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세아현/큰앟] 녹음(綠陰) 1

아현른 by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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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타 재업
* 강압적인 묘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이세진은 초록이 싫었다.


작년 즈음이었나. 창에 빼꼼히 보이던 초록이 걷잡을 수 없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게. 세진은 언젠가 저 초록이 자기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이맘때, 그러니까 장마철이 되면 초록은 더 짙어졌다. 방 안 가득한 녹빛이 꼭 녹조가 잔뜩 낀 어느 더러운 물의 밑바닥처럼 느껴져, 이세진은 장마철이 되면 정처 없이 밖을 떠돌거나 연습실에 틀어박혀 해가 저물 때쯤 숙소로 돌아가기 일수였다.


초록은 밖에서 보면 퍽 볼만한 경치였다. 붉은 벽돌 빌라의 한 면을 가득 덮은 능소화 덩굴.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을 멈춰 각자의 눈, 또는 휴대폰 렌즈에 초록을 담아 갔다. 지난 봄 처음 숙소에 들어오게 된 애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옅은 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들어 연발 셔터를 눌렀다. 입주한 지 석 달이 흘렀는데 그 애는 여전히 숙소 앞에 멈춰서 꼭 사진을 찍고 갔다.

이세진은 머리 색이 꼭 보리를 닮은 그 애를 가끔 '보리꼬리야'라고 부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머쓱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무얼 감추려 하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괜히 자기 앞머리를 쓱쓱 쓸며 정돈했다. 그러나 그 애의 손놀림보다 세진의 눈치가 더 빨랐다. 이세진은 자기가 보리꼬리라는 애칭을 부르면 홍조 있는 그 애의 뺨이 미묘하게 더 붉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거실 하나, 방 하나. 그 좁은 방에 가구라고는 이층 침대 하나, 열아홉짜리 남자 둘. 온종일 연습실에서 부대끼는 것으로 모자라 단둘이 좁은 방 안에서 같이 자고 일어나야 했다. 아이돌이 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이세진은 단체 생활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이전 소속사에서는 다섯 명이 방 두 개 가지고 살았었는데, 불편한 거야 많지만 데뷔만 한다면 몇 날 며칠이고 함께 잘 수 있었다. 데뷔 조에서 떨어지고 소속사를 옮겨 온 지금 숙소도, 어두침침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도 있고 나쁘지 않았다. 그 애가, 그러니까 선아현이, 어디서 발레인가 무용인가 하다 갑자기 아이돌 하겠다고 나타난 선아현이, 자기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이세진은 모든 게 괜찮았었다.

'밀릴 수도 있겠다.'

중소도 아닌 소기업에서 얼굴부터 춤까지 되는 난놈 하나 나왔다고, 여태 관심 없던 사장까지 연습실로 내려와 선아현을 향해 칭찬을 쏟아붓는 동안 이세진이 자신에게 내리는 비평은 불안 그 자체였다. 에어컨 고장 난 연습실에서 몇 시간이고 춤을 추던 그 애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천성이기라도 하듯 땀도 금방금방 말라 뽀송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입에 발린 말들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그 애는 호흡이 벅찬 건지 칭찬이 벅찬 건지 얼굴을 붉힌 채 멋쩍게 웃으며 숨을 골랐다. 선아현의 옆에서 억지로 미소 지으며 서 있는 이세진에게, 회사에 딱 하나 있는 안무 트레이너가 한마디 건넸다.

"음, 세진이는 뭐... 늘 잘 하고 있고, 아현이 좀 잘 챙겨줘. 내년쯤 둘 다 데뷔하게 열심히 하자. 알았지?"

이세진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했다. 사장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선아현의 어깨만 두드리다 반지하 연습실에 난 하나뿐인 창에 빗줄기가 후드득 내리치는 소리에 어이쿠 소리를 내며 창밖에 난 땅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의 발이 비를 피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급격히 어두침침해진 연습실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사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분주히 마무리를 했다.

"어휴, 비가 갑자기 오네... 허허, 우산이 없어서. 다음에 봅시다. 세진아, 아현이 잘 부탁한다."

이세진이 되지도 않는 애칭을 부르며 그 애에게 살갑게 구는 척을 그만둔 것은 그날부터였다. 바야흐로 장마, 기분 나쁜 초록이 방에 드리우는 딱 이맘때 말이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다 귀찮아졌다고, 이세진은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묻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도 함께 집에 오는 일이 없는 세진을, 그 애는 초록이 빛을 삼킨 캄캄한 방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평가가 있고 난 며칠 뒤, 천둥이 요란하게 치는 밤이었다. 번쩍이는 번갯불에 덩굴 이파리들의 그림자가 방 안에 가득 드리웠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 선아현이 일 층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철재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거센 비바람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세진이, 우산 있었나?'

최근 들어 차갑게 변한 그의 태도에도 선아현의 머릿속에는 온통 세진으로 가득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지은 별명들을 부르며 진갈색 머리를 맞대어 오는 세진이었는데, 이제 세진은 별명을 부르기는커녕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었을 뿐더러 연습이 끝나도 함께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내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녹음이 짙어져 가는 저 능소화의 이파리처럼, 선아현의 불안은 나날이 뚜렷해졌다. 새어나가지 않게 잘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혹여 들키기라도 한 걸까.

선아현이 불순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세진을 처음 봤을 때부터였다. 초록 덩굴로 가득 덮인 빌라 아래 까만 모자를 쓰고도 훤칠한 세진의 모습은 아직도 선아현의 눈에 선했다. 모자챙에 그늘진 얼굴에도 반짝이던 짙은 갈색 눈을 보면 꼭 여름의 태양을 닮아 능소화가 핀다는 그 빌라와 세진이 퍽 잘 어울린다고 선아현은 생각했다. 봄바람이 선아현의 마음마저 간질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눈이 빛을 죽이고 자기를 바라볼 때마다 선아현의 심장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아현의 마음은 세진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에 막 잠에서 깨서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할 새도 없이 선아현은 하얀 반팔 티셔츠 한 장과 자주 입는 까만 트레이닝 바지를 황급히 사지에 끼워 넣고 방을 나왔다는 말이다. 선아현은 현관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투명한 비닐우산 하나와 철사 하나 빠진 까만 장우산 하나를 집어 들고 낡은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비가 올 때마다 꿉꿉한 곰팡내가 나는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자 보안장치 하나 없는 빌라 문이 바람에 의해 덜컹덜컹 흔들리는 게 보였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가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빗물로 넘실거렸다. 어쩌면 연습실이 물에 잠겼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선아현은 서둘러 문을 밀고 나가 까만 우산을 펼쳤다.

선아현의 손에 들린 망가진 우산은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거센 장대비가 바람과 함께 몰아치자 우산이 펄럭이며 되려 선아현의 머리고 몸이고 잔뜩 적시는 꼴이 됐다. 숙소에서 연습실까지 고작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건만, 연습실 건물에 다다르자 선아현의 옷은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흠뻑 젖어있었다.


금이 간 천장 아래 갖다 놓은 양동이에 빗물이 똑, 똑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며칠간 이세진은 춤을 추고, 추고, 또 추고 몸이 부서져라 춤만 췄다. 전에도 그랬다. 데뷔 조에서 밀려난 그날, 이세진은 이전 소속사의 번듯한 연습실에서 새벽 내내 춤을 췄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질 것 없었지만. 어디까지 곤두박질쳐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이세진은 반지하 창문 위로 보이는 땅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끼익 하는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연습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보리 색 머리가 보였다.

"우산... 없을 것 같아서..."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좁아터진 연습실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선아현은 물에 빠진 생쥐마냥 쫄딱 젖은 채 서 있었다. 그런 선아현을 물끄러미 쳐다본 이세진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며 문장의 절반 정도를 입 밖으로 낸 참이었다.

"나, 나를...!"

선아현이 처음으로 격한 감정을 내비치며 이세진의 말을 잘랐다.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내질러 놓은 것치고 어렵사리 물음을 마무리한 선아현이 고개를 떨구고 연습실 나무 바닥을 내려다 봤다. 이세진은 언젠가 이 질문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거라고 생각은 해왔건만, 벌벌 떨며 서 있는 상대 앞에서 막상 '그냥 다 귀찮아졌다'는 말을 하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세진은 결국 제 속내를 까발리기로 했다.

"선아현 난 네가 날 집어삼킬 것 같아서 무서워."

잔뜩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울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선아현의 눈이 올곧게 이세진을 향했다.

"그, 그게... 무슨 뜻이야?"

 하찮고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제 속내를, 이세진은 한 번 더 고했다.

"괴물 같다고, 너."

선아현은 머리부터 서서히 피가 몸을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든 각오는 되어 있었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팽팽 돌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아현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물이 차올랐다. 꼴사납게 울고 싶지는 않았던 선아현은 온. 힘을 다해 겨우 한마디 짜낼 수 있었다.

"미, 안..."

툭 치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바들바들 떠는 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을 뚝뚝 흘리며 온갖 불쌍한 행색을 하는 것도 이세진은 전부 짜증이 났다. 그래봤자 떨어질까 봐 볼품없게 떨고 있는 건 자기였으니까.

"네가 뭐가 미안한데?"

이세진이 연습실 문 앞에 간신히 선 선아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쏘아붙이자 선아현이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을 바닥에 떨구며 중얼거렸다.


"티가, 나는 줄... 모, 몰랐어... 나는 숨기려고 했는데... 미, 미안... 미안해... 미안해..."

드문드문 뱉어진 선아현의 말뜻을 이해한 이세진은 헛웃음이 났다.

"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

어느새 둘의 거리는 한 뼘 사이로 좁혀졌다. 이세진이 손을 뻗어 선아현의 턱을 우악스럽게 끌어당겼고 선아현의 입술이 그대로 이세진의 것에 포개졌다. 선아현의 눈물이 볼을 타고 이세진의 입술까지 흘러 들어왔다. 선아현의 입안처럼 축축하고 뜨거웠다. 선아현이 상처받으리란 것쯤은 알았다. 좋아하는 게 얼굴에 티가 나는 저 순수한 애한테 이세진은 되려 자기가 괴물이 되어 할퀸 셈이었다. 입안이 헤집어진 선아현은 자꾸만 힘이 빠지는 두 다리를 겨우 딛고 이세진을 밀쳐내, 도망치듯 연습실을 벗어났다. 선아현이 나가고 활짝 열린 연습실 문 아래로 쓰러진 우산 두 개가 이세진의 눈에 들어왔다. 빗물 가득한 이세진의 망가진 우산과 물 한 방울 안 묻은 선아현의 멀쩡한 비닐우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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