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세아현/큰앟] 주인공 잡으면 죽는 병 걸림

상태 이상! 서브병 걸린 선아현

아현른 by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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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타 재업



3.

선아현의 머릿속에는 한때 자신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구역질을 할 정도로 믿지 않았던 박문대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 떠보니 낯선 천장에,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고 했던가.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아닌 나무 재질의 책상이 보였다'는 게 선아현의 입장이었다. '분명 침대에 누워서 잤는데'라는 의문에 고개를 들어 올린 선아현의 눈앞에는 연한 초록색의 칠판과 스무 명쯤 되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뒤통수가 펼쳐졌다. 몸서리를 치며 기함할 뻔한 것을 겨우 정신 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과호흡이 올 지경이었다. 선아현은 앞을 보던 시선을 내려 자신의 팔과 다리를 뜯어보았다. 드러난 맨팔과 얇은 연갈색 교복 바지 차림으로 보아하니 여름인 듯했다. 본디 있어야 할 곳은 봄이라고, 선아현은 혼란스러워 눈앞이 핑글핑글 돌 지경까지 다다른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담에서 배운 대로,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하여 제 가슴을 다독인 선아현은 자신이 왜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가야 할지 박문대의 시스템에 엮여 가상 세계를 탈출했을 때를 떠올리며 교차 검증 하기 시작했다. 목숨이 걸린 이런 일을 몇 차례 겪어본 탓에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모종의 이유로 문대가 아니라 자신이 엮였나, 이유를 아직 알 방법이 없어 선아현은 가정 한 줄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는 당장 알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아현은 박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음속으로 상태 창을 외쳐보았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누군가 그랬나.

돌발!

상태 이상 : '서브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서브가 아니면 죽음을']

정해진 기간 내로 서브 캐릭터와 이어지지 않을 시, 사망

남은 기간 : D-3

상태 창에 따르면 선아현에게 주어진 임무는 서브 캐릭터와 이어지는 것. 선아현은 박문대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증언자들을 한데 모아 말했던 때를 떠올리며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이어지기'밖에 없다는 것 뿐임을 신속하게 납득했다. 그도 그럴 게 그 부분이 제일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캐릭터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이곳이 이야기, 또는 게임 속이라는 뜻일까, 서브 캐릭터는 또 누구인지, 주인공이 따로 있을지 선아현이 파헤쳐야 할 게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복잡한 머리를 환기라도 해주는 듯, 때마침 수업 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교실을 울렸다.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르르 교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아현은 칠판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침은 11시와 12시 사이를 가리켰다. 선아현은 어느새 텅 빈 교실에 자신만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없나...'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만큼 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선아현은 고개를 저으며 나약하게 굴 때가 아님을 자각했다. 선아현은 딱 세 가지를 똑똑히 새기기로, 빈 교실에 앉아 굳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며 둘, 꾸준히 상담을 받고 멤버들과 함께 지낸 자신은 과거를 극복했으며 셋,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하루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선아현은 더 이상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이곳이 어떤 학교인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서브 캐릭터인지 아는 게 시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발로 뛰며 살펴보자고 다짐한 선아현이 의자를 뒤로 빼며 몸을 일으킨 순간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교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을 연 상대는

"세, 세진아...!"

불과 어제까지 선아현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룸메이트 이세진이었다. 반가운 얼굴에 어두웠던 선아현의 얼굴이 형광등이라도 켜진 듯 밝아졌다. 이세진의 뒤로 보이는, 마법 소년 촬영 때와 똑 닮은 까만 머리의 박문대까지. 선아현의 복잡했던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남의 교실 문을 호기롭게 열고 들어온 둘은 밥 먹으러 가자며 선아현의 팔목을 잡고 급식실로 이끌었다. 낯선 가상 환경 속에서도 두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친구로 여긴다는 사실에 선아현은 왠지 모를 든든함과 동시에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얻었다. 박문대가 그랬던 것처럼 선아현도 두 친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하면 믿어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당장은 알아야 될 게 산더미라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각자 배식을 받아 이세진의 오른쪽이자 박문대의 맞은편에 착석한 선아현은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만 몇 번 들었다 놓은 채 두 친구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행인 것은, 선아현이 이 눈치 빠른 두 친구보다 아홉 해는 더 살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선아현이 '그' 선아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들키지 않을 거라고 선아현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선아현은 가장 먼저 학교에 관해 물었다.

"우리 학교에... 무용부가, 있던가...?"

박문대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밥을 뜨던 숟가락질을 멈추었지만 짧은 적막 끝에 말은 성실하게 '없다'고 답했다. 선아현의 왼편에 앉은 이세진 역시 식판에 고정했던 고개를 틀어 선아현을 쳐다보고 말했다.

"무용? 아현이 너 무용하게?"

"아니, 그냥 생각만...! 너희는 꾸, 꿈이 뭐야?"

선아현이 알던 두 친구라면 아이돌을 꿈꿨을 것이다. 박문대는 아니더라도 이세진은 확실히. 그러나 둘은 각각 경영학과 체대 얘기를 꺼냈다. 대답을 종합해 보자면 예술고등학교도 아니고, 둘의 희망 진로도 다르다. 생각했던 것보다 현실 반영이 안 되었다는 뜻이다. 만일 문대를 괴롭힌 시스템이라면 이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론까지 닿을 수 있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동안 선아현은 미리 생각해 둔 해명 하나를 남겼다.

"아, 요즘 진로 걱정이, 많아서."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선아현이었지만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의 모습인 자신도 앞으로 사흘 동안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근심이 깊었으니까. 나름대로 정당화를 마친 선아현은 쏠쏠한 식사를 끝내고 두 친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의 끝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리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자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교실은 순식간에 공허해졌다. 다시 홀로 남겨진 선아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심정으로 가방을 챙겼다. 본가로 돌아가야 할 텐데, 자신이 알고 있는 위치가 맞을지, 외관이 바뀌었다면 알아볼 수 있을지. 물건 하나에 고민 하나를 맞바꾸듯 책상이 비워지면 머리에 고민이 쌓이는 것 같았다. 선아현의 책상에는 이제 필통밖에 남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던 선아현은 한숨을 내쉬며 일단 가보자는 생각으로 필통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의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는다고, 열린 교실 문틈으로 얼굴을 비친 박문대의 목소리에 선아현의 고뇌는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 되어버렸다. "선아현 가자"라며 고개를 빼꼼 내민 박문대를 보며 문대를 따라가면 되겠다고 반색한 선아현은 가상 현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힘찬 대답을 했다.

박문대의 걸음을 쫓아온 선아현은 어느새 영화관 안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둘이 영화관은 처음이지. 선아현은 현실의 박문대와 매표소 앞에서 영화를 고르는 고등학생 박문대의 앳된 얼굴을 겹쳐 보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시즌성 호러 영화와 어린이 영화가 즐비한 전광판 아래, 어린 박문대가 인상까지 쓰며 영화 선택을 고심하는 모습에 선아현은 설핏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박문대가 고른 영화는 뜻밖에도 샤머니즘과 관련된 태국의 한 공포 영화였다. 박문대는 귀신이 나오는 장면마다 움찔거리면서 좌석 팔걸이에 올려진 선아현의 손을 맞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선아현은 변함없이 공포 영화를 무서워하는 어린 박문대를 보며, 귀엽다는 감상과 함께 맞잡은 손가락으로 박문대의 손등을 다독여 달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선아현은 무던한 척 있는 박문대를 데리고 상영관을 나왔다. 상영관 퇴장로의 창가에는 옆 건물들의 네온사인이 비췄다.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다. 북적북적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둘은 영화관 건물의 출입구에 섰다. 박문대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선아현의 팔목을 잡고 이끌지 않았더라면 선아현은 그 자리에서 박문대에게 '내 집이 어디인 줄 아냐'는 이상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문대가 자신의 집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선아현은 군말 없이 박문대에게 몸을 맡겼다.

도심 속 인파를 뚫고 골목골목을 지나쳐 주택가에 들어선 박문대는 어느 집 담벼락 앞의 가로등 아래 멈추어 섰다. 선아현이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었다. 초입부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아는 것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 선아현은 현실과 다르게 구현된 부분이 명확하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집이 똑같았다면 세진과 문대를 본 뒤로 아침에 비해 느슨해진 자신이 더 풀어졌을지도 몰랐으니까. 가로등 불빛 아래 나란히 서 있던 박문대가 몸을 틀어 눈을 마주할 때까지, 선아현은 자신의 하루를 반성했다.

"좋아해"

박문대의 급작스러운 발언에 선아현은 사고회로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 때문에 박문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이지 않아, 느닷없고 덤덤한 박문대의 고백은 선아현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선아현의 이성은 두서없이 날뛰는 대신 차분히 하나의 가정을 내려 회로를 가동했다. 박문대가 주인공일 거라는 가정을. 처음 그랬던 것처럼 선아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속으로 상태 창을 불렀다.

이름 : 박문대

나이 : 18세

호감도 : 85%

공략 힌트 : 외모를 이용해 접근하세요

'이건...!'

선아현은 박문대의 머리 위, 허공을 보며 흠칫거린 티 내지 않으려 마른침을 삼켰다. 호감도 85%, 그리고 고백까지 받은 상태라면 박문대가 주인공일 확률이 높겠지. 주인공을 찾았다면 일이 좀 더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문대가 상처받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상태 창 너머 비치는 박문대의 인영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을 본 선아현은 대답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 문대야... 나는,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 실은..."

진실을 말한다면,

어쩌면,

문대라면.

"실은 내가 이곳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어... 나는 다른 세상을 사는, 스물 일곱의 선아현이야. 오늘, 눈을 뜨니 교실이었고... 이런 말을 들으면 많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문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이런 이유로 문대의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어린 박문대의 눈에는 당혹감이 피어났다. 고백을 거절당하기까지 했는데 보통 이유도 아닌, 영화에 나올 법한 이유였으니까. 고작 열여덟의 박문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나,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고 박문대의 마음에 바위를 던져버린 꼴이 된 게 아닐까. 선아현은 미동조차 없는 박문대를 두 눈에 담으며 밀려오는 후회를 짊어졌다.

"그런 상황인 줄 몰랐다. 타이밍 안 좋게 고백해서 마음만 어지럽힌 것 같네. 미안."

선아현의 후회와는 달리, 박문대는 선아현의 말을 믿었다. 단지 초자연적 현상을 겪어본 적 없는 고등학생 박문대가, 이 말을 받아들이기까지 사고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곳의 박문대에게도 선아현은 거짓말할 리 없는 선한 애였으니까, 증거도 뭣도 없지만 선아현을 믿기로 한 박문대였다. 일단 들어가서 자라고, 재차 미안하다는 말을 한 박문대는 선아현이 집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등 떠밀리 듯 낯선 집에 들어간 선아현은 가상의 부모님께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자신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고단한 가상 현실에도 몸을 뉠 공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기한은 앞으로 이틀. 당장 내일 학교에 가게 되면 서브 캐릭터가 누구일지 찾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 체력이라도 비축해야 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내일을 위해 선아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2.

등교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선 선아현은 박문대와 걸었던 길을 복기하며 집에서 영화관, 영화관에서 학교로 먼 길을 돌아 겨우 지각을 면하고 학교에 도착했다. 창가 쪽 분단의 맨 뒷자리에 앉은 선아현은 상태 창을 다시 한번 불러 이른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서브 캐릭터를 탐색하려 했다. 그러나 선아현의 반에는 서브 캐릭터가 없는지, 어제 박문대와 같은 경우라면 타인의 머리 위에 떠야 할 팝업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름 : 선아현

나이 : 18세(27세)

특성 :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 A급

!상태이상 : 서브가 아니면 죽음을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 A급] : 이게 되네?

상대 호감도 +10%

다만 선아현은 자신의 팝업 창을 볼 수 있었다. 이름, 나이, 상태 이상까지는 아는 정보였으나, 특이한 이름의 특성은 처음 눈에 띄었다. 하단에 적힌 특성에 관한 설명을 찬찬히 읽은 선아현은 호감도가 10퍼센트씩이나 오른다는 것에 작은 희망을 느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내려온 박문대와 이세진을 따라 급식실에 가서도 선아현은 상태 창을 부르는 데 열중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맞은편에 앉은 박문대의 팝업이 어제와 같은 것을 확인한 선아현은 오른편부터 죽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퇴식구 근처에 이질적인 투명한 무언가가 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차피 밥을 먹으러 급식실에 온 게 아니었으니, 얼른 먹고 퇴식구에 가면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선아현은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이세진이 선아현의 등을 토닥이면서 "아현아현, 그러다 체한다~"라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선아현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세진을 돌아보았다. 숟가락이 떨어져 식판 긁는 소리가 선아현의 귀에 날아들었다.

이름 : 이세진

나이 : 18세

호감도 : 60%

공략 힌트 : 있는 힘껏 아껴준 다음 멀어지세요

우선, 서브 캐릭터가 한 명이 아니다. 그러나 공략 힌트라고 쓰여 있는 문장을 읽으니 경우의 수가 하나 더 있다는 안도감이 들 뻔했다는 게 죄책감이 들 지경이었다. 문대도 모자라서 하필이면 자신의 또 다른 친구인 이세진, 그것도 자기가 알던 이세진보다 훨씬 어린 세진에게 상처를 줘야 공략할 수 있다니.

"세진이 얼굴 닳겠다"

멍하니 이세진의 머리 위를 바라보던 선아현은 그 말을 듣고 황급히 사과의 말을 쏟아냈다.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선아현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박문대의 고백을 거절했는데 같이 다니는 친구인 이세진을 공략한다면 모두에게 못할 행동이었다. 선아현은 퇴식구에 있는 사람을 공략하는 게 도덕적으로도 맞겠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식판 위에 떨군 숟가락을 고쳐 잡고 묵묵히 밥을 비웠다. '먼저 일어날게...!'라는 말과 함께 박문대와 이세진을 뒤로 하고 자리를 뜬 선아현은 길게 늘어선 테이블을 지나쳐 퇴식구를 향해 일렬로 서 있는 학생들 뒤에 줄을 섰다. 선아현은 처음 팝업이 떴던 테이블의 위치를 곁눈질로 가늠하며 다시 한번 상태 창을 호출했다. 그러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학생의 머리 위로 팝업이 나타났다.

이름 : 김OO

나이 : 19세

호감도 : 50%

공략 힌트 : 기습 키스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으세요

선아현은 발끝까지 피가 싹 빠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고가 아닌 회피라는 걸 깨달은 선아현은 앞에 선 학생의 등 뒤를 바짝 쫓아 식판을 빠르게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실로 돌아온 선아현은 에어컨 바람에라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식혀보고자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째 첫날보다 지금이 더 복잡해졌을까. 왜 시스템은 이곳에서 자신과 절친한 친구들을 이어주려고 하는지. 선아현은 시스템이 나쁘다며 원망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탓해봤자 별수 없었다. 해결 방법도 명확한 상황이었다. 아홉 살이나 어린 친구에게 상처 주기,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하기. 선아현은 이미 감은 눈앞이 더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에도, 일어나 수업을 들을 기운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회초리를 탁탁 두드리며 교탁에 선 수학 선생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몸이 좋지 않아 보건실에 가겠다'는 말을 한 뒤 선아현은 교실을 빠져나왔다.

두 동을 헤맨 끝에 보건실을 찾은 선아현은 상냥한 보건 선생의 안내를 받아 창가 근처의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에어 파스 냄새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지는 게 아로마 요법이라도 되는 양 심신에 안정을 주는 것 같았다. 호흡 가득 파스 냄새를 들이쉰 선아현은 창 너머 운동장에서 시끌시끌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눈을 붙이려고 했다. 시도는 "이세진 멋지다!" 하는 외침을 듣고는 번쩍 눈이 뜨여 보란 듯이 실패로 돌아갔다. 선아현은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건실은 운동장 바로 앞 건물의 2층에 위치하여 운동하는 아이들을 꽤 가까이 구경할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사근사근하게 구는 이세진은 이곳에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농구를 하는 중이었다. 선아현은 어린 이세진이 농구공을 튀기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룸메이트 세진과 견주어 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나 선이 뚜렷한 얼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큰 체격이 스물일곱의 이세진을 빼닮았지. 그러나 아이돌을 꿈꾸지 않는 이세진이란, 치명적인 허점이었다. 선아현은 후배 아이돌과 경연을 치렀던 어느 과거 무대 위의 이세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한 동작 한 동작 움직일 때마다 더 더를 외치며 몰입하던 그의 눈빛과 여느 때보다 가볍고 힘이 넘치던 움직임, 무대를 마친 뒤 벅차게 토하던 숨결 하나하나가 이뤄낸 전율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래, 여기는 가짜니까.'

상태 이상이 가리키는 임무를 성공해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친구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시스템이 친구들을 이용해 자신을 이곳에 가두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름 모르는 남학생보다 호감도가 더 높았던 세진이를 공략하면 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앞에 있는 어린 문대와 세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면 계산적이게 행동해야 했다. 선아현은 멍하니, 운동장의 이세진을 응시하며 이성적인 사고에 잠겼다. 그 끈질긴 시선이 몇 미터 밖까지 닿았는지, 고개를 든 이세진이 보건실 쪽을 보고 손을 붕붕 흔들며 선아현의 안중에 강력히 자기주장을 표했다. 그런 이세진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받아주기 전까지 계속 흔들 생각인 것 같은 이세진을 향해 선아현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맞받아주었다. 그러자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한 번을 보여주고는 다시 시합에 열중하는 모습이 참, 자신이 아는 이세진도 어릴 적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선아현은 상상하게 되었다.


마지막 교시까지 보건실에 누워 세밀한 계획을 수립한 선아현은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얼마 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 선생의 밋밋한 종례가 끝나자 선아현은 미리 챙겨둔 가방을 들고 황급히 이세진을 찾아 나섰다. 무작정 나온 것치고는 몇 반인지 아는 게 없어 10반이나 되는 교실 문을 전부 기웃거려야 했지만. 한 반 한 반 열린 문틈을 빼꼼 거리는 게 지칠 때쯤 선아현은 2학년 8반에 다다랐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 박문대와 책상 위에 엎드린 이세진이 보였다.

선아현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교실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박문대가 선아현을 보고는 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들었다. 앳된 얼굴의 박문대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선아현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했던, 세진이와 일이 있다며 먼저 들어가라는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었다. 문대 성격에 궁금은 해도 캐묻지는 않을 걸 선아현은 알았다. 선아현의 예측대로 박문대는 부수적인 질문 없이 '그래, 먼저 갈게.'라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곧 자리를 떴다. 교실 앞까지 박문대를 배웅한 선아현은 도로 돌아와 자는 이세진을 지나쳐 그의 앞 의자를 들어 소리 없이 빼내었다.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의자에 걸터앉은 선아현은 이세진의 잠든 모습을 보며 공략 힌트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다. 세진이에게 어떻게 잘해 줄 수 있을까.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한 선아현은 길게 늘어진 노란 햇빛이 내려앉은 이세진의 얼굴을 가려주는 것부터 행동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때쯤 선아현의 손 틈으로 이세진이 끔벅 끔뻑 눈을 깜빡이는 게 보였다. 곤히 잠들었던 그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선아현과 시선이 얽히자, 잠이 확 가신 듯 이세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아현아현~ 너무 다정한 거 아냐?"

다 잠긴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구는 이세진의 말에 웃음을 흩뜨리며 선아현은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웠다. 시간이 늦었다고 얼른 집에 가자며 기지개를 켜는 이세진에게, 선아현은 아예 가방까지 대신 들어줄 기세였다. 이세진은 자연스럽게 선아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선아현의 손에 든 자신의 가방을 뺏어 들고는, 안 깨우고 왜 기다려줬냐고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아현은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해사하게 웃어넘겼다. 이세진은 어제부터 묘하게 달라진 선아현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다. 다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뭐야~ 날 너무 좋아하네"라며 선아현과 같이 웃어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선아현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저, 세진아...! 오늘 세진이 집에서, 자고 가도 괜찮을까?"

교문을 나서자 별안간 묻는 선아현에게, 이세진은 선아현이 도대체 어디까지 달라진 셈인지 지켜보고 내일 박문대와 말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흔쾌히 허락했다.


어느새 시침은 자정을 향했다. 친구의 급작스러운 방문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선아현을 맞아준 세진이네 어머님이 차려주신 따끈한 저녁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세진의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시간이 지났다. 잘 시간이 되자 이세진은 선아현에게 자신의 하얀 반소매 티셔츠와 언젠가의 반 티였던 것 같은 축구복 하의를 건네주었다. 샤워를 마친 선아현이 이세진의 옷으로 갈아입고 방에 들어갔을 때, 이세진은 침대가 아닌 바닥에 두툼한 이불 몇 장을 깔고 누워있었다. 선아현은 양보한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몸을 누였으나, 아무리 가상 세계라고 해도 자신 때문에 불편한 잠자리를 갖게 된 어린 세진에 마음이 불편해진 선아현은 이세진에게 제안했다.

"세진아... 올라올래...?"

이세진은 간신히 잡고 있는 이성이 뚝 끊기는 기분이었다.

'같이 자자고? 180 넘는 애 둘이 슈퍼 싱글 침대에?'

선아현이 아무래도 단단히 더위를 먹은 게 아닐까, 이세진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더위를 먹은 건 자신일지도. 이세진은 무슨 소리내며 기함하는 대신 선아현의 말을 순순히 따르며 몸을 일으켰다. 선아현은 벽으로 달싹 몸을 붙여 이세진의 자리를 만들었고 빈 곳에 몸을 눕힌 이세진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선이, 조금 얇지...'

가까이에서 본 이세진의 옆태는 생각 외로 더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박문대와 이세진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자신의 세상이 좀 더 일찍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는데, 이렇게라도 둘의 어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행운이라는 감상까지 들었다. 현실의 멤버들을 떠올리자니 어쩐지 순수해 보이는 눈앞의 이세진을 바라보며, 선아현은 눈을 째끗이며 웃었다. 반면, 이세진은 겨우 한두 뼘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간지럽게 콧바람을 내며 웃어대는 선아현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는 이세진에게 "귀여워서"라고 말하는 선아현은, 계획한 행동이 아님에도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이나 다름없었다. 참다못한 이세진도 몸을 돌려서 선아현의 눈을 마주했다. 둘은 사이에는 숨소리만 오고갈 뿐이었다. 어색함에 눈을 굴려도 이세진의 시선은 끈질기게 선아현의 것과 얽혀왔다. 선아현은 한순간에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에 긴장하여 밭은 숨을 죽여 내뱉었다. 그러나, 계획에도 없이 굴러들어온 절호의 기회였다.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상의 친구와의 어색한 분위기는 꼭 필요했으니까. 선아현은 시스템을 향한 일격이라 위안 삼으며 회심의 한마디를 날렸다.

"세진아, 아까 농구... 잘하더라."

그 커다란 갈색 눈을 쳐다보고 말할 자신은 없어 이세진의 턱끝에 대고 말했다. 아홉 살이나 어린 애에게 몹쓸 짓을 하는 어른 같았으니까. 선아현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른스럽지 못한 것인지, 뉘우치며 상태 창을 호출했다. 원망스럽게도 홀로그램은 선아현의 눈앞이 아닌 이세진의 머리 위에서 광을 내며 나타났다. 선아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름 : 이세진

나이 : 18세

호감도 : 70%

공략 힌트 : 있는 힘껏 아껴준 다음 멀어지세요

10퍼센트가 올랐다. 선아현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심정으로 더 나가보자 결심했다. 시야에 걸린 이세진은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을 했다. 선아현은 눈을 질끈 감고는 "너, 너만, 보이더라..."라며 죄책감 담긴 고백을 뱉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이세진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저지른 낯부끄러운 행동에 선아현의 몸은 금세 열이 올랐다. 불편한 마음을 몸이라도 움직여서 깨보려 했으나 바르작거리며 움직인 다리가 이세진의 다리에 스쳤다. 그게 무슨 신호탄이라도 된 듯 굳게 닫혀있던 이세진이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 선아현. 너 진짜 뭐야?"

그 한마디에 선아현은 온몸이 굳는 듯했다. 세진이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낸 건... 이제는 먼 과거인 세진이 형 때였나.

"박문대랑 붙어먹을 때는 언제고"

이어지는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잘 안됐나 봐? 왜, 너 갑자기 뭐 장난해? 거짓말을 할 거면 정성껏 하든지 뻔히 보이는데 너 내가 얼마나..."

선아현은 이세진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세진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간 것은 사실이었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됐어..."

화를 삭이려는 듯 숨을 고른 이세진은 등을 돌려 상황을 회피했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에게조차 한 마디 못 하고 쩔쩔매는 자신이 한심했다.

"미안해, 세진아..."

그리고 짧은 순간 수십 번을 고민한 끝에 박문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린 세진에게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려 해도 눈앞의 이세진은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감정을 비칠 줄 아는, 자신이 알던 이세진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세진아 실은, 나 네가 알던 선아현이, 아니야. 나는 다른 세상에 사는 스물일곱의 선아현이고, 어제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 믿기 어렵겠지만, 눈을 떠보니까 이곳에 떨어졌고 내가 너의 호감을 얻거나, 다른 남학생과 키스를 해야 한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네가 나을 것 같아서... 그, 내 말에는 어떠한 증거도, 네가 믿을 이유도 없다는 걸 알아. 나는 너를... 속이려 했어. 숨기려고 해서, 너에게 어떠한 설명도 없이, 호감도를 올리는 용도로 너를 이용하려고만 해서... 정말 미안해."

미동조차 없는 이세진의 넓은 등판이 세진과 자신 사이에 생긴 두꺼운 벽처럼 다가왔다. 세진이는 믿어줄까. 낮게 깔린 음의 "자"라는 짤막한 말이 이세진의 등 너머로 들려와 선아현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친구들과의 직접적인 갈등이 처음인 선아현은 자신이 너무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어 이세진의 마음에 두 번 상처를 준 게 아닐지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얼굴 모르는 남학생을 공략하는 게 맞았다는 후회도. 굳게 돌아선 이세진의 등을 마지막 광경으로, 눈을 감은 선아현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1.

이튿날 아침, '세진이는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갔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선아현은 미안한 마음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학교로 향했다. 선아현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하루하고 반나절 뿐이었으나, 남학생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보다 이세진의 상태가 괜찮은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무작정 찾아가 이세진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친구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일 게 분명했다. 세진이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선아현은 재촉하는 대신 자신의 친구를 기다려 주자며, 당장은 주어진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하는 데 하루를 보내기로 다짐했다.

애석하게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한 채 소모되었다. 수업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공책의 맨 뒷장에 스포츠머리 학생에게 접근할 계획을 끄적이다 보니 선아현의 오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책상에 머리가 붙을 정도로 집중하며 경우의 수를 따지는 선아현의 뒤통수를, 박문대가 쓰다듬지 않았다면 그대로 오후까지 날릴 셈이었다. 박문대의 손길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올린 선아현은, 매일 보이던 박문대의 동행이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아현이 찾는 게 무엇인지 눈치챈 박문대는 '이세진은 오늘 안 먹는대'라고 말을 전했다.

식판을 두고 선아현과 마주보고 앉은 박문대는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선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를 던졌다.

"선아현, 밥 먹고 얘기 좀 하자."

문대도 못 믿겠다는 말을 하면 어쩌지. 선아현은 문득 든 생각에 숟가락질을 멈칫했으나 이를 본 박문대가 단호히 "믿는다"고 한 덕분에 걱정을 덜고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급식실에서 나온 박문대가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선아현을 이끌고 간 곳은, 점심시간이 다른 3학년의 체육 활동이 한참인 강당의 구석자리었다. 시끌시끌한 소리가 강당에 울려퍼지는 속에서 박문대는 나직하게 선아현을 돕겠다며 자신의 추측을 늘여놓았다. 선아현이 난데없이 이곳에 떨어졌다면 나갈 방법도 있지 않냐며 자신이 본 웹소설 몇 개를 예시로 든 박문대는 선아현에게 혹시 말하지 않은 게 있냐고, 있다면 전부 믿을 테니 자신에게 다 털어놓아달라고 부탁했다. 박문대의 말에 선아현은 머뭇거렸으나, 이내 시간이 얼마 없으니 문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 아래 순순히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때마침 우연인지 강당 안에 체육 수업을 즐기는 무리 안에 그 스포츠머리 남학생이 있어 설명이 수월했다.

"저... 문대야, 저기 노란 조끼 입은, 머리 짧고 키가 큰 사람 보여? 내가 저 사람이랑, 내일 안으로 키스를 하지 않으면 죽는대. 만약에, 키스를 성공한다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런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 "

선아현은 이세진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나의 루트만 남겨두었으니 그 얘기는 제외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박문대 눈썹을. 한껏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선아현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죽는다는 말에 침음까지 섞으며 머리를 굴린 박문대는 한 가지 방법을 뽑아냈다.

"너에게 주어진 미션이 그렇다면 그냥 맥락없이 저질러도 성공할 것 같은데? 과감하게. 목숨이 달렸다며 왜 남을 생각해. 그냥 가서, 갈겨."

말을 마친 박문대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강당의 한 켠에서 호루라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농구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체육 교사에게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어느 학년 몇 반 수업인가요?"라며 물었다. 지루하던 참에 누군가 말을 건 게 즐거웠는지 교사는 그게 왜 궁금하냐며 실실 웃었으나 박문대가 몇 번 대화를 받아주고 난 뒤 답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3학년 1반이래. 끝나고 오늘 수업 다 끝나고 찾아가서 잡고 그냥 해. 왜 왔냐고 물어보면 형 보러 왔다고 하든가. 어쨌거나 저쪽도 좋아할 것 같은데."

박문대는 어느 순간부터 농구공을 골대에 집어넣고 나면 선아현을 힐끗거리며 환호하는 남학생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선아현에게 지시했다. 강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선아현은 분명 다른 사람 먼저 생각할 것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경쾌한 타종이 울리며 찾아온 하교 시간, 종례를 마친 선아현은 박문대와 짠 계획대로 3학년 1반을 찾아 나섰다. 우르르 나오는 학생들 틈에 교실 창밖을 기웃거리는 선아현에게 문제의 남학생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선아현은 오후 내내 마음속으로 연습했던 것처럼 대사를 읊었다.

"혀, 형 보려고 왔어요..."

상태 이상이 풀리기만 하면 사라질 세계였으니 선아현은 주변 시선을 무시하고 이대로 남학생을 이끌고 키스만 하면 될 일이었다. 꽤나 생생한 가상 현실이 장벽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선아현은 아직 화해하지 못한 어린 세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머뭇거리던 사이 남학생은 싱긋 웃어보이며 한발 두발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선아현은 건침을 삼키며 타이밍을,

"아현아~"

선아현의 등 뒤로 거짓말처럼 이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유들유들한 어투로 말을 걸며 손을 흔드는 이세진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해. 한참 찾았잖아~"

성큼성큼 보폭을 넓히며 다가온 이세진은 선아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남학생이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며 이세진에게 "아현이가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비켜줄래?"라며 말했지만, 이를 차단한 건 선아현이었다. 선아현은 이세진이 우선이었다. 제 친구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라면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하기 적절한 때가 지금이 아닐까.

"내, 내일 꼭 말씀드릴게요. 죄송해요..."

고개 숙여 사과한 선아현은 남학생을 뒤로하고 이세진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간 이세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팔을 떨어뜨리고 선아현과 거리를 두었다. 서운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선아현은 자신을 먼저 찾아준 이세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운동장의 어느 가로수 그늘 아래 걸음을 멈췄다.

"세진아, 먼저 와 줘서 고마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었는지 이세진이 선아현의 말을 자르고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렇다는 애가 그 남자한테 가서 뭐, 키스라도 하게 찾아가?"

이세진을 두고 사라지려던 게 맞았기에, 선아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씹어대는 선아현을 향해 이세진이 운을 뗐다.

"할 거면 나랑 해."

이세진은 잇새로 말린 선아현의 아랫입술을 제 엄지로 눌러 끄집어 내고는 입술을 겹쳐왔다. 닿은 틈으로 선아현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지자 이세진은 쪽 소리를 내며 가벼운 입맞춤으로 떨어져 나왔다.

"호감도라는 거, 올랐어?"

조금 전과는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이세진의 말에 선아현은 황급히 상태창을 찾느라 육성으로 외치고 말았다.

이름 : 이세진

나이 : 18세

호감도 : 80%

공략 힌트 : 있는 힘껏 아껴준 다음 멀어지세요

"아... 아직, 조금 남았어."

이세진은 포플러 나무 아래 커다란 이파리의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선아현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는 물었다.

"지금은?"

이름 : 이세진

나이 : 18세

호감도 : 90%

공략 힌트 : 있는 힘껏 아껴준 다음 멀어지세요

선아현은 대답 대신 이세진의 아랫입술을 자신의 것에 머금어 핥는 선택지를 택했다.

"100... 다 채웠어, 세진아."

마지막으로 이세진은 또 한 번, 웃어넘기기를 택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선아현이 알던 이세진보다 감정을 감추는 데 미숙했다.

"잘 가."

그 웃음에는 별수 없는 상황에 대한 체념의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아현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심하며 말을 고르려 했으나, 이세진의 인사와 함께 선아현의 시야가 캄캄하게 변했고 이윽고 선아현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0.

다시 의식을 찾은 선아현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익숙한 천장과 그를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걱정 가득한 룸메이트의 얼굴이었다. 선아현은 반가운 나머지 그만, 몸을 벌떡 일으켜 이세진을 있는 힘껏 부둥켜안고 세진의 이름을 외쳤다. 이세진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선아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잘 돌아왔어, 아현아현~"

이세진이 귀환한 아현을 홀로 환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아현이 가상의 세계에 떨어져 죽을 병에 걸린 게 순전히 이세진 탓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이세진은 그의 룸메이트인 선아현이 하루가 지나도 잠에서 깨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문제가 생길 때 이래 그랬듯 이세진은 박문대를 불러 의논하려 했으나, 하필이면 박문대가 예능 촬영 때문에 며칠간 집을 비운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숲속의 왕자라도 된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 선아현을 옆에 두고 이세진은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아현이 어떤 상태인지, 사라진 줄 알았던 시스템의 재등장인 건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이세진 앞에 난데 없이 웬 홀로그램이 등장할 줄이야. 이세진은 결단코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름 : 선아현

나이 : 18세(27세)

특성 :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 A급

!상태이상 : 서브가 아니면 죽음을

관찰하시겠습니까?

[Yes / No]

머뭇거릴 이유가 없던 이세진은 허공에 뜬 Yes 버튼을 눌렀다. 팝업은 비디오 화면으로 전환되어 선아현과 나란히 마주 보며 누운... 이세진의 모습을 한 고등학생을 띄웠다. 묘하게 싸한 분위기에 이세진은 질겁하며 입을 막았으나 이내 화면에 흘러 나오는 자신의 화난 음성이 제 귀에 꽂혀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뭐야. 왜 싸워...'

화면 속 이세진의 날선 음성이 멈추자 자신의 상황을 줄줄이 사실대로 고백하는 선아현이 보였다. 자기였다면 그러지 않았겠다만, 언제 봐도 참 선한 친구다. 어쨌거나 그만큼 신뢰가 두텁다는 거니까, 이마를 짚으며 침음을 흘린 이세진은 선아현이 처한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호감도를 올리거나 모르는 남학생과 키스라니. 부활한 시스템이 돌아버려 선아현을 데리고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는 건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해답은 그날 밤, 꿈속에서 얻을 수 있었다. 하얀 배경의 방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이세진은 제 발치에 놓인 작은 하트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에폭시 재질의 볼록한 빨간색과 노란색 하트 중, 이세진은 노란색을 집어 앞뒤로 뒤적였다.

"우리는 널 도와주는 거야."

발밑에서 기계식 음성이 퍼지며 이세진을 기다렸다는 듯이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빨간색 하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기존의 시스템과는 다른 종족이며 오로지 선의로 선아현을 상태 이상에 빠뜨렸다고 했다. 앞에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꿈속에 멋대로 들어와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좋은 애들인지, 이세진은 의문이 들었으나 궁금했던 사항이니 묵묵히 들었다. 그 기생수들의 목적은 오로지 재미와 호기심, 사랑이라는 감정이 신기하단다. 빨간 애가 먼저 이세진의 몸에 들어와 짝사랑 상대가 선아현이라는 것을 파악했고 노란 애에게 알려준 다음, 노란색 하트처럼 보이는 기생수가 선아현의 몸으로 들어가 상태 이상을 만들어 굴리는 방식이라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친히 늘여놓았다. 빨간 하트는 이어, 그 애가 성공해서 깨어난다면 둘의 사랑은 이뤄진다는 게 주장을 했다. 기계 음성에 따르면 선아현에게 임무를 실패하여 죽게 될 정도로 어려운 임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난이도 조절을 위해 충분한 힌트를 제공했다고 분명 살아돌아올 것이라 한다. 걱정되면 계속 지켜보라는 말을 끝으로 일방적인 설명을 마친 빨간 하트는 '이제 간다'며 이세진의 꿈에서 사라졌다.


이세진은 선아현의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모르는 척 한껏 눈썹을 내려뜨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시치미를 뗐다. 아무리 캐물어도 선아현은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아... 고등학생이 되었어...!'라고 애매하게 흘릴 뿐 그 이상은 함구하기 바빴다. 이쯤 되면 놀리고 싶기도 한 게 사람의 심성이지 않나. 이세진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아현아"

가상 현실 속 자신을 오마주 삼아,

"이제 어디 가면 안 돼."

이세진은 화면 안의 선아현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방비한 선아현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어 부드럽게 살을 빨아당겼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이세진은 선아현의 귀끝부터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것을 보고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방문 너머로 배세진이 혼비백산하며 "얘들아...! 류청우가 안 일어나!"라고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선아현을 끌어안고 몇 번을 쪽쪽댔을 텐데. 여전히 열이 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아현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이세진은, 제 동명이인이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방문을 열며 외쳤다.

"형님 동네방네 말하지 마시고 조용히~ 제가 도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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