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일소청명] 특별한 하루

화이트데이 여일여청

주의! 여일여청. 전생 모름. 적폐 주의.

청명은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누구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렸을 적부터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근본 모를 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런 날마다 선배고 친구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단 것들을 건네니 발렌타인데이는 초콜릿을 받는 날, 화이트데이는 사탕을 받는 날, 정도로 알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는 날, 화이트데이는 그 답례를 하는 날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럼 화이트데이라고 사탕 주던 애들은 뭔데?”

“그건 그냥 핑계인 거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하면 편하니까. 혹여 거절당하더라도 덜 민망하고. 그날은 다들 그런 걸 주고받는 날이니까 준비했을 뿐이라고 하면 되잖니.”

“그럼 넌 뭔데?”

청명의 물음에 청명의 엉망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내리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던 장일소가 손을 멈추었다. 뭔가 찔린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청명이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쏟아져 풀고 있던 머리칼이 그 안으로 섞여버린 탓이었다. 장일소는 청명에게 방긋 웃어주고는 머리를 바로 세워주며 말했다.

“당연히 핑계지. 난 그냥 네게 선물을 쥐여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잖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청명은 장일소가 제 머리카락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멈췄다. 장일소는 조금 흥얼거리며 청명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청명이 좋아하는 대로 머리를 높게 올려 묶어줬다. 머리 손질이 끝나자 청명은 그대로 몸을 눕혀 장일소의 품에 안겼다. 청명은 또래 여자애들보다 컸지만 장일소는 그런 청명과 비교해서도 더 컸기 때문에 청명은 편안하게 안길 수 있다. 장일소는 자연스럽게 청명을 당겨 안으며 어깨에 볼을 비볐다. 편안하고 안락한 한때였다. 청명은 그 안에서 어떤 결심을 했다.

며칠 후 화이트데이가 왔다.

성격이 나쁜 것 치고 제법 인기가 좋은 청명은 발렌타인데이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사탕을 받았다. 청명에게 질투 많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전교생이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다들 우정이라고 포장할 수 있을 정도의 사탕만을 안겨줬지만 그게 쌓이고 보니 제법 많았다. 

청명은 그걸 한데 모아 사물함에 넣어두고 가방에서 제가 준비해 온 것을 꺼냈다. 제법 부피가 있는 네모난 포장은 흔들릴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듯한 작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청명은 그걸 품에 안고 장일소의 반을 찾아 내려갔다. 아래 학년은 대개 위 학년이 있는 층을 꺼려 다닐 일이 없었지만, 청명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당당하게 3학년 층을 활보했다.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3학년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은 첫 번째가 장일소였고 두 번째가 장일소의 여자친구인 청명이었던 탓이었다.

장일소의 반 앞에 도착한 청명은 먼저 반에 장일소가 있는지를 살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일소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 한가운데에 불쑥 솟아나 있는 사람이 바로 장일소니까. 장일소를 확인한 청명은 문 가까이에 앉아 있는 선배를 불러 장일소 좀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는 잠깐 미묘한 얼굴이 되었으나 곧 장일소에게 다가가 바깥을 가리켰다. 친구로 보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일소는 문밖의 청명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평소엔 오라고 해도 안 오면서.”

“내가 못 올 곳 왔어? 와도 난리야.”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청명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장일소는 이내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포장을 발견하곤 눈을 살짝 찌푸렸다. 2학년 층에서 3학년 층으로 내려오는 길에 그새 선물을 받아 그걸 그대로 들고 온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장일소를 잘 아는 청명에게 그런 오해는 손에 잡힐 듯이 분명해서, 청명은 장일소가 혼자 오해를 키우기 전에 냉큼 포장을 장일소에게 안겼다.

“그거 주려고 온 거야. 딴 사람한테 받은 거 아니니까 인상 풀어. 나 간다.”

쉬는 시간이 끝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도 청명은 장일소가 선물을 받자마자 후다닥 복도를 달려 사라졌다. 마침 교무실에서 나오던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소리친 건 덤이었다. 장일소는 사라져버린 청명의 뒷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듯 잠깐 서 있다가 제 품에 안긴 상자를 조금 흔들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날도 있네?”

조금은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서일까, 장일소의 얼굴엔 평소보다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약간의 놀림과 시기 따위가 뒤섞인 호응을 물리치고 자리에 앉은 장일소는 다소 성급한 손으로 포장을 벗겨냈다. 테이프로 고정된 포장지를 찢어버리지 않고 벗기는 건 생각보다 답답한 일이었다. 종이 포장을 벗겨내자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상자가 드러났다. 촌스럽지 않게 박혀있는 상호는 장일소가 아는 것이었다. 그가 청명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몇 번 고민했던 선택지 중 하나였다.

상자를 열자 유리단지가 머리를 드러냈다. 투명한 뚜껑 아래로 보이는 사탕은 잘린 레몬 모양이었다. 제가 단 걸 그다지 즐기지 않으니 단맛이 덜한 걸 고른다고 고른 게 레몬이었던 모양이다. 장일소는 뚜껑을 살짝 열어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에 넣었다. 단단한 사탕은 입 안에서 느리게 녹아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조금은 시큼하고 생각보다 더 달다. 장일소는 그 맛에 눈가를 조금 찡그렸지만, 사탕을 혀로 굴리며 천천히 단맛을 맛봤다.

“이거 편지 아니야?”

옆에서 장일소를 구경하던 친구 하나가 덜 벗겨진 포장지와 상자 사이에 끼어있는 접힌 종이를 가리켰다. 상자를 살짝 드니 엽서가 보였다. 아마 사탕 가게에서 함께 주는 것일 거다. 프린팅된 메세지가 적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엽서를 펼쳐본 장일소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 답례.

문장도 아니고 덜렁 단어 하나만 쓰여 있는 엽서가 너무도 청명다웠다.

엽서를 다시 접어 노트 사이에 끼워 넣은 장일소는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넣었다.

‘내 선물은 받지도 않고 가버렸단 말이지.’

장일소는 생글생글 웃으며 선물을 정리해 넣었다. 장일소의 가방 안에는 선물 상자가 나란히 놓였다. 화이트데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분명 어느 때보다 특별한 하루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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