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루퍼

[로이루퍼] 7 days

네 죽음은 내 세계의 종말과 같아. 나 또한 죽을까, 너와 함께.

하고프 2차 by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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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calisse : 세계의 종말

calopasies : 카로파시에스

* * *

1일, 아무런 이상이 없다.

2일, 고열에 시달리며 반응과 움직임이 조금 느려진다.

3일, 피를 토한다.

4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5일, 주변에 대한 반응을 거의 할 수 없게 되며 움직임이 많이 느려진다. 힘이 없어진다.

6일,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된다.

7일, 숨이 멎는다.

Calopasies [카로파시에스]

: 이 병에 걸린 날부터 7일째 되는 날에 고통 없이 죽게 된다.


[1일]

​그런 날이 있다. 문제될 것 하나 없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 그런 날이.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이 납득 되지 않아 대충 스트레스의 탓으로 돌리며 병원에 다녀왔다. 한동안 해야할 일이 많아 아플 때 제대로 치료 받지 못했으니까, 모처럼 여유로운 오늘 빠르게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병에 걸렸다고, 7일 후에 반드시 죽게 되어 치료법은 없는 그런 병에, 내가 걸렸다고. 첫 날에 바로 알아채는 사람이 없는데 오늘 오셔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헛웃음이 나왔다. 기껏 모든 일이 정리 되었는데, 이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는데.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나, 생각하다가 복잡한 감정이 늘어나 눈을 찡그렸다.

로이드 잉그램의 계획은 일찍이 발각되어 그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체포된 직후 사형일까 생각했지만 로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고위층은 그의 죽음을 원치 않았고, 그 탓에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내게 그가 맡겨졌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혹여 그가 다른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까 감시하라는 의미에서. 물론 여기에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는 검사를 받고 있을 터였다.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장치를 통해,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겠지. 위험 인물로 분리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진짜.”

억울하다 해야 할지, 서럽다 해야 할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 오는 것도 못 보고, 꽃 피는 것도 못 보고. 볼 수 있는 게 무얼까. 고작 7일 동안 나는 뭘 해야 하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았다. 곧 로이드가 들어올지도 모르니 진정해야 했다.

진정해야 하는데.

입술을 꾹 깨물며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바지에 물방울 자국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로이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나 왔다.”

“…오셨어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면서 방 안에서 소리 높여 대답했다. 지금 보면 울었다는 것을 들킬 게 뻔하니, 조금 더 방에 있을 생각이었다. 집에 잘 돌아왔다고 환영해 줄 만큼 좋은 사이도 아니었으니. 물론, 로이드가 갑자기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문앞까지 달려온 로이드는 노크 한 번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내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아 시선을 맞춰왔다.

“너… 울어? 울었나? 무슨 일인데. …누가 그랬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으니까요.​”

“…….​”

로이드가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쳐다 봤다. 그래도 뭐 어쩌 겠는가. 나는 말할 생각이 없는데. 내 얼굴을 붙잡고 있는 로이드의 손을 아프지 않게 쳐내며 시선을 돌렸다.

“오늘 저녁은 별로 생각이 없네요. 혼자 드실 수 있으시죠?​”

얼굴을 마주보고, 함께 있을 자신이 없어서.

온갖 원망들이 기어코 당신에게로 쏟아질까봐.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수십 번을 연습했던 일이었으니. 언젠가, 감정이 버거워질 때가 생길까봐. 그걸 차마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서 홀로 거울을 보며 연습했었다.

“…알았다.​”

몸을 좀 챙기도록 해, 라고 말한 로이드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차분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와 함께 웃고 있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계획이 실행되지는 않았음에도 여전히 증오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촘촘하게도 계획했다는 걸 보면, 정말 그런 일을 실행 했겠지. 잡히는 그 순간에도 미친 듯이 웃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조용하게 행동한다고 한들, 만약 속으로는 다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면? 그리하여 이번에는 막지 못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어야 하는가?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 것만 같아 곧바로 힘을 풀고는 생각을 멈췄다. 숨을 깊게 내쉬며 진정하고는 옷장을 열어 가벼운 옷을 꺼냈다. 이 상태로 오늘 하루 몇 시간을 더 버텨봤자 그리 의미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어 일찍 잠을 자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내일, 상태가… 안 좋아진다고 했나.

“죽기 전 한 번 놀아볼 시간도 없다니 너무하지.”

부러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며 욕실에 들어갔다. 찬 물, 아니지 그래도 따뜻한 물로 샤워 하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꽤 행복했던 순간들만 떠올리려 노력하며 상의를 반 쯤 벗었을 때 쇄골 근처에 꽃 모양의 붉은색 문양이 보였다. 생긴 것이 꼭 장미꽃을 닮은 꽃. 다른 점이라면 꽃잎이 잘 도드라진다는 것? 꽃잎이 일곱 개였는데 그 중 하나는 온전하게 하나가 아니라 거의 다 바스라지는 모습이었다. 아.

아, 이게. 내게 남은 시간인거야?

“무슨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니고….”

잔인하지 않은 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더 잔인하게 느껴져서. 문양을 뜯어낼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남은 날들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며 옅은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불안정했다. 처한 상황이 지독하게도 잔인한 탓에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잘 가리고 다녀야겠네.”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는 고작 그 뿐이었다.


로이드는 꽤 놀란 상태였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뛰어갔다. 루퍼스가 쉽게 울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고, 여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반응이 차갑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었다. 어느 누가 제 뒤통수를 때리고 ‘일반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사회에서 결코 ‘정상적인’에 포함될 수 없는 일을 행하려 했는데 다정하게 대해주겠는가. 그러니 그런 행동이야 상관 없었다. 별로 크게 기분이 상하거나 한 것도 없었다.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울었나, 에 대한 것이지.

눈가가 많이 붉은 것을 보니 가벼운 일은 아닌 듯 한데.

로이드는 루퍼스가 자신에게 보였던 반응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말을 툭 던졌다.

“경계가 조금 더 느슨해도 좋았을 것을.”

그의 어린 제자는 벽을 단단히도 세워 두고 있었다. 증오심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시 상처 받을 것을 대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로이드의 접근을 원치 않아 했다.

이 상태면 물어봤자 쉽게 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곤란하군.”

로이드는 루퍼스에게 꽤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 중 첫 번째 이유는 옛 제자라는 것. 물론 진심으로 소중한 제자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꽤 뛰어난 인재였기에 나름 아끼었던 제자.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아직은 루퍼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을 맡아줄 루퍼스 마이크로프트가 아직까지는 멀쩡하게 존재해야 했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다면 하루 빨리 파악해야 하는데….”

로이드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누가 그에게 해를 끼치려 한 것이라면 뒤에서 직접 해결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많은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그거 하나 못할 리가 없으니. 루퍼스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에 해당한다면 무척 좋은 일이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 하지?

로이드의 표정이 지워졌다. 일정한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 또한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게 무감정한 얼굴 그대로 몇 초를 가만히 있다가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헛된 생각이다.

그 선에서 끝나는 일이어야만 한다.


[2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개운하게 일어난 적은 없지만, 이 정도의 심한 두통과 함께 일어난 적도 없는지라 루퍼스는 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일으키려고 했다. 몸이 무겁지만 않았어도, 시야가 핑 돌지만 않았어도. 팔에 힘이 빠지면서 자세가 무너지고, 그 때문에 두통이 더 심해져 루퍼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병 때문인가….”

7일 후 죽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루퍼스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 뒷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애초에 희귀병인지라 밝혀진 것도 별로 없었고. 루퍼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제 숨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아 손을 들어 올려 제 이마를 한 번 짚었다. 열이 꽤 높았다.

“움직일 수는 있으려나….”

3초의 짧은 생각을 마친 후 루퍼스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걷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루퍼스가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흘끗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루퍼스, 자고 있나?”

“…아뇨. 몸이 안 좋아서 누워 있는 것뿐입니다.”

조금 늦게 대답이 나왔다. 루퍼스는 무언가 거슬리는 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늦었다. 곧바로 나갔어야 할 대답이 그러질 못했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과, 그에 따라 나가는 반응이─

“아프다고? 어디가.”

생각이 끊겼다. 또 갑작스레 들어온 로이드 때문이었다. 시선을 맞췄다. 로이드는 루퍼스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루퍼스는 로이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루퍼스는 눈을 감으며 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별로… 신경 쓰실 일은 아닐텐데요.”

“아프다고 했잖나.”

“…네. 제가 아픈 거지 당신이 아픈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디가 아픈 지 말해라.”

“…제가 왜요.”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이드는 제 하고 싶은 말만 했을 뿐이고, 루퍼스는 그런 그를 상대하기에 상태가 좋지 못했다.

“가세요.”

“…루퍼스.”

삐딱한 자세로 루퍼스를 내려다 보던 로이드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루퍼스는 그와 대화한 것 때문에 더 피곤해진 듯 해서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해할 생각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생각도 없고. 루퍼스는 로이드와 친근했던 관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때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로이드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제 목표가 확고한 로이드는 몇 번이고 그런 계획을 행할테니.

상처는 한 번이면 족했다.


로이드는 문 앞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었다. 어제는 울었고, 오늘은 아프다. 대충 본 것뿐이지만 호흡이 고르지 않았고 목소리가 떨렸다. 고통을 참는 것인지 인상이 조금 찡그려 있던 것은 물론이며, 돌아오는 반응이 느렸다.

감기인가, 라며 짧은 생각을 했지만 로이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감기였다면 루퍼스는 분명 감기에 걸린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라고 했을 것이다. 아프다, 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인 로이드는 제 목을 갑갑하게 죄고 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루퍼스가 보인 이상 행동들에 대한 답이 명확하질 못했다.

“변수는 싫다만… 나를 어디까지 도발할 셈인지.”

로이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리 옛 제자님은 발칙하기도 하시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지.”

계획을 수정하여 루퍼스를 둘러싼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겠다고, 로이드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꼴을 더 보다가는, 더 이상은 거슬려서 못 참을 것 같으니.

발걸음이 진득하게 떨어졌다.


잠깐 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잠깐이 아니라 많이였다. 쨍하게 떠 있던 해는 슬슬 사라질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그 탓에 불을 꺼둔 방 안은 꽤 어두웠다. 아까보다는 상태가 조금 회복된 듯 하여 루퍼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이 조용했다. 오늘 로이드의 특별한 일정은 없던 걸로 아는데, 문을 열고 나가니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나갔나?”

걸음이 느렸다. 질질 끌고 다니는지 모를만큼 땅에 붙여서 미끄러지 듯 걸어가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루퍼스는 제 다리를 한 번 내려보다가 머리가 다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천천히 제 머리를 들어올렸다. 한참동안 정면을 응시하다가 아까 말을 할 때 목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엌으로 힘없이 움직였다.

“…힘들어….”

컵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들다니. 루퍼스는 물컵을 들려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이 상태로 입까지 들어 올렸다가는 놓칠 것이 분명했다. 목을 이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과 유리 조각이 마주하는 것 중 어느 게 나을까 생각하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인지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연한 걸 왜 생각하고 있는 거지…?

루퍼스의 표정이 굳었다. 붉어 있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컵을 쥐고 있던 손이 떨리고 입술을 달싹 거렸다. 만일 로이드가 그때 돌아오지 않았다면 루퍼스는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서서히 제게 다가오는 죽음이 선명한 탓에.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물, 을 마시려고….”

“마시려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녜요.”

“물을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아요.”

루퍼스는 시선을 내렸다. 눈을 마주친다면 로이드는 제 이상함을 눈치챌 게 분명했다. 해서 루퍼스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했다.

“…마셔라.”

로이드가 루퍼스를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한 손에는 물컵을 들고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루퍼스는 그것을 받을까 머뭇거리다가 물을 마시는 도중에 컵을 떨어뜨릴 것이 걱정되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뇨, 물은─”

“마시기 힘들다면 먹여주지.”

나중에 마셔도 되니까요, 라는 뒷말이 잘렸다. 루퍼스는 제가 들은 것을 의심하는 지 멀뚱멀뚱 로이드를 쳐다봤다. 아파서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

“제대로 들은 게 맞다. 먹여주겠다고.”

루퍼스가 대답하지 않고 있자, 로이드는 짧게 숨을 내쉬며 루퍼스의 몸을 자신과 마주 보도록 돌렸다.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는대신 루퍼스의 머리 뒤 쪽으로 손을 옮겨 받쳤다. 그리고는 컵을 루퍼스의 입으로 가져가 적당하게 기울여 조금씩 물을 흘려 보냈다.

루퍼스는 로이드가 그런 행동을 하는 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대답도, 거부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로이드를 받아 들였다는 건 아니었다. 현실을 곧바로 파악할 수가 없어서,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퍼스는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생각하다가 일단은 보호자 신분이기에 잘 해주는 것 뿐이라고, 그런 결론을 내렸다. 어쨌거나 로이드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루퍼스의 동의가 필요 했으므로.

“되었나?”

“…감사, 합니다.”

로이드의 커다란 손이 내려옴과 동시에 감사 인사를 건넨 루퍼스는 급하게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

분노이자 서러움이었고 고통이자 추억이었다. 그가 제게 잘해주었던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루퍼스는 문에 기대어 주저 앉았다. 급한 움직임 탓에 심해지는 두통도, 가쁜 숨소리도 신경 쓸 수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괴로움으로 점철된 소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에,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이 좋은 사제지간이었을 때, 그때를 마주한 것만 같아서. 어쩌면 그때보다 더 다정한 것 같아서. 저것 또한 전부 거짓이겠지, 거짓이겠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루퍼스는 손으로 펼쳐 제 입을 막았다.

“윽…….”

언제나 그의 스승은 지독하게도 연기를 잘했던 탓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서.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로이드는 방으로 돌아가는 루퍼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찬가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책상 앞에 앉으며 거슬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평소와 다르게 심기가 뒤틀린 로이드는 다리를 꼰 채 발 한 쪽을 까딱거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루퍼스의 상태가 나쁘다. 그것도 매우, 많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로이드는 집에 돌아 오자마자 제 앞에서 떨고 있는 루퍼스를 마주했다. 자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픔 때문에, 제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라서.

물컵이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건, 그 정도의 무게도 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 그 정도야 당연하게도 알 수 있었다. 목이 많이 잠겼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꼭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굳어 있는 표정은 이 상황이 단순히 감기로 치부될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로이드는 물컵을 들어올린 후 루퍼스의 입에 가져다주며 그를 살폈다. 반항이 없다, 거부 하겠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평소 루퍼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와 자신이 두려워진 것은 아닐테고.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나?

그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서,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다면 루퍼스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의문인 건 그렇게까지 오래 놀랄 일인가, 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운 말을 한 것은 맞지만 그 정도의 반응이 나올만큼은 아니었다. 로이드의 시선이 음울하게 가라 앉았다. 아침에도 묘하게 느렸던 반응, 그래, 느렸다. 아침에도, 지금도, 무언가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이 느렸다.

영민했던 그의 옛 제자의 모습과는 달랐다.

밖에 나갔음에도 루퍼스에 대한 그 무엇도 얻은 것이 없어 로이드는 조금 초조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의 계획에 가장 중요한 루퍼스가, 꽤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는 안 된다. 책상을 두드리던 소리가 빨라졌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이드는 다시 한 번 루퍼스를 찾아가고자 몸을 일으켰다. 한 번만 더 확인하면 될 일이었으니.

그래서 노크를 하려 했다. 꽤 다급한 걸음으로 도착하여, 노크를 하려 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울음 소리만 아니었다면. 문 앞에 루퍼스가 있었다. 홀로 방 안에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울고 있었다. 로이드는 문에 기댄 채 주저 앉아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전부 잊었다. 계획이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루퍼스의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루퍼스는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다리가 휘청 거렸지만 곧바로 문에 기댄 덕에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눈물 자국이 가득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욕실에 들어간 루퍼스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봤다. 옷을 내려 쇄골을 확인하니 꽃잎 하나가 또 사라지고 있었다.

“하.”

제 삶의 하루 또한 끝나가고 있었다.


[3일]

루퍼스는 어제보다는 오늘의 상태가 더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열이 떨어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자유로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예전과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제에 비해서는 괜찮으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만에 이렇게 괜찮아 질 수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생각도 함께 온 탓에 머리를 저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몸을 일으킨 루퍼스는 커튼이 걷어진 창문 밖을 쳐다봤다.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볼 수 있는 건 눈에 담아두는 게 좋을 듯 했다.

“…오늘은, 나가볼까.”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땅으로 떨어지고 루퍼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커튼을 내렸다. 언젠가 읽었던 책이 떠올라서. 그 마지막 잎새를 본 것만 같은 착각에.

내 꽃잎도 누군가 그려주면 좋을텐데.

“…….”

루퍼스는 방문을 열였다. 멍청히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에는 아까운 것이 많았다.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나가려던 찰나에, 루퍼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쾅, 소리를 나게 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소리가 나긴 났으니 상대방을 깨운 것 같았다.

“루퍼스, 깼나?”

문 밖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막 잠에서 깬 듯한 정신 없는 목소리. 루퍼스는 문고리를 잡아 상대방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은 채로 대답했다.

“…네.”

“문은 왜 다시 닫았지?”

“놀라서요.”

당신이 거기에 있을 줄 몰라서.

루퍼스는 말을 삼키고 로이드의 대답이 오길 기다렸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그가 왜 그곳에 잠들어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있어 왔다가 쓰러졌나? 아니, 그럴 리 없다. 저 사람이 발을 헛디뎌 머리에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쓰러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저 곳이 잠이 잘 오는 곳인가? 그것도 그럴 리가 없다. 저 바닥이 뭐가 좋다고…?

“…되었다. 가보마.”

“네.”

로이드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지만 루퍼스는 차라리 그것이 다행이라 느꼈다. 굳이 이해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의 거짓말을 듣는 것은 늘 지치는 일이었기에 별 다른 말 없이 로이드의 발걸음이 들리기를 바랐다. 어서 저 멀리로 걸어가 주기를, 그리하여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지 않기를.

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이드가 떠나감을 인지한 루퍼스는 한숨을 내쉬려다가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기침 소리와 함께 뱉어졌고, 입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를 보며 루퍼스는 모든 사고를 멈췄다.

붉다. 탁한 붉은색인 그것은 죽음을 다시 한 번 연상시켰다. 손에 묻은 것, 입에서 뱉어진 것. 비릿한 향과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맛.

“피…….”

루퍼스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여전히 붉었다. 여전히 비릿한 향이 방 안에 남아 그의 주변을 감쌌다. 루퍼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여태 울어서 다 말라버린 것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시야는 뚜렷했고, 그래서 붉은색은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잘 보이니까, 그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이게, 나오면 안 되는 건데. 내 손에 묻을 게 아니라, 내 입으로 나올 게 아니라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왜.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어쩐지 이상했다고. 어제 그렇게 아팠는데 오늘이라고 멀쩡할리가 없다고. 죽어가는데 괜찮은 상태라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루퍼스.”

아까 분명히 돌아가지 않았나. 로이드의 목소리가 루퍼스를 현실로 불러 들이고, 루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벅찬데 로이드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피, 냄새가 났다.”

전생에 개였던 것인지 후각이 뛰어나구나, 상황에 맞지 않는 평온한 감상을 한 루퍼스가 이번에는 대답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가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며칠 전부터 조금 아팠으니까요.”

“조금이 아닌 것 같다만.”

피를 봤기 때문인지 몽롱한 상태인 루퍼스가 말을 내뱉었다. 보통의 정신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고, 그것을 알아챌 정도는 되었으니.

“…그게 중요하세요?”

“그럼, 무엇이 중요해야 하지?”

“제가 죽는 걸 바라시지 않나요?”

“…….”

“제가 죽으면, 당신이 자유로워질텐데.”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루퍼스는 아마 로이드가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잠시 놀란 것이라고 추측했다. 몇 초 뒤, 적절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이 들렸다.

“…문 좀 열고 싶은데.”

“얼굴을 굳이 마주 볼 필요가 있을까요?”

“네 상태만. 네 상태만 보고 가겠다.”

“괜찮아요.”

“…….”

“굳이 당신을 볼 필요는 없을만큼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발소리가 들려 루퍼스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이상하다. 단순히 이상하다는 말로 치부할 수 없을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자신에게 바라는 게 남아 예전처럼 챙겨주려 하는 것인지, 루퍼스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

루퍼스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찝찝한 피를 씻어 내고 싶었다. 이제 고작 3일인데,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죽음을 느끼고 싶진 않기도 했다.

바람을 쐬자. 밖에 나가면 괜찮아, 괜찮을 거야.

피가 가득 묻은 손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핏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닦는 동안, 떨리는 손은 좀처럼 진정 되지를 못했다. 아직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피가 묻은 제 얼굴을 마주할까, 거울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루퍼스는 입가를 닦았다. 입 안을 헹구며 마주했던 피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냈다.

아직도 코 끝에서 피의 향이 맴돌았다.


잠을 자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잘 생각같은 건 정말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루퍼스가 그렇게 오랫동안 울 것이라고는 로이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급하게 문을 닫은 루퍼스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고, 그가 저를 꺼려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 큰 대화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경계심이 더 심해진 듯 해서 로이드는 곤란해졌다. 단순히 조금 아프다는 말로 넘어갈 상태가 아니건만 제게 말하지 않는 루퍼스가 괘씸하기도 했고, 약간의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한 행동이었다.

루퍼스에게 로이드라는 존재를 더 선명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행동, 고작 그 정도 의미. 그렇게 더 저를 생각하는 시간을 늘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결국 과거를 떠올리며 옛정을 다시 만들어내려는 얄팍한 계획에 불과한 것.

발걸음을 돌린 로이드는 루퍼스가 가진 증오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중간에 피 냄새만 나지 않았다면. 결코 맡아지지 말아야 할 향이, 제 곁으로 넘어오지만 않았다면.

로이드는 걸음을 돌려 루퍼스의 방으로 뛰어 갔다. 제겐 익숙하게 느껴지는 향이, 그 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서. 그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루퍼스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제 할 말을 다시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왔다. 여태껏 계속 들어왔던 조금 아프다는 말이었다. 로이드는 입술을 짓이겼다. 루퍼스의 목소리가 문 때문에 흐릿하게 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멍한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에 미묘한 두려움이 담겨 있어 로이드는 루퍼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그게 중요하세요?”

사라질 것 같은 그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로이드는 문 손잡이를 억지로 돌렸을 것이다. 인내심을 발휘한 로이드는 여전히 루퍼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낯선 존재를 마주한 것 같아서 로이드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저 방 안에 있는 자는 내가 알고 있던 루퍼스가 맞는가?

“그럼, 무엇이 중요하지?”

“제가 죽는 걸 바라시지 않나요?”

심장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심장이 저 아래로, 계속해서 아래로, 그리하여 결국 저 나락에 처박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이드는 문고리를 꽉 잡았다. 저 말을 들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까. 루퍼스가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 했나?

아니면, 내가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진심이라서? 죽이고 싶었나. 죽이면, 너를 기어코 죽이면, 아니, 아니다. 아니야.

“…….”

“제가 죽으면, 당신이 자유로워질텐데.”

네가 죽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

수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머물다 사라졌다. 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 할 말이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인지 구분이 되질 않아서. 어찌 되었든 루퍼스의 얼굴을 봐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문을 열어달라는 말을 했다. 당연하게도 거절 당했다. 제 약점을 드러내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오히려 이것이 루퍼스가 보여야 하는 마땅한 반응이라 생각하면서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여기서 더 매달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알았다고 답했다. 애초에 그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를 신경 쓰는 것은 그가 아니라 루퍼스여야 했다. 그것이 로이드의 계획이었으니. 로이드는 제 계획이 조금 더 어긋난 것을 알았다. 계획을 수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게 바뀐 것도 알았다.

“…젠장.”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간 적은 오랜만이군.

로이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빌어먹게도 사랑스러운 제자님께서, 참 참신한 방법으로 저를 엿 먹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날이 좋았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햇빛은 적당히 강했다. 루퍼스는 날씨에 맞게 얇은 겉옷을 하나 입고 길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가라 앉았던 기분이 서서히 다시 좋아졌다.

“엄마, 나 저거 먹고 싶어!”

“우리 아가가 먹고 싶다는데 사줘야지.”

“있지, 아빠. 나 오늘 친구 또 생겼다!”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격이 좋을까. 이번 친구랑도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따스해지는 기분에 루퍼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고는 천천히 시야를 옮겼다. 또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아니라니까요?”

“옆에서도 봐. 그럼 맞을거야.”

“아, 제발요. 진짜 저보고 이걸 혼자 하라고요?”

“난 너를 믿으니까. 우리 대단한 후배님은 할 수 있어!”

“영혼이 없으시네요. 도와주시죠.”

“거절할게.”

“너무 단호하신 거 아녜요?”

“사람이 단호한 면도 있어야지. 그게 매력이란다.”

아.

루퍼스는 걸음을 멈췄다.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서로 투닥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즐거워보였다. 루퍼스는 그것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걸음을 멈춘 것에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박사님, 박사님, 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과거가 생각이 나서. 혹시 나도 저 사람처럼 저렇게 웃고 있었을까, 하고. 루퍼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루퍼스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당신들은 그 관계의 끝에서도 여전히 웃을 수 있을까?

그들을 따라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바람에 루퍼스는 곧바로 사람이 없는 골목길을 찾아 들어갔다.

목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함께 왔다. 한 번 겪은 일이라서 그런지 아까처럼 기겁할 수준은 아니라서 루퍼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피를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벽에 기대어 숨을 천천히 내쉰 루퍼스는 인적이 드문 길로 다녀야 겠다고 생각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이 피를 토한다면 주변에서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제 아픔을 여기저기에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로이드가 있을 것 같아서 꺼려지니, 저 언덕에 올라가 시간이나 보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해질녘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황혼빛의 붉은 따스함을 보면, 조금은 더 담담하게 모든 걸 받아 들일 수 있겠지.

루퍼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언뜻 자주빛을 본 것 같았다. 그에게 자주빛은 언제나 로이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각인된 것이기에 아무리 잊으려 해도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라 루퍼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감각이, 이런 기분이.

끔찍하게도 싫어서.


로이드는 발소리를 죽였다. 밖에 나와 기분이 좋은건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루퍼스를 보았다. 언제였더라. 저 얼굴이 익숙하다 느껴지던 날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선 탓에 로이드는 시선을 좀처럼 돌리지 못했다. 제 앞에서도 저런 얼굴로 웃던 날이 있었다. 저것보다 더 환하게 웃던 날이 있었다. 이젠 모두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숨을 짧게 내쉰 로이드는 계속해서 루퍼스를 따라갔다. 루퍼스의 걸음이 멈췄다. 무언가를 겹쳐 보듯이 시선이 향하는 것은 현재가 아니었다. 로이드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어느 선배와 후배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로 정착했다.

아, 너는.

과거의 나를 보고 있구나.

과거의 너를 마주했구나.

로이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가 아닌 타인을 통해 그 과거와 만난 것은 썩 기쁘지 않은 일이나 어찌 되었든 루퍼스를 흔들 수만 있다면 뭐든 좋은 일이었다.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루퍼스가 갑자기 제 입을 막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그의 방에서 피 냄새가 났던 게 떠올랐다.

“─젠장.”

곧바로 루퍼스를 따라 달렸다. 인적 드문 골목길로 향한 루퍼스가 피를 토하는 것도, 가까이에서 아주 똑똑히 보았다. 익숙한 듯 피를 닦는 루퍼스의 모습을 보다가 로이드는 제 심장을 꾹 눌렀다. 아팠다. 무언가에 찔리는 듯이 아팠다.

설마 하는 의심은 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루퍼스가 움직일 때까지 로이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많이 아프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원래 희멀건한 피부였으니 창백한 것도 그냥 넘겨도 될 거라 생각했다. 단지 심한 독감에 걸린 것뿐이라고 믿었다. 피 냄새가 났던 것은 고작, 고작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일뿐이라고. 자신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아닐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믿고 싶은 거였나.

“…루퍼스.”

이번에는 물어야 했다. 모른 척 하지 말고, 물어봐야 했다. 로이드는 급하게 루퍼스가 떠나간 흔적을 따라 달렸다.


느릿하게 걸어서 왔다고 생각 했지만, 해는 아직도 잘 떠 있었다. 곧 질 것 같긴 하지만 그때까지 뭘 해야 할까. 푸른 언덕 위에 올라선 루퍼스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이 하늘을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서럽게 느껴져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루퍼스는 꾹꾹 풍경을 제 눈에 눌러 담았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쯤이었다. 답지 않게 초조함을 담은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루퍼스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를 보는 것보다는 지금 이 모든 풍경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루퍼스.”

“…자주빛을 언뜻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

“따라오셨나요, 계속?”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따라왔다면 피를 토한 모습도 분명 봤으리라.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저런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었다. 루퍼스는 한참을 지나도 대답이 없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많이, 아픈 것이냐?”

“…….”

“며칠 전부터,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피를, 토하는 건 처음 봐서. 네가, 피를 토하길래.”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로이드를 보며 루퍼스는 다시 고개를 돌릴까, 그런 생각을 했다. 황혼의 붉은빛이 땅에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로이드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루퍼스는 그 모습이 기꺼워 웃음을 지었다.

“병에 걸렸대요.”

“무슨, 병인데.”

“병에 걸린 날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죽는다고 했어요.”

“…뭐?”

“치료법도 없고 그래서, 그냥 죽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왜… 왜 지금─,”

“딱히, 그런 걸 전부 털어놓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해가 저물고 있다. 제 삶의 하루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루퍼스는 그저 웃고 싶었다.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저무는 해를 등지고 붉은 빛을 받으며 참 어여쁘게도 웃었다.

“네가, 죽는다고.”

“네.”

“오늘이… 며칠 째지?”

“3일째요.”

허망하게 무너지는 로이드가 어쩌면 웃겼던 걸지도 몰랐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된 게 처음이라서, 그래도 죽기 전에 시원하게 뒤통수 한 번은 때린 것 같아서. 그래서 웃음이 나온 걸지도 몰랐다. 루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걱정 마세요.”

“…뭐를, 뭐를 말하는 것이냐.”

“죽기 전에 다 마무리 할 테니까요.”

“…….”

“당신에 대한 것, 전부.”

루퍼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발을 돌렸다. 할 말을 끝냈으니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늘을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언덕은 푸릇푸릇했으니 그 어떤 것도 선명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서 있는 사람만이 오로지 제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루퍼스는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 있을 사람처럼 희미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드는 그 모습이 싫었다. 그 감정은 명확한 불호였다. 급하게 뛰어온 탓에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루퍼스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따라왔느냐는 루퍼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그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 나면 꼭 저 멀리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대답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루퍼스가 돌아봤다. 로이드는 대답과 동떨어진 말을 내뱉었다. 다만 문장이 완전한 제 형태를 갖추고 나오지는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하다 생각할 정도로 드문드문 끊긴 말들만이 나열될뿐이었다.

해가 저문다. 붉은빛이 루퍼스에게 닿았다. 루퍼스는 웃고 있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슬퍼 보였던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루퍼스는 담담하게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병에 걸렸다고. 7일째 되는 날 자신이 죽을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로이드는 자신이 들은 게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당신을 놀래키려는 장난이었어요, 하고 루퍼스가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루퍼스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오늘로 3일째라는 대답을 들려주면서.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루퍼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병에 걸릴 리가 없잖아. 네가 내 통제를 벗어나면, 안 되는 거잖아.

로이드는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겉으로 새어나올 것 같은 감정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완전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부서지는 감각을 느꼈다.


[4일]

“…아, 아.”

목소리는 괜찮았다. 체온도 적당했고,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한 것도 없었다. 속이 안 좋다거나,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등의 증상도 없었고.

“다행이네.”

루퍼스는 이불을 걷어내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오늘만큼은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만 같아 죽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마지막 자비라도 되는지 이런 날도 있긴 하는구나, 싶어서. 그러나 기쁨 뒤에는 체념도 뒤따라왔다. 이런 식으로 기대해봤자, 매번 실망하게 될 것을 아니까. 루퍼스는 마음을 죽이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물론 너무 급했던 탓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다.

“…어?”

발목을 접질렸다. 발을 삐끗한 탓에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루퍼스는 제 발목을 건드렸다. 이상했다. 약간의 고통쯤은 있어야 하는 게 맞았으니까. 일부러 고통을 참는 편은 아니었고 익숙하다 느낄 정도로 자주 다쳤던 것도 아니니 곧바로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게 나왔다. 루퍼스는 제 발목을 내려다 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

저를 평안히 내버려 둘 자비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를 붙잡고 원망을 쏟아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체념하길 잘했다고 여기는 이 순간이 서럽고도 서러워서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루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치긴 했으니 아프지 않은 발목이니 조심스레 행동하지도 않았다.

작은 행복에 기뻐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실망했잖아.

루퍼스는 제 방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꽃병을 바닥으로 밀었다. 날카로운 소리는 유리가 깨졌음을 알려주었고 은은하게 방 안을 장식하던 꽃은 처참하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꽃병에서 새어 나온 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꽃이 죽어간다. 마치 저의 미래를 보는 듯 했다. 루퍼스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허리를 숙여 유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꽤 신중하게 잡았기에 손이 베이는 일은 없었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루퍼스는 그 작은 조각 하나에만 집중했다. 확인만, 다시 한 번 제대로 확인해 보는거야. 그는 유리 조각을 잡은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루퍼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열고 들어온 로이드는 루퍼스를 붙잡았다. 그대로 제 반대쪽 팔에 내리 꽂으려 했던 것이 막혔다. 루퍼스와 로이드의 시선이 얽혔다. 스승이었던 사람과 제자였던 사람.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그 무엇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사람끼리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초점을 잃었던 눈에 서서히 빛이 들어오고 루퍼스는 높게 들어올린 팔 하나가 로이드에게 잡힌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다급한 표정의 로이드가 시야에 담겼다.

“왜… 여기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메마른 것은 비단 루퍼스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아프게 일그러진 로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붙잡힌 팔에서 떨림이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 두거라.”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저를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지도 못하겠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위로를 가장한 기만도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루퍼스.”

“마지막이잖아요. 당신에겐 그런 자비도 없나요?”

“아니, 나는….”

“아, 당연한 걸 물었네요. 없겠죠. 없으니까 그런 짓을 했겠지.”

루퍼스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같잖은 위선을 보이는 로이드를 마주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면 괜찮다 웃으며 참을만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지쳤는데, 당신은 날 어디까지 무너뜨릴건지.

충동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나락까지 함께 가야 만족하실 건가요?”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제가 당신을 따라 저 아래까지 처박히면 만족하시겠어요?”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잖나, 지금!”

“그러면요?”

“…….”

“어차피 저 죽잖아요. 이제 곧 안 볼 거잖아. 영영 당신 인생에서 사라져 줄 건데, 왜 나를 내버려 두질 않아…?”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눈가가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루퍼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위태로운 미소를 걸치며 루퍼스는 입을 열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못 믿겠어요, 이젠.”

“나는 네가 걱정 돼.”

“당신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아서. 전부 다 안 믿기로 했거든요.”

“네가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보세요, 지금도. 거짓만 말하고 계시잖아요.”

“…루퍼스, 나를 똑바로 봐라.”

“보고 있어요.”

루퍼스는 로이드가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제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에 더 똑바로 마주하려 했다.

“과거를 보고 있는 건 아니고?”

멸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같다고 해야할까. 낯선 길을 헤매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제 소중한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망가트린 사람의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되었든 참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어제보다 더, 더 많이 절망하는 표정.

루퍼스는 처음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꽃에게 시선을 주며 안개처럼 희미하게 말을 내뱉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법이에요.”

“…….”

“당신의 현재도 결국, 그 끔찍한 과거가 만들어낸 것들 중 하나라고요.”

“…….”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받아들이나요? 시작부터가 틀렸는데.”

“…그래, 그렇군. 전부, 내 탓이었나.”

“이제 아셨다니 놀랍네요. …제가 나갈까요? 아니면 당신이 나갈 건가요?”

“너는 여기에 있어. 내가 나가겠다. 다만… 정리를 할 때는, 조심해서 하도록 해라.”

“알아서 할게요.”

로이드는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거리다 방문을 나갔다. 루퍼스는 그 방문을 한참이나 쳐다 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서야 루퍼스는 고개를 돌리며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피해 조심스레 걸었다. 창밖을 쳐다보니 외출하는 로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루퍼스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 앉았다.

“…모른 척… 찌를 걸 그랬나봐.”

그랬다면 상처 하나라도 입힐 수 있었을텐데. 갑작스레 타인의 온기가 전해진 탓에 반사적으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상대가 로이드라는 것을 알자 진심으로 찌르고 싶었지만.

루퍼스는 침대에 털썩 엎드려 이불에 고개를 파묻었다.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작은 유리 조각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발바닥에서 액체가 흘러 나오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아픈 것은 없었다. 느낌으로 알아챘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혈하지 않은 채 루퍼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로이드의 모든 감각은 언제나 루퍼스를 향해 있었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이후로, 거리가 아무리 멀더라도 로이드는 오로지 루퍼스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루퍼스에게 모든 사실을 듣고 난 이후에 로이드는 루퍼스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했다. 루퍼스가 계속 거부하긴 했지만 당사자만 모르면 될 일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로이드는 루퍼스의 방 근처에서 배회했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위인지, 로이드는 제 모습에 종종 환멸을 느꼈다.

작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 루퍼스가 침대에서 떨어진 듯 했다.


「본 글은 나 루퍼스 마이크로프트의 의사를 반영하여 쓰여진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제가 죽은 후에, 저의 모든 재산을 로이드 잉그램에게로 귀속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더 이상 로이드 잉그램이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며, 감시와 구속으로부터 그를 풀어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 루퍼스 마이크로프트」


Epilogue.

로이드는 자유를 얻었다. 또한 루퍼스의 모든 소유물을 얻게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름 모를 이들은 루퍼스 마이크로프트의 요청이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제대로 된 정보는 없지만 어쨌거나 루퍼스가 그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걸 알게 된 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참하고도 비참한 마음이었다.

어리석은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몇 번이고 깨달았다.

저택의 구조가 바뀌었다. 본래 사용하던 로이드의 방이 사라지고, 루퍼스의 방 옆 쪽에 새로운 방을 만들어 로이드는 그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루퍼스의 방은 그가 생을 마쳤던 그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로이드는 루퍼스의 물건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종종 청소를 하기 위해 로이드는 루퍼스의 방에 들어가긴 하지만 그리 자주 들어가지는 않았다. 루퍼스, 라고 부른다면 아직도 그가 답해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해서 어느 날부터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루퍼스의 죽음을 깨닫는 순간을 느낄 때마다 로이드는 숨이 막혔다. 몇 번을 시도해도 괜찮아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간혹 루퍼스의 방에 들어갈 때면, 로이드는 한참을 방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건들면 미약하게 남은 루퍼스의 흔적이 사라질까봐, 그것이 싫어서. 루퍼스의 방은 온전히 루퍼스의 것이면 했다. 더 이상은 루퍼스를 만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남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루퍼스의 묘가 만들어졌다. 시신의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약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것은 루퍼스가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만두었다. 원망과 증오는 여태껏 받은 것으로도 충분했다.

로이드가 루퍼스의 묘를 찾을 때마다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이것 또한 루퍼스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로이드는 항상 그 꽃잎을 가져가 유리병에 보관했다. 꽃잎은 어째서인지 마르지도, 바스라지지도 않았다.

가끔 로이드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그 꽃잎의 향을 맡았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의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이드는 오늘도 루퍼스의 묘를 찾았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날이 좋아서, 루퍼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게 다였다. 그런 별 것 아닌 이유로 로이드는 매번 루퍼스의 묘를 찾았다.

붉은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로이드는 루퍼스의 묘 앞에서 울지 않았다.

로이드 잉그램의 눈물은 축복이 될 수 없으니,

죽는 날까지 결코 울지 않을 것이다.

울지 않을 것이다.

[完]


Secret Story

: 루퍼스가 죽기 전, 로이드가 편지를 받기 전에 그들이 모르는 이야기

- 루퍼스 마이크로프트가 편지 두 장을 보내왔더군.

- 하나는 로이드 잉그램에게, 하나는 저희에게 보내는 것이군요.

- 일단 우리 것부터 펼쳐보지.

- …요구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 말해봐라.

- 먼저, 루퍼스 마이크로프트의 재산을 모두 로이드 잉그램에게 넘겨줄 것. 그리고….

- 또 있나?

- 예. 로이드 잉그램에게는 자유를 주는 척 하며, 멀리서 감시만 할 것, 입니다. …로이드 잉그램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유를 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 호오…. 그렇군. 마땅히 붙일 사람도 없고 말이야. 우리 떠나가신 별이 요청하는 것인데 그 정도는 들어 드려야지.

- 하하, 인재를 별에 비유하는 건 여전하십니다.

- 찬란하지 않은가. 아, 그래…. 이번에 그들에게 붙여둔 감시자가 두 명 있지 않았나?

- 네, 있습니다.

- 그들 좀 불러 오게.

- 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 로이드 잉그램의 약점을 알고 있나?

- …약점, 말입니까?

- 더 이상 루퍼스 마이크로프트라는 브레이크가 없으니 말이다. 뭐라도 좋으니 말해보게.

- …죄송합니다만, 로이드 잉그램의 약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루퍼스 마이크로프트를 제외한 타인과의 소통도 본 적 없으며, 외출할 때도 몇 걸음 돌아다니는 것이 다 입니다.

-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구만. 됐네, 그리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 이만 물러가도 좋다.

- 감사합니다.

- …선배님, 왜 말 안 하셨어요?

- 뭐가 말이니.

- 로이드 잉그램의 약점이요. 저번에 루퍼스 마이크로프트, 라고 하셨잖아요. 사랑, 하는 것 같다고.

- 그래, 그랬지. 길거리에서 봤을 때 그 표정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니까.

- 네, 아니, 그러니까요. 왜 말 안 하셨어요?

- 우리 대단한 후배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내가 그걸 말하면, 저쪽에서 뭘 할 것 같니?

- ……글쎄요?

- 루퍼스 마이크로프트와 닮은 사람들을 계속 보내겠지. 아니면 뭐, 루퍼스 마이크로프트와 비슷하게 만들어낸 사람을 보내던가.

- 아.

- …고인에 대한 예우는 갖춰야지.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의 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간들은 모두 로이드 잉그램과 함께 한 시간들이지 않을까.

- …….

- 죽어서까지 로이드 잉그램에게 붙잡히는 건 너무 하잖아.

- 하긴… 그렇겠네요.

- 뭐, 그리고. 로이드 잉그램이 온전히 사랑만 하는 건 아니라서. 다른 복합적인 감정도 많단다? 그 중에 증오도… 있을 수도 있고.

- 자기 계획을 망쳤으니까요?

- 그래. 음… 묘를 만들긴 하려나. 그것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루퍼스 마이크로프트는…….

- …기억해 줄 사람이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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