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O.SAEGI

Ten to the power of minus thirty-five second

너와 내가 사랑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감정의 시간선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난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상황 속에서 홀로 남아버린 무력한 아이들은 넘쳐났으니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도 다 그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가정사 같은 건 한탄할 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모두가 똑같았으니까. 남이 보면 비극적인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미련과 절망으로 삼기에는 비일비재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였고,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는 삶은 듣기만해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아이들은 울기도 하고 부모님을 찾기도 했다는 걸 언뜻 떠올릴 때면, 내 감정의 범위는 정상에서 조금 엇나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29년을 살았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시기부터 혼자였고, 내 감정은 언제나 무뎠으며, 모든 것에 순응하며 모든 것을 멀리했다. 무엇 하나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선별식에 나간 건 정말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그곳에서 널 만난 건 더 의도치 않은 일이었고.

처음에는 그냥 같은 길드원 그 이상도 이하도 어니었다. 그 다음에는 일 잘하는 사람. 그 다음에는… 그래, 네 다정함을 눈치챘고 나는 네 다정함과 실력이 있다면 앞으로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온전히 쓸모에 대한 판단.

네게 부서 이동을 권한 건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 제안에는 어떠한 배려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넌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네 다정함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아량이 내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좋았다. 나는 너를 특이점으로 만들어 내 인생의 편리함을 추구했고… 너는 네 신념에 따라 그런 나의 꿈을 이루어준거니까 서로 이득인 셈 치자고, 그리 생각하며 흘려넘겼다.

그런데 네 다정함은 겪으면 겪을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욕구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널 내 특이점으로 삼은 이유에는 단순히 네가 편리하기 때문만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이걸 선뜻 네게 말하기에는 저열한 욕심이라 다시 마음 한켠에 대충 박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욕심을 포함해 내 모든 걸 네게 허락하고 네 모든 걸 갖고자 함이 나의 특이점의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렇게 지난 날, 네가 내가 사랑을 말했다. 내가 네게 있어서 유일하다고. 겨우내 깨달은 그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나와는 너무 달랐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모습. 진심을 숨기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얼굴.

그 말을 건네며 뛰는 네 심장소리는 나와는 너무 다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빠르고 뜨거운 소리.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내 심장과는 다른 열정.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너와 내가 서로를 생각하는 방향이 온전히 일치하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러면 너는 사랑이고 나는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나…?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이 뛰어야만 사랑인 걸까.

내 심장은 언제나 변함없이 고요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님을 주장하는 건 그게 사랑임을 말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난 항상 어려운 길보다 쉬운 길을 택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난 이걸 사랑이라 말한다.

너와 같은 크기는 아닐지언정, 너와 같은 표현을 하지 못할지언정, 정녕 우리의 마음이 다르다고, 내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억눌러왔던 감정은 이제 익숙함이 되었다.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특이점이 나타났다면 그것이 특별하지 않으면 무엇이 특별할 수 있을까.

특이점이 될 수 없어 오기가 생긴다고 말한 네가 내게 스며들기까지 고작 몇 달. 모르는 사람에서 동료가 되고 동료에서 파트너가 되고 파트너에서 사랑이 되기까지 고작 몇달이었다. 마치 작은 점에서 폭발이 일어난 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우주가 팽창된 것 같이, 아무것도 없던 내 세상에서 감추고 억눌러왔던 마지막 감정을 터트린 이후로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만큼 퍼져나간 것이다. 감정에 익숙치 못한 만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세상에서는 느린 시간일지라도 멈춰 있던 나의 세상에서는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래.

조금씩 적응했을 뿐이다. 천천히 스며들듯이.

너무 빠른 건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게 사람이고,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게 사람이지 않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렸는데 내 머리가 그것을 인지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와 달라서 내가 말하는 사랑이 네가 원하는 방향의 사랑은 아닐지도 몰라. 근데 그럼에도 내 인생에 특이점은 너 하나뿐이야. ……내 인생에 너를 넣기로 한 이상, 내게 유일한 건 너 하나뿐이고. 너와 함께하고자 했던 내 욕구가, 오로지 너에게만 유일하단 이야기야. 이게 네가 말하는 사랑의 감정과 비슷하다면 나 역시 널 좋아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아직 분명하지 않은 감정인 것처럼 보여도, 그 감정이 네가 원하는 확실한 사랑이 되기까지, 느리더라도 계속 끊임없이 스며드는 꿈 속의 기억처럼 곧 현실이 되어, 네가 얘기하고 내가 나도 모르게 꿈꿨던 이상에 가까워질거다.

이건 분명한 예감이다.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미래.


여담…

새벽이는 남에게 뭐든지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걸 하기가 알아버린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삶도 신념도 모두 본인에게 있기에 온전히 하기에게 맞춰줄 수 없는데… 새벽이는 그게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죠. 아니 글쎄 신념의 모두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인 것부터가 그렇잖아… 하기는 평생을 의지할 사람 없이 살았고, 그게 너무나도 익숙했는데… 이게 익숙한거지 상처가 아예 없다는 건 말도 안되고. 비설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적지 않았지만… 그건 하기가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거지 완전히 없냐라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도 않거든요……. 차라리 모든 것에 의욕을 잃는 편이 희망과 실망 사이에서 상처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자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걸 새벽이는 다 채워줄 수 있는 거죠. 단지 이게 내 꿈이라고 말 한마디만 하면. 물론 하기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랬는데도 하기의 일도 생활도 모두 옆에서 해주고 있잖아. 물론 새벽이 입장에서는 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하기가 볼땐 새벽이는 원래도 다정하고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관계론에서도 썼던 것 같은데… 하기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에 자신이 이득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근데 금새벽이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100% 아니 200% 의 이점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의 부족함(애정과 외로움과 그외 기타 등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인거죠. 하기 입장에서는 금새벽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는 게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테니 그것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거고요……. 그게 사랑의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애매한가… 근데 저는 그 애매함마저도 이하기스럽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보면 이게 사랑인가? 싶은데 이하기한테 있어서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다른 걸로 표현할 수가 없는거죠. 모든게 금새벽이 유일하니까. 그 욕구조차도 유일하니까.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