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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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장을 보러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소복하게 내린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득, 하며 결정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계절이 올해도 훌쩍 다가왔는가. 특별한 계절과 추억들을 발걸음마다 아로새긴다. 나는 문득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고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춥지만 다정한 계절이 아닌가. 집에 도착하면 그대를 끌어안고 사랑한
동생에게 동생아, 나는 날로 숨이 꺼진다. 바다의 품은 춥고 어둡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하다. 나는 나의 저주의 시작이었던 하늘에서 멀어지기 위해 바다속으로 가라앉기를 몇 번씩이고 잇는다. 하늘의 품은 다정하더냐. 늘 묻고 싶었던 말이지만 그러지 못하고 이제야 묻는다. 난 늘 내게만 냉정했던 하늘을 원망하고 있다. 그래서 내게 저주가 생겼던가. 평생 맞
“가능성은 있나요.”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않겠나.” “안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더 허덕여야 재미가 있을 텐데.” 그는 미소짓는다. 나는 애써 무시한다. 그는 참 신기한 사람이다. 나를 싫어한다기엔 놓아주려 하지 않고, 좋아한다기엔 애정표현을 해주지 않는다. 절제된 감정과 행위 사이에 갇혀 나는 늘
1. 레닌그라드에 또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차가운 얼음 대륙은 바다 넘어 세계의 절반과의 신경전으로 지쳐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싸우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대조국 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연합이라는 큰 틀 아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A는 잠시 그런 의문을 품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의 그러한 본성 덕에
“….” 그녀가 어려졌다. 햇살 같은 백금빛이던 머리카락은 그 빛을 선명이 드러내고 있었고 웃음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얼굴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중이기라도 한 것 처럼…. 처음 며칠은 나도 당혹스러웠기에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 뒤 가만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잠만 자다 밥 먹
그녀는 돌이켜 보면 약에 취해 있을 때가 몇 번씩 있었다. 주로 팔뚝에 주사를 놓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는 가루를 마시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집에 오래 머물 적이면 한두 번 씩 그런 모습을 보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얌전히 깊은 잠에 들 뿐이었고, 내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는 것도 같았고, 슬 줄여가는
누군가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무어라도 두고 간 모양이지, 싶어 방에서 책이나 읽던 차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순간 잠에서 깨어나듯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오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공책이며 원고지들을 모아 서랍에 넣고는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열쇠를 숨겨놓고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두드리
내가 처음 볼 적부터 여태까지 그녀는 푸른색 머리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 일 덕에 머리색이 바뀌는 일이 있긴 했다만 며칠 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었던데다, 푸른색이 제 원래 머리색처럼 잘 어울렸기에 크게 신경을 쓴 적은 없었다. 물빛처럼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은 어딘가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했으므로 이제는 그 푸른색마저 그녀의 일부처럼 느껴질 지경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