔이긴 하지만 눈꼬리를 온통 휜 채로 웃기도 했다. 손을 잡거나 허리를 감싸며 은근히 살을 붙여 오는 게 부담스러워 슬쩍슬쩍 밀어낼 때마다 어린애처럼 시무룩한 기색을 띤다. 

전투는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혁은 삼 일을 쉬다가 이 주간 들어오지 않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삼 일간 싫든 좋든 무료함이 뭔지도 모르게 동혁의 응석을 받아주며 지내던 마크가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채로 이 주 동안 버텨야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동혁을 치료해준 날 이후로 마크는 문에다 대고 열리라고 애원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식사 시간을 줄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하고 건물의 허용된 구역 안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동혁을 포함한 대부분의 야차들이 전쟁터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아도 됐다. 마크가 누구 반려인지를 알고 있는 직원들은 더더욱 막지 않았다. 며칠간은 그냥 식당 주변만 돌아다녔다. 인공 정원의 꽃은 시들지도 더 피어나지도 않았고, 주방에는 야차들의 이름이 하나씩 붙은 거대한 냉장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혁의 것을 윗칸부터 열어 보았으나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텅 비어 있다. 맥이 탁 풀려 아래쪽 냉장 칸은 열어볼 생각도 않고 돌아선 마크가 주방을 터덜터덜 빠져나갔다.

그 짓을 며칠 하고 나서는 지겨움에 질려 결국 동혁의 주머니를 뒤졌다. 동혁이 전투에 입고 나가는 옷 말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 입는 바지 뒷주머니에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못해도 열몇 개는 되는 강화철 열쇠들. 

마크는 침대에 앉아 거기 붙은 태그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읽었다. 탕비실. 주방. 늘 열려 있는 곳들이잖아. 테스트실 1. 테스트실 2. 여기는 출입통제 구역이라 어차피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그냥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구나. 사격장 열쇠도 복사해서 갖고 다니지, 맨날 갇히지 말고. 바보. 흥미를 잃은 눈으로 몇 개의 열쇠들을 짤그랑 짤그랑 넘기던 마크의 눈동자가 문득 이채를 띠었다. 태그가 붙지 않은 열쇠 하나가 손에 잡혔다.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손때 탄 듯 반질반질했다. 

타이밍 좋게도 점심시간을 알리며 문이 열렸다. 잠시 손끝으로 열쇠의 머리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마크가 방바닥에 두 발을 딛고 벌떡 일어섰다.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후.”

짧게 심호흡한 마크가 자물통을 단단히 잡고 열쇠구멍에 열쇠를 맞췄다. 살살 밀어넣자 매끄럽게 꼭 맞물려 들어간다. 됐다. 손목을 돌려 자물쇠를 간단하게 풀어낸 마크가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보고 철문 손잡이를 당겼다. 문의 두께만 한 뼘은 됐다. 생각보다 더 무거워 중간부터는 바위를 당기는 것마냥 세게 끌어당겨야 했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자 짧은 복도가 나오고, 비슷하게 생긴 철문이 또 등장했다. 저번에 이 앞에서 동혁을 기다릴 때 들었던 소리를 생각하면 아마 비슷한 문이 두 개는 더 있을 것이다. 다행히 여기엔 자물쇠가 없다. 어깨를 두어 번 돌린 마크가 있는 힘껏 문을 당겨 열었다. 두 개의 문을 지난 뒤에 마주한 마지막 문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러기 싫었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마크가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눈동자에 푸른빛이 반짝 스쳤다. 

“열려.”

입에서 튀어나온 푸른 이능력 에너지가 문에 쾅 부딪혔다. 일어나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했더니 위력이 과했다. 점심 먹은 게 다시 올라오는 느낌에 인상을 팍 찌푸린 마크가 흘끗 눈치를 살폈다. 뒤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꽤나 깊숙이까지 들어온 덕에 타격음이 새어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간 미동 없던 문이 소리 없이 천천히 뒤로 밀려나왔다. 이럴 일이 있을까 봐 구속구 아래로 붕대를 감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사실 별 이유 없었다. 돌아다닐 데가 없기도 했고, 그날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한 게 대체 뭐 때문이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왜 그런 얼굴을 했는지를 이젠 좀 알아야겠어서. 아직까지도 양쪽 팔뚝에 정전기가 오른 듯 파지직거린다. 짜증스레 손목을 두어 번 털어낸 마크가 문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뒤로 당겼다. 

  

거기에는 점점 죽어가는 생명이 있다. 

  

첫 감상은 그러했다. 손가락 한 마디가량 남고 전부 타들어간 양초 같았다. 넓고 어두운 방 안 한가운데 침대가 놓여 있다. 아니, 침대라기에는 거대한 구속구에 가깝다. 그 위에 누운 채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 고정된 몸은 사람이라기엔 밀랍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크가 온몸이 굳는 느낌에 야트막하게 호흡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지겹도록 맡았던 의무실의 냄새다. 약품과 핏내가 섞인 공기는 공포와 안정을 동시에 몰고 왔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마크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폈다 하며 눈앞의 광경을 다시 면밀히 살폈다. 여자다. 어깨만큼 오는 단발머리에 나이는 제 또래 같았다. 잠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뜬 채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는 얼굴은 기괴해 보일 만큼 희었다. 나무토막 같은 팔뚝에 링거 줄이 꽂혀 있고, 머리맡의 폴대에 걸린 둥근 약병은 비어 있다. 

마크가 눈살을 찌푸려 약병의 이름을 읽었다. 마약성 진통제. 내부가 마르지 않은 것을 보니 다행히 약이 다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시체 같은 몸을 내려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크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았다. 기본온도가 이십 도로 설정된 냉장실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진 새 약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망설임없이 하나를 빼 들고 문을 닫는다. 침대맡의 트레이에는 손가락 크기의 불투명한 멸균봉투들과 의료용 반창고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

가만히 트레이를 주시하던 마크가 반창고를 들어 쭉 잡아당겼다. 오차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끊어 제 손등에 붙이는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봉투를 하나 집어들어 일회용 주사바늘을 꺼내고 익숙한 손길로 주사관과 연결한 마크가 침상 위로 늘어진 여자의 팔목을 잡아 올려 손목을 붕대마냥 감싼 반창고를 떼어냈다. 입술에 가볍게 경련이 일 만큼 긴장했는데도 다행히 손은 떨리지 않았다. 

대체 누구 솜씨인지 몰라도 팔목 안쪽이 주사 자국으로 죄다 엉망이었다. 조심스럽게 바늘을 빼고 손등에다 위치를 잡아 새 바늘을 다시 천천히 밀어넣으며 마크가 흘끗 고개를 들어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을 감각했는지, 내내 천장만 바라보고 인형처럼 누워 있던 여자가 눈동자만 또르르 굴려 마크를 내려다본다. 그 시선을 감각하자마자 온몸에 돋는 소름을 겨우 참은 마크가 이를 악물었다.

테이핑을 끝내고 병을 교체하자 똑 똑 하고 떨어지는 링거액 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마크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잠들어.”

새어나온 언령이 빛줄기가 되어 침대 위에 고인다. 잠시간 찰랑이던 푸른빛이 아주 느릿하게 마른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자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감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보다도 더 느리게. 마크는 여자의 속눈썹이 눈 아래를 완전히 덮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공격이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이 정도는 먹힌다. 공포에 멎었던 머리가 이제야 좀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정제하지 않은 언령이 그대로 흡수된다면 그냥 인간은 아니다. 거기다 압송된 이능력자들을 모아 구금하는 별관이 아닌 본관에 몇 개의 문을 두고 격리된 여자라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에 마크가 휙 뒤돌았다. 

“!”

헉, 하고 숨을 들이쉰 마크가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순간 복기해낸다 뭐야 이 짐승은? 어떤 선명한 목소리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를.

손발이 묶이고 재갈 물려 독방에서 지낼 때에 수없이 했던 생각이 있다. 나는 짐승이구나, 길들여질 사냥개로구나, 혹은 저들의 손에 도축될 운명이겠구나. 그러나 안일했다. 혹은 오만했다. 지금 어둠에 적응한 시야에 들어오는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짐승우리다. 창살로 분리된 방 한켠에 그것들이 뭉쳐 있다. 사람이었으나 사람처럼 존재하지는 않았다.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대여섯 가량이 한구석에 모여 앉아 경계 서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다닥다닥 놓인 작은 매트리스들은 깨끗했으나 베개며 이불, 하다못해 덮개조차 없었다. 

마크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죽어가는 세계에도 끝이 있다면 아마 이곳일 것이라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목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호흡한다. 한 번에 힘이 터져 나가지 않게 조절하느라 입가에 서서히 연기가 고였다. 눈동자에 밝은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얼굴에서 경계가 단번에 사라졌다. 개중 어린 아이들은 입을 헤벌린 채 홀린 듯이 철창에 달라붙는다. 마크가 아주 신중히 입을 열었다. 

“붙어.”

“……!”

“너도. 다리.”

쭉 뻗어나간 푸른빛이 가장 앞에 있던 아이를 부드럽게 감쌌다. 순간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굳은 아이가 가볍게 딸꾹질을 했다. 잠시 이리저리 방황하던 언령은 곧 제 주인의 말에 순응하고는 아이의 머리를 붕대처럼 감쌌다. 길게 찢어진 채 피딱지가 엉겨 벌어져 있는 상처에 이능력이 가 닿자 아이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마크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뒤통수에 잠시 머문 빛이 사그라들자 틈없이 단단히 붙은 살결이 드러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뒤통수를 더듬는 아이를 두어 번 휘돌며 상태를 살핀 언령이 이윽고 천천히 다른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이들은 더 이상 겁내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 빛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그랬다. 방 한가운데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는 마크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들은 오래 봐 온 친구를 대하듯 제게로 뻗어오는 푸른 빛줄기에 손을 뻗는다. 다리와 팔, 손목에 선명히 남은 찢긴 상처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감싸고 봉합해 다섯의 상처를 치료한 언령이 잠시 푸르게 빛나다가 전원이 꺼지듯 툭 사그라들었다. 

“욱.”

동시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은 마크가 침대 다리를 붙들고 힘겹게 구역질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핏덩이가 울컥울컥 쏟아져내렸다. 붕대를 검게 태우고 안쪽으로 파고든 구속구가 손목을 터뜨릴 듯이 죄었다.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조정해 본 건 처음이다. 동혁에게는 이럴 필요가 없었다. 이동혁은 마크가 내뱉는 그 어떤 말에도 다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삐끗했다가는 아이들을 다치게 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크가 이를 악물었다가 결국 후르르 상체를 무너뜨렸다. 세게 쓸리며 간신히 바닥을 짚은 손이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이마가 땅바닥에 닿았다. 불로 지져 타들어가는 듯한 목의 통증을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버거웠다. 안 되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들숨과 날숨이 점차 옅어져 갔다. 아득하게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것처럼 의식이 멀어진다. 그때.

“…….”

숨통이 트인다. 머리가 맑아진다. 목구멍을 치고 오르며 역류하는 피는 아직 멈추지 않았으나 아픔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희뜩하게 변해 가던 시야가 점차 제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크가 아릿하게 통증이 남은 목을 손등으로 강하게 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저 멀리서 짐승의 눈처럼 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동그란 안광이 보였다. 깊이 심호흡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데 저만치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우리 중에 얘만 정신계예요.”

“…….”

“낫게는 못 하지만 진통은 할 수 있어요.”

말한 아이는 열두어 살이 조금 넘어 보였다. 능력을 쓰는 꼬마는 아까 뒤통수가 찢어져 피딱지가 굳어 있던 녀석이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으려나. 머리를 거칠게 두어 번 내저은 마크가 두 손가락으로 목울대 안쪽을 강하게 눌러 지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웠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들을 게 많았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선 이능력자들의 눈에서 같은 농도의 푸른빛이 빛났다.

  


   

침대의 여자는 야차라고 했다. 짐작하고 있었으나 마크는 짧게 몸을 떨었다. 서른둘의 야차, 그중 언젠가부터 종적을 감췄던 한 명. 야차들의 부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른한 명이서 온 세상을 마저 휩쓸었으나, 그럴수록 죽었다는 소문만 더더욱 무성해지던 단 하나의 여자. 기억하기론 저보다 두 살 어렸다. 생각나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의 상처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았다. 애초에 반려 맺지 않은 야차와 한 공간에 있는 이능력자의 몸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 야차가 스스로 핵을 통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더.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다. 마크는 소매를 늘려 아이들의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았다. 창살 사이의 틈은 어른의 손 하나 정도는 쉬이 들어갈 정도로 넓었으나 여린 피부에 켜켜이 내려앉은 묵은 때는 잘 벗겨지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피를 토했다.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를 마저 치료하느라 조금 욕심낸 탓이었다. 이번에는 방에서 미리 챙겨온 진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능력을 빌리지 않아도 됐다. 정신계 아이는 열 살로 개중 막내라고 했다. 체구가 너무 작아 더 어린 줄 알았다고 했더니 어른처럼 웃었다. 앞니가 빠져 있었다. 이갈이가 거의 끝났는데, 첫 유치가 흔들릴 때쯤 이 방으로 왔다고 했다. 별 감정 없는 눈으로 뒤통수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에게 마크는 굳이 그 기간을 묻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챙겨온 물병 두어 개를 꺼내 손수건에 적셔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이들은 어색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고분고분히 마크의 손길에 제 얼굴을 내맡겼다. 야차는 똑같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엔 미동이 없었다. 여전히 의식은 있었으나 눈동자가 공허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 이따금 어디가 불편한 듯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마크는 여자를 꼼꼼히 살폈으나 지나칠 정도로 말랐다는 사실과 제대로 된 의식이 없다는 사실 빼고는 문제를 찾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재웠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고치려 했다가 오히려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치료는 그게 최선이었다. 여자를 재우는 데는 그렇게까지 집중하지 않아도 됐다. 동혁만큼은 아니었으나 비슷한 결로 덜 힘들었다. 

다다음 날에는 약병이 거의 비었다. 마크는 점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이 완전히 내렸을 때에 맞추어 처음 왔던 날처럼 진통제 병을 갈아 주었다. 여자는 자고 있다가, 마크가 주삿바늘을 갈아 줄 때쯤에 눈을 떠 내려다봤다. 지난 이틀간 봤던 것보다 눈빛이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마크는 잠시간 망설였다가, 작게 속삭여 물었다. 아파? 여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마크를 응시하다가 대답하듯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세밀하게 유리 공예를 해서 만든 유리알 같은 눈이다. 어디가 아파. 다시금 속삭여 묻자 마른 휴지처럼 버석한 입술이 두어 번 달싹였다. 목소리가 되기 전에 입 안에서 스러진 탓에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어도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형은 반려지.”

마크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상처가 벌어져 줄줄 피가 나는 손목을 누르며 지혈점을 잡기 위해 팔뚝 이곳저곳을 더듬던 도중이었다. 짝지어진 야차가 있지. 형의 능력이 공격이 아니고 치료가 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렇지. 줄줄 연이어 묻는 아이의 해쓱한 얼굴이 어쩐지 차갑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마크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고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잡혀온 지 오 년 됐어.”

“…….”

“세 번 갔어. 본부에.”

첫 번째 갔을 때는 아홉 살이었고, 두 번째는 열두 살이었어. 나랑 손을 잡고도 근육이 굳어 마비되지 않은 야차는 없었어. 세 번째는 백이십 일 전이었어. 그날부터 날짜를 셌거든. 그때도 어김없이 다섯 명이 굳었어. 그 뒤론 계속 여기야. 야차들은 드문드문 와. 저 사람은 진통제가 떨어지면 많이 아파해. 발작해. 캡틴은 우리더러 저 사람이 발작하면 제압하래. 근데 그게 잘 통하지가 않아.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어야 겨우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어. 이능력을 많이 쓰면 손목이 아파. 심해지면 살을 찢고 터져 나와. 이렇게. 아이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않았으나 어깨가 잘게 떨린다. 부러질 듯이 얇은 손가락이 마크의 손가락을 옭아매듯 감아 쥐었다. 

“난 폐기당했어.”

마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다음 날에는 동혁이 돌아왔다. 마크는 이 주만에 작게나마 웃었고,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대답하면서도 손목이 파직거리지 않았으며, 작은 통증에도 쉽게 걱정받았다. 이틀을 같은 침대에서 잤더니 목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 애랑 있을 때엔 대화를 평소보다 훨씬 많이 했고, 당연히도 언령을 더 자주 사용해야 했으나 며칠만 딱 붙어 지내고 나면 고질병 같던 아픔은 봄눈처럼 녹아 사라지곤 했다. 

마크는 밤의 초입에 가만히 손을 잡아 저를 깨워 준 동혁 덕분에 이틀간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잠들기 위해 돌아누워 벽지를 뚫어져라 노려볼 때엔 내내 폐기당한 다섯 아이들과 한 명의 야차를 떠올렸다. 약병은 괜찮을까. 또 상처가 벌어졌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 치미는 분노들. 그러나 동혁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틀어쥐고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으나 풀린 표정으로 어린애처럼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목구멍에 말이 턱 걸려 나오지 않았다.

동혁은 이틀간 잘 참더니, 결국 마지막 날 저녁에 마크를 방에 데려다 주고 나서 또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사격장에 간다고 했다. 오래 쉬었더니 손이 막 근질거려요. 딱 몇 발만 쏘고 금방 올게요 오늘은. 그 말을 남기고 동혁이 방을 나서자마자 마크는 저도 모르게 곧장 방 한켠의 옷걸이를 뒤졌으나, 열쇠 꾸러미가 동혁이 입고 나간 바지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대위에 길게 널브러졌다. 속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에 이불을 그러쥐고 돌아누우며 길게 숨을 내쉰 마크가 눈을 감았다. 동혁과 있을 때에는 느끼지 않아도 됐던 불안함이 자꾸 가슴 한구석을 찔러 들어왔다. 

  

“뭐해.”

“깼어요?”

나 또 갇혀서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방안으로 들어오던 동혁이 상체만 일으킨 채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마크를 보며 머쓱하게 헤헤 웃었다. 바보야, 열쇠를 복사하면 되잖아. 핀잔을 준 마크가 이마를 짚으며 뒤통수를 도로 베개에 툭 기댔다. 응 안 그래도 다음 주쯤 맡기려구. 동혁이 대답하며 냅다 겉옷을 벗고 마크가 누운 침대로 뛰어들었다. 먼지 나, 뛰지 마. 잔뜩 잠긴 마크의 목소리가 동혁에게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동혁이 땡볕 아래서 운동하다 찬물을 한 번에 들이켠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마크의 어깨에 소심하게 얼굴을 부볐다.

“잘 시간 지났어.”

“응, 미안해요. 일찍일찍 다닐게.”

“내일 또 나가야 해?”

“네. 내일 마지막으로 당분간 없을 듯.”

맨날 나만 부려먹어서, 이제 다른 형들 보낼 거래요. 캡틴도 쉬고.

마크는 피곤한 눈두덩을 비비며 꿈질꿈질 허리를 감싸고 들어오는 동혁의 손을 떼어냈다. 동혁은 묵묵히 재도전한다. 이쯤 되면 밀어내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결국 저보다 조금 작은 동혁의 품에 갇히다시피 안긴 마크가 자자 좀……. 하고 신음했다. 동혁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리 한 쪽을 몸에 감아 왔다. 아 진짜. 마크가 결국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동혁의 몸을 꾹꾹 눌러 펴 일자로 만들고 덮는이불을 끌어와 그대로 둘둘 감는다. 순식간에 돌돌 말린 애벌레 꼴이 된 동혁이 당황스런 눈을 하고 마크를 올려다봤다.

마크는 이불 속에 파묻혀 얼굴만 내민 동혁을 잠시 내려다보다 묘한 위화감에 미간을 좁혔다. 야차들은 반려가 생기면 짐승 같은 소유욕을 가진다는데, 동혁은 그런 면에선 얌전한 편이었다. 밤마다 이성 놓고 달려드는 일도, 복도며 식당에서 목덜미를 문 채로 어린애처럼 조르는 일도 없었다. 그간 꾹꾹 눌러참아 왔으니 이제부터는 자주 보채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로 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자.”

반려를 기다렸다가 같이 잠들게 된 것은 이쪽이다. 몸상태가 걱정되어 굳이굳이 한 마디라도 더 지껄여 주는 것도. 마크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동혁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동혁은 잠잠하다가 고개를 기울여 마크의 어깨에 제 옆통수를 조심히 붙였다. 이것까지 밀어내고 싶진 않아, 마크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왼쪽 어깨가 천천히 따뜻해져 온다. 

  

일어나 보니 동혁이 없었다. 마크는 가볍게 마른세수를 하고 쭉 기지개를 폈다. 역시 목은 개운하다. 심한 목감기를 앓았다가 말끔히 나은 기분이었다. 나 모르는 사이에 약이라도 먹이나. 입맛을 한 번 다신 마크가 쩍쩍 달라붙는 입안에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위의 물병을 집어들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지 두어 시간 된 듯, 송글송글 물방울이 고인 물병 속의 물은 미지근하다. 찬물을 못 마시는 마크를 위한 동혁의 배려란 걸 알았다.

사레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신중하게 물을 세 모금 넘긴 마크가 물병 뚜껑을 닫으며 벽면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십사억 구천팔백육십삼만 사천백오십, 사십삼, 사십, 삼십칠. 억 단위의 숫자가 드디어 줄었다. 인구가 십오억이던 시대도 이제는 지났다. 점점 생명이 소멸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같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에는 습관적으로 동혁의 바지 뒷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식당으로 내려간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곧장 철문으로 향했다. 안 만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손 안에 가득 잡히는 자물쇠의 묵직함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신중히 자물통의 홈 안에 열쇠를 밀어넣은 마크가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철컥 하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에서 자물쇠를 돌려 뺀 마크가 손목을 두어 번 털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왜 오늘따라 누가 뒷덜미를 콱 잡아챌 것 같지. 불안하게.

“마크!”

어깨가 탁 튄다. 놀라 열쇠를 떨어뜨린 마크가 재빨리 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낚아챘다. 실로 빠른 속도였다. 저 멀리서 복도 안쪽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마크를 부른 이누가 주변을 두어 번 휘휘 둘러보더니 크게 소리쳐 물었다. 

“너 거기 출입허가 받았어?”

마크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급한지 긴 다리로 금방 휘적휘적 뛰어온 이누는 마크의 손에 들린 자물통과 열쇠를 번갈아 보더니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마크의 낯을 살폈다. 마크는 귀가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일부러 다시금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말을 쉬이 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입을 열었으면 십중팔구 들켰을 것이다. 이누는 눈썹을 찡그렸다 펴며 잠시 고민하더니, 하긴 네가 막내 반려니까 괜찮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거긴 가까이도 못 가게 하거든, 캡틴이. 뭔지도 말 안 해 줘.”

“…….”

“다른 야차들도 잘 안 가고 막내만 들락거리니까.”

뭐, 허가 받았다니까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몰래 들어가면 안 돼! 이누는 마크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직접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등을 밀 때까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이누의 뒤통수를 확인한 마크가 가만 고개 돌려 철문을 바라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 연다.

.

속삭이는 소리를 따라 푸른빛이 뻗어나온다. 첫 번째 문이 밀려 나온다. 마크는 사람 하나가 통과할 만큼 열린 문 사이로 몸을 집어 넣으며 다시금 속삭인다. 열려. 열려. 뛰듯이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두 개의 문을 통과했다. 성대가 뻐근하게 조여 왔으나 신경쓰지 않는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본능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육감이라고 해도 이상할 법한 묘한 감각이다. 스르르 밀려나온 마지막 철문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마크가 인상을 썼다. 짐승 소리를 하도 들어선지 정말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갈아끼워진 지 몇 시간 안 된 듯 삼 분의 이 이상이 채워진 약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시체 같은 몸은 그 다음. 마크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창백하다. 여태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얼굴. 표정은 없다. 개중 가장 어린아이 둘은 울었는지 작은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등줄기로 찬 소름이 쭉 타고 내리는 것을 느끼며 마크가 아이들을 멍하니 주시했다. 그러다, 천천히 팔을 뻗어올리는 큰아이의 팔뚝을 보자마자 곧장 넘어질 듯이 뛰어 창살로 다가섰다. 기껏 지혈해 치료해 주었던 손목의 상처가 터진 듯 아이의 손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형.”

“…….”

“저거 좀 열어 줘.”

붉게 물든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창살 문을 단단히 잠가 둔 자물쇠와 그걸 친친 감고 늘어진 쇠사슬이 있다. 어둠 속에서 눈을 찌푸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물통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핏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마크는 덜덜 떨려오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눌러 내리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차갑게 질린 다섯 얼굴들에는 여전히 감정도 표정도 없다. 

“세상이 끝난대. 어제 왔던 야차가 그랬어.”

저 여자한테, 듣는지 못 듣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속삭였어 곧 마지막 전투가 있을 거래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는대 야차들은 모든 것을 죽이고 그들마저 사라지고 말 거래 미친 세상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가 없대 충돌이 커지고, 커지고, 너무 커져서 한계를 넘었대 폭발한 핵은 더 이상 막아지지 않는대 그 야차가 처음으로 불쌍해 보였어 몇 주마다 꼬박꼬박 와서 저 여자 약병을 갈아 주던 사람이었는데. 

큰아이는 말을 멈추고 한 번 숨을 골랐다. 

“야차들도 모두 죽을 거래.”

마크가 내내 참고 있던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그러나,

“그래서 살릴 수가 없대.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야 생겼는데도.” 

이 대목에서는 도로 숨을 참아야 했다. 고저없는 목소리가 사형선고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남은 십오억은 곧 십억이 되고 십억은 오억이 될 거래 야차가 만들어낸 재앙이래 우리는 여기에서 나갈 수 없어 아무도 우리를 내보내 주지 않아 우린 살고 싶어 살아남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나가서 죽고 싶어 근데 저걸 못 열어.

마크는 듣다 말고 문 앞에 쭈그려 앉았다. 검붉게 물든 자물쇠를 쥐었다. 아직까지도 피 때문에 표면이 끈적했다. 쇠사슬을 걷어내고, 신중하게 매듭을 풀어내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드러난 자물통은 철문의 맨 앞에 있는 것과 같은 거였다. 잠시 고민하던 마크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망설임없이 홈에 밀어넣었다. 열쇠는 찰칵 맞물렸으나 옆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왜 안 돼. 왜. 목덜미가 붉어질 때까지 힘을 써 봐도 미동 없다. 지나친 긴장이 방 안에 고인다. 다닥다닥 문앞에 달라붙어 그걸 지켜보던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부서져라 창살을 쥐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몇 번이고 열쇠를 잡아빼 다시 밀어넣고 돌리려 애를 쓰던 마크의 귓가에, 문득 스스로와 아이들의 숨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

희미한 타격음이다. 텅, 텅, 울리는 소리. 아이들도 같은 것을 들었는지 동시에 몸을 곧추세우고 경계한다. 순식간에 방안의 공기가 숨통을 옥죈다.

이능력자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가지고 있는 단 한 가지 능력 이외의 모든 것은 그저 일반 사람과 똑같았다. 반려를 맺는다고 해서 몸의 어떤 부분이 야차와 긴밀히 연결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야차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몸을 타고 태어났을 따름이다. 당연히 서로의 체취도 기운도 감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온몸을 덮치는 어떤 위화감. 약해빠진 인간조차도 감각할 수 있을 법한 존재의 기척. 마크는 짧은 순간 숨거나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수십 가지 떠올렸으나 곧 그만두었다. 창살 자물쇠를 열고 이 아이들을 꺼내지 못한 이상 의미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느리지만 망설임없이 문이 열린다. 길게 새어들어오던 노란 빛이 점점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영역을 넓혀 갔다. 키가 큰 누군가의 그림자가 열린 문에 기대 서는 것이 보였다. 

“마크 씨.”

“…….”

“여기서 뭐 합니까?”

순간 머리 위에서 푸른 전구가 켜지듯 다섯 쌍의 안광이 빛났다. 아이들은 증오 어린 눈빛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던 아이들의 손목을 쥐어 간신히 말린 큰아이조차 원독에 찬 눈빛으로 그르렁댔다. 등을 지고 앉아 있었으나, 마크 역시 못 알아들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마크는 최대한 침착하게 자물쇠를 손에서 놓고 일어섰다. 깊게 한 번 심호흡한 뒤 차분한 발걸음으로 뒷걸음질쳐 창살에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졌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악.”

몸이 굳었다. 관절을 눌러 내리는 압력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마크의 입에서 막지 못한 언령이 터져 나온다. 쪼개져 여러 갈래로 쏘아지는 이능력의 푸른빛이 여기저기로 비산한다. 

공기가 부푼다. 밀어내고 터뜨린다. 폴대에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던 약병이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났다. 창살에 달라붙은 채 야차들을 향해 허연 이를 드러내며 하악질하던 다섯 아이들이 날카롭게 비명 지르며 벽으로 밀려나가 부딪혔다. 어둑했던 방 안이 푸르게 밝아진다. 입구 쪽에 서 있던 몇 명의 야차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마크는 저만치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캡틴의 눈을 본다. 흐려졌다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는 시야 속의 두 줄기 불꽃 같은 눈빛. 상냥하지만 살기 완연한 사냥꾼의 눈이다.

그 뒤로 보이는 얼굴. 처음 보는 표정. 마크는 야차의 마른 몸이 누운 침대 앞에서 제압된 채로 자기 반려를 가만히 마주 바라본다. 어쩐지 파도치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입을 열어 호명한다. 

“동혁아.”

짧은 부름에 동혁의 턱에 심줄이 섰다. 반나절 만에 대체 어떤 사지엘 갔다 온 건지 꼴이 엉망이었다. 마크가 짧게 웃었다. 

야차들도 모두 죽을 거래 그래서 살릴 수가 없대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야 생겼는데도

  

“여기가 사격장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무너진다. 이십칠 년간 꾸준히 쌓여 온 몸속의 핵 잔여물들이 토악질하듯 마크의 뼈와 살과 근육을 있는 힘껏 눌러내렸다. 누가 팔을 꺾어 등을 밟아 내린 것처럼 이마를 바닥에 처박고 쓰러진 마크의 목에서 결국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에서만 느껴지던 통증이 들불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꿈은 화염이 타오르는 장면 속에서 시작된다.

  

나는 살고 싶었어. 살고 싶었나 봐. 그래서 기어이 기어이 조심하고 조심해 가며 살아남았나 봐. 여태 내가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타죽을까 봐 전등도 못 켜는 박쥐 같은 목숨이었나보지. 

어린 시절 내 방에는 백 년도 더 된 할아버지의 소설책들이 있었거든. 그 속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주 많았었지. 사람은 죽기 전에 꼭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대. 사랑했던 사람이든, 미워했던 사람이든 한 명쯤은 사진처럼 선명히. 나는 소중한 사람도 미운 사람도 없이 스물일곱이 되었는데, 스물일곱이 되었더니 세상이 망하고 있었어. 그래서 죽기 직전이 되면 누구의 얼굴을 떠올려야 하나 생각했어. 그런데 있잖아 내가 지금 죽는다면, 이대로 눈 감고 영원히 뜨지 못하게 된다면.

그만 하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왜! 내가 조절한다고 했잖아 형 정신 차려요 왜 눈을 감아요 피가 왜 이렇게 나는데 대체 목이 왜 이 모양인데 씨발 진짜 ……

  

동혁아, 나는 아마, 네 얼굴이.

이렇게 선명히.

개가 주인을 두고 어딜 가

  

 마크는 언젠가처럼 동혁의 침대에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로 본부 안에 사격 연습장 따윈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새벽부터 시작됐던 전투가 예상보다 빨리 끝났고, 철문 쪽 복도에서 나오던 와중에 복귀하던 캡틴에게 딱 걸린 이누가 결국 마크를 본 걸 사실대로 털어놨단 것도. 

마크는 반나절 정도 기절해 있다가 온몸이 구속된 채로 깨어났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고 목에서 자꾸 핏물이 넘어왔다. 방호복 입은 직원이 이틀간 들락거리며 마크를 간호했다. 동혁은 그날 이후 마크에게 아무 말도 시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이틀간 방에 들어오지 않더니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나타나서 평소처럼 혼자 떠들었다. 

형 나 이제 당분간 안 나가요 캡틴이 잔소리 엄청 했어 반려 관리 똑바로 하래. 근데 내가 대들어서 나랑 싸웠어요 처음으로 혼난 거라 좀 아팠는데 괜찮아 약은 바르고 왔어. 동혁은 밴드를 붙인 광대뼈의 상처를 가리키며 히히 웃었으나, 마크는 곁눈질만으로 동혁이 왼쪽 팔꿈치와 어깨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좀이 아닌 것 같은데. 

불편하진 않죠 못 풀어 주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제어가 힘들단 걸 내가 미리 설명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런데 형도 나한테……. 아니에요. 목은 좀 괜찮아요? 이틀 동안은 피 좀 났다면서요. 진짜 못산다. 동혁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며 전혀 장난스럽지 않은 눈으로 마크를 살폈다. 동혁이 돌아온 뒤로는 입을 막았던 재갈을 빼주었으나, 마크는 그 눈길 아래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첫째로는 동혁이 절대 안정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질 줄은 몰랐는데. 제가 잠든 줄 알고 앞머리를 쓸어넘겨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동혁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심장 어드메가 쿡 찔리듯 아픈 것도 같았다. 

  

이제는 별로 나갈 일이 없다더니, 동혁을 제외한 야차들은 전부 밖으로 나돌았다. 상황이 나쁘게, 나쁘게, 점점 더 나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본부에 야차라곤 동혁 혼자 남아 있는 나날이 점점 지속되었다. 반려들은 모두 제 반려를 따라 떠났다. 이누조차 캡틴을 따라 현장으로 나간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 모든 소식을 전해준 동혁은 속 편하게 마크에게 곡물죽을 떠먹였다. 뜨거울까 후후 불어 식혀 가며 한 숟갈씩 건넨다. 마크는 별 감정 담기지 않은 동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실감한다. 지구에는 곧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겠구나. 

손발은 머지않아 풀렸다. 다만 발목에는 묵직한 구속구가 하나 달렸다. 동혁은 그것을 두고 예의상, 이라고 표현하며 웃었다. 며칠 안 되어 침대 다리와 연결되어 있던 쇠사슬마저 풀렸다. 동혁은 이거 왜 이러냐, 관리 안 했더니 불량을 주냐, 틱틱대며 그걸 버렸다. 마크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동혁이 그랬단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동혁이 두 손 두 발이 다 자유로워진 마크에게도 굳이굳이 한 숟갈 한 숟갈 음식을 떠먹이려 들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생소한 기분에 발가락이 곱아들었으나 마크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동혁이 그 편을 더 좋아할 걸 알았다.

“형. 내가 선물 하나 줄까요.”

방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침대에 기대 앉은 마크의 눈앞에 동혁은 뭔가 묵직한 걸 든 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포장지 열듯 조심스럽게 한 손을 거둔다. 마크가 묵묵히 동혁의 손바닥 안에 담긴 것을 내려다봤다. 그새 조금 더 녹슨 핏빛 자물통은 열쇠가 꽂혀 있지 않았다. 대신 걸쇠가 반으로 잘려 있다. 마크는 이게 어떤 문을 봉쇄했었던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별로 안 기뻐하네.”

마크가 별말 없이 뚫어져라 자물통을 쳐다보고만 있자, 동혁이 머쓱하게 손에 든 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주절거렸다. 내보냈어요. 안전지구에 빈 집이 남아서. 아무리 다섯이라도 한 번에 덤벼오면 상대하긴 힘들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별말없이 갔어요. 형을 걱정하더라고요. 어차피 나가나 여기 있으나……. 아니, 어쨌든. 형은 알아요? 걔넨 내가 살린 인간의 목숨 중에 이, 삼, 사 오 육 번이에요. 사실 일 번도 형 때문에 살렸어요. 몰랐죠?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짓도.

말은 그쯤에서 끊겼다. 마크가 동혁의 허리를 콱 끌어당겨 안았기 때문이다. 동혁은 잠시 굳었으나 망설임없이 둥근 뒤통수에 손을 얹었다. 살살 쓰다듬었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 숨을 느끼며. 마크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잘했네, 중얼거렸다. 동혁은 웃었다. 아무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던 일에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잔뜩 상했던 마크의 목이 많이 나아져 뜨거운 음식도 무리없이 삼킬 수 있게 된 어느 날의 오후, 동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날씨를 가늠하는 마크의 곁에 붙어 앉았다. 햇살이 비쳐 들어와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 고였다. 눈도 큰데 속눈썹도 길다. 가만히 선 뚜렷한 옆얼굴을 관찰하던 동혁이 툭 불렀다. 형. 마크는 돌아보지도 않고 응, 하고 멍하니 대꾸했다.

“목 아프다고 왜 여태 얘기 안 했어요.”

그 말엔 고개를 돌려 동혁을 본다. 무의식적으로 목울대를 꾹 눌러내리는 손가락을 잡아챈 동혁이 그대로 마크의 가슴팍을 힘주어 밀었다. 저항 없이 침대에 뻗어 누운 마크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이미 눈치챘으나 짐짓 대꾸한다. 

“많이 했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거.”

마크는 그쯤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동혁이 눈에 힘을 팍 주고 마크를 노려봤다. 마크가 체념한 얼굴로 동혁의 눈을 피했다. 다 알아버렸구나. 하긴, 야차인데 뭘 모르겠어. 불퉁한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혁이 마크의 어깨를 잡아 제대로 눕히며 을렀다. 나 봐봐요. 이제 할 수 있어요. 그동안은 어딘지 몰랐으니까 맨날 머리에서나 빼냈지.

“굳이 목구멍 갈라 보지 않아도 다 알아요.”

“…….”

“꺼내 줄게. 좀 제대로 누워 봐요.”

여유로운 척하는 말투다. 듣자마자 며칠 전에 보았던 검댕투성이 얼굴이 떠오른다. 속을 보지 않아도 안다고. 거짓말하네. 누가 봐도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아무것도 몰랐단 걸 뻔히 들켜 놓고서. 아프지 않게 해 주겠다는 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울렁거려서, 마크는 손바닥으로 동혁의 입을 턱 막고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너 나 죽일 거야?”

입이 막힌 동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까만 얼굴의 미간에 깊게 골이 생긴다. 생각보다 진지한 반응이 돌아와 마크가 머쓱하게 손을 뗐다. 그러면서도 입은 안 멈춘다. 캡틴이 그래? 반군 출신이라 언젠간 사고칠 줄 알았대? 그러니까 쥐도새도 모르게 나를 죽이래? 주절주절 말이 길어질수록 동혁의 인상이 풀렸다. 긴장해서 아무렇게나 뱉는 말인 걸 눈치챘는지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무슨 소리야. 형 죽으면 나도 죽어.”

“그거 좀 은근히 이상하게 들린다, 동혁아.”

“사실인데 뭐가.”

  

동혁의 손바닥이 마크의 쇄골 사이를 가만히 덮었다.

  

핵 때문에 죽지 않아서 야차인 것이 아니다. 그걸 다룰 수 있기에 야차다. 대테러 이후 태어난 인간들은 모두 피폭자. 그건 인간의 육신을 타고 태어난 모두가 야차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야차들은 피폭으로 어그러진 사람의 손과 귀를 펴고, 심장과 뇌에 쌓인 세슘과 스트론튬을 거두어들였다. 죽어가는 이의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을 멈추고 마을의 식수에 녹아든 방사능물질을 정화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발밑에 엎드려 경배하고 구원해 달라 애걸했으나 애초에 거기 폭탄을 던진 것 역시 그들이었음은 너무도 쉽게 잊곤 했다. 

마크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살던 곳은 폭발지에서 아주 멀었으나 그럼에도 혈육은 두 손의 손가락이 모조리 붙어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매일 밤 나올 것도 없는 속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게워냈다. 동네의 아이들 중 거의 유일하게 사지가 멀쩡했던 마크는 열 살이 되기 전에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저도 모르는 새 본적지가 옮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반군의 군부대 숙소에서 끼니마다 배급되는 면역력 강화제를 두 통째 비웠을 무렵이었다. 

타고난 머리가 똑똑해서 군의관으로 키워졌다. 피폭당해 죽은 시신을 만지는 나날들이 길어질수록 방사능은 두꺼운 장갑과 마스크를 뚫고 아주 오래도록 마크를 괴롭혔다. 스무 살 무렵에는 결국 목울대 쪽 세포가 버티지 못한 탓에 항암도 한 번 했다. 마크는 그동안 원래 이름을 잊어버렸고 한국어를 잊어버렸다. 공용어로 사망 선고를 내리고, 밤이면 아픈 목을 부여잡은 채 희게 터 버린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일.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모두들 한 목소리로 야차를 저주했다. 괴물들,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야차夜叉들. 그러면서도 소리죽여 그들을 찬양했다. 핵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위대하다. 그들만이 우리의 구원자다. 

마크도 다를 바 없었다. 죽이고 싶었다. 언젠가, 그 위대하신 서른두 명의 목숨을 끊어놓고 손목을 잘라다가 자신을 치료하고 싶었다. 지나치게 잔인한 생각임을 알았기에 처음에는 자괴감에 울었으나, 고통이 심해질수록 눈물은 밑바닥부터 말랐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내가 미쳤나, 가만 묻다가도, 미친 세상에서 나 하나쯤 더 미쳐 버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답하는 나날. 

  

그 한가운데로 언령은 갑자기 찾아왔다. 최종 절제술을 받고 마취가 풀릴 무렵이었다. 목에서 번지는 끔찍한 통증 때문에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반쯤 잘려나간 성대에서 멀쩡히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공기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마크가 누워 있던 침대 주변의 것들이 전부 엎어지고 쓰러졌다. 비명이 멈출 때까지 눈이 새파랗게 빛난 탓에 누군가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군 소속인 상태로 발현했기에 꽤나 오래 보호받았다. 밥값은 하고 싶었으나 몸상태가 좋지 않아 전투에 투입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능력을 써도 피가 역류해 목구멍을 막았다. 모두가 마크를 두려워했고 동시에 보호하려 들었으므로 사오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을 상대로 제대로 말 한 마디 해 본 적이 없었다. 침상을 털고 일어나 도로 가운과 방호복을 껴입고 두 겹으로 고글을 쓴 채 시신을 뒤적일 때부터, 오래도록 저를 노리던 국제정부 소속 딜리버에게 결국 생포당해 스물일곱이 되던 해의 늦봄에 본부로 압송될 때까지. 

  

그 모든 시간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긴 장면으로 응축되어 복잡한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몸 안에 지겹도록 쌓이고 쌓여 썩어 가던 진득한 무언가가 피부를 뚫고 동혁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나간다. 마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악. 아. 산발적으로 튀어 나오는 신음이 언령을 담고 동혁에게로 향했다. 점점 강해지는 두통을 참으며 묵묵히 집중하던 동혁이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시에 빨아들이는 힘이 강해지자 마크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허우적대다 겨우 동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살살. 동혁아. 살살. 속삭이는 소리마저 나오지 않았으나 입모양을 용케 읽었는지 동혁이 강도를 줄였다. 

태곳적부터 몸의 곳곳에 녹아들어 있던 것들이 사라진다. 숨통을 죄고 말문을 막던 것들이 몸 밖으로 서서히 밀려난다. 눈앞이 맑다. 모든 것이 끝났을 무렵, 마크는 흐느끼고 있었다. 잇새로 야트막하게 목소리가 샌다. 

  

엄마. 

  

동혁은 멈칫했다. 공용어가 아니다. 어디선가 아주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언어다. 익숙한 발음. 자연스레 투정이 되는 부름.

  

끝을 늘일수록 아이 같아지는 음절들. 

  

다음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순식간에 몸을 훅 뒤집어 동혁을 침대 위로 찍어누르고 가슴에 올라앉은 마크가 까만 목을 두 손으로 거세게 틀어쥐었다. 얼굴 위로 차마 못 그친 눈물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동혁은 오른손을 뻗는다. 마크의 왼쪽 팔꿈치를 가만히 매만진다. 다정함이 묻어나는 손길에 마크가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울어. 

억눌린 물음에 기침과 쇳소리가 섞인다. 마크는 입을 연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대답 대신 가벼운 울음이 터졌다. 사람이 아닌 말 못하는 짐승이 우는 것처럼 마크는 울었다. 동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목 졸려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제에 원망 따윈 한 자락도 없는 말간 얼굴이다. 웃겨. 진짜 웃겨. 마크는 숨을 먹으며 내리누르는 팔에 힘을 주었다. 동혁이 밭게 기침하다 말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마크의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뭉둑한 손끝으로 말랑한 살을 굴려 가며 만지작대는 손길. 하지 마, 그거. 마크가 속절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몸을 틀어 손을 떨쳐낼 새도 없이 동혁의 입술이 열렸다. 

“이제 날 죽일 거야?”

“…….”

“마크 형.”

  

그럴 수 있어요? 

  

나직이 물어 오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겨우 내놓는 음성이 신음 소리에 가깝달 만큼 목덜미가 짓눌렸으면서, 사냥당하는 초식동물의 위치에 있으면서. 모순적이게도 도발 같다. 그 문장을 듣자마자 손에 힘이 탁 풀린 탓에 마크는 그대로 동혁의 상체 위로 후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팔을 꿈질꿈질 움직여 방금 전까지 조르고 있던 목을 끌어안는다. 동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른 허리를 둘러 안았다. 어쩐지 의기양양하게까지 느껴지는 손길이다. 

“못 하지.”

형은 못 하지. 형이 어떻게 그래. 못 할 줄 알았다. 으이구. 동혁은 기침하느라 말도 제대로 못 이으면서 기어코 놀렸다. 마크가 동혁의 목덜미에 파묻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손을 들어 가슴팍을 퍽 내리쳤다. 동혁은 윽, 하고 신음하면서도 웃었다. 마크를 감싸 안았다. 울지 마, 속삭였으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안 아파요? 묻자 품 안에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린다. 안 아프다고 하면 그저 좋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저도 울 것 같아서 동혁이 입술을 꾹 물었다. 바보같이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도 몰라서. 진작 물어볼걸. 진작 이렇게 편하게 해줄 걸. 

속으로 후회를 꾹 삼킨 동혁이 마른 등을 살살 쓸어주면서 형,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속삭였다. 그리곤 마크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잇는다. 

“형도 그날 여기를 떠나려고 했어요?”

다른 애들이랑? 그냥 그렇게 나가서 바깥세상에서 살려고? 묻는 목소리가 답잖게 긴장으로 물들어 있다. 마크는 냅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성대를 울려 입밖으로 소리를 내는데 아프지 않다. 버겁지도 않다. 그게 신기하고 한편으론 조금 슬퍼서, 마크는 횡설수설 말을 쏟아 놓았다. 그런 거 아니고. 너도 알잖아. 거기 열 살짜리도 있었어. 열네 살짜리도 있고. 걔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인데, 좀, 좀 아니잖아 그거는. 여깄으면 이제 반려도 못 되고, 그냥 그렇게 거기에 갇혀 있다가 죽는 거잖아. 나는 못 나가지. 너 두고 어떻게 가. 갈 데도 없어. 근데 걔들은 나갈 수 있잖아. 나가서 살아남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잘 살 수도 있는 거잖아.

“뭐라고?”

한꺼번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담고 쏟아져 내리는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호흡에 집중하던 동혁이 문득 마크의 등을 두드렸다. 어쩐지 다급한 손길이다. 형, 방금 뭐라 그랬어요? 마크는 동혁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낸다. 단호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반복한다. 

“내가 어떻게 가냐고.”

“…….”

“나 없으면 너 아파 죽는다는데, 이 야차야.”

못 할 줄 알았다 그랬지? 마크가 큰 눈으로 동혁을 노려봤다.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도 내가 못 할 줄 알고 있었어. 손에 힘이 안 들어갔어. 이십몇 년을 두고 원했던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너를 죽이면 나도 따라 죽을 것만 같아서. 알아? 그게 얼마나 이상한 기분이었는지 아냐고 네가.

“형.”

“뭐.”

“형 말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 몰랐어요.”

마크가 입을 꼭 다물었다.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혁은 마크의 어깨를 잡아내려 푹 끌어안았다. 마크는 다시금 동혁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이번엔 떨어지지 않으려 단단히 어깨를 쥐었다. 그저 숨 쉬는 척하며 조금 더 울었다. 동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일정한 박자로 마크의 등판을 토닥토닥 두드리기만 했다. 어린애 취급이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위로가 됐다. 

마크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있은 후에 겨우 진정했다. 운 얼굴 보여주기 싫다고 옆구리에 주먹을 찔러 넣는 걸 억지로 떼어내 놀려먹기도 뭐해서, 동혁은 마크가 제 얼굴을 베개로 눌러 놓은 뒤에 세수를 하러 다녀오는 것에 얌전히 동의했다. 

마크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다 말고 얼굴 위에 베개를 올린 채 침대 위에 일자로 뻗어 있는 동혁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치워. 툭 내뱉자 언령에 얻어맞은 베개가 벌렁 옆으로 넘어갔다. 잠들진 않았어도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동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똑바로 저를 향한 시선과 마주한 마크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자 동혁이 씩 웃었다. 

“다 울었어요?”

“누가 울어.”

“형이. 나한테 안겨서. 울면서 나 사랑한다고.”

“뭔 소리야.”

마크가 동혁의 얼굴을 향해 수건을 집어 던졌다. 상체를 훅 일으켜 그걸 피한 동혁이 마크의 옷자락을 쥐고 끌어당겼다. 얼결에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마크가 두 입술을 말아물고 동혁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갈겼다. 악. 아퍼 아퍼. 어깨를 움츠린 동혁이 한껏 불쌍한 눈을 하고 마크를 올려다본다. 얼마 못 가 둘 다 웃음이 터진다. 동혁이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벌려 마크를 푹 끌어안았다. 강아지 같은 머리통을 마주 안아준 마크가 동혁의 옆통수를 가만가만 토닥였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 끝이 뻣뻣했다. 전쟁의 흔적 때문이란 걸 알았다. 동혁이 아무리 열심히 몸을 씻어도 체향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섞여서 났다. 마크는 기르는 개의 털을 쓰다듬듯이 제 어린 반려 야차의 머리칼 끝을 조심스럽게 흐트러뜨린다. 잠시 그 느낌을 즐기던 동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마크의 품에 제 옆얼굴을 기댔다.

“나 무서웠어.”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던 손끝이 멈춘다. 동혁은 그걸 감각하자마자 마크의 몸통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형이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았어요. 그거 말고는 다른 생각이 안 들더라고. 형은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죽이고 싶어했으니까. 다른 이능력자들처럼 여기를 나가고 싶어했으니까. 그래서 그날 사실 좀 열받았어요. 속이 막 뭔 불처럼 부글부글 끓더라고. 근데 동시에 무서운 거야. 그때 복귀해서, 당연히 형이 있을 줄 알고 이 방에 딱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데. 여기에 형이 없는데, 그 느낌이 너무……. 마크는 대답 없이 주절대는 동혁의 머리 위에 제 턱을 기댔다.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손으로 짓눌렸던 목이 시큰해 오는 것도 같다. 동혁은 마크의 쇄골에 오른뺨을 기댄 채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근데 형이 날 보자마자,”

무슨 강아지가 주인 반기는 듯한 얼굴을 하길래. 

그때 알았지. 아, 형은 나를 못 죽이겠구나. 

그렇게 됐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동정이고 뭐고 몰라요.”

“…….”

“근데 형이 인간이란 걸 알아요.”

“야.”

너도 인간이야. 마크가 냅다 동혁의 말을 끊고 나직하게 속삭이며 동그란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턱 덮었다. 잠시 정수리를 눌러 내리던 손길이 천천히 뒤통수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느리고 따뜻하게 쓰다듬는 손길과 어쩐지 꽁해진 얼굴에 속상함이 그대로 묻어나와 동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쵸, 나도 인간이지. 그렇지만 내 마음은 형 같지가 않잖아. 그래서 생각했어. 좀 전에 물어보면서.

“보내주어야겠다고. 형이 가려고 했다고, 그날 날 떠나려고 했다고 대답하면……, 그냥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아니었다네.”

“…….”

“형. 나는 기뻤어요.”

되게 많이.

고개를 든 동혁이 마크의 가슴팍에 턱을 기댔다. 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고요히 맞붙었다. 마크는 가만히 동혁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경계 또렷한 눈동자와 거기 담긴 자신을 쓰다듬듯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눈 감지 않은 채 고개를 내린다. 동혁도 눈 감지 않은 채 입술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포개어진다. 

  

마크는 배우지 않은 것을 천천히 해냈다. 입을 열고, 고개를 꺾고, 동혁의 두꺼운 목을 힘줘 끌어안았다. 그리고 범람하는 생각.

  

같은 기회가 다시 주어져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결국 목숨줄을 끊어 놓기는커녕 손에 힘을 풀고 온 품 안에 이 애를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럴 거면서 대체 뭐하러 이 애를 미워하려 애를 썼을까. 대체 인간으로서의 무어가 내 안에 남아 있어서 정의랍시고 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기를 쓰고 도망치려 한 주제에 정작 어디로 도망칠 수 있지? 반군 의무실로? 주소도 모르는 고향으로? 그것도 아니면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 세계 어딘가로? 지금 나열한 곳들 중 그 어디도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잘못된 걸까. 어린 시절에 배웠던 것처럼, 내가 추악한 야차들의 꾐에 넘어가서 가엾게 이용당하는 이능력자가 된 걸까. 

그렇다기엔 황홀하다. 고통 없이 맘껏 말하고 울고 소리 지르는 감각은 좀 어색하고 아주 끝내줘. 모두가 죽어나가는 세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될 세계에서, 이건 오늘 새로 선물받은 생명이고 이 애는 내 구원자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저 살아가는 동안에 내 목숨의 주인은 이 애인데. 

  

개가 주인을 두고 어딜 가.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사라질 일 없는 세계

  

  갈 데가 있어요.

그 말을 하는 동혁의 얼굴이 또다시 어둑해져 있어서, 마크는 직감했다. 이번에는 철문 앞에서 동혁을 기다리거나 그 애 몰래 그 문을 여는 대신에, 그 방에 함께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아주 오랜만에 방에서 나와서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 빈 복도를 함께 걸었다. 걷는 동안 어쩐지 변명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마크는 주절주절 말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갔었어. 그냥 궁금해 가지고. 네가 나 데려가 놓고 앞에 세워둔 날 이후로 쭉 궁금했었는데, 그런데 딱 들어가서 처음 보고. 그러고 나니까 걱정이 되는 거야. 애들은 다쳐 있고, 전부 돌보는 사람은 없어 보이고……. 아무튼, 많이는 안 갔어. 세 번이었나 그랬을걸. 너를 마주친 게 네 번째 갔던 날이었어. 근데 애들이 야차라고, 그래서……. 좀 놀랐어. 그러니까, 너희, 서른둘이었잖아. 

느릿느릿 걷는 동안 그저 마크의 이야기를 들으며 별 반응이 없던 동혁은 첫 번째 철문 앞에 다다라서야 간결하게 설명했다. 야차가 맞다고. 반려를 잃었는데, 맺어진 지 몇 년이 지나고서 그렇게 된 사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둘 중 누구의 뜻도 아니었노라고. 마크는 그 가벼운 마지막 문장이 한없이 무거워 몸을 떨었다. 

세 번째 철문이 열렸다. 창살 속은 비었다. 야차는 여전히 백짓장 같은 얼굴로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동혁은 들고 있던 종이봉투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새 화분을 하나 꺼내 침대맡에 조심스럽게 놓는다. 그 안에는 연둣빛의 새싹이 두 개 돋아나 있었다. 마크가 눈을 크게 떴다. 거의 십여 년만에 보는 살아 있는 식물이었다. 

동혁은 죽어 말라비틀어진 식물을 담은 채로 반쯤 금이 간 원래의 화분을 종이봉투 속에 쓸어담듯이 밀어 넣고 빈 약병을 쥐었다. 슬슬 통증이 올라오는지 마른 상체가 간헐적으로 탁 탁 튀어올라 발작한다. 까맣고 끝 뭉툭한 손이 가볍게 떨렸다. 주사관과 분리한 약병을 폴대에서 내린 동혁이 냉장고를 향해 돌아섰으나 마크가 한 발 빨랐다. 

마크는 동혁의 손에서 주사관을 건네받는다. 빠르고 정교한 손길로 관과 새 약병을 연결하고 도로 폴대에 건다. 주사관 끄트머리에 새 바늘을 연결하고 약이 내리는 속도를 체크한 마크가 망설임없이 마른 손목을 잡아올렸다. 주삿바늘이 들어가 있던 팔뚝에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손목을 뒤집어 손등에 위치를 잡은 마크가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으면, 손목을 쥐고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파랗게 올라오는 핏줄에 꽂으면 돼. 동혁은 멀거니 마크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 희게 질린 윤의 얼굴을 본다.

“누나.”

“…….”

“이 형 알지.”

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동혁이 답잖게 애타는 얼굴로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새 테이핑까지 마친 마크가 주사관을 들어 약이 제대로 떨어지도록 조정한 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마른 손을 찾아 쥐고 다른 손으론 링거가 연결돼 반창고 붙여진 손등을 쓰다듬는다. 누나아. 나 좀 봐봐. 어린애가 보채는 듯한 말투다. 이 형 여기 왔었다며. 네 번 왔었다며. 

마크는 어색하게 굳은 채로 윤의 발치에 서서 둘을 내려다봤다. 윤은 밀랍 인형 같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혁을 바라봤다. 눈동자가 지나치달 만큼 공허하다. 동혁은 윤의 손등에 옆얼굴을 부볐다. 잃어버렸던 엄마를 찾은 어린애 같았다.

“내 반려다. 나도 이제 생겼다. 이 형 이름이 뭐게.”

“…….”

“모르지. 그럼 누나. 그 애 이름이 뭐야. 꼬맹이.”

“정원.”

내가 지었어. 정원이. 

종잇장 같은 입술 사이로, 아주 신경써서 듣지 않으면 그저 공기 속으로 흘러가 버릴 것만 같은 음성이 섞여 아주 느리게 흘러나온다. 제1지구식 이름. 마크의 눈이 커졌다. 그 정도 말을 하는 것도 버거운지 천천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윤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정원이지, 그치. 누나. 걔는 기억하지. 동혁은 말하다 말고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두어 번 큰숨을 쉬더니 마크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마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들어가면 알려줄게요. 그 이름 하나만 읊어 줘도 돼요. 누나가 알아듣는 이름은 그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성은 없고 그냥, 이름만.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신신당부하던 동혁의 그늘진 얼굴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 지나고, 그 자리를 핏자국이 말라붙은 앳된 아이의 얼굴이 가득 채운다.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마크가 문득 물었다.

“정원이라는 애가.”

“어?”

“혹시 동양인이야? 머리가 검고, 눈동자도 검고.”

만약 지금 떠올리는 것이 맞다면 마크는 그 아이를 알았다. 사 년 전에 센터로 이송되어 온 작은 몸을 똑똑히 기억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찢어진 복부와 갈라진 가슴팍의 살결을 직접 봉합하고, 일 년을 꼬박 옆에 붙어 돌본 아이였다. 

“코가 둥글고 곱슬머리였는데. 피부가 하얗고,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어깨에 좀 큰 점이 있었고……. 그때 열 살 추정이었으니까 지금은 한 열세 살쯤 됐을,”

“형.”

“어?”

어떻게 알아 걔를.

덜덜 떨리는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마크는 눈까지 감고 집중하며 무언가를 떠올리다가 그 부름에 퍼뜩 눈을 뜬다. 그리고 마주한다. 경악에 물든 동혁의 얼굴과.

“누나.”

“정원아.”

“누나!”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활짝 뜬 채로 상체를 일으키려 애쓰는 윤의 얼굴을. 마크는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뒷걸음질쳤다. 투명하다시피 흰 이마에 온통 푸른 핏줄이 돋았다. 구속구들이 거세게 진동한다. 새까만 눈동자는 더 이상 흐리멍덩하지 않다. 또렷하고 날카롭다. 인간 한 명 정도는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찢어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완연한 야차의 살기다. 선득한 공포가 마크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크가 숨을 짧게 두어 번 끊어 내쉬고는 차분히 외쳤다. 

“살아 있어!”

“…….”

“그, 살아 있었어. 내가 기억하기론 그래. 반군 의료센터에 있었어. 온몸에 상처가 많고 출혈도 많았는데 깊진 않았거든. 근데 문제는.”

머리를 많이 다쳐서. 의식은 없었어. 쭉 없었고……. 

마크가 말을 이을수록 방 안에 천천히 푸른빛이 가라앉듯 고였다. 신중히 언령을 정제해 내보내는 이능력 에너지는 동혁에게로 대부분 흡수되었고, 아주 느린 속도로 윤에게 스며들었다. 윤은 동혁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다시 침대에 눕혀지면서도 마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숨조차 멈춘 채로 마크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에 집중한다. 

“이능력자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 그 애 눕혀 놓은 침대에서 자꾸 전류가 흘러서. 그 이후론 의료센터에서 다른 곳으로 다시 이송되어 가서 소식을 잘 몰라. 그냥 아직 살아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어…….”

마크가 입을 다물자 동혁이 막혔던 숨을 터뜨리듯 내쉬었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동혁이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두어 번 도리질친 뒤 제게 흡수되는 이능력 에너지를 부드럽게 밀어내 윤에게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마크는 묵묵히 동혁을 도왔다. 복잡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한참을 말 없던 동혁이 얼굴을 온통 덮은 윤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누나. 살아 있대.”

“…….”

“안 죽었대. 이제 열세 살이래. 많이 컸겠다, 그치.”

윤은 울고 있었다. 말라 차갑게 굳은 몸에는 미동도 없다. 서럽게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 위로 눈물이 수도꼭지 튼 것처럼 주룩주룩 흘렀다. 곧 동혁도 그럴 것만 같아서, 마크는 입술을 말아물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까지 윤을 치료하는 데만 집중했다. 기실 고통을 잠시 덜어 줄 뿐이었기에 치료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에 진통제를 때려붓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마크는 하얀 가운을 입었던 시절만큼이나 절박하게 윤의 폐부로 제 이능력을 밀어 넣었다. 살아 주기를 바라며 죽어가는 환자의 손을 잡았다. 이따금씩 주문처럼 살아 있어, 그 애는 살아 있어, 되뇌면서.

  

동혁에게는 성이고 이름이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윤 또한 그러했고, 그 정도로 따지면 동혁보다 더했다. 그래서 윤은 동혁이 아무리 손을 붙잡고 애원해도 말간 얼굴로 쳐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 주고 싶어도 엉망이 된 머리로는 동혁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없다. 두통은 빠르게 그녀를 좀먹어 들었다. 누구보다 핵을 자유롭게 다루던 윤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핵의 찌꺼기들이 머리며 몸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뇌의 부분부분이 천천히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 모든 일은 윤이 정원을 잃어버린 날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언제였냐면.

윤의 반려는 그녀가 처음 발견한 꼬맹이였다. 장소는 한반도였다. 온몸에서 튀기는 스파크를 조절하는 법을 곧잘 깨우치고, 똑똑하게도 몇 달만에 공용어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윤에게는 고집스럽게 엄마 엄마 소리를 해 댔다. 두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가 한 번에 밀어내며 내는 발음은 저를 낳아준 이를 뜻한다고 했다. 야차들 중 한반도 출신은 윤과 동혁밖에 없었고 동혁은 옹알이부터 공용어로 했던 아기였기에, 그 두 음절 단어에 감격하는 것은 윤밖에 없었다. 

엄마지, 그래, 내가 네 엄마지. 

윤은 꼬맹이를 터질 듯이 끌어안고 작은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작은 손을 잡고 자주 안전지구로 산책을 나갔다. 호흡하고 광합성하는 희귀한 식물을 구해 화분에 옮겨심어 선물했다. 야차는 살아 있는 것을 소멸시키러 다니는 이들이었기에, 그것들 중 하나를 구해 가져오기는 역설적으로 너무도 쉬웠다. 지나치게 어리다는 이유로 반려를 얻지 못한 열여섯 살 동혁 역시 꼬맹이를 조카 보듯이 했다. 어린애들 둘이서 손을 잡고 본부의 마당을 산책하고 쭈그려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가끔 형제처럼 유치하게 싸우고 나란히 윤에게 혼이 났다. 그러면서 셋은 천천히 기묘한 가족의 형상을 갖춰나갔다. 고전적 의미의 가족은 기백 년 전에 이미 소멸되었는데도. 

아이가 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날 저녁, 윤은 남몰래 울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다는 말을 이동혁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다음 날 아침, 늘 그랬듯 꼬맹이를 데리고 칠백스물한 번째로 핵폭탄을 터뜨리러 간 윤은 혼자 돌아왔다.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의식이 없었으나 입술은 누구를 부르는 것처럼 자꾸만 달싹였다. 반려를 지키려다 삼 분의 이쯤 잘려나간 오른쪽 팔목이 덜렁거렸다. 야차들에게 일어난 첫 이능력자의 상실이었다.

  

말을 잃은 마크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뺨에 와 닿는 베개의 솔기마저 차가운 가시 같았다. 동혁은 엄지손가락으로 마크의 손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반쯤 졸음에 잠긴 눈이 느리게 한 번, 두 번 끔벅대는 것을 마크가 또렷하고 맑은 눈알로 응시했다. 

그때 캡틴은 약속했어. 내가, 그, 동생 비슷한 걸 잃기에는 어려도 너무 어렸으니까. 스무 살 생일날 선물로 네 손으로 네 반려를 고르게 해 주겠다고.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별 반항 없이 형들 누나들이 겁먹은 짐승 같은 눈알을 하고 무리지어 있던 이능력자들을 하나하나씩 테스트하는 장면을 구경만 하다 방으로 돌아갔지. 대신 그날부터 밤마다 스무 살 생일까지 남은 날짜를 세기 시작했어. 숫자가 줄고 줄어들 때마다 두통이 심해졌고. 그랬는데.

“반려를 배정받는 날에, 다 도망간 거야. 몇 남기고.”

“…….”

마크도 그날을 기억하는지 잠잠했다. 동혁이 가볍게 마크의 눈두덩에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입을 앙다물고 주먹으로 팔뚝이든 얼굴이든 한 대 기어코 갈겼을 마크는 묵묵히 콧잔등이나 한 번 찡긋하곤 별 반응 없었다. 말간 눈이 동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깜박였다. 

“그날 형 못 만났으면.”

“응.”

“나 죽으려고 했어.”

“……, 이동혁.”

“그냥 하는 말 아냐.”

정말이야. 머리가 터져 나가기 전에 알아서 죽으려고 했지. 무슨 짓을 해도 잘 상처입지 않는 이 몸뚱이를 어떡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서, 그냥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아 넣으려고 했어. 실체 없는 것에게 죽임당하기 전에 그냥 그러려고 했어. 근데 형이 나타났어. 동혁이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미간에 한 번, 콧대를 따라 한 번, 입술에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춘다. 축복을 내리는 듯한 몸짓에 마크가 어색하게 야트막한 숨을 내쉬었다. 동혁의 건조한 목소리가 어쩐지 절절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야차. 형은 내 반려. 형은 내 거지. 형.

“형을 만난 그 날이 내 스무 살 생일이었다면 믿을 거야?”

마크는 냅다 고개 끄덕였다. 머리를 숙여 동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떠나지 않을게, 중얼거린다. 마크는 연신 주문을 읊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떠나지 않을게. 곁에 있을게. 네 옆에 있을게. 너랑 매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날게. 동혁아. 동혁아. 동혁아. 동혁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 선물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저주처럼 얽혀 오는 속박. 듣는 이 대신 스스로를 옭아매는 맹세. 

  

모니터의 숫자가 무섭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십이억 구천, 팔천오백, 칠천팔백, 육천삼백삼십. 세상을 멸망시킨 한 야차와 한 이능력자는 그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함께 고요히 숨 쉬었다. 마크는 살짝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둠이 물감 퍼지듯 먼 하늘에서부터 퍼져 올라온다. 이제 저 구름은 전 세계를 덮을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위에 내릴 것이다. 건물을 녹이고 인간을 터뜨려 죽일 것이다. 마크는 잠든 동혁의 옆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잠든 듯 미동 없는 동혁의 귓가에 가볍게 속삭인다. 동혁아. 있잖아. 반군에 있을 때에 이능력자들을 모아 놓고 그랬어. 야차들의 반려는 사냥개에 가깝대. 막 굴려지는 짐승이래. 만약 정부에 잡혀갔다면, 그렇게 될 바에 명예롭게 죽으라고 하더라. 동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진다. 마크가 손을 들어, 미간에 잡힌 주름을 살살 눌러 펴 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너의 개였네.”

“…….”

“근데 있잖아. 진짜였던 거 같애.”

나는 되게……, 사랑받는 개였던 거 같애. 동혁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마크의 몸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꾹꾹 다잡는 손길이 어쩐지 절박하다. 마크는 순순히 몸에 힘을 풀고 동혁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또한 알고 있었다. 다른 야차의 방으로 갔더라면, 그들은 아마 가장 먼저 저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을 거란 걸. 혹은 망설임없이 덮쳤을 것이다.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다. 그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인간보다 강하다. 불통 이능력자 하나 제압하는 것쯤은 그중 누구에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소리 지르게 만들었겠지. 정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 일단 이 저주받은 입을 열기만 하면 언령은 흘러나오니까. 하필이면 발현도 늦어서 스스로의 능력에 익숙치 않은 탓에 흥분했을 때 두 배로 조절이 힘든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쯤, 판단력이 흐려진 틈을 타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매혹시켰을 것이다. 기어이 발아래 둘 수 있을 만큼 철저히 길들이고 말았겠지. 그러나.

이 애는 화까지 내면서 입을 다물게 했다. 티슈를 뽑아 치받아올라온 내 피를 닦고 물을 먹였다. 기백을 죽이고 다니는 주제에 나를 살렸다. 개는 응당 이렇게 다루어야지. 이런 거라면 나는 기꺼이 너에게 내 목줄을 줄 것이다. 고개를 내린 마크가 동혁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두렵고 불쌍한 나의 반려, 막내 야차, 아니 이동혁. 그저 이동혁. 내 동혁이. 잃어버린 시간들만큼 많이 불러 주어야 할 이름. 넌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너의 축복이라고 했다. 그러니 욕을 해도 좋고 죽으라 해도 좋다고 했지. 나는 이왕 너에게 줄 것이라면 부드러운 음절과 아름다운 단어와 환희에 찬 문장들만을 줄 것이다. 이것은 육성으로 들려주는 나의 고백. 네게 선물하는 아주 커다란, 커다랗고 아름다운, 아름답고 푸른 치유. 사라질 일 없는 세계.

  

마크가 입술을 연다. 푸르게 속삭인다.

  

  

동혁아

네가 이 세상에 남긴 것들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너를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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