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공략 설명서
현성기영
일단, 이기영은 쓰레기가 맞다.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인정할 정도로 이기영이 지내온 삶은 그렇게 하얗거나 따스한 편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성격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사고로 인해 넓고 험한 세상에 어린 둘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받아온 시선을 버티다 못해 엇나간 경우일 수도 있다. 차라리 십 대 때 엇나가 말썽이라도 부리면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운 일을 떠올리며 동정할 수도 있는데 이기영의 엇나가는 방식은 애초에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타인에게 모범적이며 사회가 보기에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 친절한 낯을 띄우는 눈매는 언제나 보기 좋게 가늘어지고 얇은 입매는 친절함을 듬뿍 담은 미소를 지었다.
쟤는 슬픈 일을 겪어도 의연하게 잘 크는구나. 주변 어른들의 생각은 대체로 그랬다. 이기영에게 당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거나 눈치가 영민해 성격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고개를 저을 정도의 감상이지만. 이제 겨우 둘만 남게 된 가족 중, 동생 이율하도 코웃음을 치고 말 상황―솔직히 이기영도 마찬가지다―에 이기영은 모두에게 성실했고 또 친절했다. 알아서들 해석하라지. 제게 보내는 멋대로 뻗친 생각과 시선을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이 이기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기영은 자존심과 자존감이 모두 높은 편이었으나 측은한 연민의 시선에 기분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는 표현이 맞다. 남들보다 조금 더 친절하고 남들보다 약간 더 성실하면 겉가죽만 보고 멋대로 판단하니까. 그 뒤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이기영을 의심하는 것보다 그를 믿어주기 바쁜 사람들이었다. 곤란하다 싶은 상대는 비슷하게 보내 버렸다. 애초에 문제적 요소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박혀버린 인식 탓에 이기영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주변 상황이 그를 모함하고 떨어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주무르며 모든 상황을 이용했다.
이기영의 생각을 아무도 모르는 채로 십 대의 마지막 학교를 졸업했고, 그와 비슷하게 이십 대의 대학 생활도 마무리 지었다. 군대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어디 가서 가만히 당할 성격도 아니었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어느 정도 머리에 피가 말랐다 싶을 때부터 이루어진 다분히 노골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하던 이기영이다. 실제로 손해 본 것도 없으니 완벽했다. 이십 대 후반이 된 그의 삶은 평범하게 회사를 입사한 후에도 변한 게 없다. 변할 이유도 없고.
그러니 이기영은 변명할 여지도 없는 태어났을 때부터 은근한 쓰레기였다. 부모의 죽음을 탓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그냥 쓰레기. 애초에 대놓고 힘으로 찍어누르며 목소리 키우는 사람보다 뒤에서 조종하는 놈이 더 악질적이고 나빴다. 심지어 이기영은 제 성격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담백하게 인정했다. 못돼 처먹은 성격에 보태준 거 없으면 말을 말자. 이기영은 그런 놈이었다.
――최근까지 사사건건 흠집을 내기 위해 열을 올리던 입사 동기를 연말도 아닌 상황에 타지점으로 강제 인사이동을 시킨 이후에도 말이다.
“형님은 소문에 어두워서 모르는 것 같은데, 거, 있잖소, 형님 입사 동기 그 정진호 양반. 나가리 되더니 결국 관뒀다고.”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물고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발이 빠른 이기영의 부사수 박덕구가 침을 튀겼다. 은근히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 안 그래도 꼴 좋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한동안 그 녀석 때문에 고생했잖소! 형님은 충분히 좋아해도 되는 거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보는 게 꼬리를 잔뜩 흔들고 있을 듯이 보였지만 여기서 이기영이 보일 수 있는 건, 그저 빙그레 웃는 정도였다. 그리고 약간 씁쓸한 것처럼 눈썹을 늘어뜨리며, “그거 안 됐네. 열심히 할 줄 알았더니.”라고 덧붙이는 정도까지. 완벽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이기영 스스로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제 턱을 문질렀다.
박덕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접하고 이미 빈 탕비실에서 크게 비웃었다.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던 이기영은 누구보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박덕구를 상대했다. 그래, 덕구야. 떠들어라. 열심히 욕하고 날 두둔해라. 이기영은 짐짓 너그러운 표정으로 박덕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고, 사람이 이렇게 착해서야. 박덕구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들겼지만 반들거리는 눈은 예의 그 답답하다는 착한 성격을 숭배하고 또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따르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박덕구의 생각은 읽지 않아도 뻔했다.
“형님, 고생 많았소. 해외는 안 맞으면 힘들고 그렇다는데 역시 형님이라 그런지, 이야, 엄청난 소문만, 크으.”
연신 감탄사를 뱉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아, 참. 형님. 점심 이후에 부장님이――.” 본래 목적을 상기한 박덕구가 이기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기영은 박덕구의 둔중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좇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박덕구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박덕구]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6]
[성형-단순무식한 열정가]
[……]
덕구야, 변화 좀 해라. 성장이 더딘 남동생을 보는 듯한 심정으로 웃었다. 이기영은, 인생을 조금 더 단순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능력을 곁눈질로 확인하며 마시던 캔을 가볍게 우그러뜨렸다.
열심히 뛰고 움직여 발을 넓히고 사람을 적당히 이용하고 능력껏 부리며 아닌 척 은근하게 떨어지는 콩고물을 전부 독식하고 있던 이기영은 해외 출장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제법 업계에서 날린다는 대형 상대도 만나보고 휴식을 취할 때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평온한 안락함까지 마음껏 누리던 이기영은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잘난 능력도 발휘할 수 있었고 쉴 때는 푹 쉬었더라도 은근한 정신적 피곤함과 누적된 몸의 피로함이 유재하는 중인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설호는 이기영의 팔을 은근하게 문질렀다.
“이기영 대리, 오랜만에 보니 얼굴이 폈네, 폈어. 아무리 일 때문에 나갔다고 해도 너무 잘 지낸 거 아니야?”
이 새끼는 지금 당연히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본인도 모르게 돌려서 쓰고 있는 듯했다.
“아주 자자하던데. 그 얼굴 보기 힘들다던 거물급 거래처의 회장도 대면했다며.”
심지어 미모도 장난 아니라던데――. 주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깔며 얘기하는 주제에 표출하는 열등감을 감출 줄 모른다. 이기영은 빙그레 웃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부장님이 가셨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보여주셨을 겁니다.”
네가 갔으면 파란의 수치지. 내가 가서 다행인 줄 알아라, 이 새끼야. 이기영은 매끄러운 혀가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말을 놀렸다. 속과 달리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존경을 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것보다 스치듯 자연스러운 아부는 이기영의 특기였다.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얘가 무슨 음습한 속내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를 그런 자연스러움 말이다. 딸랑딸랑, 하고. 뒤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설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을 피며 껄껄 웃었다.
“이 대리는 말을 참 잘한다니까. 파란의 인재야, 인재. 그나저나, 이 대리. 오늘 회식이 있는데.”
팔을 쓸어내리던 손이 위로 올라 이기영의 어깨를 문지른다. 설마 빠지겠어? 당연히 올 거지?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빠질 리가 없지.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귀에 박히는 기분이다. 이기영은 제 앞에서 사람 좋게 웃는 이설호 부장의 머리를 조금 전에 마신 캔커피처럼 우그러뜨리고 싶었다.
기실 그는 이설호가 굳이 제의를 건네지 않아도 알아서 회식 자리에 찾아갈 예정이었다. 직급이 조금 더 높았더라면 피곤하게 그런 자리를 찾을 이유도 없지만, 이기영이 훌륭한 커리어를 쌓고 있더라도 아직은 대리였고 위로 올라갈 계단은 높았다. 이용하고 싶은 게 많고 가지고 싶은 게 많은 이기영은 대리라는 직급은 약간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오르면 만족할 텐데. 그러니 한참 부족할 지금은 피곤해도 움직여야 하는 게 맞다. 다 미래를 위해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면 없던 힘도 솟는다.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했고 이기영은 이설호의 꼬장꼬장한 강제 참여 강조에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주변 사원들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음에도 회식까지 참여하면 피곤할 게 뻔한데, 부장이 눈치가 없다고 알아서 욕을 해 주고 있으니 이기영은 그저 하하,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기만 하면 됐다.
“저도 오랜만에 같이 어울릴 수 있어서 좋은데요, 뭘.”
“대리님도 참…….”
눈앞에서 이설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던 여성 직원이 피곤하실 테지만, 그래도 역시 대화할 자리가 생겨서 기쁘다는 덧붙임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이기영은 여전히 웃었다. 이설호 부장은 눈치도 없고 복귀하자마자 사람 귀찮게 구는 이 시대의 평범하고 귀찮은 중년인이 되었고 이기영 대리는 그런 눈치 개나 준 이설호 부장에게도 미운 소리 하나 하지도 않는 너른 마음의 소유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완벽. 이설호가 아니더라도 갔을 테지만 아까 전의 이설호는 너무 재수 없어서 이런 식으로 욕을 먹여야 했다.
“해외 출장에서 있던 일 자세히 말씀해 주실 거죠?”
“그런 자리에서도 일 얘기를요?”
차라리 서로의 듣지 못한 근황을 얘기해 봐요――. 짐짓 짓궂게 반응하자 좋다고 꺄르르 웃는다. 쟁반 위로 구슬 굴러가듯 또르르 떨어지는 웃음소리에 지친 마음이 살짝 정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해외 출장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맑은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제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암사자 소굴에 대항할 만한 무기도 제대로 갈지 못하고 들어갔다 나온 기분만 잔뜩 느꼈다. 고생깨나 했으나 결과는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 고생을 했는데도 결과가 망했으면 이기영 능력 다 죽었다. 나여서 된 거지만. 귀여운 여성 사원과 말만 하면 서로 웃음을 터뜨리던 이기영은 도착한 회식 자리의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너무 느긋하게 움직였나. 아니, 나쁘지 않은 순간이다.
“참, 대리님 안 계실 동안 새로운 신입 사원들이 들어왔어요.”
“먼저 인사해야겠네요.”
깔끔한 구두를 정리하며 숙였던 몸을 바로 하고 미닫이 문을 열려고 했다. 뭐가 즐거운 건지. 여성 사원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기영에게 은근하게 몸을 붙인다. 이기영도 굳이 그 은밀한 밀착을 피하지 않았다.
“잘생긴 신입 사원이 제일 유명해요.”
“굉장히 잘생겼나 봅니다.”
“대리님도 직접 보시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얘는 내 얘기를 그렇게나 할 것이지. 이게 뭔 비밀이라고 몸까지 밀착해서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 기대되네요. 이기영은 대충 대답하면서 열린 문을 통해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이기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분위기를 띄우고 있던 사원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잔뜩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리님, 보고 싶었습니다! 대리님, 요즘 실적이 자자하던데 또 우수사원 되시는 거 아니에요? 대리님! 이 대리님! 이기영 대리님! 등등. 인사에 일일이 대답해 주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익숙한 얼굴 사이에서 처음 보는 낯짝이 몇몇 존재했다. 여성 사원이 말한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들인 게 확실하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이기영이 먼저 고개를 숙여주니 어쩔 줄 몰라, 어색하게 눈을 다른 데로 굴리면서도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게 초년생 태가 보인다. 이기영은 그런 신입 사원들을 향해 담뿍 웃어주었다. 미래의 노동력이다.
“형님, 이쪽이요!”
덩치도 큰 게 팔을 휘두르는 것이 주변을 위협하고 있는 걸 모르는지 박덕구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이기영을 불렀다. 그래, 그래. 덕구야, 안 그래도 그쪽으로 갈 거다. 알겠다며 가볍게 위아래로 손짓한 이기영이 그의 복귀를 축하하는 여러 말들을 일부러 듣고 있을 때, 유독 여성 사원들이 밀집된 테이블로 시선이 향했다. 테이블마다 친한 사원끼리 붙어 있어서 성비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지만 유독, 이상하게, 조금 더 많은 쪽이 있다. 이기영은 박덕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잘생긴 신입 사원이 제일 유명해요. 이기영에게 붙어 그렇게 속살거리던 여성 사원도 근처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얼마나 잘생겼으면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드러나지.
자신감과 자존감이 남보다 높은 이기영은 본인이 크게 주목되지 않더라도 질투에 눈이 머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신기하면 신기했고,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잘 써먹고. 덕분에 젊은 나이에 우수한 성적을 남길 수 있고 말이다. 더구나 이기영은 본인의 외모가 그렇게 잘난 편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신 호기심 어린 눈이 원하는 상대를 찾았다. 대리님도 직접 보시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기영은 여성 사원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이나 차분한 눈매는 굳이 매력을 나타내지 않아도 우수를 담고 있었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나 보기 좋은 콧대에 입술까지. 약간 긴장한 것 같지만 천성이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게 여실히 보인다. 여자들이 좋아하겠네. 이기영은 박덕구의 옆에 앉으며 혀를 내둘렀다.
“잘생기긴 잘생겼네.”
“신입 얘기하는 거요, 형님?”
목적어가 없어도 누굴 얘기하는지 바로 알아차리는 박덕구도 놀랍다. 남자들도 인정하는 분위기라면 더 할 말이 없다. 이기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고 박덕구는 크게 관심이 없는지 더는 묻지 않고 오랜만에 보는 형님에게 주는 잔이라며 술잔을 들고 히죽거렸다.
“그래, 어디 따라 봐라, 덕구야.”
“거 후회하지 마쇼.”
이날을 위해 폭탄주를 연습했으니! 이미 거하게 마신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시시덕거리던 박덕구에 이기영도 신입 사원에게 향했던 관심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기로 했다. 그저 단순하게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열었던 상태창에 쓰인 말이 아니었다면 이기영은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였을 것이다.
[김현성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현성]
[칭호-파란의 후계자, ■■■■의 축복받은 자, 이겨내지 못한 자, 깨달음을……]
[나이-25]
[성향-선의의 중재자]
[근력-……]
[…… ……]
[총평-총체적으로 절망적인 수치의 이기영과는 태생이 다른 사람입니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군요. 어느 하나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운이 따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글쎄요. 결과는 뻔할 테지만,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잘 보여 아부하는 게 이득이겠네요.]
형님, 이러다 손 떨어지겠소. 형님, 형님! 옆에서 들리는 박덕구의 목청 좋은 소리마저 아득하게 들릴 정도였다. 상대방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이상한 능력이 생긴 이후로 칭호가 존재하는 사람은 특별한 위치가 없다면 대부분 박덕구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이기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칭호를 가진 사람이 존재하다니. 이기영은 놀란 기색을 애써 지우며 박덕구 손에서 술잔을 받아들었다. 파란의 후계자?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의? 목 언저리에 알싸한 기운이 퍼진다. 이기영의 시선은 주변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대화의 물꼬도 막힘 없이 틀고 있는 상태였지만 신경은 온통 다른 데로 쏠렸다.
파란의 후계자가, 왜, 신입 사원으로. 머리를 굴리던 이기영은 금세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현재 특별한 힘을 이용한 이기영 자신뿐이다. 아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 김현성은, 유난히 잘생겼지만, 그저 평범한 신입 사원 중 한 명. 이기영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이기영을 신랄하게 비꼬는 총평에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수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주 고맙게도.
젊은 나이에 반해 말투가 개성적인 박덕구는 이기영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자, 박덕구 본인 스스로 인정한 이기영의 오른팔이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눈에 띄게 일을 잘하는 편이 아니어도 성실한 점이나 이기영이 가볍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성격은 이기영의 치졸하고 못된 성격에 가끔 불어오는 봄날의 바람 같은 거였다. 은근 옹고집이 센 점이 있지만, 그 고집으로 인해 해를 끼친 적이 없으니 딱히 조심할 부분도 아니었으며 가끔은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편이니 이기영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껏 박덕구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박덕구의 성실한 성격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디서 소문을 물어오는 건지 누구보다 빠른 마당발 같은 부분이었다.
박덕구는 이기영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만한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고, 많이 아는 사람인 점. 회식에서의 마주침을 지나 다음 날로 넘어간 이기영은 박덕구에게 신입 사원들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박덕구는 그런 이기영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박덕구의 설명은 이러했다.
김현성. 나이 25살. 연수원 시절부터 눈에 띄는 미남으로 알음알음 사람들 사이에 퍼졌으나 그의 미모를 한층 더 받쳐주는 요소가 존재했는데, 같이 입사한 신입 사원들이 잘하는 그 무엇보다 한 단계 높이 있으며 훌륭한 업무 처리 능력이나 똑같이 고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체력이라거나. 하루는 같은 사내 직원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던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본 김현성이 가뿐하게 도와주었다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여 드러난 팔이 힘을 주자 근육이 단단히 모여지는 게 눈에 보였다는 사내 직원의 한숨 섞인 얘기는 마치 박덕구가 실시간으로 본 것처럼 침을 튀겼다. 마지막으로 주량까지 좋아 회식 때 마지막에 남아 주변을 정리했다는 훈훈한 미담까지. 박덕구는 그가 정식 직원이 될 거라며 홀로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무리했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혼자 뭘 대견하다는 듯이 대하는 건지. 이기영은 비웃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박덕구의 말에 다정하게 동의했다.
어째 들을수록 사람이 너무 성실하고 다정하기까지 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건 이기영의 개인적인 생각이었으며 그가 생각 중인 미래에는 오히려 감사할 부분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기영은 생각했다. 그 ‘파란의 후계자’가 어째서 말단부터 시작하고 있는지. 잠시 휴식 삼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동안 같은 사내 직원과 조용하면서도 단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을 아닌 척 훔쳐보던 이기영은 금방 답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회사 내부 사정에 관심이 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면 충분했다. 대내외적으로 ‘파란의 후계자’는 이미 존재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현성은 ‘파란의 후계자’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걸까. 신기한 능력은 이기영에게 신랄한 비아냥을 선사해도 거짓을 고하는 경우가 없었다. 똑같은 칭호를 두 명 다 지닐 수 있는 것이라면, 아니, 애초에 희귀성이 높은 칭호였다. 무척 뛰어난 수재가 아니더라도 돌아가는 상황만 눈치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동력을 지닌 이기영은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매스컴에 알려진 ‘파란의 후계자’에게 그 칭호가 없을 경우를 가정하며 김현성이 말단에서 시작하는 이유까지. 하. 이기영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그려졌다.
어디서나 막장은 드라마보다 가깝고 현실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존재한다.
조금 더 심층적인 사실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이기영은 누구보다 빨리 움직이기로 판단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혼자 떨어진 김현성이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얕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 커피를 들고 찾아가 주는 친절한 상사 역할로 시작해서 말이다.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김현성에게 다가간 이기영은 나긋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죠?”
“아……, 그렇지 않습니다.”
다가온 인물을 빠르게 살피던 검은 눈이 금세 순수한 낯을 보인다. 괜찮다거나 아니면 일을 하는 게 즐겁다는 등의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담백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아주 잠깐 말을 멈추던 이기영은 곧잘 웃었다. 예의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뚜렷한 선이 존재하는 자는, 얼굴을 아는 상사를 향해 공손한 어투를 내보이고 있으나 미세한 경계심은 어떻게 숨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기영은 그런 김현성의 미약한 경계심을 속으로 칭찬했다. 잘했어, 그래야지. 너무 친절하면 안 좋다.
이기영은 단계를 나아가는 게임처럼 공략법을 세우기로 했다. 그 공략법의 제목은 김현성과 친해지길 바라.
솔직하게 말해서 이기영은 자신 있었다. 이기영이 지내온 삶이 그리 쉬운 편은 아니었어도 그는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삐끗하는 경우도 다수 존재했고 불발로 그칠 때도 있었지만 이기영은 이미 몇 년째 똑같은 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친절한 상사의 낯으로 곤란한 순간에 도움을 준다거나 갖고 있던 내공을 십분 활용하여 전수해 주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달콤하면서도 유능한 상사의 연기를 말이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굉장히 존경을 담은 시선을 보내게 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이기영은 그럴 만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비정한 사회생활에 한 줄기의 튼튼한 동아줄 같은 역할 같은 은근히 번거로운 행위를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가면을 쓰고 다정한 헌신을 자처하던 이기영은 현재 심정으로는 약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노리고자 하는 상대의 철벽이 제법 높고 두터웠다. 고개를 올려봐도 끝이 보이지 않아 암담한 기분이 쓸리듯 다가오는 기분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반가운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하는데, 저 세련된 고양이는 그 얇은 눈매로 이기영의 호의를 적당히 경계하고 무시했다. 능력을 높게 사면서도 그 이상 다가오지 않으려는 기색이 완연하게 보이자 조바심이 나는 건 오히려 이기영 쪽이었다. 현성아,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너랑 잘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이기영은 긴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볍게 누르고는 손바닥으로 덮었다. 후우, 짧은 한숨이 새고 위로 올라가던 어깨가 처연하게 떨어진다.
다른 신입 사원들과는 금방 친해졌는데 제일 다가가야 할 인물이 저 지경이다. 틈만 나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도 어색하게 눈을 굴리거나 가끔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다지 차이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 미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걸 이기영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내쉬는 한숨 속에 답답함이 섞여 사라진다. 아무 바에서 혼자 있던 여성을 유혹하는 게 더 쉬울 거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기영은 그간의 대화를 천천히 떠올렸다.
“현성 씨, 피곤할 텐데 조금 쉬면서 해요.”
“괜찮습니다. 제 할 일인데요.”
라거나.
“소라 씨랑 같이 사 왔어요. 맛있다고 소문난 건데. 현성 씨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라거나.
“현성 씨,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니, 저는…….”
“다들 퇴근했어요. 들어가세요, 현성 씨.”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짤막하게 끝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굳이 이기영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자체가 저렇게 굴러갔다. 어깨에 힘이 잡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기영은 제 턱을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김현성은 아닌 척 평범한 사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칼날처럼 단호한 구석이 존재할 때는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니까, 같은 이해보다 짐이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짐이 뭔지 정확히 잡아내지는 못했지만. 이기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 김현성은 제일 먼저 어깨에 힘을 뺄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금요일 저녁에 회식 자리가 만들어졌고 친절한 상사 이기영과 부지런한 후배 김현성은 빠질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참여했다. 이기영은 술을 잘 마셨다. 그러면서 많이 마시지 않았다. 적당히,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잔을 따라주면서. 흔히 말해 안주발을 세우던 이기영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게 했다. 몸이 붉게 익은 박덕구가 잔을 쥔 채로 쓰러지는 것을 보며 이기영은 턱을 괴고는 김현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 얼굴이 붉은 것이 주변에서 주는 잔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마신 게 역력하다. 그런 강제적인 상황을 고려해도 여전히 눈빛이 또렷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김현성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주말 지나고 평일에 연휴가 낀 상태여서 그런지 다들 못 먹은 사람처럼 들이킨 결과가 주변에 잔뜩 늘어진 상태였다. 일단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김현성의 끝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한 이기영 쪽이었다. 흠칫, 하고 닿은 시선이 약간 흔들리자 이기영은 말갛게 웃는 걸로 화답했다.
“현성 씨, 우리끼리 2차나 가죠.”
약간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어도 할 건 해야 했다. 이기영은 가늘게 눈매를 좁혔고 김현성은 쉽게 말문을 트지 못했다. 망설이는 기색이 보여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김현성은 부지런하고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네, 괜찮으시다면.”하고 긴 망설임 없이 허락해 주었으니 말이다. 아주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마음 착한 고민을 한 것 같지만 이기영은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라는 말과 함께 김현성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기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현성은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 가늠이 잡히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종내에는 살짝 미간 새를 좁히고 만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잠깐 몸을 튼 이기영이 의아한 낯으로 쳐다보자 그제야 아, 하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얼떨결에 얻어낸 2차는 이기영이 잘 아는 바로 향했다. 입이 무거운 사장과 시끄러운 밤을 향해 달리는 손님들도 제법 얌전한 성격을 지닌 덕분에 김현성과 특별한 것 같으면서 별거 아닌 대화를 나누기에는 맞춤인 장소였다. 일단 방해받을 이유가 없는 부분에서 가산점이다. 이기영이 바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이 힐끔 보았다. 웬일로 혼자가 아니네, 하는 시선이 스쳤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지만 대답할 의무도 없던 이기영은 그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김현성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분위기 괜찮죠?”
이기영은 어느 분위기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쇠심줄 같은 성격을 지니긴 했어도 쉴 때는 조용한 곳에서 피로를 푸는 걸 선호했다. 약간 어두운 조명과 잔잔하게 깔리는 노래. 중간중간 사람들에서 들리는 소리도 오히려 평온한 분위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부드러운 목재로 만든 테이블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듯 가볍게 문지르던 이기영은 맞은편에 앉은 김현성을 응시했다. 낯선 곳을 가볍게 둘러보던 김현성은 마음에 들었는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영이 말했던 주변 분위기와 단순한 대화를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상황도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괜찮았다. 슬그머니 눈이 풀어지는 듯한 김현성을 보며 이기영은 만족한 기색으로 잔을 들었다. 주량이 세다는 박덕구의 설명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김현성은 표정이 나름 풀어졌어도 취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러다 이쪽에서 먼저 취하면 낭패다. 천천히 마셔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찰랑거리는 액체를 가볍게 흔들던 이기영은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이기영 대리님은…….”
“편하게 부르세요. 다른 분들처럼 기영 씨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 친해져야지. 그러기 위해서 이러고 있잖아. 이기영의 나른한 눈매가 보기 좋게 접혔다. 김현성은 당황한 듯, 잠깐 말을 멈추었으나 곧 “기영 씨는…….”하고 정정했다. 이거 봐라.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감정이 스쳤으나 이기영은 그것보다 기쁨이 더했다. 이기영은 테이블 밑으로 보이지 않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걸음 다가간 것 같다.
“기영 씨는, 굉장히 친절하신 것 같습니다. 그……, 주변 분들에게도 그렇고.”
굉장히 어려운 말을 꺼내는 것처럼 붉은 입술만 오물거리더니 고작 하는 소리가 저런 거였다. 약간 김이 새는 기분이지만 이기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쟤가 저런 말을 하는 상황 자체가 많이 발전한 거다. 그렇지 않냐, 현성아. 이기영은 자못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저처럼 재미없는 사람한테도…….”
“아…….”
탄성을 내뱉는 소리에 미처 말을 고르지 못하던 김현성이 입을 다물고 이기영을 쳐다보았다. 저를 응시하는 이기영의 표정이 미묘했다. 흐린 미소는 곤란함을 담고 있는 것 같고, 마주하는 눈동자 속은 씁쓸한 것처럼 일렁거린다. 내리뜨는 눈 밑으로 살짝 흔들리는 속눈썹이 사람의 속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김현성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앞으로 같이 지낼 사람인 것도 있지만.”
이기영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는 현성 씨랑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확신을 담은 말에 힘을 주려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했다. 담백한 대답을 들으며 김현성의 짙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자 오히려 눈을 굴리는 건 김현성이다. 곤란한 말을 들은 것처럼 쉬이 대답을 잇지 못하는 김현성이 입술만 몇 번 달싹이고 만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약간 속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갈무리했다. 현성아, 나 못 믿니. 믿어 봐. 여러 번 대화를 시도하려던 이기영 속마음에 김현성은 이미 아는 동네 동생처럼 친근함이 들었다.
“현성 씨가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 몰라도, 혹시 부담스럽거나 그러셨다면.”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표정은 쓴 것을 먹은 것과 같았다.
“조심하겠습니다, 현성 씨. 절대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기영 씨, 그러니까, 제 말은――. 무언가 넋이 나간 듯, 멀거니 이기영을 바라보던 김현성이 퍼뜩,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김현성의 감정 표현 중 제일 격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기영은 웃음을 삼켰다.
“아니라면 친해집시다. 저는 현성 씨가 마음에 들거든요.”
“네? 마, 마음에――.”
“일 열심히 하시는 모습, 누가 봐도 좋아할 텐데.”
직장 선배로서 확실한 말입니다. 짓궂은 투로 대답하자 무언가 허둥거리던 김현성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아, 그렇지, 하고. 단숨에 민망한 기분이 오른 김현성이 헛기침을 두어 번 정도 내뱉으며 제 심정을 달리했다. “싫지 않습니다. 싫지 않은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김현성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이기영은 만족한 듯이 느른한 시선을 던졌다. 쟤가 당황하면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가벼운 감상까지 생각하며 턱을 문지르던 이기영은 초반에 한 고생과 달리 괜찮은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김현성의 적당한 경계심은 칭찬해 줄 만했다. 사람이 너무 착하면 안 된다. 적당한 경계심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고생의 전적을 떠올리면 다소 부족한 감이 있지만, 이기영은 아름답게 미화된 옛 추억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김현성은 제법 편해졌다. 아련한 생각 끝으로 이기영은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피어났다. 둘만의 2차를 계기로 김현성은 예전보다 이기영을 편히 대하고 있었다. 혹여나 불편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모르는 척 다가가면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속을 헤집는 표정 같은 게 말이다. 김현성은 본인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고 이기영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낫다.
하나둘 묶인 실을 해체하듯이 느긋하게 다가가던 이기영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자리를 허용해 주는 김현성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살짝 건드리면 우수수 떨어지듯 반응하는 김현성을 아닌 척 놀리면서 옆으로 다가가던 이기영은 업무 상황으로는 김현성의 우수한 능력에 감탄했다. 김현성은 어렵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고 자신의 지분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기영이라는 중간 다리가 존재했지만 이기영은 말 그대로 ‘다리’ 역할만 자처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어두고는 본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고상한 낯짝을 들이민다. 이기영은 존재 자체가 굉장히 눈에 띄었으나 필요할 때는 반대로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제 존재를 낮추고 있으니 김현성은 알게 모르게 이기영에게 많은 걸 내어주고 있었다.
허용 범위가 얼마나 넓어지는 중이었냐면.
“형님, 요즘 서운해 죽겠소.”
박덕구의 칭얼거림을 들을 정도였다. 시무룩한 얼굴로 큼지막한 어깨를 늘어뜨리는 게 불쌍한 느낌보다는 쟤가 왜 이러나 싶다. 이기영은 대답 대신 눈썹을 비스듬히 세웠다. 근처에서 외근이 생긴 탓에 잠깐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둘의 사이는 오전부터 지금까지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는 중에 꺼낸다는 소리가 저런 망발이다. 이기영은 어디 대답해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요즘 신입 사원들이랑만 어울리는데……, 아니,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만…….”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는 게 가관이다. 이기영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 박덕구가 형님의 믿음직한 후배이자, 하나밖에 없는 오른팔인데 말이오. 요즘 상대도 안 해 주고.”
데스크로 향하는 길은 말끔한 대리석으로 정리돼 있었다. 익숙한 데스크 사원들의 얼굴이 보이고 사원증을 들고 지나가는 회사 직원들도 보였다. “형님이 바쁜 거 알고, 사람이 착해서 후배들 챙겨주는 거 아는데, 나를 빼고 술 마시러 가고…….” 결론은 지 빼고 갔다고 저러는 거다. 옆에서 중얼거리는 박덕구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팔을 두들기던 이기영은 데스크 옆으로 시선을 빗겨냈다. 약간 앳되어 보이는 외형의 여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 없는지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 흠, 짧게 목울대를 울리던 이기영은 옆에서 투덜거리던 박덕구가 분위기를 전환했다.
“어. 거……, 도련님 약혼녀 아니요?”
“도련님?”
“그건 그냥 내가 장난삼아 부르는 거고. 이사님.”
“아.”
이기영은 짧게 감탄하고는 여자를 향해 새삼스럽다는 시선을 던졌다. 대기업 파란의 이사와 약혼을 할 정도면 어디서든 비빌 만한 재력을 가진 기업의 딸인 게 확실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단정하게 정리한 덕에 모난 구석은 없지만 움츠리는 어깨나 잔뜩 위축된 몸이 안쓰럽게 보였다. 쉴 틈 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 쏟을 것처럼 일렁거렸다.
“거, 정백 그룹 막내 딸이라는데. 그나저나 서로 좋아해서 약혼한 건 아닌 것 같소, 형님.”
“뭐…….”
불쑥 중얼거리는 박덕구에 이기영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마당발이라 주변 정보가 빠른 건 알지만 뭔데 이렇게 잘 알고 있어.
“이 강원도 사립탐정 출신 박덕구로서 말하는 건데 아무리 봐도…….”
뭔 출신? 이기영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옆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박덕구에 질색하며 이기영은 걸음을 옮겼다. 본래 회사로 들어가던 목적이 아닌 불안하게 허둥거리는 여자 쪽으로 향했다. 엄지를 입에 물고 잘근거리던 여자가 제게 다가오는 기척에 흠칫,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떨리는 눈이 완벽하게 이기영에게로 향하자 묘한 만족감을 느끼던 그는 입가를 당겼다. 부드럽게 피어나는 웃음은 안정감을 주는 달큰한 내음을 풍겼다. 김현성처럼 길을 걷다 말고 뒤돌아볼 정도로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으나 제 얼굴을 어떻게 사용해야 좋을지 제대로 알고 있는 이기영은 표정을 친절한 낯으로 바꾸었다. 어느새 여자의 얼굴이 무언가 홀린 것처럼 느슨하게 풀어졌다.
사내 응접실에 홀로 앉아있는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긴장감으로 굳은 상태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에 대해 미미한 만족감을 띠고 있었다. 이기영은 그녀에게 커피를 건네며 여유롭게 웃었다. 두 손으로 잔을 쥐고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살피며 이기영은 아주 약간 갸웃거렸다. 불안한 눈빛도 그렇고 자신감 없는 태도나 심히 굽어진 몸은 아무리 봐도 대기업 그룹의 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정하얀이란 여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굉장히 위축된 상태였다. 정하얀을 응접실로 들여보내기 전에 박덕구를 통해 들은 정보를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내려졌다. 정백 그룹은 세 명의 딸이 있고 두 명은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는 당당한 인사들이다. 하지만 정하얀은 그러지 않았다. 정하얀이라는 딸이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게 맞다.
집안 내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한데, 어떻게 파란의 이사와 약혼을 한 사이일까――, 하고. 곧 둘 모두 원해서 한 건 아니겠구나, 쪽으로 금세 좁혀진다. 눈매가 가늘어진다. 정하얀의 머리를 가만히 내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이기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맞은편에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손으로 잔을 문지르던 정하얀이 뒤늦게서야 좁은 공간 안에 자신만 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순진한 눈망울이 이기영에게로 향했고 시선을 마주하자 흠칫거리며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아, 아, 아무도 믿어주, 지 않아요. 저, 저는 약, 약혼녀인데.”
어색한 침묵 사이를 정하얀이 먼저 가로지었다. 더듬거리며 말을 하면서도 제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손 사이로 쥐고 있는 잔을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이기영은, “그렇죠.”하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내리 뜬 눈은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돌아오는 반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전달하고자 하는 정하얀의 목소리가 명확해졌다.
“야, 약혼녀라고 마, 말을 했어. 그런데, 그런데, 왜, 어, 어째서……, 나, 나를 시, 기하는 거예요. 그런 거야. 그, 그런 게 아, 아니라면.”
“아…….”
종내에는 고개를 숙여 손톱을 물어뜯는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기영을 잊어버렸는지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괴기해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이기영은 제 손으로 사이를 누르며 주름을 폈다. 대화를 할 수 없다.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정하얀을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고 멀거니 보고만 있던 이기영은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틀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박덕구가 얼굴을 들이민다. 오늘 하루 충분히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던 후덕한 박덕구의 얼굴이 반가울 지경이다. “형님, 오고 있소.” 이기영은 몸을 일으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고 완벽하게 나가기 위해 당겼으나 박덕구가 엉거주춤하더니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다른 얼굴이 보이자 이기영은 행동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키가 크고 날렵한 인상. 맞춤 정장을 가뿐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이였다.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으나 얄상거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나 점잖은 듯이 구는 반들거리는 눈이 인상적인 사내다. 이토 소우타. 일본에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온 거지. 이기영은 한 걸음 더 물러났고 이토 소우타는 이기영을 보지도 않고 정하얀 쪽으로 다가갔다. 이토 소우타를 보자 정하얀이 소리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정하얀은 이토 소우타가 일본에서 돌아온 것을 알고 무작정 파란에 온 것이다. 이기영은 눈을 깜빡였다.
[이토 소우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이토 소우타, 이창태]
[칭호-실리아의 바람]
[나이-30]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 ……]
[총평-전체적으로 높은 능력치, 그중에서도 … (중략) … 체력이 조금 떨어져 보이는 것은 가슴 아프군요. 하지만 체력을 받쳐주는 전설 등급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기영과 같은 건 성향밖에 없군요. 조금 더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이 새끼, 도둑놈 아니야? 이기영은 자연스럽게 정하얀을 확인하면서 보았던 나이를 떠올렸다.
“하얀 씨, 올 때는 온다고 말을 해 주지.”
웃는 낯으로 정하얀에게 안부를 건네지만 그 안에 배인 은근한 짜증과 귀찮음이 느껴졌다. 당사자인 정하얀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고 능숙한 미소가 사람의 시선을 빼앗기 때문에 눈치채기가 어려웠다. 남들보다 보는 시선과 눈치가 기민한 이기영에게는 유감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이토 소우타가 등장할 때 둘이 있는 걸 본다면 시작도 전에 눈에 들어올까 싶어 만일을 대비해 나가는 시늉을 하려고 했던 이기영은 어찌하지 못하는 상태로 엉거주춤 멈춘 상태로 눈을 굴렸다. 흐음. 이기영의 보기 좋은 눈썹이 한껏 휘어진다.
“차, 창태 씨, 저, 저는…….”
“하얀 씨, 오늘은 바빠서 제가 시간을 더 낼 수가 없어요. 후에 직접 하얀 씨를 뵈러 갈 테니 모쪼록 오늘은 돌아가 주실 수 있을까요.”
화사한 표정으로 이토 소우타의 한국식 이름을 부르던 정하얀의 말을 끊고는 제 손목 시계로 시간을 힐끔 확인한다. 잔뜩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누가 봐도 얼른 가라는 신호였다. 안타깝게도 정하얀은 그 신호를 모르는 듯했다. 몇 번 입술만 달싹이던 정하얀이 이토 소우타가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축객령을 내리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곧 회의가 있어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 하얀 씨. 하얀 씨는――.”
다정하시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정하얀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던 이기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저 여자의 성격을 파악하고 저렇게 다루는 이토 소우타는 솔직한 심정으로 제법이었다. 이토 소우타 본인도 정하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위험하고, 조심히 다루어야 하면서도 또 놓을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적절한 관심과 애정에 굶주린 듯한 정하얀이 좋아할 만한 단어만 골라 내뱉으니 정하얀이 불안해 하면서도 수긍하고 물러나는 걸로 매번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 한 그룹의 이사직 자리까지 맡고 있는데 사람 하나를 못 다루는 건 말이 안 되지. 파란도 그렇지만 실리아는 이토 소우타 모친의 그룹 이름이었다. 바뀌기 전에는 야마토였던가. 이기영은 짧게 혀를 차며 복도로 나왔다. 저런 인물이 현 파란의 후계자라 이거지.
현성아, 너 갈 길이 먼 것 같다.
“기영 씨?”
기다리고 있던 박덕구 뒤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린다. 박덕구가 몸을 틀자 하얀 얼굴에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현성이 보였다. 생각하기 무섭게 나타나다니. 이기영은 잠깐 헛웃음을 내비쳤다. 의아한 낯의 김현성은 이기영이 반가우면서도 또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또렷한 의문을 담았다. 분명히, 오늘, 외근이 있다고. 김현성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이기영 쪽으로 다가갔고 이기영은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응접실 안에 있던 이토 소우타가 이기영을 부르고 있었다. 이기영에게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춘다.
“곧 회의 시간이 있어 부득이하게 부탁드립니다. 하얀 씨를 회사 밖으로 안내해 주세요.”
얼른 저 여자를 끌어내, 하고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실제로 틀린 해석도 아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하얀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밀어낸 이토 소우타가 이기영을 보며 부탁했다. 그를 따라 똑같이 웃던 이기영은 응접실을 나와 먼저 몸을 틀어 걸어가는 이토 소우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뭇거리며 다가온 정하얀이 심히 우울한 낯으로 아까와 비슷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이기영은 한숨을 삼켰다. 답답한 기분이 스쳤으나 어쩌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마음의 눈을 통해 이토 소우타를 본 순간부터 든 확신이었다.
그는 없고 김현성은 있는 것. 이기영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정하얀에게 손짓했다.
“기, 기영 씨.”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현성이 이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김현성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 떨림은 당황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엇으로부터? 의아한 기분이 들어 김현성을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은 찰나였다. 김현성 또한 중요하긴 해도 지금은 그 중요한 김현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하얀 씨, 이사님 말씀대로 밖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충분한 여유도 있었고. 나가는 동안 이것저것 정보를 캐거나 물면 더 좋다. 이기영은 속내를 억누르며 입꼬리를 당겼다.
“아, 형님, 그러면 나――.”
“저도 가겠습니다, 기영 씨.”
옆으로 다가온 박덕구가 팔을 들 때 김현성이 냉큼 이기영의 옆으로 왔다. 발언을 잃고 당황했던 박덕구가 곧 정신차리고 “나, 나도 갈 거요!”를 외치면서 정하얀의 옆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며 이기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김현성이 직원들 사이에서 친절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런 식으로 귀찮은 일을 굳이 맡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먼저 다가올 줄이야. 김현성도 방금 스친 인물이 누구인지, 지금 옆에 있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판을 만들기도 전에 먼저 이렇게 노력해 주는 모습에 절로 뿌듯해진다. 현성아, 타이밍 놓치지 말고 저 여자를 꼬시는 거야. 네 얼굴이라면 할 수 있어, 하고. 이기영의 걸음걸이가 사뿐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한껏 기분이 고조된 이기영은 입을 놀리기로 했다.
“정하얀 씨는 이사님과 어떻게 약혼하신 겁니까.”
“네? 저, 저는, 아니, 저희들은…….”
놀라 눈을 둥글게 뜨는 모습이 하얀 토끼처럼 보였다. 금세 쑥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트는 정하얀을 보며 이기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묻지 않아도 뻔하긴 했다. 집안끼리 연결했겠지. 그 덕분에 이토 소우타가 정하얀을 귀찮게 생각하고 있는 듯해도 버리지 못하는 건 다 정하얀 뒤에 든든히 버티고 있는 배경이었다.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조금 그런 말은 안 하면 된다. 하지만 이기영은 하기로 했다.
“이사님께서는……, 정하얀 씨를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네요.”
이기영이 던진 폭탄에 숨을 들이키는 건 박덕구였고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 김현성이었다. 순간 사고회로가 멈춘 정하얀의 입술이 부들거리며 떨리더니 곧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그, 그런.” 정하얀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제게로 향하는 진득한 시선들을 즐기듯이 가만히 웃고만 있던 이기영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저는 소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한테 안 맡길 텐데 말이죠, 하고. 이기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도착 알림음과 함께 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하얀은 할 말을 잃은 대신 이기영에게 더 말을 해 보라는 듯이 눈빛으로 종용했다. 마치 무언가를 갈급하는 불과 같은 시선에 이기영은 그 반응을 피하며 느긋하게 층수 버튼을 눌렀다.
“굳이 새겨듣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드, 듣고 싶네요. 그, 그러니까 해, 해주세요.”
나름 목에 힘을 주고 명령하듯 얘기하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모든 걸 깎아내린다. 다른 사람이라면 피식거렸을 순간에도 표정을 관리한 이기영은 “그렇다면…….” 목소리를 깔았다. 둘의 관계를 매도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상하다, 라는 밑밥을 만들어 낸다. 정말 소중하고 좋아하는 연인이라면 그렇게 보내지도 않을 테고 얼굴도 모르는 회사 직원에게 떠맡기듯 보내지도 않을 거라고. 소중히 대하고, 지금 이렇게 같이 나가는 것도 연인이어야 했다, 같은. 이기영은 아무것도 아닌 말을 흘리듯이 조곤거렸다.
정하얀 씨는 능력도 좋으실 텐데――.
“더 사랑받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을 끝으로 띵, 하고 도착 알림음이 들렸다.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정하얀을 향해 나가자고 팔짓하자 어깨를 떨고는 밖으로 나간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며 회사 밖으로 나온 이기영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로 무언가 바뀌기는 무리다. 그러나 본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망각한다면 이토 소우타에게 받은 태도를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제가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정하얀은 제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떨리지 않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이기영의 발목을 묶었다. 슬금슬금 발목을 휘어잡는 검은 것이 점점 조여오는 것도 모르고 이기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얀 씨는 충분히 그래도 되는 사람입니다.”
뭐, 아니더라도 정하얀 씨가 위치를 이용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어도 좋을 수도 있고. 다소 책임감 없는 말이었고 이기영 스스로 알고 있으나 일부러 던졌다. 후자의 말이 정하얀 뇌리에 강하게 박힌다면 정하얀은 절대로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낮아질 것 같았으니 말이다.
“위, 위치를 이용…….”
확실히 꽂힌 것 같기도 하고. 정하얀은 어느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건드리고 있었다.
“뭐, 조언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됩니다. 정하얀 씨가 제 동생과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오지랖을 떨었네요.”
물론, 친오빠처럼 편히 부르셔도 되고요――. 농담 섞인 어투로 이기영은 정하얀을 배웅했다.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하얀의 시선이 다소 음습하게 떨리는 것을 모르는 이기영은 제가 뱉은 헛소리에 피식 웃었다. 이율하는 이기영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친동생이다. 너무 잘해서 문제지. 이기영은 몸을 돌려 다시 회사 쪽으로 향했고 그 옆은 정하얀 없이 박덕구와 김현성이 따르고 있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 같다.
“거, 형님. 왜 그런 말을 한 거요?”
지금껏 가만히 있던 박덕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찬가지로 조용히 있던 김현성의 시선이 이기영에게 닿았다. 회사를 생각하면 둘의 관계가 유지되는 게 말단으로서 좋을 수도 있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박덕구의 생각이었고 이기영은 그 둘이 갈라져야만 하는 강한 이유가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이기영이 박덕구가 아닌 김현성을 응시했다.
“그냥 안타깝잖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게.”
현성아, 나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아까 봤는데 대놓고 무시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나 봐. 여동생 있어서 그런가……, 내가 오지랖이 심하긴 했다.”
이럴 때만 팔아넘기는 여동생이다.
“혼자서 무언가 해 볼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김현성의 동공이 모를 이유로 떨리는 게 보인다. 이기영은 그저 웃었다.
“형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솔직히 비밀인데……, 이사님이 영 사람다운 느낌이 없는 것 같소.”
다시 회사 내부로 들어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깐 박덕구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로 입을 다물었던 박덕구는, 곧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터운 손이 이기영의 등을 가볍게 쳤다.
“이야, 형님. 정말 형님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오.”
누가 본인 회사의 이해득실 따지고도 그런 말을 하겠냐며 박덕구는 크게 웃었고 이기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기영도 특이한 상황에 처해진 게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정말 형님이 존경스럽다니까.”
형님, 최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박덕구에 이기영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저렇게 혼자 뿌듯해 하는 박덕구를 적당히 제지하면 된다. 이기영도 기분 좋고, 박덕구도 기분 좋은 선에서. 그럴려고 했는데.
“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잠자코 있던 김현성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기영이 입을 다물고 그 김현성마저 칭찬을 하니 박덕구가 더욱 신이 나 떠들어댔다. 그런 박덕구의 호들갑을 보면서 김현성이 더 뿌듯한 표정을 짓는 게, 이기영은 얼떨떨하면서도 속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제지……,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기영은 입술을 꾸욱 깨물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덕구를 통해 파란 그룹의 후계자와 정백 그룹의 딸이 파혼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한 이름은 듣지 못해도 누군지 알고 있으니 이기영은 주먹을 쥐고는 잠시 힘을 주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토 소우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했어도 회사 내부 사정으로는 그다지 큰 타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속사정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토 소우타의 성격으로는 제법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이라는 선택까지 하면서 정백 그룹과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했던 게 무산이 되었으니 말이다. 정하얀 위에 두 여자를 잡는 게 좋은데. 아무리 봐도 정하얀은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능력도, 성격도. 어디 하나 빼어난 구석이 없고 그룹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도 아닌데 왜 붙잡으려고 했던 걸까. 어딘가 걸리는 감이 있지만 한참 아래에 있는 이기영의 정보력을 모아도 무리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이기영은 관대해지기로 했다. 이토 소우타가 차린 밥상에 재를 뿌리다 못해 숟가락도 치워놨으니 한동안 정하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지겠지. 이토 소우타가 지지부진할 동안 김현성의 쓰임새를 높이는 게 우선이었다. 거의 빈털터리로 시작하는 프린스 메이커나 다름없다. 정말 게임이었으면 진즉에 치트키를 사용해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줄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이기영의 꿈은 대기업 파란을 집어삼킨 김현성 옆에 서서 믿을 수 있는 오른팔로 군림해, 떨어지는 제 몫의 콩고물을 챙기는 거였다. 김현성 정도라면 떨어지는 콩고물도 먹음직스럽지 않을까. 김현성이 그럭저럭 알려져 있는 상태라면 어림도 없을 행동이었으나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이기영이 어떻게 주물러도 순수함를 담은 다정한 선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제게 닿는 김현성의 시선이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도 안다.
그래, 이렇게만 잘 가면 된다.
정말로, 파란 기업을 먹게 된다면. 푸흡. 이기영은 비집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가리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원증을 찍으며 회사 안으로 들어올 때 자주 보는 경비마저 “무슨 좋은 일 있으신 것 같습니다.” 라는 실없는 소리를 건네도 이기영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고, 실제로 이기영은 요 며칠 동안 기분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가벼웠다.
한창 성수기도 지나서 그런지 업무도 그렇게 바쁜 편이 아니다. 오전부터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있던 이기영은 점심쯤에 박덕구를 따라 근처 카페로 들어가 그 곳에서 김현성을 보기 직전까지 말이다.
“어, 현성 씨 아니요?”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게 반가웠는지 씨익 웃는다. 이기영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김현성을 건들며 아는 체를 할 게 선하다. 박덕구의 팔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덕구야, 다른 사람이랑 있다.”
그러니 굳이 가지 말라는 의미다. 턱짓하며 가리키자 그제야 상대방을 발견한 박덕구가 머쓱한 듯이 눈을 굴렸다. 나지막하게 “여, 여성분이랑 같이…….” 중얼거리는 박덕구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밴다. ‘그 김현성 씨가?’ 하는 놀라움과 함께 당연히 ‘그 김현성 씨니까.’ 싶은 뿌듯함이 묻어져 나와 이기영은 가늘게 뜬 시선으로 박덕구를 흘겼다. 종종 드는 생각인데, 박덕구는 마치 오랜만에 보는 사촌동생 대하는 것처럼 김현성의 행동 하나하나를 장하게 두는 경향이 있었다. 돼지 새끼가 자기나 좀 잘하지. 퉁명스러운 감정이 새어나왔지만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본 박덕구를 향한 걱정과 핀잔이 동반돼 있다.
박덕구와 비슷하게 영 힘을 못 쓰는 사촌동생 바라보듯 보고 있던 이기영은 시선을 돌려 김현성을 훑었다. 마침 진동벨이 울렸을 때였는지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있던 여성도 따라 일어나려고 한다. 김현성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짧게 웃는 것이 보는 사람도 참 훈훈하게 만든다. 안 그래도 회사 근처 카페에다 시간도 점심과 겹쳐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김현성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홀린 것처럼 따라 움직이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남자치고는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연약함은커녕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이 유난히 탐스럽고 붉다. 눈썹도 가지런하고 눈은 말할 것도 없는데. 어디 하나 빠진 구석이 없다니. 박덕구와 비슷한 마음으로 뿌듯해졌다.
그래, 현성아. 솔직히 이토 소우타는 회사에 맞는 얼굴이 아니다. 딱 김현성이지. 믿음과 신뢰를 무한하게 줄 것 같고 어디 홍보라도 하면 소비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할 듯한 외모다. 미래의 회장님께서 얼굴도 참 열심히 일을 하신다고. 속으로 감탄하면서 주문을 마친 이기영은 박덕구와 함께 근처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어머, 이 대리님.” 하고 반가운 표정을 짓는 다른 부서 사원에게 적당히 인사를 마치며 이기영은 박덕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하는 건 주로 박덕구였고 듣는 쪽은 이기영이다.
“아, 잠시만.”
진동벨이 울리자 이기영이 팔을 올려 대화를 끊었다. 박덕구가 일어나려는 걸 손으로 어깨를 눌러 다시 앉게 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굳이 도맡아 하려고 한다. 농담 삼아 형님은 머리 쓰는 일을 하고 움직이는 건 자기가 하겠다며 가슴을 칠 때도 있지만, 이기영에게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후배를 위해 먼저 움직여 주는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하는 게 맞고. 그저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좋아해 주면 된다. 비스듬하게 입가를 당겼다. 카운터로 다가간 이기영은 진동벨을 반납하고 트레이를 들었다.
가끔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선이란 게 있는데,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던 부분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런 때가 딱 지금과도 같은 상황처럼. 박덕구의 잘 따르는 개처럼 보고 있는 시선이라 생각했으나 위치가 다르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린 이기영은 김현성과 그 옆에 선 여성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확하게는 이기영과 김현성의 시선이 닿았다. 트레이를 반납하려고 했는지 일어나 있던 김현성이 두어 번 정도 눈을 깜빡이더니 흠칫, 놀란다. 여성은 걸음을 멈춘 김현성을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등을 지고 있던 상태라 잘 보지 못해 여성을 잘 볼 수 없었는데 눈에 들어오자 새삼스럽게 감탄이 인다. 무뚝뚝해 보이나 눈빛에는 고집이 있어 보였다.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는 느낌이 참 김현성이랑 잘 어울린다 싶을 정도로. 김현성 주변에는 여성 사원들이 많다. 호감을 가진 게 분명한데 김현성이 안 보이는 벽을 치고 있으니 주변을 돌고 있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우리 현성이라면 그래도 되지. 그런 김현성이 낯선 여자와 함께 있으니, 아무래도 생각이 그쪽으로 튀게 된다.
옆에 있던 여성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김현성 쪽으로 돌아가자 창백한 낯이 보인다. 무언가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불안이 담긴 눈빛이다. 그 눈빛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지금은 더욱 그랬다. 대체 뭘 걱정하는 건지. 이기영은 의아했지만 그간 자신이 지내온 삶과 상황을 생각해보며 얼추 이해하기로 했다. 잘 지내는 형한테 호감 있는 상대랑 있을 때 의외의 곳에서 만나면 나 같아도 당황스럽기는 할 거다.
기실 이기영이라면 찔리는 상황이라도 더욱 당당하게 대했을 테지만. 사람 성격이란 게 다 다르니 말이다.
“형님, 왜 서 있는 거요?”
어느새 다가온 박덕구가 제 잔을 들며 물었다. 쯧, 짧게 혀를 찬 이기영은 트레이 위에 홀로 있는 잔을 들고는 카운터 위에 트레이를 다시 두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덕구야.”
가볍게 고개를 저은 이기영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에게 시선을 주며 짧게 웃었다. 누가 봐도 믿음직한 미소다. 걱정 마라, 현성아. 형은 네가 부담스러워 할 만한 건 안 묻는다. 솔직히 정하얀 같은 배경이 거물급인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좋겠지만, 네가 마음에 든다면……, 하고. 연애는 마음에 드는 상대랑 결혼은 미래를 열어줄 상대랑. 그렇게만 하면 됐다. 그런 의미의 가벼운 미소임에도 김현성의 낯이 더 어둡다. 뭐야. 어떻게 해석한 건데. 내 흐뭇한 미소가 뭔지 몰라? 현성아, 형을 모르니.
도리어 당황해 버렸다. 박덕구가 어깨를 잡아끌며 카페 밖으로 벗어나기 전까지 얼떨떨한 심정이 된 이기영은 앞을 바라봤다.
오후 업무를 보던 와중에 잠시 다른 부서에 들를 일이 있던 박덕구가 김현성 옆에 있던 여성에 대한 정보를 물어왔다. 인사팀의 조혜진. 본래는 다른 회사에 있던 유능한 인재였으나 파란으로 옮긴 지 2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하고 고개를 주억이게 된다. 조혜진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종종 이름이 언급되는 존재였다. 융통성 없기로도 소문이 나서 서로 부딪치면 시달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김현성이랑 언제부터 아는 사이인 건지. 당사자가 직접 말을 해 주지 않는 이상 둘 사이의 관계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이기영도 마당발인 박덕구도 알 재간이 없다.
알 수 없는 부분은 많았지만 중요한 인물은 아니라고 평가를 내린 이기영은 담백하게 그렇구나,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한창 열심히 해야 할 때지만 가끔 쉴 구멍도 있고 그래야지. 그런 생각의 이기영과 별개로 김현성은 아닌 듯했다.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뒤통수가 따끔하다. 고개를 돌리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찾을 수 없지만 다시 일을 하려고 하면 따끔거리는 게 몇 번 반복됐다. 누가 봐도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김현성의 태도에 답답해진 건 이기영이었다. 이기영은 가슴께를 꾸욱 눌렀다. 회사 근처에서 여자랑 있던 걸 본 게 대수라고. 같은 회사 직원끼리 자주 갈 만한 데서 죄 지은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
현성아, 형 못 믿니? 형, 이기영이다.
김현성의 두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열심히 하라는 업무는 안 보고 자꾸만 주변을 기웃거리는 김현성을 버티다 못한 이기영이 커피 좀 마시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일어나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저도 잠시…….” 하고 서둘러 따라오는 기색이 역력하다. 애초에 그 부분을 노리고 움직인 게 맞긴 한데, 김현성은 착실하게도 물었다. 탕비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이기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영 씨…….”
우울함이 가득 배인 목소리였으나 이기영은 모르는 척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낮에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예 관심조차 없는 가벼운 반응에 김현성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예, 현성 씨. 커피 드실 거면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다정한 선배의 본분도 잊지 않고 움직이자 뒤에 있는 김현성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야 하나. 종종 세련된 고양이처럼 아닌 척 날을 세운 김현성의 모습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건, 뭐. 고양이도 아니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게 꼭 덩치만 큰 개다. 쩔쩔 매는 시선으로 이기영을 보고 있었던 김현성이 눈이 마주치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반응을 보이니 가끔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인 게 어쩔 수 없다. 물론, 사탕 준다고 꾀어내는 중인 건 맞다.
이기영은 방긋, 웃었다. 사람 대하는 게 아직 부족한 미래의 회장님을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현성 씨, 제게 무슨 할 말 있으신 겁니까.”
왠지 그렇게 보여서요. 말끝을 늘어뜨리며 커피잔을 내밀자 김현성이 아, 침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잔을 받는 건 그다운 행동이다.
“아까……, 카페에서…….”
“낮에 만났었죠? 안 그래도 인사하려고 했었는데 옆에 다른 분이 계셔서 방해 않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너 여자랑 있더라? 근데 난 착해서 가 줬어. 부드러운 억양 밑으로 누른 속마음을 감추며 미소를 유지했다. 인사하려고 했던 것도 이기영이 아닌 박덕구였지만, 비슷하긴 하다. 김현성 옆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이기영이 제일 먼저 다가갔을 테니 말이다. 담백한 반응에 눈만 굴리던 김현성이 “맞습니다……, 맞긴 한데.”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기영은 조금 더 양보해 주기로 했다.
“회사 근처 카페였으니 다른 부서 직원인가 봅니다.”
이제 떠먹이듯이 뱉어내는 말을 잡는 건 김현성의 몫이었다. 이기영 마음 속 미래의 회장님께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그리고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누가 보면 굉장히 멋진 말을 들은 것 같은 태도다. 빛이 나는 표정을 눈앞에서 본 이기영이 의아한 감정을 속으로 문질렀다.
“네, 그렇습니다. 인사팀에…….”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 어디서 만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 김현성이었다. 안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김현성에 대한 거라면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는 이기영으로서 고마운 행동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왜 저렇게까지 설명하나 싶은, 그런 느낌. 그래도 알려줘서 다행스러운 감정까지 섞였다. 김현성을 가만히 보다가도 우리 애가 저러고 싶다는데 뭐 어떠냐 싶은 느긋함을 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던 김현성이 이기영과의 대화 이후로 한껏 홀가분한 표정으로 업무에 집중했다. 김현성은 일을 잘했다.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는 부서 내에 다른 신입 사원들이 입을 씰룩이며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낼 때도 있지만, 부서 내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 건 좋은 거라며 열등감을 억누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너희가 질투할 그런 상대가 아니다. 이기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상하게 아쉬움이 들었다. 서로 잘하고 있단 느낌이기는 한데, 뭐랄까.
“계속 이렇게 일만 하고 끝날 것 같은 게…….”
설마 그러겠어.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씨바, 현성아. 그런 호칭 갖고 있으면서 고작 그 정도의 자리에 만족하면 안 된다. 요새 느끼는 이상함과 미묘한 불안함이 뭔지 깨닫고 나서야 먼 허공을 보고 말았다. 시작이 너무 밑이어서 행동하기 어려운 점도 있긴 한데, 입을 놀려 하나둘 바꾸거나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바로 일하는 맛이란 걸 알았다. 알면 뭐하나. 묘하게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김현성을 보며 드는 생각이 똑같이 기분이 아니라 이게 뭔가 싶은 애매한 마음이라니. 이게 다 김현성의 행동이 미적지근한 탓이다. 이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 어느 정도 아귀가 떨어졌다.
“오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기다릴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지혜가 매끈하게 정돈된 손톱으로 그의 뺨을 가볍게 눌렀다. 깜찍한 행동에 정신이 돌아온다. 맞은편에 앉은 이지혜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저를 두고 다른 여자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잖아, 누나.”
“그럼 다른 남자인가?”
“…… …….”
찰나의 침묵에 돌아오는 시선이 가늘다. 이기영은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왜 바로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했는지. 다른 남자 생각한 건 맞지만, 왜 찔린 기분이 드는 건지. 희미하게 웃자 이지혜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흐음, 하고 작고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린다.
“오빠, 같은 부서가 아니라서 제가 잘 못 보는 줄 아는데요. 저 보는 눈 되게 많거든요.”
단정하게 정리된 제 손톱을 보며 이지혜는 다른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당연히 알지. 누나 능력이 어느 정도인데.”
“그걸 아시는 분이 요즘 이상하게, 왜, 남자랑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
아니, 동성이랑 어울리는 게 뭐가 문제야. 그 말이 목 위로 솟구쳤다가 가까스로 내려갔다. 이기영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건지 이지혜는 말을 이었다.
“오빠, 요즘 부서 내에서 도는 소문 잘 모르죠?”
“소문?”
이기영이 못 잡을 만한 소문 같은 건 없는데. 돌아다니는 소문이 정말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기영에게는 자존심 문제로 다가왔다. 놓치는 소문이 존재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그런 이기영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이지혜가 긴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다 헛소리야.”
이기영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이지혜는 입을 달싹였다. 난 또.
“하도 소문이 그래서 난 또 남자까지 견제해야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진짜 헛소리인 것 같은데.”
“아무럼요. 천하의 이기영이 삶을 끝낼 짓을 하겠어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사람들 생각이란 게 여전한데. 이지혜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봤죠. 그 이기영이 왜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나……, 당연히 이기영에게 득이 될 일인 게 확실한데, 하고.”
이지혜를 따라 웃던 이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감이 날카롭다. 이래서 마음의 눈으로 볼 때마다 영혼의 짝이니 뭐니 그런 말을 잘도 지껄이는 거겠지. 심지어 이기영이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챙겨오는 게 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제가 내린 생각과 정보를 모아 결론을 내린 이지혜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오빠가 뜬금없이 정백 그룹의 여자랑 어울릴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뭐, 결론을 내렸죠. 이제 저도 사모님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고.”
잘 가다가 마지막이 이상한데.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며 이기영은 턱짓했다. 그래서?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빠가 좋거든요. 초반 입사 때 된통 물 먹은 거 생각하면 아직도 짜릿해서 말이죠. 그 수단과 방법에 여자가 있어도 상관없어요. 마지막이 나면 되잖아.”
제가 오빠 엄청 높게 쳐주고 있는 거 알죠? 이지혜스러운 발언이다. 도달한 결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르기는 해도 괜찮았다. 이기영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지혜는 충분히 김현성 메이커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기영의 행동 패턴이 조금 바뀌었다는 이유로 하나로 이상함을 눈치 채고 주변 조사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 수가 없다.
그런데, 뭔가.
“정백 그룹의 여자랑 어울리고 있다?”
“아, 정확하게는 혼자만 어울리고 있는 중일까요?”
산뜻한 이지혜의 반응에 미묘한 시선이 된 이기영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이럴 때는 제법 귀엽다. 이지혜는 풋,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를 죽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지금 죽을 것 같은데요. 쳐다보는 게 예술이에요.”
농담 아니고 지금 이 레스토랑을 벗어나면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릴 것 같았다. 이지혜는 조금 춥다며 비실거렸다.
“오빠, 오른쪽 옆으로 세 번째 테이블.”
상체를 앞으로 숙여 이기영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중얼거린다. 이지혜의 행동에 이기영도 자연스럽게 주변을 훑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움직였다. 원래대로 돌아오자 나지막하게 “봤어요, 오빠? 내가 감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화장기 없는 단정한 얼굴과 반대로 입은 옷이 비싸 보였다. 이런 데 안 올 것 같았는데. 이지혜가 느낀 시선의 주인은 정하얀이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동시에 이지혜의 정보력에 감탄했다. 정하얀이 누구며 어떻게 생겼는지 벌써 머리에 박고 있다니. 이기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다정한 눈빛이다.
“누나, 열심히 조사했나 봐.”
“오빠 일은 제 일이니까요.”
예전에는 누나란 말에 미소에 금이 갔던 것 같은데 요즘은 유들하게 넘어간다. 묘한 재미가 있었던 부분이 사라졌음에 다소 아쉬움을 느낀 이기영이 고마워, 하며 입매를 당겼다. 키득거리면서 대꾸한 이지혜가 옆으로 흘러내린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기울인다.
“이사님이랑 파혼하게 만들더니 무슨 짓을 벌인 거람, 이기영은?”
“딱히 한 건 없는데.”
말 몇 마디 했을 뿐이다. 그 이후로 정백 그룹과 얽힌 일도 없고 말이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상대가 좋다고 물을 부분이 없다. 이기영은 고개를 저었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선선한 태도에 이지혜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잘못 걸린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운이 좋을 수도 있는 것 같네요.”
다른 여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인데, 그 여자의 수준을 보고 쓸 만한지 파악하는 게 어쩌면 이기영보다 더 냉철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지혜의 능력이라면 굳이 자신과 협업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무래도 성격이나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서 눈에 띄게 앞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은 건지, 혹은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하는 걸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스스로 선을 만들어 한계를 넘지 못할 수 있어도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보다 낫다. 또한 그는 제가 다룰 수 없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지 않았다. 이기영보다 능력이 좋더라도 주무를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이다. 기꺼이 밑으로 기어들어가 제 존재를 감춰도 될 수 있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누군가 그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비난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고, 있어도 비슷한 영혼의 짝꿍뿐인데.
이기적인 쓰레기. 그리고 이기영도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연말 행사에 참여할 생각이겠네요, 오빠.”
“응, 그래야지.”
말은 이렇게 해도 참여할 수 있게 만들 연줄이 없다. 이렇다 할 수 있는 게 불가능한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현성아, 하고 속으로 앓는다. 너무 느긋했다. 당장 간부급들로 이루어진 행사에 참여할 수 없는 수준이라니.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누나는 갈 수 있나 봐.”
“네, 제가 또 줄을 잘 섰잖아요.”
간부, 박연주를 말하는 것 같다. 박연주가 행사 파트너로 이지혜를 골랐군. 이기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간부급 행사라고 해도 파란 가족 행사고, 또 외부에 자랑하는 행사잖아요.”
결국 잘난 놈들끼리 모여서 하하호호 웃는 곳이라는 말을 좋게도 둘러댄다. 이지혜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기영을 응시했다. 자못 장난기가 섞였지만 그 안에 생각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게 보인다.
“정 구하기 어렵다면 외부에서 구해보려고 했어.”
웬만하면 외부의 도움을 받는 건 없어야 했다. 외부로 고개를 돌려봤자 득보다 잃을 게 많으니 평소의 이기영이라면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파트너 정도라면, 혹은 그다지 아쉬울 게 없거나 이기영을 마음에 드는 상대라면. 그간 회사 생활을 통해 안면을 텄던 이들을 떠올리는 틈새로 이지혜의 가벼운 목소리가 가로지른다.
“그렇다면 정해진 것 같네요, 오빠?”
오른쪽 옆으로 세 번째 테이블. 이지혜는 혀로 제 입술을 핥았고 이기영은 아, 하고 눈을 둥글게 떴다. 이기영의 눈이 천천히, 옆으로. 여태까지 쉬지도 않고 여기만 보고 있었는지 파리한 낯의 정하얀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선이 닿자 화들짝 놀라더니 곧 홧홧해진 얼굴로 몸을 움츠리는 게 보인다. 이기영은 작게 입을 모았다. 신은 믿지 않지만 가끔은 신을 찾아도 될 것 같다고. 이렇게 안배해 둔 것처럼 위치에 있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랑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이기영은 저를 힐끔거리며 보는 이에게 눈웃음을 쳤다. 적당히 배경이 되고, 행사에 어렵지 않게 참여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이기영은 고민했다. 이지혜와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는데, 별개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기영을 이렇게 일하게 만드는 상대이며 동시에 이기영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김현성이 문제. 여러 번 언급하는 것 같지만 김현성은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만, 했다. 어디서 문제일까, 싶었는데 비슷한 또래였다면 그 나이가 되도록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김현성처럼 일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김현성이 그래선 안 됐다.
무슨 의도를 갖고 파란에 입사를 했으며 이토 소우타에게도 없는 칭호를 지니고 밑바닥부터 시작하는지. 질척한 부자들의 막장 이야기는 얼추 예상할 수 있어도 이걸 티를 낼 수가 없다. 김현성은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고 또 드러내지 않았다. 몸을 둥글게 말고 쳐내던 초반의 김현성을 떠올리자 눈가가 아른거린다. 어디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 홀로 궁리만 하고 있으려니 가끔은 답답했다. 동화 속 남자에게는 대나무 숲이라도 있었지 이기영은 지닌 게 얼마 없다.
스케줄이 예전 같지가 않다. 적당히 쉬고 여유도 부릴 때가 있었는데, 모두 과거의 영광처럼 바래지고 있었다. 정하얀과 꾸준한 교류를 하고 이지혜와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고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김현성 주변도 얼쩡거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영업왕 이기영이라는 이름도 놓칠 수 없다니. 스트레스 유지라도 못했다면 다 그만두고 훌쩍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기영이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닌 점에 박덕구도 김현성도 감사해야 했다.
젊을 때 아니면 언제 그래. 내가 그린 완벽한 미래가 있는데. 미래의 회장님 김현성의 영원한 오른팔, 이기영이라는 호칭. 성공한 자신을 생각하면 스러지던 체력도 솟아난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지금도 먼 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묘해지는 관계가 있다면, 그것 또한 김현성이었다. 계절이라도 타고 있는 건지. 서로 초면이었을 적보다는 낫지만 어째 예전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처럼 이기영의 마음도 얼어가는 듯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말이라도 건네려 하면.
“저, 현성 씨.”
“네, 기, 기영 씨. 아니……, 제가 지금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이런 식이거나.
“현――.”
“박 대리님, 조금 전에 부장님께서.”
저런 식이었다.
잡기도 전에 도망치는 걸 보려니 속이 꼬인다. 그렇다고 계속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김현성은 분명히 이기영을 보고 있었다. 가끔은 환하게, 또 가끔은 우울하게, 어쩔 때는 고민하는 시선으로. 미래의 회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요즘 따라 김현성의 머리통을 들쑤시고 싶다는 충동이 자주 들었다. 계속 주위를 배회할 거면 듬직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지 왜 저렇게 어수룩한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스무 살 초년일 때나 할 법한, 풋풋한――, 음? 헛생각으로 흐를 뻔했다.
어쨌든 이기영은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하는, 그러나 여전히 이기영의 눈치를 살피는 김현성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도 슬슬 지쳐갈 때다.
“형님, 이날에 무슨 약속 있소?”
박덕구가 제 데스크 자리에 있던 캘린더를 들고 다가오더니 두툼한 손으로 날짜를 가리켰다.
“그때는 선약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박덕구가 가리킨 날짜는 간부 행사와 겹치는 때다. 한창 연휴도 섞여서 쉴 수 있는 요일이었기에 이기영과 어울릴 생각이었던 박덕구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니, 잠깐.
“선약이라니. 형님.”
“덕구야.”
이 돼지 새끼가 또 헛소리 모터를 돌리려고 하는 것 같다. 이기영이 팔을 들어 제지하려고 움직였다. 두꺼운 팔을 잡으려던 박덕구 너머로 입에 종이컵이 하나,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김현성이 보였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누구 주려고 오는지 선하다. 기특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얘가 오늘은 웬일로 순순히 다가오나 싶기도 했다. 박덕구가 “형님! 방금 촉이 왔는데.”라며 언성을 높이자 순순히 눈을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잦아든다.
“강원도에서 연애박사 박덕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저 말만 벌써 몇 번째다. 이기영의 입술이 삐뚜름해졌고 박덕구의 뒤통수만 보고 있던 김현성의 표정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이 연휴 기간은 웬만해서 가족, 친구, 아니면 연인들과 하루 정도 어울리는 날이요. 하지만 형님은 가족이 없으니 아니고.”
아니, 이 근육 돼지가? 부모님이 없는 게 맞으면서도 필요할 때만 팔리던 이율하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친구랑 어울리는 건 아니라는 이 박덕구의 촉이 왔소.”
중학생 때부터 관계를 유지하던 핸드폰에 입력된 연락처가 단숨에 지워졌다.
“남은 건, 연인……, 인데. 형님, 솔직히 말할 때요.”
“뭘?”
이기영은 진심으로 물었다. 뭘.
“거……, 그, 정백 그룹의 막내랑 요즘 잘 어울린다고. 형님이야,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건 맞지만 유독 챙겨주는 게 영 수상했소. 그러니, 이건!”
단순히 정하얀이랑 잘 지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왜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지 모르겠으나 이기영은 이 기회를 걷어찰 성격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으면, 천천히 그물을 쳐야 한다. 간부급 행사 때 이기영을 파트너로 사용해줄 고마운 배경이긴 것도 맞다.
――라며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없지만. 이기영은 불편한 침묵을 택했다.
“아무리 봐도 회계팀 희영 씨가 형님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무심하더라니. 크으. 그런 이유가 있었구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자화자찬한다. (김현성은 여기서 중얼거렸다. “회계팀……, 희영…….”라고.)
“어쩌다 그런 관계가 된 거요? 역시 그때가 계기인가. 하긴, 그래서 이사님 뻥 차고 형님한테 간 거 아니요?”
심지어 기승전결도 다 만들었다. (김현성은 또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때……, 기영 씨, ……었지.”라고.)
“덕구야, 그런 거 아니다.”
웃으며 그 입을 막으려고 해도 눈치를 강원도에 맡긴 박덕구가 신이 나 떠들었다. 따악, 하고 이루어진 운명의 로맨스! 상처받은 대기업 딸과 친절하고 착한 영업팀 인재의 만남,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박덕구의 입을 꾹 치닫고 싶은 욕망에 손가락만 유연하게 움직이던 이기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회사 행사 있어.”
“――그렇게 웨딩마치를 올리고 해피――, 엥?”
국수 먹게 해 주는 거요, 형님! 팔을 휘두르던 박덕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으이그, 저 근육 돼지.
“하얀 씨랑은 회사 행사 관련으로 얘기할 게 있어서 자주 만나는 것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일의 연장선이야.”
암, 그렇고말고. 미래의 차기 회장님을 위한 일의 연장선이다. 황당한 듯 눈만 꿈뻑이던 박덕구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그쪽은 형님이 마음에 드는 것 같던데…….” 연애는커녕 결혼부터 2세 육아까지 순식간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박덕구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씰룩인다. 연휴에 황정연을 소개하려고 했던 큰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붓이 꺾였다.
“안 그래도 그날 나 혼자 가기는 뭐해서 같이 갈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듣기로는 간부급 행사라고. 이기영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 있냐고 묻는 걸 보아하니 약속 있나 보다.”
“크, 크흠……, 큼!”
헛기침을 하는 박덕구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짓던 이기영이 금세 표정을 달리했다. 고민이 된다. 가는 건 맞는데 또 어색한 자리에 있으려니 은근히 부담스러울 것 같다. 바로 앞에 있는 박덕구는 이미 그날 약속이 있는데, 이 대화를 들은 상대가 응해주면 좋을 텐데――, 하는 반응으로 말이다. 현성아, 형 지금 낚싯대 잡았다.
속과 달리 곤란한 표정의 이기영은 이걸 어쩐다, 불안감을 토했다.
“기영 씨.”
낚싯대는 아직 안 던졌는데 자세 잡기도 전에 물살을 가로지르며 무언가 떠올랐다.
“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저 그때…….”
던지기도 전에 문 녀석이 망설이고 있다. 이기영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현성아, 그래. 그거야. 세게 물면 돼! 옆에 있던 박덕구의 표정도 환해진다.
“저, 시간 많습니다.”
어쩐지 촌스러운 고백을 들은 기분을 느꼈다.
이기영은 제법 즐거웠다. 미래의 회장님과 함께 할 시간이 늘어난 점도 그렇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던 김현성도 머뭇거리는 건 여전해도 먼저 이기영에게 다가왔다. 대체 왜 머뭇거리는 건지. 그 부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먼 듯했지만 도망치는 뒷모습을 허망하게 볼 때보다 낫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이토 소우타도 즐거움에 한 몫 거들어 주었고 정하얀의 제안으로 정장을 맞추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현성이도 새 옷 입혀 줘야 하는데, 하고 뒤늦은 생각이 들긴 했다. 애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준비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옆에서 다 봐 줘야 하는데 보지 못한 게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일은 이기영 같은 내조인들이 관리하는 영역이었다. 물론 현성이 얼굴과 몸에 안 어울리는 옷이 없을 테지만. 이미 옷걸이가 다르다.
이기영은 정하얀의 손을 잡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당히 공들인 기색이 든다. 지금 제 옷과 맞춘 복장이라고. 뺨을 발갛게 상기한 정하얀이 연신 이기영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자, 자선 해, 행사라니. 오, 오빠네 회사는 좋은 일을 많이 하, 하는 것 같아요…….”
자선 행사라면서 오는 사람이 간부급에 회사와 이해관계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타 기업 간부급의 사람들이다. 파란 기업의 영업부 이기영 대리였다면 올 수 없는 곳을 정백 그룹의 막내 딸 정하얀의 파트너로 올 수 있었다. 이게 좋은 일인 건지. 깊게 생각하기에는 저 너머의 사정이다. 때가 아닌 이기영은 그저 방긋 웃었다.
고급 호텔을 빌린 내부는 소란스러움과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도 조용한 느낌. 이기영은 입술을 누르듯이 당겼다. 지금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부터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 사람들을 볼 때와 확연히 다르게 다가왔다. 높은 샹들리에가 아련한 불빛을 떨어뜨리는 밑에 서 있는 이들이, 앞으로 김현성과 함께할 수도 있다. 정하얀이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지 않았더라면 정신 차리는 게 늦을 뻔했다.
“마, 맛있는 음식들도 많아요, 오빠.”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에 서 있기가 불편했는지 안쪽으로 당기는 정하얀에 순순히 끌려갔다. 이기영 또한 괜히 눈에 띌 만한 상황을 겪는 건 사양이다. 이기영이 지금 이 곳에 온 이유는, 첫 번째로 김현성과 오늘 행사에 참여한다는 회장과 조우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인물 관계의 가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둘 다 성공할지 아니면 하나만 성공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기영은 몇몇 익숙한 사람들을 스치듯 보았다. 파란의 간부급 인사들.
“여기 있었네요, 오빠.”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정하얀과 달리 또렷한 억양이 지척에서 들린다. 잔을 들었던 정하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멈춰졌다. “아…….”하고 정하얀이 낮게 침음했다.
“왜 이런 곳에 있어요? 안 보여서 혼났네.”
작은 키가 흠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한 당당함이 보였다. 다가온 이지혜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머, 하얀 씨는 뭘 입어도 예쁘네요.”
“네……?”
화살이 정하얀에게로 향한다. 정하얀의 기준에서는, 감히 오빠와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고 데이트까지 한 악이었다. 그런 악에게 적의를 태우기도 전에 먼저 말을 건네니 당황한 상태로 눈만 굴리고 있었다. 역시 사람끼리 부딪쳐 봐야 태도가 유연해진다고. 정하얀이 이지혜를 이기려면 한참 먼 훗날의 이야기 같다.
이지혜는 같은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어색한 상황이 무색할 정도로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정하얀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기영 씨가 뿌듯해 하겠다. 그쵸. 같이 옷 맞추신 거 아니에요?”
“헤, 헤헤……, 맞춘 거 맞지만…….”
금세 히죽거리는 정하얀에 피식 웃은 이지혜가 가볍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주변에 누군가 있을 것을 대비해 이기영과 이지혜가 만든 신호였다. 정하얀은 대화 내용이 궁금하지 않더라도 둘이 대화를 한다는 전제 자체를 소름끼치게 싫어할 것이니 간단히 신호를 보내는 게 나았다. 그녀의 신호를 들으며 이기영은 정하얀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좀 더 끌었다.
혹시나 의아함을 갖기 전에 신경을 돌리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단순한 그의 행동에도 정하얀의 얼굴이 금방 붉어진다. 이 아가씨는 얼마나 편히 지내온 건지 모르겠다. 아니, 관심을 받지 못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못 배운 걸까.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이지혜의 시선에 약간의 비웃음을 담는다.
“의외로 다른 기업에서도 꽤 왔더라고요. 외국 쪽도 그렇고. 오빠, 한동안 재수 없어서 짧게 외국 발령 났었잖아요. 아는 얼굴 보여요?”
우수사원이 되었음과 동시에 아픈 기억을 찌르는 이지혜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 되어버린 과거에 이기영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올라가는 입술 새로 답답한 한숨과도 같은 바람이 새어나간다.
이지혜는 몇 분 정도 이기영과 정하얀 근처―은근하게 정하얀을 무시하는 것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경계하는 정하얀이었다―를 머물다가 사라졌다. 이지혜와 영양가 있는 대화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다음에도 그런 대화를 하려면 서로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지금 여기서 제일 움직이기 편한 건 이지혜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지혜도 금방 물러난 것일 테고. 누나만 믿을게. 나는 따로 할 일이 있거든. 제 영혼의 짝꿍을 응원하며 이기영은 정하얀의 뺨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훔쳤다. 정중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 정하얀의 하얀 얼굴이 금방 붉게 익는 게 보였다.
“오, 오빠…….”
정하얀을 처음 만났을 때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현재까지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 긴장으로 인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뺨에 닿은 손길은 오래 지나지 않아 떨어졌다. 아쉬움에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장소에 정하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제 언니들도 있겠지. 웬만해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어깨를 움츠리던 정하얀은 “하얀아, 추워?”라고 옆에서 묻는 이기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몇 개월 전의 시작이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정하얀은 약혼한 남자가 있었고 이기영은 그 남자가 있는 회사의 사원일 뿐이다. 자신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토 소우타에게 목을 매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때는, 일단 벗어나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토 소우타가 제게 보내는 미소가 애정을 품지 않은 걸 알면서도 말이다. 홀로 일본에 간 이후로 제대로 연락 한 번 없던 이토 소우타가 불안해 직접 회사로 찾아가기까지.
그래도 오빠를 만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야. 정하얀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기영의 감정을 즐기고 있었다. 이기영의 조언 이후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차피 제대로 된 관심을 받을 수 없다면, 관심을 줄 상대를 찾으면 된다. 집으로 갈 동안 계속 아른거리던 이기영은 정하얀이 찾던 사람과 얼추 맞았다. 정하얀이 원하는 것처럼 그는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꼬이는 걸까. 버릇처럼 손톱을 깨물려던 정하얀은 제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상기하며 주먹을 쥐어 엄지를 안으로 가렸다.
“오, 오빠, 저는 오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갖고 있, 어요.”
이기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눈에 정하얀은 입을 달싹였다. 더 많이 사랑해 줄 수 있는, 그리고 위치를 이용할 수 있는. 가르쳐 준 건 오빠니까. 그 상대가 이기영이 되어야만 했다.
“창태 씨가……, 저랑 약혼하려고 했, 던 이유는…….”
아니, 여기서 갑자기? 정하얀이 갖고 있는 수이자 이토 소우타가 노리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건 환영이지만 너무 갑작스럽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정하얀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설프게나마 가렸다. 붉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숨을 멈춘 정하얀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떨떠름하게 “하얀아?”라며 부르는 이기영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한 정하얀이 화들짝 놀라며 성급하게 중얼거렸다.
“엄마가, 제게 유산을……, 트, 특허권인데…….”
“아아.”
그걸 이토 소우타가 노리고 있었다, 라고. 심하게 떨리는 정하얀의 말을 끈기 있게 듣던 이기영은 낮게 감탄했다. 정하얀이 그런 걸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토 소우타가 약혼을 하려고 했던 거다. 정백 그룹이라는 배경도 나쁘지 않고. 관심을 받지 못한 상태로 자란 덕분에 심히 불안정한 성격도 어쩌면 이용할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기영처럼.
“저 그런 거 관심 없, 그래서 오빠한테――.”
“기영 씨.”
정하얀의 말을 끊은 듣기 좋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화려한 내부 안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렇게 반갑다니. 정하얀은 낯선 타인의 등장에 입을 꾹 다물었고 이기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반 정도 넘긴 머리가 깔끔해 보인다. 이기영은 천천히 그를 훑어보았다. 하얀 피부에 대조적인 검은 정장이 매끈해 보인다. 키가 커서 그런가. 여기까지 올 동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을 게 선하다. 김현성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빛나다니. 가끔 들던 의구심이 사라질 정도로 가슴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역시나. 다시 생각해 봐도 파란의 얼굴은 우리 현성이지.
전혀 모이지 않던 시선들이 은근하게 꽂히는 것을 느끼며 이기영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꼬리만 먼저 올라가던 게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반가운 웃음으로 달리한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던 개와 같았다. 내가? 속으로 실소하며 김현성을 맞이하려는데 어째 표정이 굳어있다. 다가가려던 이기영의 몸이 어정쩡하게 멈추고 만다.
“현성 씨?”
보자마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역시 현성 씨라며 칭찬하려던 게 입안에서 머뭇거리더니 사라졌다. 김현성은 다소 불편한 낯을 띠고 있었다. 우리 차기 회장님께서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낯선 장소에 대한 불편함에 굳은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했다. 남들보다 김현성의 표정을 깊게 살필 줄 아는 이기영만이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뭐지. 눈썹을 휘던 이기영은 머리를 굴렸다. 답은 금방 내릴 수 있다. 지금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간부급 행사라고 언급한 적이 있긴 해도 지나가듯이 언급했다.
김현성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갖고 있다. 김현성으로선 지금 일어난 상황이 기회이며 좋아해야 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걱정부터 한 건가. 평소 김현성의 성격을 떠올리던 이기영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성아, 많이 놀랐어? 형이 너한테 주는 깜짝 선물인데. 왜 표정이 그러냐. 짓고 있던 이기영의 미소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상황 설명이 부족했나.
“현성 씨, 자선 행사인데――.”
“방금 뭘 하고 있으셨습니까.”
“――네?”
은근한 서운함마저 생기려는데,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묻는 김현성에 틈을 놓친 이기영이 눈을 깜빡였다. 맥락이 이상한데. 이기영은 천천히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 뭔가를 눈치 채고, 물으려는 게 아니었나? 이기영의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 쪽으로 잠깐 향했다. 그리고 다시 김현성에게로. 이기영은 음, 입을 다물었다.
“기영 씨가 팔을, 그, 아니, 고개를 숙이셔서.”
목소리가 상당히 떨린다. 빤히 바라보는 이기영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 김현성이 말을 더듬거린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정하얀이나 김현성이나 이상할 정도로 말을 더듬으며 제 의견을 피력할 때가 있다. 정하얀이야 왜 그런지 셈이 확실하게 보이지만 김현성은, 글쎄. 고개를 기울이던 이기영은 아, 하고 탄성했다. 현성아, 혹시 형이 연애하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란 거야? 예전에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더니. 이 귀엽고 유교적인 자식. 김현성이라서 귀여운 것뿐이다.
“뺨에 묻은 게 있어서 잠시 털어주던 중이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사실이지. 김현성이 오기 전에 했던 거지만. 이기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아, 부끄러운 부분까지 알려야겠니. 하긴 김현성은 가끔 눈치가 없었다.
“아, 그런……, 그렇군요.”
그런 거였구나. 곧 민망한 표정으로 눈을 굴린다. 다소 안도가 섞인 것 같고, 무언가 쑥스러워 보이는 듯한 어설픈 미소가 그려진다. 본인이 방금 무슨 모습을 보였는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기영은 웃음기 섞인 시선으로 김현성을 짓궂게 바라보았다.
“뭐 잊은 것 같지 않아, 자기?”
김현성의 어깨 위로 앉은 가늘고 긴 손가락이 먼저 보이더니 뒤이어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이 눈길을 끌었다.
“차희라 회장님.”
“딱딱하게 무슨.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를 필요 없잖아.”
나도 이미 자기라고 불렀는걸. 보기 좋은 입술에 매끄러운 미소가 덧그려진다. 외국에서 처음 봤을 때와 여전한 모습이다. 높은 신장, 어떤 옷이든 곧잘 소화해낼 것 같다. 혹은 어울리지 않더라도 자신감 넘치는 강인한 표정이 다르게 보여주지 않을까. 이기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란히 서 있는 김현성과 차희라를 바라보았다. 둘이 같이 있으니까 잘 어울리네. 그림이 된다는 표현을 쓴다면 지금이었다. 차희라의 등장에 불안을 느꼈는지 정하얀이 좀 더 가까이 붙는다. 무의식의 행동인 것 같지만 차희라를 건드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눈이 정하얀을 훑는다.
“안녕, 세컨드.”
“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달싹이는 정하얀을 외면한 차희라가 곧 옆으로 넘어갔다. 이기영은 안 보이도록 뒷짐하고는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차희라 앞에만 서면 없던 긴장감이 턱 언저리까지 차올라 간질이고 있다.
“자기, 내가 지금 할 말이 많은데 참고 있는 거 알지?”
차희라가 피식 웃었다.
“이런 행사에 내가 올 필요도 없고 우습지도 않은 동행을 끌고 오는 일도 없는데 말이야…….”
“누나, 정말 고마워.”
재수 없어서 외국으로 넘어갔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 인연을 만들어 줬다. 차희라를 알게 된 건 그때의 인연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인연으로 거대 기업 사이에서 치이고 왔지만. 이기영은 그날의 맞은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생각하지 말자. 단숨에 털어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적어도 내 옆에 설 만한 그릇이 되는 것 같으니까 허락해 준 거야.”
나중에 보답은 확실히 받겠어. 그런 어조가 가득 담겨있다. 겨우 굳은 낯을 풀었던 김현성이 긴장한 표정으로 차희라와 이기영을 보고 있었고 정하얀이 부들거리며 차희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희라의 눈에 담긴 의도를 파악한 이기영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처럼 왔으니까 나도 적당히 어울려야 할 것 같아서, 자세한 건 나중에 연락해.”
절대 먼저 연락할 생각은 없다. 이기영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덧붙였다. 이기영의 도움으로 차희라와 동행한 김현성이 물러나려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같이 다니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파트너인데, 하지만 기영 씨랑 멀어지고 싶지 않은데, 같은. 얼굴이 어둡게 변하는 김현성이 따라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차희라가 먼저 손을 저었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어.”
난 애초에 파트너 같은 거 잘 안 두고. 고맙게도 먼저 말을 하고 물러나니 김현성은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귓가가 붉어졌다.
“희라 누나 성격이 많이 털털한 편이죠.”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이기영이 나지막하게 웃는다. 그 부드러운 웃음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안정시키는지 알까. 대체 다른 유명 거대 기업의 차희라 회장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또 그 애칭은 뭐냐고 묻고 싶은 게 한 가득―회사를 위한 것인지 제 개인적인 감정인 건지―이면서도 김현성은 웃고 있는 이기영의 얼굴을 보자 다 물리기로 했다. 그만큼 웃는 게 보기 좋았으니까. 어느새 김현성도 그 옆에 있던 정하얀도 몸에 힘을 뺐다.
제법 이르게 온 건지,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되지 않고 사람들끼리 모여 점잖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기영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옆에 있는 김현성에게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느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또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이기영이 구한 정보와 이지혜가 구해준 정보가 모이니 꽤나 많이 모였다. 처음에는 그저 표정을 굳히고 있던 김현성도 지금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새삼스레 깨닫기라도 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이기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듣고 있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간략한 움직임 정도밖에 없지만 지금 미래의 회장님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 중일 것이다. 오랜만에 미래의 회장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한껏 좋아진 이기영이 유난히 웃음을 자주 흘리며 김현성과 정하얀을 동시에 상대했다. 고양이, 아니, 강아지 둘을 데리고 있는 기분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김현성과 정하얀 둘 다 묘하게 만족하고 있는 눈치였다. 잠시 모든 대화가 끊어졌을 때쯤에 김현성이 퍼뜩, 정신 차린 표정으로 음료를 갖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말리려고 뻗은 손이 무색하게도 쉬이 사라지는 김현성의 뒷모습을 보며 이기영은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이럴 때 아니면 누가 회장님이 손수 주는 음료를 마셔보나. 정말 회장님이 되었을 때 자주 얻어 마실 수 있는 오른팔이 되어야 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정하얀과 함께 서 있었다.
여유로운 몸짓으로 다가오는 한 인물을 보기 전까지는.
“하얀 씨.”
잘 갖춰 입은 이토 소우타는 단정한 청년 사업가로 보였다. 나쁘지 않은 외모라고 생각은 했지만 은근 옷태가 잘 받네……. 우리 현성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그래도 순수하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조금 전까지 배부른 강아지처럼 나른하게 있던 정하얀의 몸이 흠칫, 굳는다. 다 끝난 사이인데 왜 오냐는 불편한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이토 소우타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제가……, 오, 면 안 되는 곳에 온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얀아, 잘한다. 강아지 같던 게 의외로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며 뾰족하게 날선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정하얀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이토 소우타는 짧게 침묵했다. 침묵은 찰나였고 그의 미소는 흐트러짐 없었다.
“그럴 리가요. 하얀 씨가 갈 수 없는 데는 없죠. 그래도…….”
이토 소우타는 약간 아련한 눈빛을 보였다. 외모가 썩 괜찮은 탓에 상대가 다르다면 통했을 시선이다. 정하얀이 아니었다면.
“저와 함께 했으면 이런 구석이 아닌 다른 많은 분들에게――.”
그 말을 끝으로 이토 소우타의 고개가 줄곧 가만히 있던 이기영 쪽으로 향했다.
“――하얀 씨를 소개할 텐데 말이죠.”
몇 개월 전 회사로 찾아온 정하얀을 치우라고 했던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지 바라보는 눈이 사뭇 날카롭다. 동시에 이기영은 빈정 상했다. 뭐야, 이 새끼, 하고. 이토 소우타의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공격을 이기영이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다른 분이 계셨군요.”
마지막 말까지 가관이다. 줄곧 옆에 있던 이기영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있더니 인사를 한답시고 하는 게 무시와 어느 정도 가늠한 사회적 위치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얼굴도 기억 안 나고, 정하얀이랑 같이 있으니 어디 회사를 주무르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잘난 사업가도 아닌 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나 보다. 이토 소우타의 평가는 다 맞았다. 그 짧은 새에 이기영이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상대가 이기영이랑 칭찬받지 못하는 거면서도. 바쁘고 잘나신 분께서 어디 회사 직원 얼굴 같은 걸 기억하겠어. 이기영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애초에 말을 걸 생각도 없었는지 이토 소우타는 금방 시선을 돌렸다.
“하얀 씨, 저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제법 사람에게 신뢰감을 줄 것 같다. 그래도 우리 김현성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애절한 듯한 긴장어린 시선이 사람 마음을 갖고 놀 것 같다. 그래도 우리 김현성만큼은 아니지만. 공작새가 꼬리를 환하게 펼치고 살랑거리는 꼴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 이기영이 관전하는 마음으로 둘을 보았다. 아닌 척하고 있어 보이지만, 이토 소우타는 정하얀과 파혼한 일이 자존심 상한 것 같다. 그와 별개로 정하얀이 갖고 있는 것이 탐이 나 제 자존심을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저와 하얀 씨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짐짓 아쉬움 섞인 한숨이 함께 나온다. 이토 소우타는 배우였다. 제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제 높은 자존심도 누를 줄 아는 기회주의적인 배우.
“싫, 됐어요. 저희는 이미 끝난 사이예요.”
잔뜩 힘을 실은 목소리로 대꾸한 정하얀이 이기영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하얀아, 잘하다가 거기서 그러면 어떡해. 아니, 잘한 건 맞는데. 나랑 뭐 시작한 것도 아니잖니. 정하얀의 행동에 이토 소우타의 눈이 둘 사이로, 마지막은 이기영에게로 향했다. 대놓고 보이는 행각에 억누르지 못하는 불쾌함이 은근하게 엿보인다. 이기영은 비실거리며 벌어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선선히 대답하는 주제에 영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제법 높게 쳐주었더니 그새 혼자 미끄러지고 난리야. 이기영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휘며 손을 내밀었다.
“이기영입니다, 이사님.”
“저를 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모를 리가 있나. 같은 회사 직원인데. 그렇게 까 내리던 게 같은 회사 직원이다, 이 새끼야.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잡은 손을 짧게 흔들었다. 이기영도 이토 소우타도 악수한 손을 뒤로 물리는 건 빨랐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기영 씨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영업직 대리입니다. 하얀 씨 덕분에 이런 데도 다 와 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대리라는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을 보이다가도 마지막에 정하얀을 띄워주니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반대로 옆에 있던 정하얀은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정하얀과 달리 이토 소우타는 노련하게 제 감정을 숨겼다.
“이번 파란에서 여는 자선 행사에서 좋은 경험 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름칠한 혀는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서로 하하 웃으며 번지르르한 말만 건네고 있을 때,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보던 이토 소우타가 싱글거렸다. 반대로 이기영은 약간 긴장했다.
“이만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라……, 아, 이기영 씨. 그거 아십니까.”
“무슨…….”
“어울리는 장소를 구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거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호텔이 제법 만족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이토 소우타는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기영은 모르는 척했다. 저 시발 새끼가 대놓고 무시를 해도 이기영은 전혀 타격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솔직히 화도 안 났다. 저 시발 새끼한테. 이기영은 “멋지게 공들이신 것 같은데요.”라는 멍청한 말이나 지껄이며 이토 소우타의 꼬인 어휘를 애써 외면했다. ……김현성의 듬직한 어깨가 보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그런 이기영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다가오는 인물이 있었다.
“기영 씨.”
“여기 있었구나.”
그게 한 명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얇은 트레이에 음료 세 잔을 들고 있던 김현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 짧은 새에 반갑기라도 한 건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대로 이토 소우타의 뒤는, 주승준 회장이었다. 멀리서 봐도 잘생긴 김현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번 행사의 주인공인 주승준이 등장하자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주변 이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의 받는 곳에 서 있게 되어 버렸다는 거다. 보는 눈이 많아지자 불안해진 정하얀이 이기영 뒤로 몸을 숨겼다.
“회장님.”
격식을 차린 이토 소우타에 희미하게 웃은 주승준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이기영 쪽으로 향하더니 다음으로, 김현성에게로. 원하던 상황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모든 게 이루어질 줄이야. 이기영은 박수라도 쳐야 하나 싶은 심정으로 주승준을 보았다. 김현성도 일어난 상황에 당황했는지 입을 달싹이다가 곧 굳게 다물린다.
김현성을 빤히 바라보는 주승준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넌…….”
“회장님, 시간 되셨습니다.”
옆에 있던 비서의 재촉에 주승준은 잠시 눈을 꽉 감더니 몸을 돌려 움직였다. 그 뒤를 이토 소우타가 따라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떠나가고 김현성은 어색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놓았다. 서 있는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이기영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다. 너머로 들리는 “방금……, 둘이 좀 닮지 않았어?”와 같은 수군거리는 속삭임이, 흥미가 동한 이지혜의 반짝이는 표정이나 미묘하게 굳은 시선의 차희라까지.
――정말 예술이었다.
“현성 씨.”
“……네, 기영 씨.”
고개를 숙인 김현성이 차마 이기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기영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표정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또 여유로움이 배인 미소였는지 말이다. 이거, 의외로 쓸 만한 상황을 건진 것 같은데.
“저희는, 많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현성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이기영은 제 턱을 문지르며 싱글 웃었다.
“미쳤니?”
처음 들은 한 마디가 그거였다. 하지만 이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비난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기영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차희라가 제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잘못 말했지.
“아주 미쳤구나.”
조금 더 통쾌할 만한 단어를 찾아 내뱉고 싶은데 당장 떠오르는 게 없으니 답답했다. 차희라는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기영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차희라의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차희라는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연신 쓸어 넘기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을 하다보면 가끔 목숨 거는 새끼들을 종종 볼 때가 있는데, 너 같은 새끼는 처음이네.”
“칭찬으로 생각하면 될까?”
나름 다소곳한 미소를 보내니 차희라가 주먹만 쥐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했다. 이 새끼를 때릴 수도 없고. 하필이면 오늘따라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해 보이는 건지. 밥은 잘 먹고 있는 건지. 요 며칠을 고생을 해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약한 놈. 머리 굴릴 줄 아는 쓰레기. 하는 짓이 영 밉지 않아 두고 있었지만 오늘은 솔직하게 말을 해야 했다.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 타격 입을 만한 짓을 하는 짓이 칭찬이겠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기, 퇴사하려고?”
그럴 리가 있나. 가늘게 뜬 시선으로 흘기는 차희라를 향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한 번 정도는 흔들려도 돼. 흔들리고 나서 잘 처리하면 되니까.”
“……주 회장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아서 다행이지.”
그 점도 있다. 파란의 회장, 주승준은 사람이 워낙 시원한 면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 같은 거였다. 그러면서도 봉사 활동이나 기부도 많이 하는 편이니 파란 자체가 나름 깨끗하고 착실한 하얀 기업에 속했다. 지금 그걸 이기영이 흔들려고 하는 거지만. 전체적으로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을 수준에 불과해도 막상 일을 내면 주승준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다. 차희라는 처음으로 남의 회사를 측은하게 여겼다.
이기영이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예상은 간다. 하지만 이걸 직접 시행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는 명백하게 존재했다. 지금 그걸 하려는 미친놈이 눈앞에 있다니. 외국에서 봤을 때는 제법 당돌한 맛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 회장 아래로 자녀가 없어서 이토 소우타가 후계자가 된 건 유명한 일이야.”
“그렇긴 해. 일본 기업까지 갖고 있고 업무 능력도 좋아서 거의 확정이었지.”
이기영은 제 앞에 놓아진 찻잔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식지 않은 커피의 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따로 두고 보면 전혀 몰랐을 텐데, 막상 둘이 같이 있으니 희한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는데……. 같이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어.”
“그때 일은 다 누나 덕분이야. 고마워, 누나.”
행사 때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만족스럽다. 금세 싱긋 웃는 이기영에 차희라는 한숨을 내뱉었다. 놀아났구나. 다른 놈이었다면 건방진 값을 물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저 얼굴을 보면 제 분노가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가기에는 차희라, 라는 이름이 운다.
“쓰레기 자식.”
씨근덕거리며 내뱉은 한 마디에도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커피가 좋네요.’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졌다. 차희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과 상황을 이렇게 만든 이기영이 못내 불쾌하면서도 느긋한 왕의 모습을 보였다. 등을 뒤로 물리며 내려다보듯이 바라보는 차희라의 눈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로 내가 얻는 게 뭔데? 자기, 나는 무료 봉사 같은 거 하지 않아.”
이래야 차희라답다. 이기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나가 도와 줘야 얻을 수 있을걸.”
“건방진 소리하기는.”
차희라는 고개를 기울여 나른한 표정으로 이기영을 응시한다. 거대 기업 중 하나인 파란이 휘청거리면 비슷한 계열을 운영하고 있는 차희라 쪽이 이득을 취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누나는 사람 한 명만 소개시켜 주면 돼.”
내부에서 구할 수 없으니 외부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설 정하얀이 존재했지만, 그녀는 본인 그룹 내에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으니 안 되고 다른 알 만한 이들은 외국에 있는 상태였다. 남은 게 당연히 차희라뿐인데. 이기영은 검지를 들었다.
“한 명. 한 명을 소개해 준 대가치고는 좋은 거래 아니야?”
그렇지, 누나? 제법 이름 있는 기자 한 명만 구하면 됐다. 차희라 이름이라면 어렵지 않을 테고. 이기영이 담뿍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차희라가 으음, 침음을 삼켰다. 저 빌어먹을 미소에 여기까지 오게 되어 버렸구나. 차희라는 제 아픈 구석을 내보이지 않으며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새끼 마음에 안 들기는 했어.”
“그래? 누나한테 엄청 잘하던데.”
너한테 좆같게 군 걸 봤다는 말을 어떻게 하니. 차희라는 한숨을 삼키며 손을 저었다. 이토 소우타는 정하얀의 옆에 있던 이기영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에게는 친절한 낯으로 다가왔다. 그 얼굴로 인해 거대 기업 자녀들 중에 몇 여성은 홀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날의 승리자는 김현성이었다. 미묘하게 아련한 시선을 던지는 주승준과 그를 외면하며 이기영 옆에 있던 김현성. 노련한 주승준은 다른 이들이 눈치 챌 정도로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지만 김현성의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이토 소우타를 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운 무언가를 보는 눈이 어찌나 애절한지. 이토 소우타가 다른 이들을 상대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 일부러 주승준 근처로 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파란에서 일을 한다는 말을 흘리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스치듯 보았을 때 주승준은 분명히 흠칫했다. 놀랐을 테지. 김현성이 제 회사에 있으니까.
저런 미묘한 태도를 보여주는 주승준이 취한 다음 행동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파란 부서를 다 뒤졌다. 그리고 영업팀에 김현성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기영은 손을 들어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막았다. 일 잘하는지 보러 온다는 핑계로 주변 부서를 싹 훑는데 영업팀 부서를 그렇게 오래, 진득하게 보고 갔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끝난 게임이다. 어쩔 수 없는 사고 한번 거하게 터뜨리고 이기영은 이제 뒤에서 박수만 치면 됐다.
빈 찻잔을 내려두자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저녁에 일 있어?”
“오늘 연차 썼어.”
“좋네. 그렇다면 같이 저녁이나 먹자. 그때는 일 얘기 말고.”
나쁘지 않다. 이렇게 주변 관리를 해 줘야 필요할 때 무언가 얻어낼 수 있는 거다. ……이상하게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조금 미묘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지만. 뭐, 우연이겠지. 아니, 그런 사람들이니까 어느 정도 이기영에게 휘둘릴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두었던 외투를 챙기며 일어났다.
“잠시만, 먼저 나가 있어.”
회사 내선 전화에 불이 들어오자 외투를 입은 차희라가 걸음을 멈췄다. 있으라고 해도 나갈 거였다. 내부적인 일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기영은 외투를 입으며 밖으로 나갔다. 발끝을 타고 복도의 찬기가 올라온다. 꾹 닫힌 창문 너머로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이 보였다. 아직 여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해가 진다. 새삼스럽게 겨울임을 상기하며 이기영은 뒤이어 열리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불편한 낯의 차희라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일그러진다. 약간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바빠 보이기도 했다. 저녁 약속은 없던 게 되겠군. 속으로 확신했다.
“미안, 자기. 가볼 데가 생겨서 물러야 할 것 같아.”
“괜찮아, 누나. 중요한 것부터 해야지.”
먼저 제안했는데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는 게 못내 불만스러워 보였다.
“가는 길에 데려다 줄까?”
“아니야. 가는 길에 잠시 덕구한테 가 봐야겠다.”
흐응. 여자 만나는 건 아니고. 가늘어진 시선에 담긴 감정이 미묘했다. 이기영은 그저 웃었다. 여자라니. 만나자고 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오늘은 차희라 한 명 상대하는 걸로도 기력을 다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만연한 이기영은 걱정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앞서 걸었다.
“누나, 먼저 가 볼게.”
“내일 오전쯤에 연락처 하나 갈 거야.”
차희라를 뒤로하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유독 칼바람이 부는 날이다. 스치는 바람이 마치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는걸. 금요일 연차에 주말까지 꼈으니 이틀은 더 쉴 수 있다. 왠지 오랜만의 휴식인 것 같기도 하고. 연차를 썼음에도 이렇게 밖으로 나와 일을 한 것 같지만……. 이기영은 후, 하고 웃음기 섞인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지는 것을 담담하게 보았다.
정면을 응시하자 누군가 긴 다리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살짝 기울여 앉아 다리를 쭉 뻗고는 발갛게 된 양손을 길게 모아 제 입가를 꾹 누르고 있었다. 유난히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따라 흩날린다. 드러난 귀도 얼굴도 붉다. 아직 이쪽을 보지 않은 인물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왠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기영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듯했지만 이기영은 눈치 채지 못했다.
“현성 씨.”
바람 소리까지 들린다. 지척까지 다가와서야 고개를 돌린 김현성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도 이기영 혼자 서 있었다.
“기영 씨.”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환한 미소를 맞으니 조금 타격이 온다.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을 달싹이던 이기영이 약간 미묘한 낯으로 그를 보았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아니, 저렇게 웃어주니 믿어주는 것 같아서 좋기는 한데. 그래, 저건 미래 회장님의 신뢰의 미소였다. 이기영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물어볼 게 많다.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현성 씨.”
“아……, 저, 박 대리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딱히 책망한 투로 물은 것도 아닌데 김현성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박덕구 이 새끼는 왜 남의 스케줄을 떠벌리고 다니는 거지? 그나저나 현성이는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제일 궁금한 것들이 목 언저리까지 차오르지만 애써 눌렀다.
“추우셨을 텐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많이 발갛다. 겨울에, 칼바람까지 맞으면서 달랑 코트 한 벌만 입고 있었으니 저렇게 될 만도 했다. 본인도 비슷한 차림으로 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이기영이 약간의 안쓰러움을 담아 인상을 찡그리자 김현성이 손을 저었다. 어쩐지 얼굴이 더 붉어진 것 같다.
“그, 렇지 않습니다.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고…….”
그러게. 대체 왜 여기에 온 거니, 현성아. 김현성의 시선이 조금 밑으로 향한다.
“기영 씨도 추우실 텐데요.”
“아, 그렇긴 하네요.”
목티를 입고 있지만 드러난 부위가 추운 건 사실이다. 이기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제 목을 문질렀다. 다시 이기영을 보는 김현성의 눈이 조금 결연에 차 있었다. “저, 기영 씨……”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은근히 떨린다.
“저희, 얘기할 게 많으니까. 그, 혹시 저녁에…….”
“아, 한가합니다.”
따뜻한 집으로 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지만 어느 장소를 가도 따뜻한 건 마찬가지다. 휴식은 무슨 휴식이냐. 얌전히 현성이한테 시간을 반납해야지. 담백하게 대답하는 그에 안도한 김현성이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김현성이 데리고 간 곳은 어느 분위기 좋은 바도 비싼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하지만 간판을 보는 순간 이기영은 오, 하고 감탄했다. 박덕구와 자주 가는 곳이었다. 평범한 맥주나 소주는 어딜 가도 똑같지만 안주가 맛있는 곳이라 마음에 드는 술집이다. 약간 긴장한 표정의 김현성을 멀거니 보며 어떻게 알았을까, 싶다가도 분명히 박덕구의 영향이 있을 거라 확신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덕분에 무슨 얘기를 해도 금방 묻힐 만한 곳이다.
“형님, 이쪽이요!”
의외라고 생각했었는데 김현성이 왜 이쪽으로 왔는지 알겠다. 아니, 박덕구도 있는데 왜 그렇게 긴장하면서 묻던 거야? 마치 데이트 신청처럼. 큼지막한 손을 휙휙 젓고 있는 박덕구가 보인다. 오늘따라 메신저로 끈질기게 스케줄을 물으며 늘어지더니. 다 이유가 있던 행동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 형님.”
고작 반나절 안 본 것뿐인데 능글맞게 군다. 그런 박덕구에게 오랜만이다, 하고 받아친 이기영이 의자에 앉았다. 시간 맞춰 고기를 굽고 있었는지 노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그리고……, 술이 왜 이렇게 많지? 타이밍 좋게 박덕구가 거들었다.
“자자, 오늘은 많은 얘기가 있을 거요. 대화에는 술이 필요하고, 그리고 내일은 주말이니!”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지만 요즘 같은 때에 술이 곁드는 건 좀 피하고 싶다. 그래도 상대가 단순한 박덕구고 믿음직한 김현성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기영은 하하, 웃었다. 시작은 일상 대화와 함께 고기와 술로 이루어졌다. 그 다음은 안주와 술로 이루어졌다. 박덕구의 대화를 들으며 은은하게 웃고 있던 김현성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운을 뗀 순간부터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김현성은……, 흔히 말해 막장 같은 가정사의 인물이었다.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는데 집안의 압박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그런 드라마에서 보던 내용 말이다. 어쩐지 이토 소우타랑 주승준이랑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그쪽도 재혼이었구나. 주승준이 그렇게 김현성을 아련하게 쳐다보며 주변을 맴도는 이유도 알겠다. 그때는 압력으로 아무것도 못했지만 이제는 제 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니 뭐 하나 주지 못해 안달이겠네.
――김현성은 보호 자극을 불러일으킬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모든 걸 털어냈다는 강인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사람 안에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크, 크윽……, 나쁜 놈 새끼들……, 크, 다 갖고 있으면서 그걸 또 빼앗으려……, 크응.”
엄청 자극받은 사람이 옆에 있다. 코를 훌쩍이던 박덕구가 김현성의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오늘은 미친 듯이 마시고 내일부터는 혁명으로 태우는 거요!”
“감사합니다, 박 대리님.”
“흐, 크으으. 현성 씨, 강원도 의리남이라고 하면 이 박덕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할 거 없소. 끝까지 지킨다!”
언제는 연애 박사라며. 이기영은 제 빈 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는 걸 보며 그저 웃었다. 무언가 후련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이기영와 박덕구를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은 무거운 짐 하나를 털어낸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인데. 이기영의 미소가 살짝 삐뚜름해졌다.
그런 중요한 대화에 왜 박덕구가 있는 거지.
박덕구가 얼마나 좋은 녀석인지 오래 지낸 이기영이 모를 리가 없다. 저렇게 말한 이상 분명히 지킬 거다. 의외로 정보 수집력이 좋으니 김현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구석도 많고. 내부에 아군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 나쁘지 않은데. 분명 박덕구가 김현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유를 줄줄 나열해 봐도 한참 이어지는데.
――이기영은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이 대화를, 이기영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듣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이 조금 치졸하게 느껴졌지만 이기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현성아, 일은 내가 다 했는데 어째서? 씨바, 분명 나쁜 건 아닌데. 김현성도 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같이 털어놓은 것 같은데. 이기영의 표정이 어긋났다.
홀로 타오르는 박덕구가 김현성에게 계속 술을 몰아주고 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며 이기영은 웃었다. 그저 웃고만 있었다.
“이크,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도중에 연락이 온 박덕구가 짧은 통화를 마치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본다.
“그래, 날씨도 추운데 이만 들어가자.”
“아, 계산은――.”
“현성 씨는 동작 그만. 오늘은 저의 날이요!”
지갑을 챙겨 일어나려는 김현성의 어깨를 꾹 누른 박덕구가 이기영에게도 앉아 있으라는 눈빛을 보내며 헐레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소란스럽던 이가 사라지자 묘하게 정적이 깔렸다. 여전히 주변은 시끄러운데, 지금 여기만 조용하다. 박덕구에 불도저 같은 짓에 거절도 못하고 연신 들이키기만 하던 착한 김현성의 얼굴이 붉고 노곤하다. 그래도 반듯하게 서 있는 걸 보아하니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우리 현성이는 술도 셌지.
“오늘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음에 소개할 거요. 형님도 현성 씨도 꼭 들어 주시오!”
무슨 새로운 다짐을 했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쥔 박덕구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기영은 알겠다고 대충 끄덕이며 손을 휙휙 저었다. 거구의 몸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기영이 숨을 들이켰다.
옆에 서 있던 김현성은, 어느새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성 씨, 택시 타고――.”
“잠시……, 잠시만요. 기영 씨, 잠깐 다른 데 들려도 괜찮습니까?”
짙은 눈이 올곧게 저를 응시하고 있다. 이기영은 “괜찮습니다.”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김현성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김현성이 향하는 곳은 음식점과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들어가기 직전에 이기영은 잠깐 멈칫했다. 아니, 왜 여기를, 하는 마음과 그러고 보니까 곧 그날이구나, 싶은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가게 내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 여자, 여자와 남자, 남자…….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다. 딱히 비싸고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선물을 챙기려는 정성이 갸륵하다. 긍정적인 생각과 달리 이기영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갑자기 이런 데에 들어온 김현성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밝은 색도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도 어두운 색이…….”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는 김현성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건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 가만히 있던 이기영이 드디어 관심을 보였다. 현성아, 누구한테 주는 선물인데 그렇게 고심하고 있니. 여자? 마음에 드는 여성분이 있다면 형한테 꼭 알려 줘야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짙은 남청색 목도리를 가리켰다.
“이건 현성 씨한테 잘 어울릴 것 같네요.”
“…… …….”
눈썹을 찌푸리던 김현성의 모든 행동이 멈춘다. 몸을 틀어 이기영을 볼 때까지 뚝뚝 끊어지는 것 같다. 드디어 저를 보는 김현성에 만족한 이기영이 담뿍 웃었다.
“안 그래도 현성 씨 추워 보였는데 들어온 김에 하나 사야겠습니다.”
“…… …….”
끝까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는 김현성에 이기영은 입술을 불퉁하게 삐죽였다. 일단 던지고 본 말이었지만 사서 선물할 생각이다.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기영이 목도리를 골라 계산하러 가자 후에 김현성이 서둘러 따라왔다. 김현성은 하얀색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하얀 목도리라니. 괜찮기는 한데……, 관리하기 그렇지 않나. 그래도 우리 현성이가 택한 거니 다 이유가 있다.
포장까지 마친 선물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이기영도 김현성도 잠시 앞을 보고 있었다. 이기영은 생각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린 이기영이 고개를 돌렸다.
“현성 씨.”
“기영 씨…….”
엉거주춤 내민 선물이 어색하게 허공에 있다. 이기영은 눈을 둥글게 뜨고 내밀어진 것을 보았다. 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안다. 아,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주는 게 아니었어? 미묘한 기분이 들면서도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린다.
“하얀색이 저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까?”
저도 모르게 짓궂은 투로 물으니 김현성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계산 전까지 했던 생각을 싹 잊은 이기영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포장된 선물을 받아들며 고맙습니다, 하고. 비싼 선물도 좋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김현성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커피를 사 줘도 좋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머뭇거리던 김현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도리……, 두르는 거 보고 싶습니다.”
“아, 지금요?”
“보고 싶습니다.”
상관은 없지만. 이기영은 가만히 응시했다. 김현성도 의외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눈빛이 뜨거운 게……. 이기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현성아, 설마 너.
“취하셨습니까?”
“네? 아니요. 아닌데……, 기영 씨가 제가 드린 목도리 한 거 보고 싶습니다.”
“너 취한 거 맞는데.”
애가 지금 안 하던 앙탈을 부린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다. 이기영이 반말을 툭 내뱉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자꾸만 보고 싶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런 김현성에 이기영은 못내 잘 포장돼 있던 목도리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확실히 목에 두르면 따뜻하기는 하겠네. 이기영은 목도리를 두르고는 보란 듯이 자랑했다.
“현성 씨, 잘 어울립니까?”
“……네.”
잘 어울려요……, 기영 씨는 흰색이 어울려서……, 좋아요――. 술에 취한 김현성은 어째 그 나이의 청년으로 보였다. 술이 세서 웬만하면 안 취하고 뒷정리하는 쪽이었는데 박덕구가 애를 보내 버렸다.
“그럼 현성 씨도 하셔야죠.”
턱짓하며 제가 준 선물을 가리키자 김현성이 화들짝 놀란다. 본인이 뭘 들고 있는지 잊은 것 같다. 김현성은 더듬거리며 포장된 목도리를 꺼냈다. 짙은 남청색의 목도리. 두 손으로 목도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잘생기고 키도 커서 어딜 가도 시선을 받는 인물이 마치 신줏단지를 모시는 것처럼 경건하게 목도리를 들고 있는 꼴이라니. 지금 그런 감정을 일으킨 게 제 선물이란 것에 만족스러운 이기영이 한껏 웃었다.
“현성 씨? 왜 계속 보고만 있으신 겁니까. 목도리 맬 줄――.”
모르냐는 물음을 하기도 전에 김현성이 눈을 빛냈다.
“네, 해 주세요.”
그래서 모르는 거야, 아는 거야? 술에 취한 김현성은 유난히 뻔뻔했다. 살짝 당황한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 김현성이 마치 진상하듯이 두 손으로 목도리를 내밀었다. 이기영은 말없이 목도리를 받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게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개처럼 보였다. 분명히 고양이였는데. 고양이였던 것 같은데. 애매한 기분을 느끼며 이기영은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나란히 목도리를 매고 있다. 김현성은 제 목에 둘러진 목도리를 여러 번 만지더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다 큰 청년한테 수줍다는 표현을 쓰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현성 씨, 택시 타고 가셔야 할 테니 좀 걸읍시다.”
이기영은 꿋꿋하게 서 있는 김현성의 팔을 끌어 움직였다. 늦은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닿을 듯, 스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꽃이 핀 것 같은 김현성까지 확인하고 있으려니 살짝 취할 뻔했던 기운도 싹 가신다. 김현성은 술에 취하면 안 되겠다. 오 분 정도 그렇게 걷고 있으니 조금 한적한 거리가 나왔다. 이제 좀 편해졌다. 김현성도 슬슬 잘 따라오고 있으니 느긋하게 김현성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이기영도 집으로 가면 됐다.
“……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성 씨?”
이기영이 떠든 게 아니니 김현성뿐이다. 의아한 눈으로 김현성을 보자 그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친해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분명 그랬던 것 같다. 김현성은 제 목도리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우울한 낯을 만들었다. 다시 덧붙이는 말이 어찌나 슬퍼게 다가오는 건지. 걷는 걸 잊은 이기영이 숨까지 참았다. 방금 뭘 들은 거지. 현성아? 이기영은 당황했다. 취중진담이라고. 원한 건 아니었으면서도 김현성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주 치명타로. 참고 있던 숨을 뱉은 이기영이 서둘러 김현성 옆으로 걸어갔다.
“현성 씨, 방금…….”
“저는, 기영 씨와 이렇게까지 친해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치고는 너무 번듯하게 말해서 깬 줄 알았다. 사실 취한 척 솔직한 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기영의 표정이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현성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내가 지금 널 위해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팽하겠다고? 팽할 거라는 의미니? 현성아,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내가 얼마나 앞뒤로 내조를 훌륭하게 하고 있었는데. 이기영이 그린 미래에는 미래의 회장 오른팔이었다. 근데 지금 그 미래의 회장이 오른팔을 잘라내다 못해 아무 데나 버리려는 듯했다.
“현성 씨, 지금 취하신 것 같은데…….”
“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뭐?”
주제가 대체 어디로 튀는 건지 도무지 예상을 못하겠다. 이기영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김현성을 보았다. 코를 훌쩍인 김현성은 어느새 울먹거리고 있었다. 여자였으면 좋겠다, 라고. ……누가? 이기영의 궁금증은 금방 해소됐다.
“제, 가 여자였으면……, 기영 씨한테…….”
“음……?”
이기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고민했다. 이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 입을 막아야 하는 건지. 분명히 후자가 낫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것 같다. 이기영은 눈치가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없는 게 아니라 빠르다 못해 높았지. 그러니까, 이기영은.
――막아야 하는 게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기영 씨한테 다가갈 수 있었을 테죠…….”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은 참 멋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과 동시에 애매한 표정으로 김현성을 응시했다. 울먹거리던 김현성의 눈가가 부옇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남자여도 충분히 대화하고 있던 게 아닙니까.”
“의미가 다른……, 다른 겁니다.”
기어이 저지르고 만다. 이기영은 눈을 감았다. 술주정을 빌어 듣고 만 고백에 이기영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경계하던 김현성, 천천히 허물어지던 김현성, 반가운 표정을 짓던 김현성――,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지려고 하던 모습까지. 그러던 주제에 무슨 일만 있으면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며 다가왔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렇게 행동한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들은 동성의 고백이었지만, 의외로 감상이 덤덤했다. 생각을 마친 이기영이 하, 하고 짧게 웃음을 뱉었다.
미래의 회장님 오른팔이 된다고 했지 손가락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제 머리를 쓸어 넘기던 이기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김현성을 응시했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이기영은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차가운 뺨에 손가락이 닿는다. 피부가 닿자 흠칫한 기색이 느껴지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손으로 뺨을 훔친 이기영이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현성 씨.”
“…… …….”
“현성 씨?”
“네, 기영 씨…….”
느리지만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살짝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이기영은, 지금 김현성이 술에 깬 것을 알았다. 이걸 어쩌나. 이기영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그림에 이런 경우는 전혀 없었으면서도 그래도 이런 상황이 찾아왔으니. 이기영은 나른한 표정으로 입가를 당겼다.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로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미소로 김현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했다. 김현성은 저를 홀린 듯이 보고 있었으니까.
“현성 씨, 그러니까…….”
뺨을 훔치던 손을 밑으로 떨어뜨린다. 눈물로 젖은 김현성의 보기 좋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떨어지는 손을 아쉬운 듯이 머무르는 게, 어디서 본 적이 있던 것 같다. 자신을 좋아하던 정하얀한테서. 새삼 감탄했다. 그렇게 드러냈는데 전혀 몰랐다니. 이기영의 삶에 동성이 좋다고 다가오는 경우가 없었으니 모를 만도 했다. 알고 나서야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는데도.
이기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현성 씨 집으로 갑시다.”
좋다는 답을 내린 것도, 싫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다. 그 애매한 차이를 아는 건 그렇게 말을 내뱉은 이기영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김현성이 눈을 홉뜬 채로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천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며 이기영은 소리 죽여 웃었다.
――미래의 회장님을 만들 때, 회장님을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김현성에 이기영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열두 시가 지난 후로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란 것만 알았다.
2018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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