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e

이상동몽 1

관계의 정의가 필요한 때가 온 거야

변하지 않는 관계라는 건, 내가 그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일부분 썰과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야, 나 소개팅 나간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듯 무심하게 툭 말을 내뱉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 말을 건네고는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딱히 네 반응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의 통보가 적당했다.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장난이 아니었지만, 너에게는 장난 같은 이벤트 중 하나가 되어버릴 것도 분명했다. 이런 너의 반응,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도 모른 채 거슬려 하던 내 기분도 이젠 마무리될 것이라 생각하면, 생전 하나도 관심 없던 사랑도 연애도 못 할 것 없겠단 생각도 들었으니…….

너와의 관계도 이걸로 끝이겠지.


"나오씨는 지금 법대생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수석이시라고. 역시 대단하시네요. 나오 가가 대대로 천재라는 말이 정말인가 봐요."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적당한 대답과 적당한 반응. 그리 싫어하던 천재 프레임에도 평소에는 짓지 않던 웃음을 지었더니 이것도 나름의 노력이라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소개팅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에 한 건 잡았다며 씩 웃던 혈육. 그 체면을 뭉개버리지 않게 되어 다행인 걸까, 아니면 이 지루함을 버틸 수 있는 내 인내심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이 상황을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분위기 좋은 식당,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차분한 상대방과 수준이 맞는 대화도 모두 자신이 선호하는 것들이었다. 쓸데없이 과민 반응하게 되는 일도 없고, 내 생각을 곡해하여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이 고요함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었고, 그랬어야만 했다.

내가 원했던 이 잔잔함을 지루하다 생각하게 되다니, 이건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어렵지 않은 건 어째서일까.

시끄럽고 고집 센 망아지, 이치무라 카즈키.

내 인생에 도움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 일상을 전부 망가뜨린 범인.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는 너무나도 명확한 이유였다.

아. 또 모든 생각이 그놈으로 귀결된다. 정작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생각이 멈춰지질 않는다. 하는 생각이라고는 그놈을 불평불만 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게 뭐가 좋다고 멈추질 못하는 것일까. 너만 관련되면 어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 이상은 앞에 있는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닌가 생각할 때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와 시선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와닿는 것은 어느 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잘도 저런 웃음을 짓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생각이 들어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상대라니 이 앞의 여자도 참 불쌍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기만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예의가 아님을 알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자리를 주선 받은 것부터가 틀려먹었으니 이젠 어떻게 되든 결론을 내면 되는 일이었다. 일이 잘 풀리면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쓰레기가 되면 되겠고, 풀리지 않는다면 뺨이라도 맞고 끝나면 다행인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방법을 모색해야겠지만.

젠장. 기껏 정리하겠다고 목표했던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꼴이 한심하다. 이 상황은 정답이 아니었던 걸까. 지금 내가 뭘 하는 건지도, 이게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이젠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소개팅 자리를 주선 받은 건 순간의 치기였을 뿐일지도 몰랐다. 나는 정말 이걸 마지막으로 결론 내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짓고 싶어 했던 결론은 대체 무엇이길래 난 여전히 이렇게 헤메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카즈키.

전에 네가 했던 말대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만 할까.


내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너무 무심했던 탓일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온전히 내 탓이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부분이 많았다. 내가 그놈과 사귄다는 소문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하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아는 진상이라곤 극히 일부분에 불가했으니까. 그저 아니라고 말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이 말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이 사건의 진범과 담판을 짓는 일뿐이었다.

"너 왜 소문 정정을 안 하냐. 네가 아니라고 말 한마디만 해도 사라질 일 아닌가?"

"하지만 히사. 이제 곧 졸업이고...... 졸업하면 소문 들을 일도 없지 않을까?"

이해하기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뱉는 널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도 안잡혔다.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너는 나름대로 답변을 내놓는다지만, 내가 들을 땐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유일 뿐이었고,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네 성의 없는 변명에는 나를 놀리겠다는 목적만 여실히 드러났고, 네 얼굴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웃음이 만개했으니까. 재수 없게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속이 끓었다. 장난. 그놈의 장난. 사귄다는 소문을 고작 놀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미친놈. 본인의 연애도 포기하면서까지 고작 날 놀리기 위해 이딴 장난을 친다고? 진짜 이놈은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진짜 연애하면 금방 사라져~ 나는 그동안 히사한테 엉뚱한 사람이 들러붙지 않도록 막아준 거지!"

"하, 이 상황에서 나한테 들러붙는 놈이 이상한 건 아니고? 너 때문에 다가오는 놈들도 없는데 누구랑 하란 소리야?"

어이없는 말에 소리치고 답답한 마음에 가슴이라도 치고 있으려면 그러지 말라며 막아설 놈 때문에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고,

“아아, 맞다. 그렇구나?”

그런 내 심정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여유롭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나를 더 분노하게 했다.

“…히사, 연애하고 싶어?”

망할.

참는 척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풋 하고 들려오는 실소는 나를 어지간히 놀리고 싶어 함이 분명했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듯 실실 웃고 있는 저 얼굴이 당황함이든 불쾌함이든 무엇이든 부정적인 감정으로 찡그러지는 모습을 봐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네 말처럼 진짜로 연애해야 하나 싶었다. 이 소문이 잠잠해지면 그저 자기 뜻대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 신난 저 얼굴이 시무룩해질까. 연애하고 싶냐고 묻는 네 앞에서 그딴 건 관심 없고, 지금 당장 널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이나 떠올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 덕분에 나에게 다가오는 이성이란 없었고, 연애로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기에는 방법은 이놈이거나 소개팅밖에 없었으니까. 그저 막막한 미래에 감흥 없던 눈물마저 흘릴 지경이었다.

“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했으면 좋겠냐?”

“아니? 나를 놔두고 왜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 미쳤어? 당연히! 절대! 안 되지!”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도 신은 나를 용서해야만 했다.

“미친 새끼. 그럼 너랑 연애하리?”

“어. 나랑 해! 그렇게 다른 애들한테는 날 남친이라고 소개해 놓고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겠다고? 허락 못 해!”

“웃기지 마! 내가 언제 널 남친으로 소개했어? 너 혼자 놀려먹겠다고 쇼한 거잖아! 그런 주제에 네가 뭔데 허락하니 마니야? 미쳤냐? 어? 진짜 너랑 한다고 하기 전에 적당히 해라?”

“히사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아아. 맞다. 이놈은 미친놈이었지. 저 웃음은 내가 단단히 말려들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아니, 말려든 건 처음부터였다. 이치무라 카즈키와 만난 고등학생 때부터 어딘가 단단히 꼬였던 것이다. 네 앞에서만 서면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는 대로 뱉어냈던 모든 말이 그걸 증명했다. 어이없음에 뇌를 거치지 않고 뱉어낸 말은 결국 나를 향해 돌아왔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하는데…….

뒤늦게 깨달은 벌인가.

“어, 해. 해. 한 입으로 두말하면 큰일난다?”

“한 입으로 두말? 내가 그럴 것 같아? 어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해보라고!”

아니. 그냥 나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놈인 거다. 그놈의 오기와 자존심이 뭐라고 이걸 받아치는 건지. 뇌가 멈춰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이걸 진짜로 사귈 리가 없으니까.

“어 오늘부터 1일이다? 나중에 가서 정정하지나 마! 그래 놓고 남자라고 우기지 말라고!”

“흥,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너야말로 겁쟁이처럼 물러날 생각이나 하지 말라고”

“히사야 말로 겁쟁이처럼 물러나지나 마. 물러나면 100년은 놀려줄 테니까!”

“누가 할 소리!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물러나면 겁쟁이에 패배자라고 평생 우려먹을 생각이니까!!”

……진짜 별반 다를 것 없는 놈이었나보다.

XX. 망할 카즈키.

이젠 모르겠다. 여기까지 왔으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의 싸움이니까 누가 먼저 지쳐 떨어지는지 해보는 수밖에.


이 지경까지 와서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오히려 이 상황이 되니 이렇게 멍청한 관계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비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

애초에 이 관계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그때, 누가 이기나 그렇게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오는 관계는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이 생각마저도 제대로 굴러간 생각이 아니었음을 이제 와서 파악했으니 다행인가. 너는 이상한 곳에서 이상할 만큼 집착적이고 끈질긴 면모가 있었고, 나 역시도 고집과 끈질김 하나로는 어디 가서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서로의 경쟁심을 부추겨 잘잘못을 따지는 건 애초부터 잘못된 방향이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을까. 이 이상한 관계는 시작부터 하면 안 됐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단순히 친구라는 관계로 잘 지냈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게 해결될까. 그러면 적어도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방황하는 일도, 고민하는 일도, 선택을 강요 받게 되는 이 상황도 전부, 전부 필요없는 일이었을텐데.

거짓말뿐인 사귐과 오기로 점철된 애정행각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수정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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