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우아현/건앟] 선악과 4(完)

공고X예고 AU, 외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현른 by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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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타 재업
* 2010년 배경

그날 이후 선아현과 나는 관습이나 의식처럼 서로를 찾았다. 주로 그 애의 교실이나 내 집, 아니 집이라 하기도 뭣한 좁은 원룸에서 몸을 섞었다. 선아현은 종종 부모님께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는 전화를 넣고 내 집에서 밤을 보냈다. 그 애의 부모님은 새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금지옥엽 키운 아들의 외박을 순순히 허락하셨다. 선아현을 집에 처음 데려왔을 때, 그 애의 표정에 무언의 측은함이 스쳤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의 난 타인의 연민 어린 눈빛에 환멸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선아현은 달랐다. 그 애는 딱하다며 혀를 차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대신 나를 위로하는 법을 알았다.

우리는 맞닿는 체온을 위안 삼아 어설프게 동정하고 품에 안아 서로를 구원하고 또 괴멸하길 반복했다. 선아현으로 인해 나는 타인의 부재로 오는 외로움에 다시금 고립되었고, 나로 인해 선아현은 타인의 애정이 주는 온기를 갈구하게 되었으니까. 선아현이 자고 가지 않는 날에 나는 5평짜리 집에 발을 들이는 게 싫어 한참 인파 속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선아현은 본인의 의사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들어주려고 했다. 그게 순수한 의사 결정권이든 추잡한 욕망이든 그 애는 내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오로지 내 의견만 따랐다. 

나의 결론은 '사랑이 아니다'에 다다랐다. 우리는 깊이 경모할 뿐이라고. 한낱 타인에게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고 따르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이 구는 게 종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아현은 우릴 사랑이라 정의했다. 열일곱, 아직 어린 그 애의 첫사랑이 고작 나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지만 나는 선아현을 탐한 순간부터 그 애를 따르기로 했기에, 사랑한다는 그 말에 별수 없이 '나도'라는 답을 했다. 돌아오는 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밝은 웃음이었으니까 거짓말을 해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거짓 가득한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내 사정을 알게 된 선아현의 부모님이 방 한 켠을 내주겠다고 제안하셨지만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욕정에 물들인 게 면목 없어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선아현은 아예 내 집에 살림을 차렸다. 두 배는 넓을 자기 방을 두고 왜 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만류했지만 그 애는 '혼자 있으면 밥 잘 안 먹잖아요'라며 꽤 굳건한 태도로 집에 들어왔다. 자기가 해줄 것처럼 들어오더니 결국 해 먹이는 건 나였으나, 어쨌거나 선아현은 목적을 이뤘다.

그 애가 온 뒤로 좁은 공간에 참 많은 게 들어섰다. 방문하는 사람 없어 한 사람분만 있던 수저와 식기를 비롯해 칫솔과 베개도 하나씩 늘어났고, 가전제품이라고는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가 다였던 집에 선풍기를 들였다. 선아현이 더워할까 봐 저금해둔 돈을 털어 마련했는데 그 애는 땀 한 방울 흘리는 게 없어 헛돈 들인 거나 다름없었지만. 하나 난 창에 언제 불어올지 모르는 더운 바람을 기다리는 대신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어슴푸레 들리는 방 안에 선아현과 나란히 앉아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습기에 누렇게 변색한 벽지도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졌다. 그 애가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와서는 스스러운 얼굴로 벽지를 가리키며 엽서를 붙여 꾸미자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어두컴컴한 집은 선아현의 존재만으로 초가 켜진 듯 환해졌다.


선아현이 부모님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돌아오는 일요일 밤이었다. 그 애만 기다리는 내 모습이 싫어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제집을 펼치고 머리를 박길 반복하고 있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는 동시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땀에 젖은 이마에 종이가 들러붙다 이내 힘없이 떨어졌다. 비밀번호를 가르쳐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애는 벨을 눌렀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문밖에 있는 사람이 선아현임을 알았으나, 그 애가 쭈뼛대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좋아서 나는 현관 앞에 서 문틈에 대고 물었다.

- 누구세요?

- 혀, 형... 저, 아현이에요.

나는 맥연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지우고 문을 열어 선아현을 맞이했다. 상기된 얼굴의 선아현은 등 뒤로 양손을 감추고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 나를 향해 인사를 대신한 말을 이었다.

- 형, 눈이요... 꼭 감아주시면, 안 될까요?

들뜬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순히 요청을 따랐다. 현관 앞에 들어선 선아현은 답지 않게 촉촉한 손바닥으로 내 팔목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서둘러 움직이는 그 애의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눈 뜨면, 안 돼요.' 하는 신신당부도 덧붙였다. 집에 다녀오면 항상 무언가 바리바리 싸 오던 그 애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는 건 처음이었다. 선아현은 방 제일 안쪽에 위치한 침대까지 움직인 뒤 어깨에 한 손을 살포시 눌러 매트리스 위에 나를 앉혔다.

-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눈앞이 노란 병아리색 상자로 가득 찼다. 선아현이 두 팔을 쭉 뻗어 건넨 상자에는 빨간 리본이 곱게 매여있었다. 상자 안에 든 것보다 그 뒤로 보이는 기대에 찬 그 애의 얼굴이 더 궁금했지만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잠자코 상자를 받았다. 리본 끝을 잡아당기기 전 올려다본 선아현은 명치 부근에 양손을 부여잡고는 호흡을 참는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부러 리본을 천천히 당겼다. 나비 모양 매듭이 형태를 잃고 빨간 끈이 무릎 위에 떨어지고, 상자를 열자 완충재에 싸인 까만 물체가 희끄무레 보였다. 완충재를 한 겹 한 겹 벗겨낼 때마다 선아현이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남들처럼 펄쩍 뛰며 좋아하는 건 성상에 맞지 않아 그 애가 바라던 반응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상자 속 물건을 본 나는 커진 눈으로 말 없이 선아현을 응시했다. MP3가 아무리 흔하다 해도 아이팟은 전교에 몇 없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이걸 내가?'라는 생각에 멍청한 표정을 지은 얼굴을 보며 선아현은 생글생글 미소를 짓다가 곧게 뻗은 다리를 접어 자리에 움츠려 앉아 내 무릎에 턱을 올렸다.

- 화면 켜서, 봐주세요.

진회색 아이팟 클래식을 손에 쥐자 알루미늄의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전원을 찾아 기계의 앞뒤를 뒤적거리던 나는 선아현이 황급히 설명서를 건넨 덕에 아이팟에는 전원 버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명서를 따라 화면을 켜자 그 애는 곧바로 다시 맑은 눈을 접어 웃었다.

- 맨 첫 번째, 음악 들어가서, 재생 목록이에요.

휠을 굴리던 엄지가 음악 카테고리에 멈춰 선아현의 말을 따랐다. [Mon rayon de soleil]이란 이름의 재생 목록을 클릭하니 서른 곡 되는 팝송이 담겨 있었다. 그 애는 선이 반듯하게 정리된 이어폰을 넘겨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 건우 형 생각하면서, 넣어봤어요. 제, 선물이에요.

선아현의 밝은 얼굴과 달리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얽혔고 대체로 결론은 하나로 수렴되었다. 이를테면 주말까지 내 생각을 하며 손수 음악을 골라 하나하나 넣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 애는 나를 위하는데 나는 선아현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는지, '내가 뭐라고'와 같은 뭐 그런 결론. 그러나 선아현의 기대에 찬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지기 전, 나는 강제로 생각을 끊어내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내려가 선아현의 옆에 나란히 몸을 붙여 앉았다. 밤공기마저 데워진 여름의 절정, 에어컨 하나 없는 좁고 습한 집에 맞닿은 피부가 끈적거렸다. 나는 이어폰 플러그를 아이팟에 연결한 후 왼쪽 헤드를 선아현의 귀에, 다른 하나는 내 귀에 끼워 넣고 [Mon rayon de soleil]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다.

[Yellow - Coldplay]

Look at the stars

Look how they shine for you

And everything you do

Yeah they were all yellow

.

.

.

Your skin

Oh yeah, your skin and bones

Turn into something beautiful

 And you know, for you, I'd bleed myself dry

For you, I'd bleed myself dry

.

.

.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 기타, 드럼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전주가 끝나고 따스하면서 공허한 보컬이 노래를 이었다. 선아현이 나를 생각하며 골랐다는 이유가 뭘지, 가사의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느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2절이 마무리되어서야 선아현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주광색 스탠드 빛이 선아현의 등 뒤에서 밝은 빛을 쏟아내어 그 애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뱉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토하고 말았다.

- 아현아, 너한테 난 뭐야?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형은, 햇살이에요.

고민 하나 없는 즉답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줄곧 도망만 치던 내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 건우 형, 저는... 형한테 무슨, 존재인가요?

사랑이 아니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언젠가 모든 건 끝이 나기 마련이니까,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선아현에게 다른 건 다 바쳐도 마음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애가 겨우 며칠 비우는 빈자리에도 뼈저리게 느끼는 외로움이 구역질 날 만큼 싫었다. 자멸감에 몸서리칠 지경이었다. 집에 들이고 밥도 먹이고 잠도 자고 몸도 섞는 사이에 마음만은 안 줬다고 자위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방 안의 적막을 깬 건 역광 속에 숨은 선아현이 작게 훌쩍이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열린 건 선아현 쪽이었다.

- 사랑해요.


불안하게 떨리는 음정이 기어이 사랑을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늘 '나도'라는 두 글자 뿐이라 언제부터인가 그게 그 애에게 상처를 줬다 해도 내가 햇살 같다던 그 애는, 나에게 몇 번이고 홀로 따스한 말을 건넸다.

- 사랑해.

- 사랑해, 햇살.

나는 우릴 종교가 아닌 사랑이라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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