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
개인작
서걱. 무딘 검날이 교도의 목 언저리를 파고들었다. 숫제 동물을 해부하듯 휘둘러진 칼날은 삽시간에 살점을 가르고 핏물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비명 하나 없이 스러진 교도의 뒤로 기형검을 내던진 청명은 그대로 시산屍山에 주저앉았다. 주위에 마른땅을 찾아보기가 힘들만큼의 난전이었다.
...몇이나 살아남았지? 핏물을 담뿍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자가 셋, 생사 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자가 둘... 전투가 끝난 시점까지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던 청명은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운기조식을 준비했다. 전장에는 휴식이 없었다. 적군이 몰려오면 싸우고, 적군이 몰려오지 않으면 싸우지 않을 뿐. 청명은 운기조식 중의 적습으로 주화입마에 빠져들었던 강호인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세상 모든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아무리 명문 정파의 무학을 익히고 강호 일절의 영약을 취해온 이들이라 한들 갑작스런 심마心魔에 당해낼 재간은 없던 모양이다. 잡생각을 비우고 가부좌를 틀자 이리저리 뒤틀린 기혈을 따라 정순한 내력이 휘돌았다.
심법을 수련하고 부동不動의 마음가짐을 익힌다. 이를 통해 체내에 기氣를 모으니 이곳을 단전이라 한다.
강호인에게 있어 내력이란 곧 두번째의 피와 같다. 결국 내력 역시 혈류를 타고 흐르는 무형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릴 수 있는 피의 양에 한계가 있듯, 소모되는 내력의 양에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청명은 진탕이 되었을 내부를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흘릴 피가 부족하다면 골수를 뽑고, 골수마저 바닥을 보인다면 뇌수를 뽑아낸다.
설령 십만대산에서 살아 돌아간다 한들 자신은 더 이상 화산의 검수로서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이 자명했다.
하하, 바싹 마른 조소가 흘렀다.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나. 내 화산은 모두 여기에 있는데.
짧은 순간 감긴 눈 안쪽 그리운 화산의 정경이 떠올랐다. 청명은 이미 계절감을 잊은지 오래인 전장에서 애달픈 매화향을 맡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채 개화하기도 전의 꽃봉오리가 군홧발에 짓밟히며 토해내는 마지막 향기였다. 쿨럭, 밭은 기침과 함께 급히 운기조식을 마무리한 청명은 서둘러 눈을 부릅떴다. 흐드러진 매화는 오간데없이 여전히 십만대산이었다.
전쟁의 열기는 시산屍山이 그 높이를 더해감과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맞대는 검에는 선명하던 적의 대신 대상 없는 허망함만이 공명했고 내딛는 걸음에는 결의 대신 오기가 덧칠되었다. 청명은 손을 뻗어 시체 틈바구니를 뒤졌다. 반쯤 녹아 흐물거리는 살점 사이로 단단한 병장기의 감촉이 닿아왔다. 반으로 부러진 매화검이었다.
초점 없는 눈이 선명하게 음각된 매화를 훑었다. 그가, 그의 사형제가 일평생을 함께한 검이었다. 시체 틈을 조금만 더 뒤져본다면 수십 자루의 매화검을 찾을 수 있을테고, 십만대산 전체를 뒤진다면 수백 자루의 매화검을 찾을 수 있을 테다. 장문사형, 정녕 후회치 않으시겠습니까? 청명은 시산屍山 한자락에 파묻혀 있을 자신의 장문掌紋을 향해 물었다. 평생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이었다.
내려가면 제자를 들여야겠다. 더는 휘두를 수 없을 검을 대신해 내 모든걸 가르쳐야지. 막연한 다짐을 반복하며 부러진 검신을 놓아버린 청명은 또다른 쇳조각을 집어들었다.
한때 사형제였던 이들의 주검을 딛고 선 검존은 끝내 휘청이는 걸음으로 전장을 향했다.
애끓는 만가輓歌를 바람결에 흘려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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