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윤자양 로그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천장,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에 앉으면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허리에서 물결친다. 보통 집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날을 세워 잠을 편히 자지 못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잠을 푹 잔 것 같은 느낌에 분홍빛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인다. 침대 아래 바닥에 놓인 흰 거실화에 두 발을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딸린 화장실로 걸어간다, 그리 오래 걸리는 거리는 아니었으나 맨발이 맨질맨질한 바닥에 닿는 것이 싫었다. 발밑에 걸릴 물건이나 사소한 머리카락 따위도 없을 텐데 말이다. …졸려. 생각하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면 아직 잠이 닦이지 않은 얼굴이 보인다. 헤어밴드를 한 후 미지근한 물을 틀어 세수를 한다. 그제야 잠이 깬 듯 눈에 활기가 도는 듯 했다. 세수하고, 양치도 하고. 헤어밴드를 뺀 뒤 앞머리를 정리했다. 머리 모양은 아마 고용인들이 만져 줄 테니 자신이 할 일은 옷장에 걸려 준비되어 있는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가는 것 뿐이었다. 오늘은 이 옷이구나, 흰색 블라우스에 녹색의 롱 스커트를 바라보며 잠옷을 벗고 블라우스를 몸에 걸친다. 치마도 입고, 양말도 신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

짧은 아침인사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좋은 아침이에요,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끄덕임이 익숙한 건지 고용인은 이미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식탁과 세트인 디자인의 의자를 빼 주는 고용인의 움직임에 맞춰 의자에 앉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담긴 투명한 디자인의 잔과 음식이 든 접시와 식기가 놓인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라니, 점심은 안 먹어도 되겠는데. 1인분의 고기보다 작은 사이즈의 고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고기를 썰어 한 입 먹는다. 자극적인 맛이었다. 요리사가 바뀌었나, 내가 먹을 요리라고 전달받지 못한 걸까. 우리 오빠가 먹을 줄 알고 만들었다거나…?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소리 없이 잔을 내려놓은 후 스테이크를 빤히 쳐다보면 고용인들이 눈치를 본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아가씨? 말에는 아니요. 짧게 대답하며 스테이크 한 조각을 더 썰어 입에 밀어넣고 씹는다. 최소한의 칼로리 섭취였다. 반쯤 먹고 남겼었나, 그보다도 덜 먹었었나.

“머리 만져 드릴게요, 이쪽으로….”

“…고마워요.”

저희 일인걸요, 아가씨. 한 방으로 이동하면 몇십 벌의 옷들과 화장품, 귀걸이와 반지, 악세사리, 향수 병 따위가 늘어져 있는 광경이 들어온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쓰셨던 방인데, 현재 어머니는 다른 방을 쓰신다며 자신이 이 방을 받았다. 일종의 드레스룸이다. 화장대 앞의 의자에 앉으면 고용인들 한 두명이 붙어 조잘거린다. 대답을 바라지 않고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는 것이라 굳이 대답은 하지 않는다. 사모님이 바이올린 연주회에 나가신다거나, 사장님께서 새 프로젝트 때문에 늦으신다거나, 수련 도련님께서 의대에 적응을 잘 하고 계실까 걱정하는 내용 등등이기 때문에 굳이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 이야기도 아니니까, 윤씨 가에서는 절대 아가씨 앞에서 아가씨와 관련된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꽤나 예민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욕이라도 하는 줄 알고 인상을 찌푸리고는 했으니까.

“머리는 틀어 올릴까요? 가벼워 보이고 좋을 것 같아요.”

“마음대로 해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고용인이 능숙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동그랗게 묶어 올렸다. 땋은 머리로 포인트를 준 건 덤이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는 건 오랜만인데,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만지작거렸다. 오늘 밖으로 나갈 예정이 없으시다고 하셔서요, 밖에 나가실 때는 머리를 내려 드릴게요. 자신의 행동을 보고 고용인 하나가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비어 있는 귀에는 초록색 보석이 박혀 있는 화려한 귀걸이를 끼워 줬다. 오늘의 포인트 컬러는 녹색인가 보다. 금색에 녹색 보석이 꽤나 잘 어울렸다. 손가락에 끼울 반지를 고민하는 고용인들에게 왼쪽 손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자 반지가 들어 있는 보관함의 뚜껑이 소리 없이 닫혔다. 저희가 순간 깜빡했네요, 은재 도련님이 계신데 무슨 다른 반지를….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성은재라는 사람의 얼굴은 몰라도 존재 자체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우연히 듣기를, 그 자양 아가씨의 성격을 누그러지게 만드는 사람이란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두었지만.

“끝났나요?”

“네, 아가씨. 거실에 계시겠어요?”

“내 방으로 차랑 케이크 좀 올려 줘요, 할 일이 많아.”

“네, 아가씨.”

몸을 일으켜 드레스룸을 벗어났다. 쉴 시간은 없었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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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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