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e

이상동몽 2

네 생각이 궁금해. 우린 지금 어떤 관계지?

변화하는 관계가 두렵다면 그건 나아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명이다.

(*일부분 썰과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로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해 사귀기로 했던 그날 이후로 너와 나는 연인이었지만 연인이 아니었다. 말로는 사귄다, 남들에게는 그리 자랑하고 다녔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해서 사귀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저 거짓뿐인 관계였다. 쇼윈도 커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x신 같은 짓이긴 했다. 아마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 테지.

너만 엮이면 나답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내 선택이었을까. 원래 같으면 사귄다는 퍼포먼스를 하든 말든 꺼지라는 냉담한 소리로 쫓아내 버렸을 텐데 자존심을 빌어 모른 척 지내왔던 것도 있으니, 네 말처럼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건 내 과실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서로의 자존심에 못 이겨 키스까지 하는 멍청이들 두 명이 만났으니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우기기에는 남은 이성이 그건 네가 생각해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회의감의 이유가 내 행동이 아닌 관계 정의에 비롯됐다는 사실이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너와 내가 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이 지경까지 왔을까. 연인도 친구도 아닌 관계에 대한 회의감인가. 그게 무슨 의미이길래 나는 이것을 정의하고 싶은 걸까. 미지의 의문이 두려워 무작정 관계를 끊어내기에는 여전히 너와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이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결국 이걸 해결하고 싶었다. 나에게 해결되지 못한 결과와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무지를 끝없이 헤매다 도착한 벼랑 끝.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노력하는 거다. 무지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존재 자체를 없애는 수밖에.

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가라앉은 정신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차가운 물에 네 생각을 흘려보내고 가라앉은 감정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니 제대로 떨어져 보자고.


다짐이 무색하게도 소개팅 상대와의 대화는 지지부진했다. 돌고 돌아 결국 서로의 겉만 보고 판단하는 대화에 무슨 감정을 표해야 하고 어떤 감상을 비춰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정말이지 내가 딱 질색하는 것이었다. 떨어져 보겠다고…… 하, 개뿔. 떨어지는 것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어려우니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쉽게 해결해 나갈 운명은 아니었던 거다.

와중에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에는 카즈키의 항의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 히사! 너무한 거 아니야?! ]

[ 어떻게 날 두고 소개팅을 나갈 수 있어! ]

[ 너무해!!! ]

[ (우는 이모티콘) ]

[ 나한테는 그렇게 착하게 웃어준 적 없으면서ㅠ ]

[ 우리도 소개팅해! ]

[ 나도 착한 히사 보고 싶다구!! ]

‘…무슨 소리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 왜 읽고도 대답 안 해? ]

[ 히사! ]

[ 시끄러워; ]

[ 너무해ㅠㅠ ] ₁

[ 이젠 읽지도 않는 거야?! ] ₁

‘하아…….’

이번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지였으니 방법을 다시 고민해 봐야 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시끄럽게 떠드는 휴대폰과 이 상황에 지쳐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갈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이젠 이 자리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점철됐다.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내어 예의상의 미소를 입에 올렸다. 작별의 인사를 담을 시간이었다.

상대와 눈을 마주하려 고개를 든 순간 이상한 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 이상한 것.

그건 이상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 예상대로라면, 절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뭐야."

겨우 올렸던 입꼬리가 경직되고, 입에서는 무의식적인 의문이 튀어나왔다.

“뭐긴 뭐야. 히사 남친이지.”

존재에 벙찐 것이 한 번, 그 뻔뻔한 대답에 한 번. 순간 머리가 텅 비어 멍청하게 ‘뭐?’라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평소라면 노발대발 신경질이나 잔뜩 부렸을 텐데 오늘따라 달라 보이는 네 모습이 익숙지 않아 멍청한 대답이나 놓아버린 거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 시력 교정을 위해 끼던 두꺼운 안경도 벗고 평소에는 볼 수 없던 포멀룩 차림까지.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아 조금은 엉성하게 메인 넥타이. 그 모든 행색이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자리를 망치려고 온 사람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괜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야.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소개팅은 아니지 않아?”

“뭐? 자기?”

“응, 자기야. 아무리 그래도 남한테 폐 끼지면 안 되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앞에 있는 사람을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이 씩 웃는 모습에 가증스러움과 어이없음을 느꼈다. 동시에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고 말이다. 도저히 네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번에도 또 장난일 뿐인지.

“아. 그쪽한텐 미안한데, 제 애인이라.”

순식간에 흘러가는 상황에 갈피조차 잡지 못한 채 네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고 만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비집고 순식간에 다가온 네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빼앗겼다. 막을 새도 없이 닿아온 입술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귓가에 울리는 그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민망한 소리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이미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나는 그저 멍하니 네 얼굴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조용해진 세상이 또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소개팅은 대차게 망했다. 입맞춤 이후 생각이 모조리 날아가 버려서 그 뒤에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지금 카즈키 손에 이끌려 그 장소를 벗어났다는 사실만 인지될 뿐이었다. 카즈키만 오지 않았어도 평범하게 마무리되고 다신 만나지 않을 상대였을 텐데 괜히 안 좋은 인상만 남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도 이젠 소용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무작정 네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건 짜증이 났다.

왜지? 이것도 그저 장난일 뿐이라서?

심기가 나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또다시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이치무라 카즈키에 의해서. 너는 도대체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지. 나는 장난도 이만하면 됐다고 외치고 있는데 그마저도 장난으로 흘려보내려는 것일까.

“카즈키.”

“카즈키! 어디 가는데! 이거 놓고 가지?”

“조용히 해.”

속에서 울분이 올라왔다. 지금 화내고 싶은 건 난데 왜 도리어 네가 화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조용히 하라고? 웃기지 마. 지금 되지도 않는 행패 부리는 건 너야. ……너 지금 내 중요한 자리를 망쳐놓은 건 알고 있냐? 지금 화를 내야 할 게 누구인데 조용히 하라 마라야?”

“하아… 제발. 히사”

답답한 듯 뱉는 그 한숨 소리도, 차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자기 머리나 헝클이는 그 손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조용히 해. 길 한복판에서 나랑 사귄다는 거 광고하기 싫으면.”

그 말에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협박이었겠지만 넌 왜 굳이 많은 방법 중에서 우리의 사귐을 꺼내 든 걸까. 아마 넌 이 방법이 나에게 가장 잘 먹힐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랬던 것이겠지만, 나는 이제 별것 없는 이 작은 단서 하나에도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넌 왜 여기까지 그 먼 발걸음을 옮겨서 내 노력을 망치는 걸까. 왜 화를 내며 나를 끌고 가는 거지. 어째서… 어째서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구는 건데. 내가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상처받은 눈을 하면… 그러면 마치 너와 내가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 같잖아.

“…히사. 나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사귀고 있지.”

겉으로만.

“근데 왜 소개팅을 나가는데…….”

왜냐고? 진심으로 묻는 건가.

순간 속이 끓어 인상을 콱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걸 계속하고 싶은 거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꾹 내리눌렀다. 평생 이렇게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식 입맞춤을 나누고, 서로 바득바득 자존심 긁으면서 누가 이 거짓말을 더 오래 버티는지 내기라도 했어야 하나? 대체 이걸 계속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무슨 이득이 있어서 사귀는 척을 계속해야 하냐고.

“너야말로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고작 놀리는 걸로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왜 소개팅 나갔냐고? 당연히 그만두려고 겠지. 이제 진짜 진절머리 나서 그만두려고.”

지친 눈을 감았다. 억울하다. 정말이지 억울했다. 왜 나만 이렇게 고민해야 해. 왜 나만 벼랑 끝에 몰린 듯 숨이 막혀야 하지? 왜 나만 이 관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왜 이 관계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왜. 숨이 막힌다. 알 수 없는 이유가 자꾸 숨통을 조였다.

“나… 싫어?”

“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싫을 리가 없잖아. 네가 싫었으면 애초에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뭐 하러 이러고 있겠어. 싫어하는 일에 시간의 가치를 쏟는 짓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 그러니까… 내가 고작 싫어한다는 이유로 이 관계의 의미를 찾고 있을 리가 없다. 그 나오 히사토미가 구질구질하게 지금까지 버티다 더 이상 참지 못할 때쯤 되어야 도망치듯 소개팅이나 받았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나는…….

네가 싫은 게 아니라 이 거짓말 같은 관계가 싫었, 나…? 왜지? 그야 너는 장난인데, 나는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너는 거짓말인데 나는 거짓말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나는, 사실 나는…… 너와 거짓말로 나누던 애정에 진심이 되어버렸으니까.

네가 진심으로 좋아졌으니, 장난으로 시작된 이 관계가 진저리 날만 했다. 내 성격에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내 감정이 거짓말로 포장된 채 감춰져 있는 게 거슬렸던 거야. 그래. 네 행동이 거슬린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거슬린 거다.

너는 장난인 줄 알면서도 좋아하게 된 멍청한 내가.

젠장.

진짜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정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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