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한참 동안 그리 기대고 서있었더란다.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기대고 그의 등을 방패 삼아 가만히 창가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함께 맞으며 온기를 빌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홀에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나 창밖의 풀벌레 소리 따위들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 울려댔다. 둘이서 끌어안고 물속에라도 빠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빠져서, 그 고요한 바닷속에, 아주 깊은 곳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늘어놓은 말들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충고였고, 살면서 들어본 적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비아에게 해당하는 말이냐면은 그건 또 아니었다. 그래서 밀어내면 기어코 그는 한 발짝 더 내밀어서 울타리를 넘고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동굴이나 다름없어서, 안으로 파고들수록 어두컴컴하고 숨을 쉬기가 힘들 텐데. 계속 두드리고 있으면 언젠가 모든 게 무너져서 당신도 나도 잔해에 깔려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겠지.
명망 있는 기사? 실비아는 공작의 여식이었으나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명성이나 권력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건 사교계 사람들도 알아줄 정도로 분명해서, 작위를 내세워 사람을 다루는 족속들은 진작에 그녀를 넘보지 않을 정도였다. 일개 기사가 세운 공이 얼마나 되었든 실비아는 연연하지 않았다. 당신의 공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건 실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한밤의 꿈처럼 사그라들 우연한 만남에 다정한 사람이 잘못 걸려 같이 파묻히는 게 싫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자신을 그저 아름다운 장미인 줄만 알고 손을 내밀었다가 가시에 찔려 피를 보는 꼴을 겪는 것보단 애초부터 밀어내는 것이 나았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까다로운 사람 취급을 하고 포기했으면 했다. 그가 했었던 말처럼 차라리 혼자 침잠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왔기 때문에,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불씨가 되어 모든 것을 불태우는 꿈을 꾼다 해도 잿더미를 늘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제발…….”
실비아는 아직도 그의 온기에 기대어 제 감정을 숨겼다. 툭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결코 울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도, 하지도 말아요. 난 변화를 바라지 않아요, 경. 이대로의 안락을 원해요. 파고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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