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트 섬리딩 증후군
레드마피아 AU
1.
레닌그라드에 또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차가운 얼음 대륙은 바다 넘어 세계의 절반과의 신경전으로 지쳐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싸우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대조국 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연합이라는 큰 틀 아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A는 잠시 그런 의문을 품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의 그러한 본성 덕에 자신과 그 동료들도 여태 살아남았지 않은가. 이 땅에 짙게 뿌리내린 철의 장막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어둠을 먹고 자라는 것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것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나타내는 말과 같았다. 정의라는 것의 의미가 퇴색되고 만 시대, A는 그런 시대에 살았다.
2.
A는 시대의 어둠을 먹고 장성하여 어른이 되어서는 도적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라가 자신을 지켜준 적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 이른바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을 거부해 볼 작정이었다. 금방이라도 외줄 아래로 떨어질 만큼 위태로운 매일이 이어졌지만 A는 그것을 즐겼다. 사회 밖이라면 어느 곳에든 제 가족이 있으므로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물론 진짜 핏줄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가족들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녀는 도적이었고, 도적들의 법을 지쳤으며, 모든 도적들(Вор в зако́не)은 곧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사랑해왔다. A는 조직에 대해서 느긋한 비밀로 남겨 가족 없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갖가지 문신들로 직종과 계급을 나타내는 것도 그것의 일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그녀가 첫 번째로 새긴 문신은 어깨의 별 그림이었다. 조직에 속해있다는 간단한 의미였다.
A 역시 다른 여러 가족들처럼 잊을 만 하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삶을 살아왔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꽤나 많은 부와 명성을 얻어 나름대로 안전한 삶을 살아왔다. 때로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 뇌물을 꽂아주기도 했고, 때로는 고위 관리와 손을 잡고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혹여 감옥에 간다 한들 여러 문신들 덕에 얼굴을 모르더라도 가족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했고, 어떨 때는 그곳이 집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 그녀가 주로 해 오던 일은 조직의 해결사 역이었다. 도적의 법에 대한 절대적 준수와 배신에 대한 용서 없는 처벌을 모토로 삼아 L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해친, 가족이었던 이들을 청산했다. 평생 사랑받지 못하던 삶을 받다 겨우 동료란 것을 찾은 소녀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녀는 순수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한편으로는 매섭고 냉혹한 사람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상처받은 어린아이기도 했다. 이 시대가 아니었다면 겪을 수 없을 비극을 겪었고, 동시에 이 시대가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을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A는 시대의 비극임과 동시에 수혜자 취급을 받았다.
3.
A에게 처음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만나기로 한 거래자를 기다리다 벤치에서 까무룩 잠든 것이 계기였다. 다시 눈을 뜬 것은 한 사내가 눈을 살풋 털어내어주고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려 할 무렵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고 눈을 떴을 때에는, 한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파악할 새도 없이 나른한 몸에 추위가 찾아와 옷깃을 꾹 여미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 위로 살며시 자리잡은 눈덩이가 후드득 자리를 피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푸하하— 웃었다. 비몽사몽한 A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사내는 한참 웃다가 이름을 답했다. A와 만나기로 한 사람과는 다른 이름이었다. 허탕인가, A가 다시 벤치에 앉자 사내 또한 A의 옆자리에 앉았다.
“돌아갈 곳이 없나요?”
“아니야, 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그런가요.”
하지만 얼마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기다린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고 사내와 A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으레 사람들이 그러했듯 시대의 비극을 이야기했고, 새벽에 옆 동네에서 일어났던 도적들 끼리의 싸움— 사실 그 자리에는 A도 있었으나 모르는 척 흉흉한 시대라고 맞장구를 쳤다. 사내는 훗날 A가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4.
두 사람은 이후로도 종종 그 벤치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다. A는 사내를 꽤나 심심하고 할 일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고, 사내는 A를 신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 아름다운 눈이 까맣게 빛을 삼키고 있는가. 그것을 궁금해 하였다. 하지만 A는 사내와 가까워진 이후로도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렸다. 자신과 같은 세계의 사람도 아닌데 솔직하고 정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만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내보일 때마다 참 안쓰러워 하긴 하였다.
인간이란 어째서 남을 믿고, 안쓰러워하고, 타인이라는 것을 궁금해 하는 것인가. A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내가 두려웠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면 여전히 도적질을 할 수 있을까? 여태 사라진, 때로는 저가 청산하기도 했었던 몇몇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일부는 사랑 때문에 조직을 배신했다. 만약 그 때 A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사람들을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을까? 이미 지나버린 일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A는 그 사람들을 청산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소속감이라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신이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기에. 하지만 사내는 그런 A에게 늘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점점 가까워지던 사내와 A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법정에서였다. 권위 대신 법망에 잡힌 A는 조직 간 패싸움과 몇 건의 강도… 등의 사유로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법정에서 A는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가족을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그래, 시대의 비극이라는 것은 사람이 못 믿을 것을 믿게 만드는구나. 사내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A의 답에 어이없게도 그녀가 지었던 순수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내의 직업은 기자였다. 돌아서 나가는 A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입모양으로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A는 그 날 살면서 처음으로 울었다. 상심이란 이런 것인가, 이별의 통증이 이렇게나 아픈 것이던가.
5.
사내는 A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 그녀의 안에 아직 순수한 소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내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애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나 신뢰는 어떤 것인가 알려주고 싶었다.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선고된 A의 형이 끝나는 날에 사내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곳으로 갔다. 비록 이름도, 사는 곳도, 연락처라면 더더욱이 알 방법이 없었지만 그곳에 가면 그녀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죗값을 다 치른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몇날 며칠이고 그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어디선가 그녀가 찾아와 줄 것 같아서….
어느덧 봄이 올 무렵이 되었지만, A는 사내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6.
A는 줄곧 믿음이라는 가치를 평가절하해오던 삶을 살았다. 사람은 언젠가 믿음을 배반하고, 그렇기에 실망하고, 싸우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A는 먼 발치에서 사내를 바라볼 뿐 그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매일마다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안절부절 못 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끝내는 실망한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모습을 겨울 내내 보았다. A는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A는 고민 끝에 분해를 열어 조직을 탈퇴하며 조직의 모든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의 안위를 약속받았다. 권위는 자신 대신 몇 번인가, 대신 잡혀 주었던 A를… 슬슬 쓸모를 다할 적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저가 직접 사라져 준다니 환영인 상황이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A는 조직에서 나와 일반인의 신분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 꽃이 피는 봄날에 A는 사내의 품에 안겼다.
사내의 지독한 겨울이 끝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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