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시 ■■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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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요란하다.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기댄 B는 낡은 계단의 삐걱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고작 서너 가구가 거주하는 그의 아파트에는 새벽 손님을 맞이할 만한 인사가 없었다. 오직 B를 제외하고.

현관 앞에 다다른 발소리가 잠시 멈춰 섰다. B, 자? 새벽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 뻣뻣한 몸을 일으켜 세운 B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현관문을 열었다. 지독하게 익숙한, 미소를 매단 낯.

A.

무슨 일이야? 질문은 그대로 목뒤로 삼켜졌다. A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B의 집에 발을 들인다. 어둠 속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근처를 지나가던 중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거든. 자고 있으면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조명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A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샤워실 좀 빌려도 되지? 으, 응... B는 아연한 얼굴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A는 늘 그랬다. 예고 없이 나타나 온 사방을 헤집고 떠나버리는 녀석. B는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창백한 얼굴을 문지른다.

집 안에 유령을 들인 것만 같았다.

-

A가 빗물 대신 수돗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타났을 즈음, B는 핫초코 파우치를 뜯고 있었다. 흐릿한 조리등 아래 전기 포트가 작게 끓는 소리를 냈다.

밤이 늦었는데 눈꺼풀은 무거워질 기색이 없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병원 침대 위에서 보내던 무렵의 잔재였다. 잠들 수 없는 밤, 살금살금 제 병실에 숨어들어와 말을 붙이던 A. 과거의 향수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감각에 머리가 무거웠다. 곧 전기 포트에서 알림음이 울리고, 자신은 A에게 머그잔을 건넬 것이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A는 변덕스럽게 자리를 뜨겠지. 그리고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띵. 전기 포트가 경쾌하게 울렸다.

-

어째 볼 때마다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 같다니까... 반쯤 비어버린 머그잔을 쥔 채 이야기를 늘어놓던 A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B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졸려?

하긴, 늦은 시간에 찾아오긴 했지. 대번에 자리를 뜰 것처럼 구는 A를 보며 B는 새파란 얼굴로 일어섰다. 아니! 졸려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네 얘, 얘기를 듣는 게 즐거워서... 어물거리는 B를 응시하던 A는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니면 됐어. 미소 짓는 낯은 거의 천진하다. B는 침음을 삼켰다. A는 늘 타인을 휘두른다.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거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여태 멎지 않았으나, B는 그가 훌쩍 왔던 것처럼 훌쩍 떠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A. 조,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글쎄. 어떨까...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진다. A는 일말의 희망을 가늠하듯 웃는다.

밤이 늦었잖아. 밖에서는 잘 못 자거든...

덜컥. B의 머그잔이 바닥을 굴렀다. 그렇지만 A, 혼자서는 잠이 안 와... 병실 침대 위로 기울여지던 창백한 얼굴. A는 B가 자신과 같은 때를 회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B는 그때보다 더 불안정했다. 움켜쥔 어깨가 저릿했다.

B는 안다. 이 관계는 A의 적선 같은 흥미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 차라리, 너도 나처럼 엉망진창이 되어서... 입 안에서 굴리기만 했을 뿐 뱉어본 적은 없던 말. 무표정하던 A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런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했어야지. 은연중 흘리는 소유욕과 집착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나, 정립된 문장의 형태로 마주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제멋대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자신을 동등한 위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A는 대번에 B를 걷어찼다. 크게 힘을 실은 것은 아니었으나 키에 비해 마른 체격의 남자는 발길질 한번에 균형을 잃고 책장에 부딫혔다. 왜 넌 매번 상황을 이런 식으로... A의 말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책장 위를 장식하고 있던 수석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다.

퍽, 추락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얼어붙은 두 눈동자가 짧은 순간 엉켜들었다. A로부터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끌어냈다는 저열한 쾌감, 그리고 죽음을 앞둔 순간의 공포. 창백한 청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B가 가까스로 입을 연다. A…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아까처럼 내뱉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B의 입에서 추가로 어떤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

...B?

빗소리는 멎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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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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