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빛 바래지 않을 행복

知香 by 지향

미나세 미카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결을 내어 놓을 때마다 구름이 되어 하얗게 부서지는 계절이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공원은 유난히 더 한적했다. 미카는 발에 걸리는 돌멩이들을 툭툭 걷어차 공터로 날려 보냈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으니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걷어찰 것이 없어져 미카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넷이서라도 활동을 이어가고 싶은데…… 미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몹시 하기 싫었던 어린 시절 수학 숙제 같은 물음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결론은 진즉 내려진 것 같았다. 지금껏 함께 해 온 사람들에게 말하기 미안할 뿐이었다.

미카는 어려움도 절박함도 없이 아이돌이 되었다. 애초에 아이돌 같은 게 되겠다고 바랐던 적도 없었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중학생 시절 동아리 부원들과 참가했던 콘테스트에서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버린 것이다. 데뷔는 순조로웠고 초창기에는 꽤 잘나가는 그룹이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줄로만 알았다. 미카는 소속사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선선히 승낙했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그거야 이렇게까지 그룹 상황이 안 좋아질 줄은 몰랐으니까.

과거의 영광은 찰나일 뿐. 데뷔곡만큼 인상적인 곡을 내어 놓지 못한 그룹 '네버랜드'는 날이 갈수록 새로 쏟아져 나오는 그룹들의 파도에 휩쓸려 잊혀 갔다. '네버랜드' 데뷔 직후 새 남자 그룹을 내어 놓은 소속사는 그들을 밀어 주느라 7인조 여자 그룹 같은 건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이에 엇나가기 시작한 멤버 하나는 애인 몇십 명을 사귀고 스케줄에 번번이 불참하며 아이돌로서의 삶을 반쯤 포기했다. 다른 멤버 두 명은 갈등의 골이 깊어져 서로 얼굴조차 보기 싫어 했다. 나머지 셋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연예계 활동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미나세 미카는 모든 게 지겨워진 지 오래였다. 애초에 간절히 원해서 아이돌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빨리 그만둘수록 좋지 않나. 그래야 사회에 자리잡을 시간이 생긴다. 고등학교 학력은 검정고시를 통해 땄으니, 이제부터라도 대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해서……

명료한 해결책이 떠오르는데도 자꾸만 짜증이 났다. 이딴 식으로 흐지부지 그만둘 짓거리에 바친 7년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더 거슬리는 건 그 시간들이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팬들에게는 여전히 고마웠고 무대 위에서 행복했던 시간들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인간의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게 없는데도. 그런 덧없는 것이 미련이 되고, 미련에 발목을 붙들려 세월을 유수처럼 흘려보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있자니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치고 지나갔다. 직후 발랄한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아, 역시 미카 씨였네요! 너무 얇게 입으신 것 아닌가요? 날씨가 추운걸요."

낯익은 목소리에 미카는 눈을 떠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닿거든 마루야마 아야가 활짝 웃었다. 잠시만요, 제가 담요를 챙겨 왔어요. 이내 숄더백에서 담요를 꺼내 제 무릎에 덮여 주고는 멋대로 옆자리에 앉았다.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므로 미카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마루야마 씨, 오랜만이네요. 뒤늦게나마 정중하게 인사한 미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별달리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오며가며 인사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연락도 종종 했지만 미카는 아야와 친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미카에게 아야는 싹싹하고 열정적인 업계 후배일 뿐, 그 이상의 사적인 관계로 얽히지 않았으니까.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야는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말을 붙여 왔다. 그동안은 좀 바빴어요. 저에게도 개인적인 스케줄이 적잖이 들어오고 있거든요! 이번에도 스케줄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는데…… 미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종일관 쾌활한 투로 제 할 말을 마친 아야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추운 날 혼자서 뭐하고 계셨어요? 누구를 기다리시던 건가요?"

"아닙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서요."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괜찮으시면 제가 들어 드릴게요. 고민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고 하잖아요!"

미카는 아야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야는 엄연히 다른 아이돌 그룹 멤버이고, 제 그룹이 떠안은 약점을 말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미카는 한숨을 뱉어냈다. 경쟁자고 뭐고 못 말할 게 무언가. 어차피 곧 끝날 일이다. 그런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룹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해체하게 될 것 같거든요. 아야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 않은 채 미카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활동에 열의를 잃어버린 멤버가 절반이라고. 활동을 이어가고자 하는 멤버들도 있지만 자신은 해당이 없고 그만둘 참이라고. 솔직히 이런 상황이 올 때까지 꾸역꾸역 버틴 게 어리석다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이돌 활동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잖습니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아야의 표정이 울상이 되어 갔다. 정말 눈물이 많은 사람이군. 단출한 감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시무룩한 낯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말이 절로 삐뚤게 나갔다.

"마루야마 씨에게는 잘된 일이겠네요. 경쟁자가 하나 줄어드는 거니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야가 눈을 휘둥그레 떴으므로 미카는 조금 후회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던 듯했다. 아무렴 어떤가, 연예계를 뜨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인데. 졸렬한 변명으로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하여간 순진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대하기 어려웠다. 곧바로 생각에 잠긴 아야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겸연쩍어진 미카는 눈을 굴려 앙상해진 나무들을 훑었다. 이파리는 진즉 다 떨어졌고 갈색 이파리 하나가 바닥에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밤하늘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답답해 보였다. 하여간 삭막하기 짝이 없는 계절이다. 이래서 겨울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상냥한 구석 없는 스스로가 싫어질 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생각이 더 길어지기 전 아야가 말했다.

"그러면요, 미카 씨. 무대 위에서 반짝거리던 순간들을 모두 포기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본 미카 씨는 무대에서 춤출 때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어요. 아닌가요?"

"즐겁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그렇지만 고작 그런 찰나의 감정 때문에 불투명한 미래에 스스로를 내걸고 싶지는 않아요."

"아니요, 찰나의 감정이 아니에요. 언제까지고 미카 씨의 마음속에서 빛 바래지 않을 행복이에요!"

아예 몸을 미카 쪽으로 돌린 아야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면 으레 품었을 법한 이상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경쟁자가 하나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아이돌은 모두가 경쟁하고 성장하며 반짝임과 마음을 이어나가는 이야기 속에 있다고. 그러니 함께 그리던 꿈을 이대로 포기하면 마음이 아플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다. 꼬투리 하나 잡히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게 팬덤이고, 다른 아이돌들은 바로 그 떨어지는 팬들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미카는 그 낙관적인 말을 흘려넘기기 어려웠다. 미카가 반박하지 못하자 아야가 다시금 시선을 맞춰 왔다. 분홍빛 눈이 선명한 열정의 색으로 반짝거렸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면, 그만큼 무대에 올랐던 미카 씨의 지난날들이 선명한 행복의 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 아닐까요? 저는 미카 씨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눈 후 아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미카 씨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세요. 마음 정리도 잘 하셨으면 좋겠어요! 선물이라며 남겨 놓은 담요를 매만지며 미카는 배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생각이 더욱 많아진 것 같았다. 결코 흔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기울기 시작했다. 짙은 분홍색 담요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눈송이 하나가 살그머니 내려앉았다. 춥고 삭막하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었다. 미카는 생명력 없는 겨울을 싫어했으나 눈만큼은 싫지 않았다. 데뷔를 하던 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던 언젠가의 자신도 아야처럼 생각했을까. 자신이 반짝임과 마음을 이어나가는 이야기 속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확실한 건, 지금의 미카는 이대로 그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고 싶지 않았다. 다분히 충동적인 마음으로 미카는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야. 네 명이라도 활동을 이어가자는 제안, 잘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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