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A x L
그녀는 돌이켜 보면 약에 취해 있을 때가 몇 번씩 있었다. 주로 팔뚝에 주사를 놓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는 가루를 마시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집에 오래 머물 적이면 한두 번 씩 그런 모습을 보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얌전히 깊은 잠에 들 뿐이었고, 내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는 것도 같았고, 슬 줄여가는 모습도 눈에 보였기에 몇 번 말을 하려다 말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 순간에만 여태의 통증에서 온전히 도망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떨 땐 깊은 잠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곤히 있기도 했다가, 어떨 땐 마음 속의 말들을 해대는 모습이 신기했다.
내가 먹는 약 중에서도 그녀의 것과 비슷한 성분이 있으니 영 이해하지 못 할 계제는 아니었다. 통증이 심했고, 병원보다는 뒷골목이 더 가까웠을 것이 분명하기에 생긴 참사라 생각했다.
오늘은 그녀가 며칠이고 우리집에 있던 날이었다.
외출 후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그녀가 반쯤 늘어져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위의 몇 개를 풀어헤치고 한쪽 소매는 둘둘 말아올려 문신 없는 하얀 살결을 온전히 드러내는 채. 책상 위에는 약병과 주사기가 널려 있었다. … 화가 나기 보다는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내 품이 그리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일까. 이대로 그녀가, 영영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선택하면 나는 어쩌면 좋을까.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편이 그녀에겐 더 행복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금 눈을 떠 내 품으로 안기기를 몇 번이나 바랬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대강 걸쳐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침대 위에 흐트러진 채 놓인 모습이 마치,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식사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영영 멋져 보일까. 어린 시절의 부재된 사랑을 내게서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때로는 들었다. 그러니 이렇게 의도적으로 걱정을 유발하려는 것이 분명한 태도임에도, 적당히 어울려 주어야겠지. 물론 그런 사유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을 것이 분명하지만.
새끼 고양이가 관심을 이끄려 파닥거리는데 시선조차 안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품속에 축 늘어진 여린 몸은 마치 사람이라기 보다는 인형과 같이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하건 꿈에서 깨어나지 않겠지. 그 꼴에 뺨 위의 상흔을 슬며시 쓸었다. 영혼의 균열, 평소에는 손이 가까이 가기만 하더라도 기겁하는 그것. 이 흉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내게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유감인 일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아 주어서, 내게 와 주어 고맙다고 몇 번이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거친 손끝으로 느껴지는 은빛 상흔의 감촉이 남달랐다. 불길에 일그러진 흉한 꼴에 비하면, 이것은 그리 크지도- 못나지도 않은 모습이 아닌가. 때로는 그녀가 이 흉을 경멸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풀린 눈으로 손에 제 뺨을 비적이고 있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만 같아. 자네는 지금 무슨 환상을 보고 있을까. 물어봐야 멀쩡히 닿을 수도, 멀쩡히 돌아올 수도 없을테니 품 속의 인형이 된 그녀를 끌어안고나 있어야겠다. 그녀가 보고 있는 환상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 좋아요.”
“무엇이 말인가.”
“사람의 품이라는 거.”
그녀의 말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품은 어차피 자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남은 영원과 영혼은 이미 자네에게로 영영 귀속되어 버렸다 말해주고 싶었다. 비어버린 마음을 다 채우고도 흐를 정도로, 남은 평생을 사랑해줄 것이다.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귓가에 말을 속삭였다.
“얼마든지 이러고 있어 주겠네.”
약에 취하기라도 하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녀가 여태 살아온 삶에서, 통증을 느끼던 모든 순간을 보담아 주겠노라고 사랑을 고백하던 첫 순간부터 스스로와 약속했다.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이번이 마지막 사랑일 것이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에도 어린아이마냥 환히 미소짓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해주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으면 했다. 어찌 되었건 여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스스로 알았으면 했기에.
“….”
이러고 있어 주겠다. … 그 뒤로 이어질 말은 억지로 삼켜내었다. 덕에, 속이 꽤나 쓰렸다. 사랑이 무한함은 알았지만 섣불리 영원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내게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질 때 마법처럼 답해주고 싶었다. 내게도 그녀처럼 부재된 사랑과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허가 있었고, 영혼에 짙게 새겨진 상흔을 그녀에게서 받는 애정으로 메워내고 있었다. 내 곁에서 떠나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영영 내 곁에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엄청난 모순에 사로잡힌 기분이 든다. 일종의 죄악감 때문이었다.
언제쯤 깨어날까, 하는 말을 신음처럼 뱉었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짓은 언제나 질색이라. 이렇게 품속에 가두고 있는데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가 이 긴긴 꿈에서 깨어나면 퍽 혼내줄 생각이었다.
“자네를 애정하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 빨리 깨어나야 할 걸세.”
어느새 편히 감은 눈꺼풀을 살풋 쓰다듬으며 빙긋 미소지어 보였다. 감히 내가 걱정하게 만들었으니 괜한 소유욕이라도 부려 볼까.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 안쪽으로 하얀 살결이 드러나보였다. 허리를 살풋 팔로 감싸고, 고개를 지탱해 주었다. 상흔이 남은 뺨이 드러나보여, 입술을 슬며시 얹었다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한 체온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고동소리가 내게로 전해져온다. 아까와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우습게도 무언가 안정이 되는 것만 같았다. 드러난 살결과 체향, 나즈막히 닿아오는 숨결이 존재를 실감나게 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다 드러난 목덜미를 꾹 깨물어 살결에 애달픈 숨결과 함께 잇자국을 새겨 놓았다. 투명한 살갖 위로 꽃잎이 내려앉듯 붉은 흔적이 새겨진다. 나름대로, 내 것이라는 것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앞에 두고도 기다리라는 건 너무하잖는가.”
새겨둔 흔적에 살풋 입술을 얹었다가 떨어졌다. 그녀를 꼭 껴안은 채로,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듯 말을 뱉어내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나도 옆에 살며시 자리를 잡았다. 일어나고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할 테니 조금만 더, 이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번에는 언제 깨어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한나절이면 충분할테지.
꿈에서 깨어나면 걱정했다 한참을 투정부리다 애정어린 말을 가득히 쏟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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