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황야에 피는 꽃

知香 by 지향

"메인 보컬 교체는 결과적으로 취소되었고, 1회전도 돌파할 수 있었지만…… 정말로 교체되었으면 어땠을까 무서웠어요."

"하지만 나오 씨에게는 그분만의 생각이 있었을 테고, 제 퍼포먼스가 미숙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미카가 한동안 말이 없으니 아야가 황급히 덧붙였다. 대수롭게 생각지 말라는 배려일 터였다. 그럼에도 미카는 곧바로 대답을 내어 놓지 못하였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아이돌이 되고 싶다던 이 사람이 옛일을 회상하며 지어낸 표정 때문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려서.

많이 놀랐겠군요, 힘든 시간을 보냈겠네요. 미카는 아야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왜 저에게 상담하지 않았나요?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국면에서 급작스러운 메인 보컬 교체라고요? 프로듀서 쪽을 교체하는 게 낫겠군요. 혹은 무능한 기획사를 향해 냉소라도 던지고 싶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종래에는 맥 빠지는 한마디를 내밀었다.

"……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 나누실까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집에 갔다가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다행히 아야는 밝은 목소리로 승낙했다. "그래요! 마침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거든요." 그러고는 선뜻 앞장서 걸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도 굴하지 않는 게, 여전히 씩씩한 토끼 같다고 생각하며 미카는 조용히 그를 따랐다.


*

아야의 거센 만류에도 굴하지 않은 채 미카는 음료에 간식까지 제 카드로 긁었다. 제 앞에 놓인 음료 몇 잔을 홀짝거린 아야는 난데없는 질문을 해 왔다. 뚝 끊긴 화제를 다시 꺼내기 겸연쩍은 듯했다.

"소속사를 옮기고, 그룹 재정비를 하고 있다고 하셨죠. 잘 되어 가고 있나요?"
"네. 소속사도 의욕적이고 멤버들도 의기투합하고 있으니 여름 중으로는 새 음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미카는 슬쩍 웃었다. 어째 눈앞의 아야가 더 기뻐하는 듯한 눈치였던 탓이다. 하여간 경쟁자에게 너무나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카는 감사 인사를 덧대었다.

"그리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마루야마 씨의 조언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거듭 감사해도 부족하지 않아요."
"별말씀을요! 미카 씨의 의지가 중요했던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라."

미카는 제 음료에 떠다니는 사과를 티스푼으로 쿡쿡 찔러대며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드리우는 봄볕이 아직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름의 햇볕만큼 따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벚꽃잎들은 그 온기마저 견디지 못하겠다는 양 슬슬 떨어져 내렸다. 어렴풋 보이는 화단이 온통 꽃잎으로 엉망이었다. 카페 사장이 열심히 가꾼 것 같은데, 치우려면 고생깨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는 꽃 가꾸는 취미 같은 건 조금도 관심을 둔 적 없었다. 어차피 계절이 바뀌면 기껏 기른 꽃이 시들어 버릴 테니까. 그는 제 노력이 무가치했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봄바람이 불어와 마음에 무슨 변덕이라도 일었는지, 미카는 줄곧 생각했던 것들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 메인 보컬을 바꾸겠다는 얘기 말이에요, 저는 그따위 폭언을 들었다면 당장 관뒀을 겁니다. '그래요,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세요. 바꿔서 얼마나 잘 되는지 봅시다.' 이런 소리나 하며 객기를 부렸겠죠."
"에헤헤. 저는 폭언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요. 그렇게 불같이 화내는 미카 씨는 상상이 안 되는데요. 아무튼, 미카 씨는 대체 불가능이잖아요! 그런 말을 들을 리가 없죠."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마루야마 씨도 대체 불가능인데 말입니다."
"정말요? 히나 쨩도 그렇게 말해 주었는데. 정확히는 제가 보컬이기에 파스파레에서 기타를 치는 게 즐겁다고 했어요."

"저도 마루야마 씨가 보컬이라면 무대마다 백덤블링을 세 번씩 해야 한대도 좋을 겁니다." 농담조로 말한 후 미카는 제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한바탕 파동이 인 후, 잔잔해진 찻잔 위로 제 얼굴이 비쳤다. 비치는 얼굴이 미카는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낯짝은 어른인데, 정신머리는 열여섯에 지나지 않았다. 키는 훌쩍 커 버렸는데, 제 마음은 실패를 겪을 리 없을 것이라 믿었던 그때에서 한 뼘도 자라지 않았다.

"아무튼, 저는 정말로 소중한 것 앞에서는 유치해지나 봅니다. 마치 조금도 소중하지 않았던 듯, 미련 따위는 전혀 없는 듯 방어적으로 굴지요. 정말로 놓치면 후회하고 말 텐데도.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것을 적극적으로 지켜내려는 마루야마 씨가 근사해 보였습니다."
"조금 쑥스럽네요.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요."
"마루야마 씨는 모르시겠네요. 지키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는 게 저에게는 얼마나 대단해 보이고 부러운지."

그렇게 말하고 미카는 아야에게 시선을 두었다. 역시 전부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기쁘네요.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겠어요!" 그러고는 이미 반쯤 먹은 케이크를 또다시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제법 입에 맞는 듯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종종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카는 케이크에 손대지 않았다. 아야 씨 입으로 들어갈 게 한 조각이라도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영 아까웠다.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아야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고 미카는 구태여 그 공백을 채우지 않았다. 카페에서는 밝은 아이돌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미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잊어지는 아이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포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이들이 꽃잎의 숫자만큼 많으리라. 그들에게 유감이나 부채감 따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수백 개의 청춘이 바쳐질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잠시 셈해 보았을 따름이다. 제 눈앞, 아이돌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할 말이 얼추 정리되었는지 아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메인 보컬 자리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히나 쨩은 우리가 '벼랑 끝 아이돌'이라는 말을 했었어요."
"벼랑 끝이라. 극단적으로 들리는 표현이군요."
"조금 그렇죠? 아시다시피 파스파레는 데뷔 무대에서 립싱크를 해서 평판이 최악이었고, 저는 파스파레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어요. 생각해 보면 메인 보컬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도 그때와 비슷했어요."
"벼랑 끝에 선 듯, 절박하게 노력한다는 의미군요. 확실히 마루야마 씨의 상황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미카는 문득 목이 탔다. 찻잔을 조금 비운 후 어렵사리 말했다.

"저는…… 마루야마 씨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에헤헤, 고마워요! 그렇지만 저는 상처받아도 괜찮아요, 상처는 언젠가 아물잖아요."
"상처가 잘 낫는 편이십니까?"
"글쎄요. 잘 낫지 않는 상처도 분명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언젠가 아물 걸 아니까요. 계절이 바뀌면 꽃이 지지만, 또다시 봄이 오면 새로이 피어나는 것처럼요."

미카는 긴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은 영영 마루야마 아야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었고, 동시에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었다. 황야의 모래바람에 부식되는 돌보다 그 틈새에 기어코 뿌리내리고 봄을 기다리는 꽃이 더 강하기 마련이다. 상처 나지 않고 조금씩 영구히 깎이는 것들보다 상처 입고 또 아무는 존재가 더 강하다. 미카는 아야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한 마디를 툭 내놓았다.

"부럽네요, 그런 점도."

"그러는 미카 씨도 부러운 점이 많아요! 춤도 잘 추고, ……" 미카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 얼굴에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미카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한 줄곧 이야기를 이어 가는 아야의 얼굴에 어느덧 가장 잘 어울리는 웃음이 걸려 있어서, 미카는 역시 그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생각이 사랑 비슷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으나.


뱅도리 모르면 전혀 못 알아먹는 글이 되어 버려서 부연설명

'황야에 피어라, 꽃 소녀들이여'는 파스파레 이벤트 스토리예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파스파레는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아이돌 출신 프로듀서를 들였습니다. 1회전을 앞둔 어느 날, 프로듀서는 '무대가 전혀 두근거리지 않고 그 원인은 마루야마'라며 메인 보컬 교체를 건의했어요. 멤버들은 당연히 모두 반대했고 아야는 자신의 어떤 점이 미흡한지 고민을 거듭합니다. 메인 보컬이 될 것을 제안받은 '히나'와 함께요.

두 사람은 동료 밴드 멤버에게 자문을 구해서 거리에서 게릴라 공연을 하게 되는데, 길거리에서는 두 사람을 봐 주는 행인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 히나와 아야는 '파스파레의 팬'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대중)'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안정감 있는 방식보다는 도전적이고 즐거운 음악을 선보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메인 보컬 교체가 취소되었지만 아야는 개인적으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메모리얼 스토리에서는 다른 NPC캐릭터가 위로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위로가 너무 부족했어요, 우리 꼬질토끼 당장 북북씻기고 맛난거 먹여야된다고~! 그런 마음으로 쓴 글이에요. 사실 쓰다 보니 미카가 그리 위로를 잘하는 캐릭터가 아니어서(……) 그것보다는 아야와 미카의 차이점에 더 초점을 맞춘 글이 되었네요.

미카는 상처받을 거면 도전도 안 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혹평받으면 어쩌라고? 나도 그렇게 진심으로 한 거 아니거든?(누구보다 진심이었음) 이렇게 유치하게 객기를 부리는 편입니다. 실패한 적이 거의 없는 인생이고, 그래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해요.

그렇지만 아야는 숱하게 실패했고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 인물이에요. 그렇기에 실패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지 않아요. 혹시 실수했다면 다음에 개선점을 찾는 편이죠.

그래서 미카는 아마 영영 아야처럼 성숙한 인물이 못 되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요 ^.ㅠ
끝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