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게임즈

사막에 내리는 눈 上

와타비앙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와타나베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군대는 전시 외의 살인을 용인하지 않았으나, 다음 세 가지 상황에서는 살인자를 포용했다. : 배신자를 처형하는 것, 퍼니싱에 감염되어 예후를 기대할 수 없는 환자의 요청, 다수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소수를 죽이는 것.

차라리 배신자를 사살했다는 명예로운 일이었다면 좋았을테다. 그는 와타나베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어른'이었고, 퍼니싱에 침식당했으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환자였다. 의료 보급이 부족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보급품 대신 민간 의술을 사용하느라 풀물이 든 입술을 겨우 비틀어 올리곤 짧게 손짓했다. 어서, 와타나베. 이러라고 네게 총을 준 게야. 소년이 총을 고쳐잡는다. 권총 손잡이에 두른 미끄럼 방지 매트가 땀에 젖어 미끌거렸다. 와타나베는 총의 이름을 억지로 되뇌였다. 스미스&웨슨 M60. 와타나베가 사는 시대보다 약 일천 년 전에 만들어진 구식 총. 그러나 사람의 숨을 앗아가기엔 더없이 제격인…….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이내 귀청을 찢는 우레가 들린다. 다시 눈을 뜨면,

창백한 하늘이었다.

와타나베는 그 사람의 끝을 맺은 후 더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바나 지역엔 전선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덜 마른 머리칼 사이로 모래 바람이 성기며 제 머리칼에선 언제나 바스락거리는 모래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선을 내려 사랑하는 은사의 숨을 직접 끊은 어린 수녀를 바라보았다. 스미스&웨슨 M60 권총이 하얗고 가느다란 손 사이에서 형편없이 떨렸다. 창백한 뺨이 눈물로 발갛게 물들었고 머리두건 바깥으로 새어나온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눈결정이 성겨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원이나 사막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없던 모양이지. 그는 수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가시거리가 10미터가 채 되지 않는 눈보라 한가운데였다. 목사는 삼분이 채 되기 전에 눈에 묻혀 잠들 것이다.

"… 가죠. 후방 부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수녀는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수녀의 이름이 비앙카라는 것은 수녀와 함께 남쪽으로 향하고 있던 피난민들 중 한 명에게 들었다. 와타나베는 얄팍한 머릿속 교양 지식을 들춰 그 이름이 백색을 의미하는 뜻임을 깨달았다. 설원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 더 걸릴 대장정이었으나, 사람도 기계도 많이 없는 북쪽은 퍼니싱에 누구보다 안전했다. 군용 트럭에 실린 보급품을 내리던 와타나베는 오늘도 가장 먼저 찾아온 비앙카를 향해 짧게 눈짓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고 있었던 듯 내리깔렸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 저, 음. 수녀님."

"비앙카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성직자에겐 예의를 갖추는 것이 소대 규칙이라서 말입니다. 무어가 더 필요합니까?"

"아, ……."

비앙카의 시선이 데굴 구른다. 와타나베는 장부와 펜을 든 채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치마 앞으로 맞잡은 손끝이 추위에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무기라곤 제 은사를 쏘았을 때 한 번 잡았을 여자의 손끝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잘한 생채기가 많아 붉어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와타나베는 막연히 생각하곤 손을 뻗어 비앙카의 손을 잡아챘다. 관리하지 못해 길게 늘어진 사금빛 머리칼 아래 녹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손목에 걸린 머리끈 하나를 다른 손으로 빼내어 걸었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서요."

"아, 아아. 네."

비앙카는 그제야 토끼처럼 떴던 눈을 조금 누그러트리고 손을 내밀었다.

"묶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

"아, … 끈 주세요. 제가 묶겠습니다."

파란 시선이 손끝을 따라간다. 궂은 일을 도맡아한 사람의 손끝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비앙카의 손가락에 투박한 머리끈을 걸어주었다. 군용 끈이라 그렇게 좋은 건 아닙니다, 하고 덧붙이자 비앙카는 눈송이가 바스러지듯 웃었다. 와타나베는 다시 막연히 생각했다. 저런 투박하고 거친 검은색 머리끈보다는 하얀 비단 리본으로 만든 끈이 더 잘 어울리겠다고.

비앙카는 -아마도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줄- 간식거리와 식료품을 들고 돌아갔다.

한 번 두 번 닿던 시선이 어느새 비앙카를 뒤쫓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와타나베의 넓은 시야에 손을 불어가며 냉수에 수건을 빨고 있는 비앙카가 잡힌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녀의 곁에 가서 같이 수건을 빨았다. 세탁물은 날마다 바뀌었다. 어느 날은 수건이었고 어느 날은 피와 고름이 묻은 붕대였으며 그것도 아닌 날에는 주로 기름 때가 찌든 것들이었다. 같이 빨래하는 날마다 와타나베는 눈을 찬합 안에 담아 끓인 더운 물로 비앙카의 손을 녹여주었다. 그럼 비앙카는 꼭 봄꽃처럼 웃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썹이, 추위 때문에 발그레해진 양뺨이 그제야 비앙카를 그 나잇대의 소녀로 보이게 만들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트였다. 비앙카가 먼저 사소한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럼 와타나베는 제가 아는 한에서 비앙카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고는 했다. 처음엔 30분이 걸리던 빨래 시간이 -둘 다 손이 차가워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했으므로-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앙카는 주로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고 싶다 따위의 대인관계에 대한 고민을 했고 와타나베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을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달래주었다.

살인의 시대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야 했고 때로는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대였다. 말을 흐리며 은사에 대해 어물거리자 비앙카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빨갛게 얼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러고는 늘 다정한 목소리로 "고마워요, 와타나베 씨." 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럼 와타나베는 멋쩍은 낯으로 목덜미를 긁으며 "… 별 말씀을요, 수녀님." 하고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유독 비앙카의 웃음소리는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수녀는 군인이 보여준 호의에 보답하듯 가끔 와타나베와 같이 밤을 새주고는 했다. 평소 오아시스 소대가 주둔하던 사막은 나침반이 제대로 기동하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소대원 대부분이 별을 읽을 줄 알았고,  동토는 사막보다도 북극성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비앙카가 어린 아이들을 재우고(어른들이 그녀를 꺼려하는 것과 별개로 어린 아이들은 비앙카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편이었다) 밤을 지새는 모닥불 옆에 합류하면 소대원들은 저마다의 톤으로 별들의 방향을 논했다. 비앙카는 눈을 깜박이면서 그들이 마구 쏟아내는 별의 방향을 읽는 법과 신화와 사막의 미신을 듣다가, 마지막까지 남아 모닥불을 치우는 와타나베를 도와주면서 사막에서는 정말 그런 미신을 믿느냐고 되물었다. 그럼 와타나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토의 미신과 다를 건 없다고 그녀를 놀리곤 했다.

한바탕 놀리고 놀림받는 일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사람들이 잠든 군용 지프트럭까지 걸어가며 동토와 사막의 미신을 비교했다. 비앙카가 있던 교회에서는 매년 봄의 첫 새순이 돋은 가지를 꺾어 신께 바치는 작은 행사가 있다고 했고 와타나베가 있는 군대에서는 우물이 마르기 전 마지막으로 길어올린 물은 무덤가에 뿌려주는 관례가 있었다. 와타나베는 비앙카가 트럭에 올라가기 쉽게 손을 잡아주면서, 언제 한 번 여유가 된다면 사막에 있는 교회까지 와달라 했고 비앙카는 수도복 베일 바깥으로 비져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러겠다고 했다. 아무도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냥 그러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내리시려고요?"

"원래 지내던 교회가 어떠한 이유로던 폐쇄되면 가장 가까운 교회로 가는 게 규칙에 맞아요.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다니 말은 더 안 하겠지만…."

와타나베가 말을 흐린다. 독실한 신자들이 대부분인 생존자들 사이에서 비앙카의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앙카와 함께 가장 가까운 교회에서 내린 생존자들은 이미 멀리 떨어져 다른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앙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 앞에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그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와타나베에게 어떠한 걱정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말을 더 얹는 대신 오아시스 소대의 방식대로 비앙카에게 경례했다. 비앙카도 가볍게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남은 생존자들이 탄 지프트럭이 교회에서 멀리멀리 사라졌다. 오아시스 소대의 주둔지 근처에 있는 부대의 방공호로 가는 것일테다. 비앙카는 트럭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탓에 인수인계가 끝났을 무렵에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저물고 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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