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 in

연성교환

모든 실험은 시작과 종료가 명확해야 한다.

실험실의 불문율. A는 습관처럼 기록지를 쥐고 펜을 움직여 나갔다. 17시 42분, 실험 종료. 성과는 없음. 사유...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을 잃고 혼탁해진다. 기록지를 떨어트린 A는 펜을 쥐고 있던 손으로 허리께를 움켜쥐었다. 검붉은 선혈이 옷자락을 점점이 물들여 나간다. 젠장, 애초에 살상용으로 만든 녀석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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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가 실험실의 문을 연 것은 정확히 54분의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A의 숨이 아직 붙어 있었다는 것이고, 불행은 그 12분이 그의 피 대부분을 실험실 바닥에 칠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데 있었다. 강박을 의심할 정도로 하얗게 관리하던 실험실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으니 A가 성질을 낼지도 모르겠다... 현실도피에 가까운 상념은 바닥을 기고 있는 인간이 A라는 데 닿은 순간 끝났다. 뭐야, 거기서 뭘 하고 있는건데? A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작동 오류를 막기 위해 실험실에는 일체의 통신 기기를 배치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전원을 정지하고 대략적인 실험 내용을 기록하는 데 7분. 구조 확률을 계산하고 포기하는 데 30초. A는 손목에 찬 실험용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골든 타임 따위는 진작 지났다. 다른 부위였다면 조금 더 버텼을지도 모르는데. 하필 옆구리를 공격당해서는... 내장 어딘가를 잡아 뜯겼는지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이봐, 위대하신 지배자님. 듣고 있어?

좀 조용히 부를 수는 없나?

하! 잠시 의식이 끊겼는지 눈앞이 가물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힐. 바닥에 고인 핏물에 새하얀 의사 가운이 조금씩 젖어든다. 오른편에는 어디에 처박혀 있었는지 모를 응급 키트가 엉망으로 열린 채 놓여있었다. 지혈하기엔 늦었어. 그냥 내버려두지 그래... 놀라울 것도 없이 의견은 묵살당했고, A는 상처를 거칠게 움켜쥐는 손길에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B의 손 역시 엉망으로 떨리는 채였다. 의사가 되긴 글렀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상처를 움켜쥐는 것만으로는 지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A는 말없이 피웅덩이를 응시했다.

기일을 선택할 수 있다면 겨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문득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식어가는 몸과 반대로 치미는 열감이 머리를 눅진하게 녹인다. A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작년 겨울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차피 불멸을 이룰 수 없다면 남은 시간이 긴 것도 아니니까... 고장난 테이프처럼 목소리가 늘어진다. 뒤에 이어지는 대화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A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싶어졌다. 죽음의 계절 따위, 영영 죽음을 모를 여자에게 어울릴 리가 없지 않은가.

겨울은 고요한 계절이다. 한 사람 분의 생명 따위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삼켜버리겠지. 사라지는 것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나름의 축복일 테다... A는 여전히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붙잡아 떼어낸다. 쓸만하군. 기억해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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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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