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기
아날로그 식으로.
그는 한 맨션의 원룸을 구했다. 중개인은 그를 조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여러번 ‘조용한’ 집을 ‘가능한 빨리’ 구하고 싶다고 강조했으며, 그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약간 의아해하며 처음으로 소개한 낡은 맨션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언제 들어올 수 있냐고 묻고는 바로 계약했다고. 오지랖 넓어보이는 그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역시나 무슨 일이 생겼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꼭 그럴 줄 알았다며, 진즉에 알아봤다는 말들을 쉴새없이 재잘대는 그는 한참 영양가없는 말을 지껄이다 이내 가십을 내뱉더니 내 눈치를 보곤 또 금새 굽신거렸다. 그럴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애초부터 관심을 가져주시지 그랬어요. 골칫거리의 매물을 비싼 값에 넘겨 처분해 버렸다고 좋아하기만 했을거면서. 나는 그가 건네준 계약서를 눈으로 슥 훑으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었다.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굽신대고, 온갖 가십을 주워섬기며, 직업과 삶을 구분짓지 못한 채 연신 전화를 받아대는 그런 인생 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닥에 납작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권력을 내세우다가 금방 또 굽신거리는 것밖에 배우지 못한 인간이었다. 평소였다면 조금 연민했을까 싶었지만 난 그러기엔 조금 바빴다. 입을 쉬지 않는 그에게 대충 인사하고서, 내가 가야할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으로 쏠려있었다.
CCTV 영상 속 네 모습은 주변 이웃들이 증언 한 것과 거의 같아서 누구를 용의자로 삼거나, 거짓말을 밝혀낸다거나 하는 것도 필요없었다. 너는 주변 이웃들이, 집주인이, 기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물품들을 주문했고. 남들에게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서 조용히 살아갔다. 거의 한달간, CCTV에 비친 네 모습은 야윈 듯한 흰손. 가끔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정도였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최근. 너는 뭔가 깨달은 듯이 한참 분주했고, 끈으로 깔끔하게 분류한 쓰레기를 몇번 날라 버렸다. 너는 중간에 마주친 맨션 주민들에게 환하게 웃어보이며 싹싹하게 인사했다. 늘 그랬듯, 네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미용실에 들렀고,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한가득 샀다. 그래. 누군가의 말처럼 너는 다시 희망을 찾은 것처럼 보였고, 또 누군가의 말처럼 주위를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틀정도 넌 꽤 바빴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네 집에서 나온 유서에는 간단한 재산의 정리와 몇가지 당부들. 정리할 것들. 마무리해야 할 것 두어가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집행인 란이 비어있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힌 별 고민없이 슥슥 적어나간 것 같은 여타 내용과는 다르게 그 내용의 집행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는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넌 유서의 내용을 적어뒀다가 깨달은 것처럼 주변을 정리하고 여전히 이름을 비워두고서 떠났다.
나는 안되었을까. 나라도. 네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노란 포스트잇처럼. 깔끔히 비운 쓰레기통의 옆면에 붙어 미처 버리지 못했던 그 종이 쪼가리는 마치 네 마음속 감정처럼 약간 구겨져서, 하지만 마치 내게 보이길 원했던 것 마냥 당당하고 소심하게도 “사랑해”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넌 그 종이로 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게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포스트잇을 떼어내선 울지도 못하고 한참이나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난 널 사랑했다. 나도 몰랐고 아마 너도 몰랐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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