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갈 수 없었던 길

아기주히 단문

글러먹음 by 호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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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다. 희는 뛰고, 또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거하게 넘어질 때야 그 사실을 알았다. 바지가 찢어졌는지 살갗에 피가 맺혀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을 것이다. 희는 반사적으로 주변에 있는 물길을 찾으려다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순황의 가르침을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의 응급처치였다- 떠올리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공림에 있던 모두가 가르쳐 준 것은 제 안위를 위해 사용해서는 아니되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 모두가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맹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희는 그가 가까이 갈 때마다 손을 말아쥐던 하곡도,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듯 허공을 헤메고나서야 시선을 맞춰주던 양명도 기억했다. 가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순자도, 안쓰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굴던 맹자도….

희는 때때로, 그가 정말 ‘폭군’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선산에서 지내던 이들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아, 천전 선생은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하곡을 동행하고 내려간 시장에서도 접근하려는 황실복권파가 그렇게 많았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들을 따라갔다면, 그래서 모두의 원망을 속시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였다면 좋았을까? 그럼 적어도 이 괴리감에 고통스러워하진 않았겠지. 그를 향하는 날선 비난 따위를 기꺼이 받아삼키고, 선의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희는 지학이 되기 전에 접촉했던 사람들의 제안을 떠올렸다. 주나라를 다시 세우자, 모든 영광과 부귀가 발밑에 가득할 것이다, 하늘 위에 인이 있고 당신의 발 아래에 의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단과 칠정은 주를 위해서만 존재할 것이다, 그런 것들. 사람을 신으로 모신 탓에 광신의 형태를 띄던 대신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쏟아지던 시선. 희는 그 길을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택하지 않은 것은 하곡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곡의 다정한 심성은 누구보다 희가 제일 잘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비록 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너트린 황실의 복권을 위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선산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속상해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길이 다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이유는, 주희가 정신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무릎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제안받은 길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갈 수 있는 길이라곤 오직 이정표 하나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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