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아현청려/문앟엋] 삶의 이유 上
포스트 아포칼립스
* 포타 재업
'죽음만이 인류를 구하리'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벽을 뒤덮은 넝쿨을 헤집자 익숙한 문자가 보였다. 검은색 스프레이로 누군가 휘갈겨 쓴 메시지였다. 박문대는 자신의 것이 아닌 필체를 본 게 언제 적이었는지 가늠해 보았다. 세상이 이 꼴이 나고부터 박문대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읊으며 놓지 않으려던 편지가 마지막이었던가. 목숨처럼 품어 온 편지는 2년 전 어떤 새끼가 불을 질러 조각만 겨우 건졌다. 그마저도 이제는 박문대의 필체와 동화되어 자아를 잃은 채 박문대의 팔 안쪽에 검은 잉크로 새겨져 있었다.
'또 만나게 될 거야, 문대야'
더는 들리지 않는 선아현의 목소리로 자신이 새긴 문자를 머리로 읽어보려 애를 쓰며, 박문대는 콘크리트 벽을 뛰어넘었다. 바닥으로 보이는 시멘트가 갈라진 틈으로 우거진 풀을 밟으며 박문대는 땅에 발을 디뎠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중앙에 그을린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적이든 동맹이 될 예정이든 머지않아 마주치게 될 수도 있으니 알아둘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알고 가는 게 좋았다. 박문대는 즉시 인적을 탐문하러 걸음을 옮겼다. 4년이란 시간 동안 굳어버린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나뭇가지 주변에는 풀들이 누워있었다. 떠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눌린 풀의 길이로 가늠해 보자면 최소 180은 넘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작게 눌린 풀은 아마 앉은 채로 망을 보던 사람의 것이겠지. 박문대는 아예 눌린 자리 그대로 자신의 몸을 뉘어보았다. 면적이 가로로 넓지는 않았으니 옆으로 누웠을 것이다. 박문대는 몸을 돌렸다. 쪼개진 시멘트 사이 흙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절 정도 찍힌 발자국, 그와 뒤섞여 뭉개진 문자.
'곧 보자'
박문대는 전쟁 이래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이 망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5년이었다. 온난화로 식량난이 심화하여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고 파산하는 국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구촌이라던 말은 사라지고 강대국은 너도나도 국경을 닫기 시작했다. 식량도 뭣도 없어 잃을 것 없는 핵보유국들이 사방팔방으로 핵을 터뜨려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데까지 1년이 걸렸다. 하루아침에 인류의 사 분의 일이 증발했다. 박문대의 기억 속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긴급 속보라며 대형 광고판들을 가득 메운 '핵 전쟁 발발. 즉시 지하로 대피하십시오.'라는 문구가 또렷했다. 박문대는 전학 간 선아현이 사물함에 남긴 편지를 손에 쥐고 하교하던 중이었다. 고등학생인 박문대는 지하철 역사로 뛰어들었다. 미어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역사에 비치된 방독면이라도 써보겠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지하 역시 전쟁이 터졌다. 역사 내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고 문을 걸어 잠갔던 게 박문대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재난 문자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박문대는 변기 뚜껑 위에 쭈그려 앉아 선아현의 편지를 머리에 죽어라 욱여넣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 박문대의 정신이 나가지 않게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선아현의 편지 뿐이었다.
그러나 핵이 터졌다고 해서 세상이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4년이 문제였다.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안 그래도 없는 식량의 반이 죽었다고 보면 됐다. 세계 곳곳에는 내전이 터졌고 씻고 먹을 물마저 피폭되자 전염병이 돌았다. 구호 물품은 핵 전쟁 직후 한두 번 내려오다 끊겼다. 돈 있는 사람들은 극지방과 오지로 떠났고 더는 의미 없는 부지를 차지하며 내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죽인다는 가족 놀이를 해대는 추악한 새끼들이 생겨났다. 박문대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누군가에게 붙고 떨어지고 빼앗고 뺏기고, 때로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하도 읊어서 박문대의 뇌리에 박힌 그 문장 때문에 죽고 싶은 욕구를 떨쳐내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박문대에게 남은 실낱같은 인간성은 오로지 선아현을 향한 애정 뿐이었다.
선아현이 보고 싶었다. 그게 걔의 몸뚱이든 걔가 살았던 흔적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선아현은 허물어진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옆으로 몸을 뉘었다. 쪼개진 바닥재 사이로 무성히 자란 잡초가 선아현의 볼을 간지럽혔다. 팔을 올려 얼굴에 닿는 풀을 치우려 했으나 와이셔츠가 어깨를 꽉 조이며 방해해 선아현은 가만히 감촉을 느끼기로 했다. 그때보다 몸이 자랐음에도 선아현은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고집했다. 전학 가기 전 교환한 박문대의 명찰을 왼쪽 가슴 부근에 달고 산 지 4년이 지났다. 이렇게라도 해야 문대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전쟁 이후, 선아현은 박문대가 전학 가기 전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곧 봐'라는 말을 잠들기 전마다 바닥에 한 번씩 손가락으로 적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며칠 전 1,460번을 넘겼다. '곧 보자'라는 두 단어를 깨진 시멘트 아래 흙에 끄적인 선아현은 무거운 눈을 겨우 부릅뜨고 자신의 옆에 무릎을 모아 세워 팔로 감싼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재, 재현 씨. 이번에는 꼭, 깨워주세요."
함께 다닌 지 2년이 지났으나 존대를 깨지 않는 것은 선아현이 고집하는 일종의 규칙이었다. 인류애가 사라진 세상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신재현은 다정한 척을 했다. 세상이 망해도 무너지지 않는 고결함을 가진 그 애한테는 그런 사람이 어울렸다.
"알았으니까 얼른 자요, 문대 씨."
신재현은 그게 제 옆에 누운 이의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짧아져 발목이 다 드러나는 그 애의 교복 바지 주머니 언저리에 '선아현'이라고 박힌 자수나, 피 튀기는 육탄전 속에서도 박문대 그 이름이 적힌 명찰만큼은 깔끔히 지키던 모습을 보고도 모른다면 신재현은 이 정신 나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잠든 선아현의 숨소리와 모닥불이 타는 소리, 드문드문 우는 풀벌레 소리가 뒤섞여 콘크리트 벽 안 공간에 울려 퍼지자 신재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눈 깜빡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감히 이대로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뻔한 자신을 향한 비소였다. 고결한 그 애와는 달리 자신은 얼마나 추악한 사람이던가. 다정을 뒤집어써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신재현은 선아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자신의 과보를 되새겼다.
규율이 사라진 세상은 도덕을 버린 놈들이 차고 넘쳤다. 화폐의 가치가 사라지고 이 땅에 본능만 남은 사람들의 우열을 정하는 것은 뛰어난 신체 조건과 무기 숙련도였다. 단, 여기서 뛰어난 신체 조건에 외모는 해당하지 않았다. 각종 욕구에 돌아버린 놈들을 떠올리자면 마이너스였다. 다른 나라와 다를 것 없이 한국 또한 내전이 터지고 정부와 군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스무 살의 신재현은 자신의 반반한 외모를 구호품으로 받은 방독면 아래 철저히 감췄다. 간혹 만나는 동행은 반년을 넘기지 않았다. 첫 동행인 채율에게서는 1종 운전을, 두 번째 동행인 신오에게 총질을 배운 신재현은 한쪽이 정이라도 들면 생존에 방해가 될 게 뻔하니 늘 적당 선에서 헤어지길 택했다. 그런 신재현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 유리창이 다 깨진 어느 빌라의 방 한 칸에서 홀로 쪽잠을 청하던 신재현은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놈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마를 타고 얼굴까지 흐르던 피가 속눈썹에 말라붙어 신재현은 눈을 뜰 수 없었다. 두 손은 뒤로 묶여 눈을 비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버둥거리는 신재현을 보고는 조롱하듯 귓가에 더러운 호흡을 몰아쉬며 깔깔대던 두꺼운 음성이 역겨웠다.
"새끼 존나 예쁘게 생겼는데 왜 여태 못 봤지?"
음성만큼 두터운 손이 신재현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어 들어 올렸다. 보나 마나 똘마니 여럿 데리고 다니는 근육질의 키 작은 남자일 게 뻔했다. 이딴 놈들한테 희롱당할 바에 혀 깨물고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신재현은 곧바로 실행에 옮기려던 찰나였다. 놈들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 그만 하세요."
말을 더듬는 것치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를 무시하듯 걸걸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왜, 너 말고 다른 애 예뻐하니까 질투 나?"
턱을 쥐던 손이 사라지고 터벅터벅 신발 끄는 소리가 신재현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신재현은 자신을 위해 나선 저 성인군자 유형의 인간에게 고마움 대신 '굳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들의 행동으로 봐서는 남자의 서열을 최하위, 아마 노예처럼 부려지는 중일 것이었다. '짝' 하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날카롭게 울렸다. 아마도 뺨을 맞았을 거라고 신재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죽을 용기도 없고 그딴 취급 받으며 살아가는 놈한테 고고한 동정 따위 바라지 않았다. 신재현은 처지도 모르고 남을 돕는 자를 수도 없이 보았다. 끝은 모두 죽음이었다. 사정이 어떻든, 인간성이 어쨌건 저렇게 나서다가는 남자도 금방 죽을 것이다. 때마침 무언가 단단한 것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맞았을 때 이런 소리가 들렸던가. 신재현은 남자의 명복을 빌어주지는 못해도 가는 길은 동행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근육질의 남자 무리가 다시 호탕하게 웃든 박수를 치든 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흐르는 적막을 깬 건 또다시 머리를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였다.
"야... 야...! 씨발, 저 새끼 잡아!"
우당탕거리며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부딪치거나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이 이리저리 흩어져 신재현이 놓인 공간 너머까지 멀어졌다. 여차하면 죽으려던 신재현은 다시 찾아온 삶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손목이 끊어져라 당겨댄 탓에 느슨해진 끈 사이로 신재현은 한 손을 빼낼 수 있었다. 속눈썹에 눌어붙은 피딱지를 떼어 시야를 확보한 신재현이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훑었다. 바닥에 피를 흘리며 뻗어있는 남자는 아까 그 더러운 놈인 듯했다. 신재현은 자의든 타의든 역겨운 무리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사라진 쪽에게, 용기 없는 놈이라 칭한 제 생각을 철회했다. 죽은 남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자신의 권총을 빼내어 손에 쥔 채 신재현은 현관을 나섰다.
빌라와 머지않은 공터에서 신재현은 남자 무리를 발견했다. 옅은 모색에 교복을 입은 남자애를, 우락부락한 근육의 키 작은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더러운 놈들을 그냥 두면 언젠가 화근이 되어 신재현을 찾아올 것이었다. 신재현은 남은 탄환의 개수를 가늠해보았다. 여섯. 학생을 제외한 남자들의 머릿수보다 둘 많았다.
'탕, 탕, 탕'
총소리와 함께 벽돌 바닥에 탄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셋은 머리에 구멍이 난 채 바닥에 몸을 떨궜고 남은 하나는 그 자리에 굳어 질질 오물을 쏟아냈다. 신재현은 겁먹은 놈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나쯤은 알아서 해 주면 고맙겠는데, 교복 입은 것은 손에 쥔 스패너를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신재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방아쇠를 당겼다. 솟구치는 더러운 피가 어린 쪽의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희한하게도 그 애는 얼굴 대신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손으로 가렸다.
신재현이 선아현과의 동행을 제안한 것은 감사의 표시나 호의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친절은 불필요한 요소였으니까. 무너진 세상 속 신재현은 사람을 철저하게 도구로 이용했다. 선아현도 마찬가지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선아현은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외양을 가졌다. 신재현은 언젠가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선아현을 넘길 생각이었다. 제 손으로 넘기지 않아도 그 정도 외양이라면 누구나 선아현을 탐하려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나'에 본인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지금보다 어렸던 자신의 오만이었다고, 신재현은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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