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멀리로부터

야차개 에필로그

형 잘 좀 잡아 봐. 아니, 이렇게. 아니 그건 거꾸로잖아. 해줘? 필요 없어? 알았어, 그럼 나 이거 패스워드 알아내는 동안만이라도 좀 꽉 잡고 있어. 금방 하고 가서 도와줄 테니까.

 

아니, ……, 야! 바람 때문에 엄청 흔들린다고 이거.

 

아이, 안다고. 왤케 목소리가 커, 소리 좀 낮춰. 우리 여기 온 거 걸리면 큰일나 진짜로. 알잖아. 내가 창고에서 이거, 이름 뭐라고?

 

노트북.

 

그래. 노트북 꺼내 온 것만 걸려도 우리 집 당장 뒤집어져. 집이 문제가 아니라 센터 옥상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구획장 아저씨랑 센터장 누나까지 다 달려나올걸. 형 센터장 누나한테 쥐어박히고 싶어?

 

해찬아.

 

어.

 

너 손이 바빠야 되는데 말이 좀 많네.

 

어. 미안. 얼른 할게. …… 아이, 근데 이거 구식이래도 너무한다 진짜! 누를 수 있는 자판이 하나 둘 셋 넷, 이게 다 몇 개야. 대충 세도 오십 개는 넘겠다. 위에 달린 쪼그만 버튼들은 다 뭐래. 구행성 인간들은 어떻게 이런 걸 개발해서 쓴 거야. 이해를 할 수가 없네.

 

걔네는 자판 칠 때 열 손가락을 다 썼다잖아. 와, 바람 무슨 일이냐 진짜. 오늘따라 더 심한 거 같애. 나 손가락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야.

 

손가락이.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지.

 

…….

 

미안하다고.

 

멀었어? 해킹칩이 작동이 안 돼? 아무리 구식이래도 복원본이라서 그거, 뭐야, 데이터베이스는 여기 걸로 채워넣었을 텐데.

 

그니까. 그건 맞는데 이거……, 인식은 되는데 프로그램 구동이 안 돼. 어 잠깐만. 형 올해 델타학년이잖아. 고문화 수업 때 고전 네트워킹 가르쳐 주나? 코딩 배웠어?

 

아, 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 자신 없어……. 나 고전 기술과목 완전 꽝이라고 얘기 안 했었나? 코딩이랑 인공지능 들어가면 백지야.

 

웃기지 말고 일로 와, 교대해. 이제 형이 공부 못한다고 하는 말 안 믿어. 얼마 전에도 전구획 1등 해 놓고서.

 

아 진짜 자신 없는데. 일단 한 번 해봐?

 

어 일단 와봐. 와서 함 봐봐. 내가 보기엔 이거 그렇게까지 복잡한 암호 같진 않거든? 물론 난 안 배워서 모르지만.

 

근데 그러려면 네가 먼저 와서 이거 잡아야 돼.

 

아 맞다. 잠깐만. …… 와! 바람 미쳤다!

 

와, 살겠다! …… 야 괜찮아 이거 기초야. 풀 수 있어 풀 수 있어. 쫌만 기다려봐. 자판 진짜 무슨 일이냐.

 

구리다니까, 그거.

 

진짜 그러네. 뭐가 어딨는지 아예 못 찾겠어. …… 아 이거 나 수업 때 쓴 전자언어 케이싱 칩 있으면 빠를 거 같은데. 그거 돌려 놓으면 알아서 답을 몇십 개씩 추려서 막 넣거든. 물론 것도 제대로 된 복원본이 없어서 좋은 모델은 아니긴 한데.

 

그거 어딨는데? 집에?

 

아니. 센터장 누나가 수업 끝나고 다 거둬 갔지.

 

아 뭐야.

 

야, 그럼 그걸 애들한테 다 나눠주겠냐? 얼마나 예민한지 알면서.

 

그건 맞지. 고문화 수업 들어갈 때 선배들 다 비닐 옷 입고 들어가잖아. 좀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입을 때마다 다 태워버린다며? 그거 듣고 와 장난 아니네, 했어. 왜 그렇게까지 예민해?

 

구행성이 다 녹았다잖아. 아직도 울 증조할머니는 핵이 무섭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에 왔을 테니까 그럴 만도 하지.

 

엥.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으면 거기에서의 기억이 아예 없는 수준 아냐? 그런데 뭐가 무서워.

 

그분들이 어른이 되기도 전에, 같이 온 어른들이 다 죽었다잖아. 우주 공간을 통과하느라 이미 잘게 쪼개져서 핵 자체가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대. 애초에 핵에 내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근데 우리 행성 환경에 적응이 안 됐대. 면역이 아예 쌓이질 않았다고 그러더라. 그게 다 자란 장기 속에 핵이 쌓여서 그런 거래. 무섭지.

 

별로……. 안 와닿아서. 옛날에 형들이 실험실 금고에서 가져온 핵원자 보여 줬는데 그냥 그렇던데. 반짝반짝 빛나서 예뻐 보이긴 하더라.

 

누구, 옆 구획 애들?

 

어.

 

…… 걔네는 깡패들이잖아. 너 아직도 걔네랑 어울려? 걔네 출입금지 안 당했어? 막 들어와? 날 밝으면 구획장 아저씨한테 말해야겠다.

 

뭐야, 아니야! 못 본 지 몇 년 넘었어. 나도 옆 구획 안 가, 혼나기 싫어. 그때 보고 마지막이고 만지지도 않았어. 아이 뭐 그렇게 정색해 갑자기. …… 알았어. 걔네 얘기 안 할게. 미안해.

 

…….

 

근데 이민형.

 

형.

 

민형아.

 

형이라고.

 

그러니까 민형.

 

…….

 

알았어. 민형이 형. 웃으라고 그런 건데.

 

왜.

 

나 추워.

 

바람 너무 심하지. 쫌만 참어. 이거 지금 나올 수 있는 수가 너무 많아 가지고 반 정도 돌았거든. 나머지 절반 마저 해도 안 되면 그냥 아래층 내려가서 실험실 뒤져 갖고 칩 찾아 올게.

 

어? 어, 어. …… 걸리면 혼난다며.

 

됐어. 이러고 있는 것만 걸려도 죽기 직전까지 혼날 텐데.

 

풉.

 

웃어?

 

아냐. 형 웃긴다. 가끔 그렇게 화끈하더라 사람이. 근데 있잖아, 형. 나 진짜로 할 말 있어.

 

뭔데. 얘기해.

 

…… 화 안 낼 거야?

 

일단 들어 보고.

 

나 아까 말했던 그때 있잖아. 핵원자 처음 봤을 때. 물론 껍데기만 핵이어도 말이야. 나 기분 좋았다?

 

기분이 좋았다고?

 

어. 약간 내 말 잘 듣는 강아지 보는 기분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그거 오래 보면은 눈 아프고 어깨 빠질 거 같고 그런대. 근데 나는 하나도 안 불편하고 그냥 좋던데. 손 넣어서 만져보고 싶었어.

 

만지진 않았지?

 

당연하지! …… 근데. 진짜 솔직히 말하면, 손가락 엄청 가까이 갖다 대긴 했는데. 닿을랑 말랑. 그게 내 손 따라서 움직이더라고.

 

이해찬.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야. 그것만 해도 형들, 이 아니라 걔들이 엄청 신기하게 쳐다봤어. 너 아무렇지도 않냐고. 자기들은 그거 담은 용기 들고만 있어도 손가락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고 그런다고. 그러고 나서 그거 걸려 가지고 걔네 영구출입금지 먹은 거잖아. 금고 뜯고 서버에 해킹칩 꽂아서 털 생각을 어떻게 했대. 쓸데없다.

 

…….

 

…….

 

야, 해찬아.

 

엉?

 

걔네 다섯 명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너 울 엄마 중앙병원에서 일하는 거 알지.

 

당연하지, 나 갓난애기 때 1차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에 최종백신까지 다 이모가 놔 주셨는데. 근데 갑자기?

 

네가 말한 그 다섯 명 다 얼마 전까지 중앙병원에 있었어.

 

어? 뜬금없이 왜?

 

한 명은 팔 전체, 나머지 넷은 손을 절단했어.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안에서 터져 나와서 그. 잘린 게 아니고 터져나갔대.

 

…… 왜?

 

피폭은 아니야. 걔네가 가져간 게 순수하게 분리해 놓은 원자기도 하고, 어차피 우리 다 혈통 따져 보면 핵 내성인이기도 하고 해서. 암튼 너무 흡수가 잘됐는데, 그게 우리 행성 면역체계랑 완전히 상극이라 뼈 안에서 염증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서…….

 

…… 형.

 

어.

 

나 무서워.

 

나도. 팔에 소름 돋았어 지금. 내가 말했는데.

 

왜 근데…… 왜 그런 큰일을 나는 몰라?

 

애들한테는 당연히 말 안 해 주지. 델타부터는 단단히 경고해. 직접적으로 접근했다가 다친 사람이 많다고. 금고랑 센터 연구실 안에 있는 원자들은 철저히 연구용이고 수업용이 아니니까 죽기 싫으면 건드리지 말라고. 우리는 그냥 거기 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방호복을 껴입어야 하는 거야. 몇 겹짜리 금고랑 소독된 문을 사이에 두고도.

 

형.

 

어.

 

근데.

 

어.

 

그러면 왜 나는 멀쩡해……?

 

해찬아.

 

응.

 

그걸 알고 싶어서 지금 오밤중에 너랑 나랑 센터까지 나와서 안테나 붙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집중해서 잡아봐. 전파 너무 흔들려. 자꾸 끊기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나 손이 다 얼었어.

 

거의 다 됐다. 80퍼센트야. 해찬아 자? 잠들면 안 돼.

 

안 자……. 그냥 좀 무서워서 그래.

 

무서우면 다른 얘기 하자. 나는 너네 집에 노트북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 구행성에서는 개인용 노트북으로 인공위성 전파 사서 연결하는 게 유행했다는데, 이거 켜는 거 성공하면 다른 행성이랑 전파 터질까? 하다못해 수명 긴 인공위성이 살아 있다면 그거라도.

 

이거 복원본인데.

 

그러니까. 모형만 복원한 건 아닐 거 아냐. 고전 네트워킹 배워보면 알아. 구식 기기에는 필수적으로 구동시켜야 되는 베이스 프로그램들이 있었대. 우리 데이터베이스를 써도 그건 별개일 테니까, 아마 구행성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에 연결만 되어 있으면 전파가 잡힐 거야. 어 그러면 아마 통신 부품이 따로 있을 텐데.

 

응. …… 있는 거 같애.

 

있는 거 같다고?

 

노트북이랑 같이 뭐가 있었어. 잠깐만, 나 가져왔어. 주머니에 있는데. 형 와서 이거 좀 꺼내 갈 수 있어? 쪼끄만 조종기 같은 거던데.

 

보자. …… 이거 구식 리모컨이야.

 

리모컨? 이게?

 

어. 나머지는 뭐 이상한 기호 써 있고. 누를 수 있는 버튼이 하나밖에 없는 걸 보니까 이거 모스 부호인가?

 

그걸…… 구행성 사람들은 하나하나 눌러서 쳤다고?

 

그렇게 수준 낮다는 표정 짓지 마. 걔들은 이 리모컨 하나로 모스부호 칠 수 있게 된 것도 혁신인 줄 알았을 거야. 구행성 상공에 인공위성이 워낙 많아져서 복잡한 컴퓨터 언어를 죄다 갖다 버리고 모스부호 통신으로 돌아갔었다는 이야기는 역사 시간에 들은 적 있어.

 

하긴. 저 고물 돌덩어리 자판 달려 있는 꼬라지 보아하니 그랬겠다.

 

말 이쁘게.

 

알았다고요.

 

…… 여기 같이 있는 메모는 읽어 봤어?

 

어. 내가 형한테 맨 처음에 얘기했던 그 내용 그대로야.

 

용케 안 쓰러지고 나한테 발설까지 했네.

 

출생의 비밀 정도는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피차 근본 없는 행성에서 태어난걸 뭐. 아빠랑 동생들까지도 나랑 너무 안 닮아서, 난 주워온 자식새낀가 싶은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긴 했지. 그치만 애초에 얼려놨던 유전자를 이식해서 만들어진 거라고까진 생각 못했는데.

 

…….

 

만약에 내가 누굴 본떠서 만들어진 거면 신기하겠다. 나는 누굴까? …… 무서우면 다른 얘기 하기로 했는데 왜 다시 돌아왔지. 나 무서워.

 

됐다. 됐다! 이제 그거 놓고 이리 와. 같이 보자.

 

와, 너무 따뜻해. 형 나 더 꽉 좀 안아 봐…… 내가 저기서 저거 잡고 매달려 있느라 얼마나…… 어, 형…… 이거…… 일지네.

 

어. 이거 일지다.

 

…….

 

…….

 

어떡해? 어른들 깨워?

 

잠만. 잠깐만, 잠깐만, 해찬아. 이거 읽어 봐. 여기 이 부분 읽어 봐. 마지막 야차와 마지막 이능력자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 이후 센터 폭발 및 이륙 성공……. 폭발한 게 여긴 아닐 테고. 구행성에도 센터가 있었나 보네. 너 구행성에서 왔나 봐.

 

…… 진짜였다고, 그게.

 

야차의 샘플은 13번 괄호 열고 남 괄호 닫고 가 보관. 이능력자의 샘플은 20번 괄호 열고 여 괄호 닫고……. 어.

 

형, 나 소름 돋아.

 

나도. …… 너 십삼 호 살지.

 

형은 이십 호고.

 

잠시만, 아예 뒤쪽도 좀 읽어볼래. 센터 내부에서 배양 과정을 거쳐 체외 양육 후 공식적인 탄생일은 일력 6월 6일. 일력은 태양을 얘기하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이거 우리 단위로 바꾸면 날짜에 30만 더하면 되거든. 그럼 행성력으로 6월 36일이니까.

 

내 생일이야…….

 

…….

 

…….

 

여기서 끊겼어.

 

형은 안 무서워?

 

뭐가 무서워. 옛날옛날 기록이잖아. 나는 열여덟이고 너도 벌써 열일곱 살이나 먹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진작에 일어났어야 해. 안 그래?

 

…… 형 말 들으니까 또 묘하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 내 남자친구가 구행성인이고 어쩌면 나도 그럴 수도 있다니. 행성에서 연구자가 되기엔 최선의 옵션이잖아. 걱정하지 마, 만약에 나쁜 어른들이 널 갖고 생체실험 하려고 하면 내가 냅다 데리고 튀어 줄게. 핵 들고 튀자. 너한테 안전하면 나한테도 그렇겠지 뭐.

 

형, 그,

 

어?

 

너무 급한데?

 

왜? 튀지 마? 그럼 어떡해.

 

아니, 그 전에 거.

 

…… 이해찬 그렇게 안 봤는데. 왜 부끄럼 타? 남자친구를 남자친구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울 엄마도 남친 있어. 너네 아버지도 있잖아, 남친 아니고 남편이긴 하지만. 뭐가 이상해.

 

그치, 맞지, 그건 맞는데. 우리 사귀기로 한 지 몇 시간 안 됐잖아. 아직 나는 좀, 좀, 적응이 안 돼서.

 

얼른 적응해. 근데 뭐, 계속 남친이라고 불러주진 못하니까. 그건 나한테도 쫌 빡세네. 소름 돋아. …… 이게 뭐야?

 

아, 뭐야. 나 이거 못 읽어. 고전기술 언어잖아.

 

…… 해찬아.

 

어?

 

너네 고조할아버지 대박 부자였나 보다. 이 컴퓨터가 보유한 것 중에 살아 있는 인공위성 신호가 있어. 방금 연결 떴어.

 

뭐라고?

 

신호 보내볼까? 근데 자꾸 끊겨! 너 얼른 가서 저거 잡아.

 

아 추운데! 형 형 모스부호 칠 줄 알지?

 

당연하지, 이번에 이걸로 수행평가 쳤거든? 기다려 봐. 답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궁금한 거 물어볼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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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봤어?

 

아니, 이제 서두를 뗐어.

 

아 왜 격식을 차려. 그냥 묻지!

 

야, 구행성 예절이 우리보다 빡세면 어떡해. 우리 완전 예의 없는 후손이 될 수도 있어. 조심해야지.

 

아 나 춥다고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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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있잖아, 혹시, 그거 전파 잘 잡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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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있어?

 

어, 듣고 있어. 말해.

 

야차가 뭔지도 좀 물어봐주라. 나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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