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키타] 열대야
23.08.19 하코더 출간 회지 합본
01. 키타 신스케
미야 아츠무가 키타 신스케의 이름을 외운 것은 입부하고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입학하자마자 주전으로 발탁되고, 첫 공식 무대인 인터하이 예선을 앞두고 있을 때. 그 무렵의 아츠무는 잔뜩 들떠 있었다. 고교 시절 낸 성과는 프로 데뷔에 영향을 주는 만큼 이제야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다는 느낌이었다. 이나리자키 고교는 효고현에서 전국 대회 출전 경험이 가장 많은 강호교였고, 쿠로스 감독의 적극적인 인재 영입으로 우수한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오사무와 함께 시합에서 활약하긴 했으나 아츠무는 다른 팀원들에게 만족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같은 배구 클럽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아란을 비롯해 실력 있는 선수들과 경기를 뛸 수 있었다. 더 많은 시합에서, 더 많은 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기대감에 부풀기 충분했다.
예선 날짜와 대진표가 정해진 후로 부활동 시간이 끝나고도 자율 연습을 하는 시간이 늘었다. 올해 신입생 중에는 주전으로 발탁된 선수들이 많았고, 1학년들끼리 남아서 연습하는 날에는 승부욕에 불타 늦게까지 연습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날도 그렇게 분위기는 한참 열이 올라 있었다. 체육관을 채웠던 열기를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힌 것은,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오버워크는 금지라고 했을 텐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2학년 선배였다. 지금까지 별로 대화를 나눠본 적 없었던, 항상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 선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비꼬면서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무뚝뚝한 표정이 차갑게 느껴져서였는지, 빤히 응시하는 시선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는지. 여기 있는 신입생들보다 키도 체격도 작은데 마치 아래가 아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경기 앞두고 컨디션 조절도 신경 써야지. 자기 관리도 실력이다.”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잔소리에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만 했다. 문단속은 자기가 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1학년 네 명은 그대로 쫓겨나듯 체육관을 나서야 했다. 이미 밖은 어두워진 후였고, 그제야 연습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허기와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저녁 메뉴를 결정하는데 정신이 팔려 키타가 부활동 시간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던 이유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키타상이 혼낼 때가 가장 무섭더라.”
“욕하거나 때리는 것도 아닌데... 위압감이 장난 아니지.”
키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긴지마와 스나의 대화는 곧 다른 주제로 넘어갔으나 뒤따라 걷는 아츠무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입을 삐죽이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얼굴은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오사무와는 대조되는 인상이었다.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융통성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좀 더 상냥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무, 근데 저 선배 이름이 뭐더라.”
“니 설마... 지금까지 키타상 이름도 몰랐나.”
제 형제의 무심함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오사무가 입을 열었다.
키타 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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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키타 신스케, 포지션은 윙 스파이커입니다.”
입부 기간이 끝나고 공식적인 부활동 첫 시간, 모든 부원들이 모인 자리였다. 쿠로스 감독의 이야기와 신입생들의 인사가 끝나고 부원 모두가 차례대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강호교답게 비주전 선수를 포함하면 부원 수는 생각보다 많았고, 작년 경기 영상을 봤던 아츠무는 유력한 주전 선수 후보들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배구부의 에이스인 아란이나,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던 리베로 아카기 같은 사람들.
미야 아츠무에게 선배를 향한 존경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세터로서 상대를 위한 완벽한 공을 올린다. 그러나 누구에게 공을 올릴 것인지, 그건 온전히 아츠무의 선택이었다. 실력주의인 아츠무에게 팀원이란 공을 올리고 싶은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고작 나이가 더 많고 적다는 이유로, 선배라고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키타 신스케의 순서는 2학년 중 가장 마지막이었다. 나란히 옆에 서 있는 다른 배구부원들과 비교했을 때 키나 체격 조건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작년 경기 영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과 이름.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일관된 무표정, 담백하게 할 말만 마친 자기소개는 딱히 아츠무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 후로도 키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부원들이 많아 팀을 나누어 연습하느라 지금까지 키타와 합을 맞춰 연습하는 일도 없었고, 타 학교와 진행한 연습 경기에서 키타는 유니폼도 받지 못했다. 아츠무의 기준에서 키타가 시선을 끌 만큼 눈에 띄는 실력을 갖춘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키타 신스케에 대한 인상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가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아츠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키타 신스케의 첫인상이 뒤바뀌는 날이었다.
어떻게 키타 신스케가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미야 아츠무가 키타 신스케의 이름을 외우게 된 그날부터, 그 이름은 학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어렵고 불편한 선배인 키타 신스케의 평판을 요약하면 약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이미지였다. 성적 우수,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평판 좋은 성실한 우등생. 뭐 하나 대충하는 법이 없고, 항상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을 말하는 사람. 융통성 없이 고지식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교우 관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부활동 시간에 체육관에서 마주한 키타는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귀신같았다. 평소에는 묵묵히 연습에 집중하거나 경기를 지켜보며 서포트하는 역할이었는데, 눈치가 빨라서 부원들의 상태를 귀신같이 집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어느 순간 뒤에서 나타나서 정곡을 찔렀고, 항상 뒤에서 압박감을 뿜어내며 지켜보고 있는 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표정 변화도 없고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상 때문에 1학년들 사이에서는 로봇 같다거나 무섭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때리거나 군기를 잡는 질 나쁜 부류의 선배는 아니었다.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란에게 듣기로는 2학년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는 또 다른 것 같았다.
“키타? 웃는 거 많이 봤는데.”
“아란군.. 시력 검사는 제대로 하고있제?”
“진짜라고!”
그렇게 보여도 주변을 잘 챙긴다고 했던가.
아란이 말하는 ‘잘 웃고 다정한 키타 신스케’의 모습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지만.
“키타상 배구는 예전부터 했었대? 어느 중학교 출신?”
“후에네쿠 중학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때도 배구부였다고.”
“후에네쿠? 처음 듣는데.”
“그 학교에서 우리 학교는 거리상 잘 안 오는데.. 키타도 쿠로스 감독님 추천으로 입학한 거잖아.”
“..키타상도 감독님 추천이라고?”
“어,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으면 본인한테 물어보지 왜 날 붙잡고 있는데??”
“키타상은 학년도 다르고... 뭔가 물어보기 어렵다 아이가...”
“지금 니랑 대화하고 있는 내도 키타랑 동갑이다, 바보냐.”
비주전에 벤치 멤버도 아닌 키타 신스케. 그런 그도 쿠로스 감독의 캐스팅으로 추천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호기심이었다. 공을 올릴 스파이커를 선택하는 세터로서, 배구에 있어 사람을 평가하는데 엄격한 아츠무에게 키타는 감독 추천으로 강호교에 입학할 만큼 눈에 띄는 기술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주목받았던 아란이나 저와 제 쌍둥이, 아이치현에서 데려온 스나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쿠로스 감독의 안목은 우수한 편이다. 지금 배구부에서 감독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중학교 시절 감독님이 직접 찾아와 건넨 제안을 받았다. 심지어 아이치현에서 활동하던 스나를 데려왔을 정도로 감독은 캐스팅에 많은 수고를 들이는 사람이었다. 고교 배구에서 매년 늘 같은 팀은 없기에, 항상 새로운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인재를 모으고 키운다. 그게 쿠로스 감독의 철칙이자 수년간 이나리자키 고교가 전국 대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시합에서도 마주친 적 없는 그럭저럭 보통인 학교, 무명 배구부 출신 키타는 아츠무가 주목하는 범주 안에 들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렇기에 쿠로스 감독이 키타 신스케의 배구에서 본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무시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운 의문이었다.
“니가 당번인데 왜 내까지 일찍 일어나야 하냐고!!”
“누가 매번 깨워도 안 일어나놓고 안 깨워 주고 갔다고 하도 투덜거려서 이번엔 끌고 나왔다. 왜.”
오사무가 당번이라 먼저 나갈 때마다 안깨워주고 갔다고 투덜거렸더니, 이번엔 아예 자기가 일어나는 시간에 함께 깨워버린 탓에 평소보다 이른 등굣길이었다. 따로 할 일도 없어 아츠무는 오사무만 교실로 보내고 정해진 아침 연습 시간보다 일찍 부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일찍 왔네. 오사무는?”
“오늘 당번이라, 저 먼저 왔어요.”
당연히 아직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실에는 키타가 있었다.
“키타상도 일찍 오셨네요. 항상 이 시간에 오세요?”
“응. 아침마다 하는 게 있어가.”
...아직 둘이서만 있을 때는 어색한데.
걱정과 달리 키타는 대화를 더 이어가는 대신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츠무는 안심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키타 신스케의 아침 루틴은 부실 청소로 시작했다.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대충 정리해 둔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배구공을 닦았다.
“도와드릴까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키타를 힐끔 지켜보던 아츠무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냥, 혼자 하는 의식 같은 기다.”
반복하는 일을 좋아해가.
키타는 계속해서 공을 닦았다. 아츠무가 다시 키타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정리는 끝나 있었고, 곧이어 스나와 오사무가 부실로 들어오면서 짧고 길었던 정적은 끝이 났다. 그날 연습 내내, 아츠무는 오늘따라 시선 끝에서 키타를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플레이, 늘 반복하고 연습했던 대로 충실한 키타의 플레이는 아츠무와는 정반대였다. 아츠무에게 새로운 도전은 놀이와도 같았다. 멋있어 보이는 기술을 발견하면 그게 더 멋지고 재밌을 것 같으니까 시도한다. 모든 배구 시합은 같지 않기에, 더 강한 녀석을 만나고 이기기 위해 늘 다른 배구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 키타의 배구는 시시한 편이었다.
그러나 키타 신스케를 계속 관찰하고 알게 된 사실은, 리시브 하나는 트집 잡을 부분 없이 깔끔했다는 것이다. 오랜 연습과 노력이 받쳐주어야 하는 리시브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가 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늘 반복하고 연습했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플레이는 아츠무가 추구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실수하는 일이 없고 안정적이었다. 비주전에 벤치멤버도 아니면서 매일 가장 먼저 연습에 나오고, 청소나 뒷정리 같은 사소한 것 하나도 대충하는 법 없이 성실하다. 적어도 좋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끈기는 싫지 않았다. 그런 키타 신스케의 배구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츠무와 키타 신스케의 ‘노력과 끈기’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아마 결과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츠무는 결과가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얻어낸다. 어린 시절 자신보다 두각을 보였던 형제를 제치고 세터 자리를 얻어낸 것도, 좀처럼 성공하기 어려웠던 서브를 실전에서 무기로 쓸 만큼 구사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짜릿한 성취감을 알기에 고비가 있어도 계속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키타 신스케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흔해 빠진 말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 적어도 아츠무의 관점으로 봤을 때, 키타 신스케의 결과는 비주전이었다. 결과를 내지 못하면서 그렇게까지 노력할 수 있나? 아츠무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이었다. 키타를 알아갈수록 궁금한 점이 늘었다. 키타 신스케가 결과와 상관없이 배구에 진심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아츠무는 문득 궁금해졌다.
6월 중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인터하이 예선.
이나리자키 고교는 예선을 통과해 효고현 대표로 본선에 진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을 맞이한 8월 초,
본선에서 이나리자키 고교는 3등으로 인터하이를 마무리했다.
키타는 단 한 번도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다음 날도, 키타 신스케는 가장 먼저 부실에 나왔다.
02. 초여름
6월 중순으로 접어든 초여름, 하루가 멀다하고 오락가락하는 날씨는 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침까지는 분명 맑았는데 하교 시간에 맞춰 내리는 소나기라니. 촘촘하게 내리는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허망하게 들렸다. 하필 오늘은 배구부 연습이 없는 날이었고, 반성문을 쓰느라 남게 된 아츠무를 기다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같이 오사무가 찾은 맛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으니 연락해도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올 일은 없을 거다. 그냥 맞고 뛰어갈까?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비를 계속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아츠무를 불러 세운 것은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츠무?”
“키,키,키타상?”
아, 또 말 더듬었다. 이제는 듣기만 해도 긴장해 버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키타 신스케였다. 이 선배 앞에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니 우산 없나?”
“예...”
“그럼 같이 쓰고 가자.”
옆으로 걸어온 키타가 우산을 펼치자 시야 안으로 하늘색 우산이 가득 찼다. 뭐해? 안 들어오고.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아츠무에게 키타는 우산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 감사합니다. 아츠무가 쭈뼛거리며 몸을 숙였다. 제가 들게요, 자연스럽게 우산을 건네받은 아츠무가 우산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우산은 건장한 운동부 학생 두 명이 쓰고 가기엔 작은 크기였다. 몸을 잔뜩 구겨 넣어도 어깨 한쪽은 비를 맞고 있었고, 내딛는 걸음마다 어깨와 팔이 스쳤다. 초여름이라도 비를 맞아 차갑게 식어버린 바깥쪽 팔과 달리 맞닿은 팔에서는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키타상, 오늘 부활동도 없는데 늦게까지 있으셨네요.”
“응,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켜가. 뭐 좀 정리하다가 늦었다.”
그러고 보니 반장이라고 했던가. 지나가면서 들었던 오오미미 선배 말로는 학기 초에 임시 반장을 맡았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담임 선생님이 새로 반장을 뽑아야 한다는 걸 까먹었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근데 선생님, 반장은 안 뽑습니까? 한 달이 넘어간 시점에 키타가 던진 질문에 엄청 당황했다고. 하지만 따로 지원자도 없었고 모두 익숙해진 후라서 키타는 그대로 반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활동에 늦거나 지장이 가는 일은 없었기에 평소에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교무실에 들르는 키타의 모습을 자주 봤던 기억이 났다. 부활동에서도 이미 충분히 느꼈지만 학교 선생님들이 좋아할 법도 했다. 키타 신스케에게 성실, 꼼꼼함 같은 단어들만큼 어울리는 수식어가 또 어디 있을까. 심지어 성적까지 좋았다.
“그러면 니는 오늘은 연습 없는 날인데, 이 시간까지 뭐했는데?”
“... 수업 시간에 졸다가.. 반성문 쓰느라요.”
쓰읍, 키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끼며 아츠무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처럼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아츠무는 키타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사무도 저 버리고 가고, 아무도 없길래 그냥 비 맞고 갈까 했는데 키타상이 도와주셔서 살았어요. 능글맞게 웃으며 넘기는 후배의 얼굴을 본 키타는 따가운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비 맞고 다니다 또 감기 걸릴라.”
너, 보기와 다르게 한 번씩 심하게 앓잖아.
“요즘은...! 컨디션 관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그런 일도 많았지만.. 이제는 진짜 아닌데.. 아츠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황급하게 반론했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쩔쩔매는 아츠무의 표정을 본 키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혼내는 말이 아니라 그냥 하는 말이었나? 표정 변화도 목소리 톤의 변화도 크지 않은 키타의 말에 담긴 의도를 읽어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3학년 선배들은 저래 보여도 농담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키타 신스케와 장난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낯설었다. 종종 치고 들어오는 키타의 정론이 꽤 매섭기 때문일까, 욕하거나 큰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것도 아닌데 키타는 다른 선배들보다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시합에 나갈 때 가장 즐거워하면서, 컨디션 때문에 실력발휘를 못 하면 속상하잖아.”
이어지는 말은 평소의 날카로운 정론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담백한 말투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키타는 그저 툭 흘리듯 던진 말이었겠지만 혼날 줄 알았던 예상과 다른 다정한 말에 아츠무의 눈이 커졌다.
다정한 키타 신스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수식어. 다른 사람들이 말하던 키타 신스케의 다정함을 알게 된 것은 지난겨울 아츠무가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였다. 오기를 부리다가 자기 관리에 엄격한 키타에게 크게 혼나고 연습에서 쫓겨났던 날. 단호하게 집에 가라는 말과 컨디션 관리 못 하는 걸 칭찬하지 말라던 냉랭한 태도 앞에서 아츠무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코치님께 조퇴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상냥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키타의 말에 심통을 부리며 짐을 찾으러 돌아왔을 때 발견한 것은 메모가 붙어있는 편의점 봉투였다.
아츠무에게
밥 제대로 챙겨 먹고 자라
- 키타
목캔디, 우메보시 같은 감기에 좋은 것들이 가득 담겨있던 봉투. 본인을 닮은 듯 깔끔하고 간결한 필체. 아픈데 혼나기까지 해서 내심 더 서러웠던 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더 감동받았던 건지. 늘 차갑고 무서웠던 선배한테 처음으로 따듯한 말을 들었던 그날은 정말 울컥했다.
그때도, 지금도. 키타 신스케의 다정함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치고 들어온다.
친하지도 않은 후배에게 선뜻 우산 한쪽을 내준다거나, 깔끔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깨가 비를 다 맞고 있는데도 내색하지 않는 거라던가. 늘 냉랭한 말투로 잔소리하다가도 이렇게 걱정하고 챙겨주는 말을 했다.
작년의 미야 아츠무였다면, 몰랐을 사실들.
여전히 키타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으나, 지금의 아츠무는 키타가 무서워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덧 두 번째 하복을 입는 계절이 되었다. 이나리자키고교는 올해도 인터하이 예선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 또 효고현 대표로 인터하이 본선에 나갈 예정이었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올해의 주장은 키타 신스케였다. 주전 선수는 아니라도 종종 시합을 뛰게 되었다. 코트 안에서 함께 뛰게 된 키타는 작년에 아츠무가 했던 생각들을 모조리 잊게 만들었다. 냉정하게 코트 밖에서 코트의 상황을 읽고, 코트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키타 신스케의 배구는 변화무쌍하게 날뛰는 이나리자키의 배구와 닮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런 개성 강한 이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었다.
시합에서 날뛰다가 키타의 날카로운 지적을 들을 때면 여전히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키타는 틀린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키타의 조언을 따랐을 때 제대로 먹히는 경우도 많았고, 그 단정한 목소리 속에는 신뢰할 수밖에 없는 압박감이 있었다. 미야 아츠무에게 키타 신스케는, 아츠무의 사전에 없었던 ‘선배’나 ‘대장’ 같은 단어를 바로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 선배라는 단어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아츠무에게 키타는 같은 동아리 선배, 배구부 주장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에 젖은 수국과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벽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어 물기를 탁탁 털어내자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살피자 빗줄기는 아까보다 잦아들어 있었고, 지붕에서 맺혀있던 빗방울들이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반적인 하교 시간을 넘긴 시간대라 둘 뿐인 정류장에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빗방울이 툭툭 땅을 두드리는 소리, 비에 젖은 흙냄새, 물기를 머금은 공기. 여름의 냄새와 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아츠무가 접은 우산을 건네자 키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버스 오면 우산은 니가 들고 가라.”
“그럼 키타상은요?”
“지금 집에 동생 있다 해서, 내리는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오라고 했다.”
“누구랑 다르게 마중도 나오고 착하네요.”
“와, 오사무는 투덜거리긴 해도 그 정도는 해 줄 것 같은데.”
“금마 지금 저녁 먹느라 바쁠걸요. 밥 먹을 때 방해받기 싫다고 안 나올 게 뻔합니더.”
조금 전 확인한 휴대폰에는 스나가 보낸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앞에서 두 그릇째를 해치우고 있는 사무와 맛있게 먹고 있는 긴지마가 찍힌 사진,
[여기 진짜 맛집이네.]
그리고 스나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들리는 듯한, 짧은 문장 하나가 속을 긁었다. 살살 약 올리는데 도가 튼 놈이었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들. 그 맛집, 분명 나도 가고 싶다고 했는데. 집에 먼저 도착하면 니가 냉장고에 넣어둔 푸딩은 내 꺼다. 아츠무는 며칠 전 오사무가 선착순 한정판매라며 사 온 푸딩을 떠올렸다. 한 입만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주더니, 아껴 먹겠다고 남겨둔 푸딩이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동생분은 몇 살이에요?”
키타의 동생이라, 키타한테 가족 관계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라 문득 궁금해졌다. 지난 인터하이 예선 때 할머니가 응원을 오셨어서 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 6학년.”
“나이 차가 꽤 나네요.”
“응, 귀엽다.”
“키타 상도 형제들이랑 싸우고 그래요?”
“엄청 어릴 땐 그랬던 것 같은데, 싸운다기보다는.. 혼나거나 혼내거나 하제. 나랑 누나도 나이 차 많이 나서, 내도 어릴 때 누나한테 많이 혼났다.”
“혼나는 키타상이라니... 안 믿겨요.”
“글나.”
키타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누나한테 혼나고 서러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키타는 그 나이대 또래처럼 느껴졌다. 늘 어른스럽게만 느껴졌던 키타의 입에서 나오는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들. 키타는 대부분 누나가 맞는 말을 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며 씁쓸하게 말했지만, 누나와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봤던 사례들과 비교해서 사이가 무척 좋은 편에 들었다.
날 때부터 제 형제는 동갑이었으니, 허구한 날 투닥거리며 싸운 경험은 많아도 나이 차 있는 형제에게 혼난 이야기는 생소하다. 우리한테 혼낼 때처럼 동생도 그렇게 혼내실까 생각했다가, 동생 이야기를 할 때면 귀엽다는 듯 푸스스 웃는 키타의 모습을 보고 곧 그런 상상은 흐려졌다. 어린 동생한테 무른 키타 신스케라, 그 모습은 낯설었지만 분명 키타의 동생도 키타를 말로 이긴 적은 없을 거라고 아츠무는 속으로 확신했다. 아니면 리틀 키타 신스케일지도 모르지. 키타가 말하는 어린 시절 누나에게 혼났던 일화는, 어린 동생일지라도 조목조목 정론으로 혼내는 누나의 모습이 지금의 키타를 덧그리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에.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삼남매가 많이 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곧 버스가 도착 예정이라는 알림이 떴다. 키타가 타야 할 버스가 먼저 도착하자 키타는 아츠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일 보자, 키타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츠무는 버스가 지나간 방향을 계속 눈에 담고 있었다. 둘만 있으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건지.
그러고 보니,
키타와 둘이서만 길게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츠무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도착한 버스에 탔다. 익숙한 풍경들을 지나칠 때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비는 완전히 그쳐있었다. 갑자기 찾아왔다가 사라진 소나기 뒤에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맑게 갠 하늘이 있었다. 비가 내렸던 흔적은 축축하게 젖은 땅과 손에 들린 하늘색 우산에만 남았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갑작스러운 변화로 가득한 계절의 시작이다.
완전한 초여름이었다.
03. 여우비
여름날 오후의 수업 시간은 나른한 공기가 가득했다. 시끌벅적했던 급식 시간이 끝나고 찾아오는 고요함, 일정한 박자로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바람이 뺨을 스칠 때면 얇은 커튼이 살랑거리며 시야 앞을 가렸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흰색 커튼이 다 가려주지 못한 한낮의 햇빛이 책상 위로 쏟아지고, 그림자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아츠무의 자리는 교실 맨 뒷자리 창가였다. 또래보다 큰 키와 체격을 지닌 운동부 학생들의 고정석. 딱히 수업을 열심히 듣는 건 아니라서 아츠무는 지금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턱을 괴고 교과서 그림 위에 다른 낙서를 끄적이는 중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로 힐끔 눈동자를 굴렸다가 시선이 교실을 지나 창문 너머로 향했다. 맨 뒤에서는 교실의 풍경은 물론 창밖의 운동장까지 한눈에 들어왔고,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 중인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차라리 지금 체육 시간이면 더 좋았을 텐데.
하루 종일 배구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공부에는 딱히 흥미가 없어 아츠무가 학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급식 시간과 방과 후 부활동 시간뿐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따분한 시간을 견디는 것도 힘든데 하필이면 느리고 조용한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의 고전 문학 수업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날씨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사랑을 알아가는 감정의 변화를 날씨에 비유하고 있는데-
칠판에 분필이 부딪치는 소리와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렸다. 칠판을 빼곡하게 채운 필기에는 여기 사용된 단어가 무엇을 비유하고 담긴 속뜻은 어떻고 하는 해설이 붙었지만, 그 목소리는 전혀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꺼풀이 나른해진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니라 이 교실에 있는 거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자주 졸았다는 이유로 반성문까지 썼던 전적이 있어 아츠무는 최대한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품을 뱉어내고 다시 창밖으로 시야를 돌리자, 아까보다 좀 더 학교 건물에 가까운 위치로 이동한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체육복 색을 보니 2학년이었다. 사람들을 쭉 훑어보던 아츠무는 곧 익숙한 머리색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끝이 검은 회색 머리카락, 동그란 뒷통수. 키타 신스케의 반이었다. 달리기 수행평가 중인지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체육 선생님의 신호에 맞춰 키타가 달렸다. 배구부 활동에서 자주 보던 익숙한 달리기 폼이었다. 키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운동장만 한참 응시하던 아츠무는 나른한 감각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다음 신호 소리였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였다.
최근 들어 아츠무는 학교에서 키타와 마주치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같은 배구부라서 거의 매일 보는 사이긴 했지만, 부활동 시간마다 얼굴을 보는 것을 제외하고 학교 안에서 키타와 마주치는 일이 늘었다. 학년이 달라 쓰는 층이 다른데도 종종 시선 끝에서 어렵지 않게 키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타이밍에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깜빡하고 있었던 숙제 때문에 교무실에 불려가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는데 바로 옆에 키타가 있었다. 키타 신스케가 뭔가를 잘못했을 리는 없고, 저와는 달리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온 듯했다. 키타의 목소리가 들린 후부터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바로 앞에 있는 선생님보다 옆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금방이라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츠무 니 상습범이다. 오늘 안에 꼭 내고 가래이.”
“예...”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옆에 있던 키타도 용건이 끝났는지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아츠무보다 한 발짝 앞서 걸어가던 키타가 먼저 문을 나서며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조금 안심했지만, 복도로 나오자 문 바로 옆에서 키타는 팔짱을 낀 채로 아츠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츠무.”
역시 예상대로 다 들린 모양이었다. 감독님과 마찬가지로 키타는 주장으로서 부원들의 성적 관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부활동에 지장 가는 일이 없도록 학교생활에도 너무 소홀하지 않을 것. 주의를 주는 것 외에도 재시험이나 보충 수업을 피하기 위해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종종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숙제 도와줄까.”
“...네?”
“오늘 마침 연습도 없고, 대충 들렸는데 그거 작년에도 냈던 거다.”
“감사합니다!!”
잔소리가 끝나고 갑자기 내밀어진 손길에 방금까지 꼬리내린 강아지처럼 키타한테 꼼짝을 못하던 아츠무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업 끝나고 도서실에서 보기로 약속한 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쉬는 시간이 끝난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방과 후의 도서실은 한적했다.
수업이 끝난 후 귀가하거나 부활동을 갈 시간이라 도서실에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사실 도서실을 온 적이 없어서 원래도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야 아츠무와 도서관이라니, 아츠무가 생각하기에도 어색한 조합이었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키타 신스케라는 것도 겸해서. 지금까지 키타가 공부를 봐줄 때는 오사무나 스나, 긴을 포함해 다 같이 부실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공부했기에 어쩐지 낯선 느낌이었다.
아츠무는 대충 접어 교과서에 끼워둔 탓에 살짝 구겨진 프린트들을 꺼냈다. 문학 선생님은 작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온화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상과 달리, 유독 이런 면에서는 단호한 면이 있어서 대충한 티가 나거나 미제출이면 제대로 낼 때까지 시달렸다.
“이건 작년 시험에서도 나온 유형이니까 참고하고.”
키타 신스케가 가리킨 건 여우비를 지역별로 다르게 표현한 말을 짝지은 것이었다. 같은 소설 지문 아래에 이어지는 다음 문제는 주관식으로 간단한 작문이었다. 여우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쓰기. 작년에 수업을 들었던 키타의 말로는 문학 선생님이 학생들의 작문을 읽는 걸 좋아해서 해마다 이런 과제를 내준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추상적인 질문이라니. 반성문 같은 게 아닌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지는 오래되었다. 예시로 들어간 지문을 읽으며 여름, 계절, 날씨, 사랑. 반복되는 구절을 속으로 읊었다.
화창한 날씨에 내리는 비. 여우에 홀린 것처럼 이상한 풍경. 난해한 질문에 고민하던 아츠무는 맞은편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키타는 아츠무에게 줄 필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키타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보고도 믿기 어려웠던 경험이라, 고개를 떨군 눈앞의 키타를 보고 떠오른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봄고가 끝난 후 은퇴한 선배들이 빠지고 새 유니폼을 받던 날, 키타 신스케가 1번 유니폼을 받던 순간. 표정 변화도 리액션도 크지 않았던 키타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표정은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 이런 걸 쓸 수는 없겠지만.
키타상의 다른 표정을 또 볼 수 있을까? 아츠무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는 모습을 또 보고 싶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보지 못했던 다른 표정이 궁금했다. 동요하지 않는 키타 신스케가 평범하게 웃거나 놀라거나 하는, 그런 순간들이.
“아츠무, 집중해야지.”
잠시 회상에 잠겼던 아츠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키타라도 속마음을 읽지는 못하겠지만, 평소 시합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보는 일이 많아 지금도 꼭 생각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제를 도와주고 있는 선배를 앞에 두고 그 선배가 울었던 일을 떠올렸다는 걸 자각하자 부끄러워져 괜히 민망한 기분에 문제를 푸는 손끝이 빨라졌다. 어쨌거나 키타의 도움으로 아츠무는 빠르게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키타 신스케의 또 다른 표정을 볼 기회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과 습하고 무거워진 공기는 이제 완전한 여름 날씨로 접어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부터는 제법 더운 날씨였지만, 아직 학교에서는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아 선풍기만으로는 피부에 달라붙는 더위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후의 수돗가는 이런 날씨에도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 시합 한 판을 뛴 후 더위를 식히려는 학생들로 붐볐다. 아츠무도 그중 하나였다.
반 대항전으로 아이스크림 내기를 했기 때문에 오사무는 바로 승낙했고, 덥다고 나가기 귀찮다던 스나는 어느새 말려들어 끌려왔다. 아츠무는 운동 신경이 좋은 것과 별개로 배구를 제외한 운동에는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승부욕을 자극하는 몇 마디에 쉽게 넘어갔다. 이번에도 아츠무를 영입한 긴지마보다 어느 순간부터 더 열을 올리며 뛰었다. 수돗가에서 물을 끼얹고 있을 때도 누가 시작한 건지 모를 장난에 대결은 2차전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한 눈을 판 사이 아츠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호스를 가져와 연결하고, 몰래 숨어서 접근한 뒤 튀어나오는 동시에 물을 뿌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튀어나온 아츠무는, 자신이 노렸던 녀석들의 얼굴색만큼이나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키,키타상이 왜 여기에.....”
뚝, 뚝.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교복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정면으로 물을 맞은 키타가 잔뜩 찌푸려진 눈가를 쓸며 물기를 닦아내는 동안, 3초가 3시간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 도서실에서 했던 생각 탓인지,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꼭 울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아츠무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키타가 눈을 떴을 때-
“...아츠무, 조심해야지.”
-아츠무가 가장 무서워하는 키타 신스케의 표정이었다.
키타의 냉랭한 눈빛에 이미 한차례 주의를 받은 듯한 주변을 포함해 모두가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를 끊으려 아츠무가 다급하게 외쳤다.
“수건!!! 수건 가져올게요!!! 잠시만예!!”
“이 앞이 부실인데...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그럼 일단 이거라도...”
피부에 딱 달라붙는 교복 셔츠 끝을 잡고 물기를 짜던 키타의 어깨 위로 아츠무는 체육복 져지를 벗어 둘러맸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츠무를 본 키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거절하지 않고 어설프게 얹어진 져지를 제대로 걸쳤다.
부실에 따라온 아츠무는 키타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창문 너머로 쨍하게 들어오는 햇빛과 대조적으로 흠뻑 젖은 키타는 맑고 화창한 날씨에 꼭 비라도 맞은 사람 같았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키타는 교복을 비틀어 물기를 짜고 창가에 널었다.
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아츠무를 본 키타는 아츠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나가던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장난은 적당히 쳤다면 좋았겠지만, 이번 일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는데도. 제 것보다 큰 아츠무의 져지는 젖은 교복에 닿아 축축해져있었다.
“됐다. 날도 더운데 금방 마르겠지.”
계속 미안해하는 아츠무에게 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후배들이 자신을 그렇게 편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딱히 화가 난 건 아닌데도 바짝 쫄아있는 아츠무의 반응이 웃기기도 하고. 항상 무표정이었던 키타의 입꼬리가 풀어졌다. 그리고 그런 키타를 보며 아츠무는 충격 받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키타 신스케가 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가장 궁금했던 표정을 마주하자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창문 너머 포근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조용한 부실에 운동장에서 넘어오는 웅성거리는 소음이 잔잔하게 깔리고, 묘한 정적 속에서 아츠무는 어딘가 홀린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미소가 옅게 깔린 키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키타의 눈동자에는 하늘이 담겼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다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이 타고 흐르는 게 화창한 날씨에 내렸다 사라지는 여우비 같았다. 이상하게 목덜미가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어쩌면, 이미 예전부터 홀려 있던 걸지도 모르고.
04. 장마
TV에서는 때이른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아츠무는 오사무와 같은 표정으로 토스트를 입안에 구겨 넣었다. 벌써 이렇게 습해서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 더우려고, 투덜거리던 부모님은 먼저 나가는 아이들에게 우산을 챙겨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서자 우중충하게 먹구름이 낀 하늘이 보였다.
어쩐지 올해 여름은 유독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7월 5일은 키타 신스케의 생일이었다.
10월 생인 아츠무가 키타의 생일을 듣고 떠오른 생각은, 한 살 차이도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데 이 시기엔 키타와 두 살 차이라는 거였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가만히 있어도 어른스러운 키타 신스케가 미야 아츠무보다 더 빨리 어른에 가까워지는 계절. 어른들이 말하길 학생 때야 한두 살 차이가, 선배니 후배니 하는 것들이 크게 느껴지지만 사회에 나가면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던데. 아츠무에게 키타는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또래보다는 선배 이미지가 강했다. 미야 아츠무의 인생에 처음 마주하는 ‘키타 신스케’라는 무게감. 그건 20대가 되어서도, 30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요즘 배구부 2학년들의 주된 관심사는 ‘키타상의 약점 찾기’였다. 사실 이미 한 번 도전했다가 실패했었지만. 키타 신스케가 놀라거나 하는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아츠무의 호기심에 불이 붙으며 다시 시작된 주제였다.
“이번에야말로 꼭..!!”
“성가시네...”
“스나 닌 안 궁금하나.”
“...궁금하긴 한데.”
“관심받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유치한 미야 아츠무. 오사무는 저와 똑닮은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번 약점 찾기에 도전했을 때는 오사무도 아츠무와 똑같이 신나했던 것을 떠올리며 스나는 둘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 오사무와 달리 아츠무는 집요하다는 감상도 덧붙이며.
“근데 츠무. 왜 또 찾기로 한 건데?”
지난번에 찾은 키타의 약점은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정전기에 약하다고 했던가. 파직거려서 싫다는 말투는 좀 이외였지만, 어린 동생이 있어서 옮은 말투 같았다. 유일한 약점이 정전기라니. 어디 써먹지도 못할 약점이었다. 결국 그렇게 열을 올렸던 키타상의 약점 찾기는 종결.
그 후로 덮어둔 주제를 다시 꺼낸 것은 아츠무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오기였다.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저 선배한테도 하나쯤은 인간다운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 그다음은 재미였다. 키타 신스케를 계속 지켜본 결과 키타는 늘 한결같은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그 견고한 벽을 무너트리고, 보기 드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키타의 약점을 찾으면 지금보다 덜 혼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다른 녀석들을 꼬드겼었다. 결과는 싱겁게 끝이 났었고.
그리고 지금은, 키타 신스케가 궁금했다.
고작 1살 차이,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활동을 같이 하는 선후배 사이. 하지만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미묘한 간극. 미야 아츠무가 키타 신스케와 동갑이 되는 순간이 오지 않는 것처럼, 평생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거리감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당사자가 알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는 ‘약점 찾기’라는 핑계를 대면서도, 정작 아츠무는 진짜 키타의 약점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키타의 몰랐던 면들을 알고 싶었다. 이런 심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예전에 나왔던 주제를 다시 꺼내 갖다 붙이면서 아츠무는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단순하게, 예전의 호기심에 불이 붙은 것뿐이라고. 아츠무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키타의 생일을 맞아 오전 부활동 시간에 부원들끼리 돈을 모아 산 케이크를 전달했다. 키타와 친한 3학년들은 따로 선물을 챙기기로 하고, 오전 연습이 끝난 후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시간을 내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던 아츠무의 기분이 이상해진 것은 점심시간에 키타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팬을 본 후부터였다.
“잘 쓸게, 고맙다.”
키타는 거절 대신 상냥하게 웃으면서 감사를 전했다. 아츠무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될 정도로, 그렇게 웃고 있는 키타는 제 나이 또래의 평범한 학생 같았다. 상대방이 준 선물은 오전에 부원들끼리 돈을 모아 산 구색 맞추기용 케이크와는 다른, 누가 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것이었다. 팬이라고 하기엔 사심이 느껴지는 수줍은 표정까지 더해서. 도망가듯 그 자리를 떠난 아츠무의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키타의 웃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리고 오후 부활동이 시작되기 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체육관에 도착한 아츠무에게 이름 모를 여학생이 키타에게 전해달라며 자신의 품 안에 선물을 안겨주고 도망쳤다. 이런 건 직접 전해 주던가. 아츠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고등학생이 된 후 시합에서 활약하면서 아츠무는 제법 자기가 인기 있다는 걸 알았다. 아츠무의 팬이라며 시합을 응원하러 오거나 이런 선물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역할은 또 처음이었다.
“키타상 이거... 아까 어떤 사람이 전해 달라던데요.”
근데 이름을 안 말해줘서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명찰 색은 2학년이던데. 아츠무가 전해 준 선물을 받은 키타는 선물을 유심히 뜯어보다가,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손으로 쓴 쪽지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글씨 보니까 누군지 알겠다. 이런 거 안 챙겨도 된다 했는데... 고맙구로.”
전해줘서 고맙다고 말한 키타는 다시 쪽지와 선물을 꼼꼼하게 포장한 뒤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넣었다. 필체만 봐도 누군지 알 정도의 사람이라니, 아츠무는 아까 그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바로 알 수 있는 걸까. 묘하게 신경 쓰였다.
“몰랐나? 키타 은근 인기 많다.”
아란과 둘만 남은 상황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슬쩍 떠봤던 아츠무는 돌아오는 대답에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딱딱하고 무서워 보였는데... 잘 챙겨주고, 은근 다정해가 걔 좋다 하는 애들도 많다.”
근데 정작 본인은 그런 쪽으로 인기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열받는다. 저번에 놀리려고 했다가 키타가 정색하고 혼냈는데... 남녀가 붙어있다는 것만으로 엮는 것도 실례고, 진짜라도 사람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 했나.
“정작... 그렇게 떠 봐달라고 부탁한 건... 걔였다고...!”
키타를 짝사랑하던 동급생의 끈질긴 부탁으로 말만 꺼내봤다가 키타한테 잔소리를 들으며 탈탈 털렸던 걸 떠올린 아란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무심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다정한 키타 신스케, 그리고 그런 키타 신스케가 보여주는 다정한 면에 흔들리는 사람들. 아츠무는 그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체육관 밖을 나서자 추적거리며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꿉꿉한 공기가 닿았다. 일기 예보에 나온 불쾌지수를 떠올리며, 날씨 때문인지 텁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아츠무가 약점을 찾겠다며 다시 키타 신스케를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작년에 아란이 말했던 ‘잘 웃고 다정한 키타 신스케’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얼마 전의 대화 내용까지 더해서. 학교에서 우연히 목격한 키타는 아란이나 오미미, 아카키와 함께 있을 때가 많았지만 같은 반으로 추정되는 3학년 여학생들과 있을 때도 많았다. 배구부 안에서는 특별히 큰 키가 아니었던 키타는 그 옆에서 키도 체격도 눈에 띄었다. 누나가 있다고 하더니 대화도 별로 어색해하지 않는 것 같았고, 시끄럽고 유치한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보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이 호감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학급 반장에 시키지도 않은 부실 청소까지 할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성격인 키타는 볼 때마다 늘 옆에 있는 여학생의 무거운 물건을 대신 들어준다거나, 질문을 받으면 성실하게 답변을 내놓고 있었다.
“맞나.”
키타는 언제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중간중간 짧은 호응을 넣어 맞장구치는 키타의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웃고 있는 표정이 제 나이 또래의 평범한 학생 같았다. 심지어 키 차이 때문에 시선이 맞지 않을 때는 대화하기 편하게 상대 쪽으로 기울여주기까지 했다.
그런 키타를 보며 아츠무는 경악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저 정도면 유죄 아닌가. 키타는 그저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지만, 상대는 키타를 그 이상으로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저걸 모르나?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거냐고.
키타와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 이상하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계속되는 장마로 불쾌지수는 치솟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이나리자키 배구부는 여름 방학을 맞자마자 본격적인 인터하이 준비를 위한 여름 합숙을 갔다. 방학에는 기숙사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빈 기숙사를 운동부 학생들이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매번 합숙 비슷한 생활을 하긴 했지만, 매년 다른 학교들과 연합으로 진행하는 이 합숙은 외부로 나가는 합숙이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돌아가면서 주최 학교를 방문하는 합숙,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외부로 나갈 차례였다.
늘 그렇듯 이나리자키 학교는 우승 후보답게 그 사이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요주의 인물인 미야 쌍둥이는 말 그대로 날뛰었고, 키타는 개성 강한 팀원들을 잡아주며 팀의 완성도를 높였다. 쿠로스 감독이 꿈꾸던 그림대로 만족스러운 팀이었다. 예선 때보다 한층 더 손발이 맞아 보이는 모습에, 감독은 올해의 인터하이와 봄고가 기대된다며 즐거워했다.
합숙 내내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체육관과 숙소 안에는 계속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어 그나마 습하지 않았지만, 체육관에서 숙소나 식당으로 가기 위해 이동할 때면 뿌옇게 내리는 비가 보였다. 3박 4일간 진행되는 합숙의 둘째 날, 결국 폭우주의보가 내려 그날의 연습은 일찍 끝났다. 합숙 마지막 날을 장식할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던 감독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안을 고민했고, 일찍 숙소로 돌아오게 된 학생들은 저마다의 여가시간을 보냈다. 잡다한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빡센 훈련 일정 속에서 굴렀던 몸이 씻고 나온 뒤 푹신한 이불에 닿자 불가항력이었다.
곯아떨어졌던 아츠무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창밖에는 번개까지 치는지 번쩍거리는 빛이 보였다가, 몇 초 뒤 시끄럽게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사실 번개보다는 양쪽에 잠들어있던 긴과 오사무에게 발길질을 당해서 깼다. 얘네는 배구부면서 왜 축구를 하고 있냐고. 배 위로 올라온 무거운 다리를 옆으로 치운 뒤, 아츠무는 잠버릇 고약한 제 형제를 힐끗 째려봤다.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남의 이불까지 돌돌 말아 탈취해 간 긴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가, 개운하게 날아가 버린 잠 기운에 아츠무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아츠무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숙소 복도 끝에 있는 라운지였다. 자판기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기댄 채 창문 밖을 응시했다. 고요한 한밤중의 복도는 적막이 흘렀다. 들리는 소리는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와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자판기의 기계 소음. 백색 소음처럼 들리는 소리들에 나른해졌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아츠무는 불청객처럼 불규칙적으로 내리치는 번개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어두워진 창문에 반사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형상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악!!!!!!!!!”
“놀래라, 니 여기서 뭐하는데.”
키타상? 고개를 돌린 아츠무는 눈을 끔뻑거리며 앞에 있는 키타를 바라봤다. 합숙이나 도쿄 출장을 갈 때마다 가장 먼저 잠들었던 키타 신스케가 이 시간에 안 자고 있다니 낯설었다. 컨디션 관리도 중요하다며 항상 잠드는 시간에 바로 자러 들어가는 사람이지 않았나. 아까도 숙소 점검을 끝낸 후 가장 먼저 자러 들어가는 걸 봤었는데.
“중간에 깼는데 잠이 안 와서예... 키타상은요?”
“방금 깼다. 밖에 저렇게 번개 치는데 잠이 와야지.”
니도 마실래? 자판기 앞에 선 키타가 가리키는 손끝을 본 아츠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츠무는 키타가 내민 레몬차를 두 손으로 받았다. 키타의 다른 손에 들린 것은 밀크티였다. 자연스럽게 아츠무의 옆에 앉은 키타는 아츠무처럼 창밖을 바라봤다. 또다시 조용한 적막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핸드폰이 가리킨 시간은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새벽, 합숙의 기상 시간까지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니도 번개 치는 날 싫어하나.”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츠무의 시선이 창밖에서 키타로 옮겨갔다. 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연습도 많이 못 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건 싫어요.
“글나. 니도 번개 때문에 깬 줄 알았다.”
“전 사무가 발로 차고 긴이 이불 뺏어서요.”
퉁명스럽게 불평을 말하는 아츠무를 보며 키타는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키타상은 번개 싫어하세요?"
“어릴 때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무서운 건 아닌데 깜짝깜짝 놀라는 게 싫다.”
본가가 옛날 주택이라 번개가 심하게 치면 정전될 때가 있는데, 어릴 땐 안 좋은 기억이 많았거든. 부모님은 맞벌이라 집에 안 계시제, 할머니가 초나 손전등 찾으러 가서 없는데 옆에 있는 누나는 무서운 이야기하면서 놀리고 그래가...
그건 좀 귀여웠을 것 같기도 하고. 누나한테 놀림당하는 어린 키타 신스케를 떠올리며 아츠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의 성격을 떠올리면 이럴 때 실없는 농담은 하지 말라며 정색하고 혼낼 것 같은데.
“...키타 상은 약점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럼 로봇이게? 맞받아치는 키타의 말에 아츠무는 순간 뜨끔했다. 키타의 앞에서는 다 간파당하는 기분이었다.
키타를 빤히 쳐다보던 아츠무는 키타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앉아있다는 걸 자각했다. 어둠 속에서 적응된 시야로,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키타의 얼굴이 보였다. 늘 동그랗고 단정했던 뒤통수가 잠결에 일어나 부스스하게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숙소 욕실에 있던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쳤네.”
어느새 창밖에는 거짓말처럼 빗소리가 멎어 있었다. 요란하게 울리던 천둥 번개도 조용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밝아오는 새벽하늘이 보였다.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고요했다.
한밤중의 모든 소음이 없어진 지금,
유일하게 시끄러운 심장 소리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불쾌지수가 치솟았던 장마가 끝이 났다.
05. 폭염주의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무더위에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꺼지라...”
미야 아츠무는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렸다. 옆에서 시비를 거는 오사무에게 짜증 낼 기력도 없을 정도로, 찌는 듯한 더위에 열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축축 처지는 몸은 무거웠다. 좀처럼 잔병치레 앓은 적 없이 건강한 편에 속했지만 그런 아츠무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절이 바뀔 때면 한 번씩 심한 감기가 찾아오곤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체육관 에어컨 고장으로 이번 주는 부활동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는 몸 상태에 아츠무는 결국 보건실로 향했다. 학기 중이 아니라 여름 방학 보충 수업 기간이라서 그런지 원래도 자주 자리를 비우는 보건 선생님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빈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아츠무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커튼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츠무는 눈을 떴다. 그새 열이 더 오른 건지 시야가 몽롱했고, 식은땀을 흘린 몸은 찝찝했다. 선생님도 온 것 같으니 약을 받으려고 커튼을 걷어내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아츠무?”
놀란 아츠무는 숨을 삼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츠무의 시선이 평소보다 높이 있는 키타의 시선과 마주쳤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 같은 아츠무의 모습에 키타는 약을 먹었냐고 물었다. 보건 선생님이 안 계셔서요. 그럼 바로 조퇴하지 그랬어. 키타는 익숙한 듯 보건실의 서랍을 열어 감기약을 꺼냈다.
“마음대로 뒤져도 괜찮아요?”
“이 서랍 안에 있는 건 꺼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
키타는 미지근한 물과 알약 하나를 건넸고, 서랍을 더 뒤지더니 체온계와 해열 패치도 꺼냈다. 삑, 아츠무가 체온계를 귀에서 떼어내자 경고등처럼 노란 불빛이 화면에 깜빡거렸다. 이것도 붙이고 있으라며 키타는 해열 패치를 떼서 멍하게 앉아있는 아츠무의 이마에 붙였다. 꾹꾹 눌러 붙인 손길이 간지러웠다. 아마 곧 오실테니 더 누워있어. 아츠무는 키타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힐끗 곁눈질하자 보건 선생님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쓰는 키타가 보였다. 학생용 의자를 끌고 와 앉은 키타는 아마도 보건실에 방문한 이유로 보이는 설문지를 쌓아놓고 정리하고 있었다. 팔랑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가 보건실을 채웠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아츠무는 눈을 감았다.
아츠무가 깼을 때 키타가 있던 자리에는 보건 선생님밖에 없었다. 일어났으면 열 다시 재보자, 약은 키타가 챙겨줬다고 들었는데. 보건 선생님의 손에 들린 체온계는 아까보다 낮은 온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약 효과 덕분인지 잠들기 전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츠무는 미지근해진 해열 시트를 이마에서 떼어내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아, 그것도 챙겨가고.”
선생님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비닐봉지가 있었다. 감기에 좋은 것들로 가득한 봉투. 이번엔 쪽지가 없다는 차이만 빼면 반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익숙함을 느끼며 내용물을 확인한 아츠무의 손끝이 레몬차 페트병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 왜 다정한 건데.”
비슷한 상황에 놓이고서야, 미야 아츠무는 키타 신스케를 향한 감정이 작년과 달라졌음을 인정했다. 어느 날은 잔소리를 쏟아내며 기강을 잡았다가, 또 어떤 날은 어린애를 챙겨주듯 다정하게 구는 사람. 배구부에서는 그렇게 무섭고 엄격한 선배인 키타 신스케가, 제게 누그러지고 다정해지는 순간들이 좋았다.
차라리 무섭기만 한 선배라고 생각했을 때가 나았을까. 키타 신스케의 다정한 면을 알게 되고, 그 다정함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기분이 울렁거릴 줄 알았다면.
그러니까 이 감정은 여름 감기와도 닮았다. 걸리기 전까지는 얼마나 지독하게 앓을지 몰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그런 거. 애써 다른 핑계와 호기심이니 다른 이름을 붙여왔지만, 이제는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키타 신스케가,
미야 아츠무를 특별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지금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게 ‘키타 신스케’를 향한 관심이었다. 그동안의 답답했던 감정들이 유치한 질투였다는 것도.
미야 아츠무는 사랑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배구 스타일은 사랑을 닮았다고 평가받지만. 그 나이대 또래처럼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미야 아츠무가 언제나 1순위로 여기는 사랑은 한결같이 배구였으므로.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답게 자신을 향하는 애정은 눈치 빠르게 읽으면서도, 정작 연애 경험은 없었다.
아츠무에게 호감을 보였던 학생들의 절반은 예민한 아츠무의 성깔과 필터링 없는 말투를 알게 되면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은 인기 많은 남자애한테 기대했던 환상과 달리 까보니까 그냥 유치하고 촐싹거리는 놈이라는 이유로 관심이 식었다. 미야 아츠무 안의 배구가 지닌 존재감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이유로 조용히 마음을 접은 사람도 있었다. 결국 미야 아츠무를 ‘연인으로는 영 아니지만 얼굴이랑 배구하는 모습은 멋진 녀석’ 정도로 생각하는 팬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했다. 처음부터 순수하게 아츠무의 배구를 응원하는 팬도 있었으나 아츠무에게 사심을 가졌다가 결국 팬으로 남은 부류도 꽤 많다는 사실을, 비슷한 얼굴과 스펙을 가졌음에도 미야 오사무가 미야 아츠무보다 연애 대상으로서 수요가 더 많다는 것을 아츠무 본인만 몰랐다.
결국 미야 아츠무의 인생에 제대로 된 데이트 경험은 없었다는 소리다. 데이트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발단은 바로 어제였다.
보건실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최근 아츠무는 키타를 피하고 있었다. 키타 신스케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특별하게 여겨주면 좋겠는데, 그게 단순히 인정받는 후배보다는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감정에 뚜렷한 이름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이 겁이 나 최선을 다해 모른 척하는 사람처럼.
“니 나 피하나.”
배구부 연습이 끝나고 창고에서 공을 정리하느라 둘만 남은 상황에서 키타는 돌직구를 던졌다. 다른 부원들이 먼저 나간 타이밍에 키타가 담담한 목소리로 아츠무, 하고 부른 뒤에 따라 나온 말은 ‘저녁 뭐 먹을 거냐’라고 물어보는 듯한 말투치고는 살벌하게 정곡을 찔렀다.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이 바닥으로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제, 제가요...?”
“요즘 눈 마주치면 바로 피하는 것 같아가.”
니 혹시 뭔 잘못했나. 괜히 머리 굴릴 생각하지말고 퍼뜩 말해라. 지금까지 아츠무가 저지른 각종 사고들을 떠올리는 듯 키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냥... 요즘 좀 고민이 있어서예....”
... 사실 그 고민의 이유가 키타상이긴 한데요. 아츠무는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이런저런 변명을 갖다 붙였더니 미야 아츠무의 고민은 전혀 다른 이유가 되었다. 다른 녀석들한테는 진지한 상담을 하기 어려워서 키타상한테 말해볼까 고민했다는 변명이 통했는지 키타의 얼굴에서 의심이 가셨다.
“내일 따로 일정 있나.”
“아뇨 없는데요...”
“그럼 내랑 시내에서 볼까.”
그게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키타 신스케와 주말에 따로 둘이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츠무는 아슬아슬하게 전철을 탔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는데도 평소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 탓이었다. 그냥 교복을 입고 갈지, 아니면 사복을 입고 가는 게 좋을지. 옷장 앞에서 고민하던 아츠무는 오늘따라 끌리는 옷이 없어 옆에 있던 오사무의 옷을 슬쩍 꺼내 입었다. 아츠무가 집에서 나올 때쯤 일어난 오사무는 아츠무가 입은 옷이 얼마 전 새로 산 제 옷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거 내 옷 아니가.”
“어, 오늘만 좀 빌릴게.”
“혹시 니가 말하는 오늘이 내가 아는 의미랑 다른 거가.”
한두 번이 아닌 아츠무의 뻔뻔함에 오사무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사이 아츠무는 빨리 가봐야 한다며 잽싸게 도망갔다.
[도착했다. 출구 앞에 있을게.]
키타의 문자 메시지는 이모티콘 하나 없이 담백했다. 저도 이제 내려요, 아츠무는 답장을 보내고 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며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어제 미야 아츠무가 키타 신스케에게 둘러댔던 변명은, 원래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가 되었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찾아오는 진로 조사, 성적표,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이 시기에 한 번쯤 고민하는 미래에 대한 생각과 싱숭생숭한 기분. 어릴 적부터 프로 선수를 꿈꿔왔고 그럴 만한 실력으로 유망주가 된 아츠무에게는 딱히 고민이 아니었으나, 그날 오전에 주변에서 나왔던 이야기라서 갖다 쓴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진짜 심란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1학년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확실히 2학년이 된 후부터는 주변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었고, 배구부 2학년들끼리 이 주제가 나와 이야기하던 중 오사무가 배구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면서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늘 싸우는 게 일상이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결국 서로 자기가 더 성공해 주겠다며 선전포고를 하고 화해했지만, 오사무가 긴, 스나와 입시 준비 이야기를 할 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실상은 아무 생각 없을 때가 많은 스나는 계속 배구를 할 생각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글쎄, 라는 답변만 내놨다. 배구를 계속해도, 배구를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말투였다. 긴은 선수를 준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운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오사무는 요리 관련 대학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츠무에게는 제가 몰랐던, 아마도 꽤 예전부터 준비한 듯한 정보들을 늘어놓는 오사무의 모습은 낯설었다.
“오사무 말에 틀린 건 없다. 니는 니고, 갸는 갸고.”
“....알고 있어요....”
점심을 먹으며 편한 분위기 속에서 하는 상담이었는데 정론으로 때리는 키타 때문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오사무가 했던 말은 아츠무에게 더 날카롭게 들렸다. 미야 아츠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에는 당연히 같은 코트에서 날뛰는 오사무가 있었다. 오사무가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최고의 파트너이자 최고의 라이벌. 그런 녀석이 아무런 미련 없이 배구를 그만둔다고 말하는 순간 밀려오는 배신감, 서운함, 그리고 아쉬움.
그래도 그렇게 배구를 좋아했는데,
실력도 있으면서 쌓아온 게 아깝지 않나?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형제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결정을 무르지 않을 녀석이라는 걸 알아서, 아츠무는 ‘미야 오사무’가 없는 배구를 처음으로 상상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만큼 아쉬우니까 니도 속상하겄제.”
처음 배구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이 해왔으니까. 오사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어도, 아츠무 니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꼭 코트 안에서 같이 뛰는 게 아니라도, 같이 뛴다고 생각하는 건?”
같이 코트에 서지 않아도 시합은 그 팀 모두의 시합인 것처럼. 코트 안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키타 신스케의 배구. 아츠무와 달리 코트 밖에서 함께 하는 시합의 의미를 알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니가 프로에 가고, 오사무가 배구를 그만둬도, 네 배구에서 오사무랑 같이 쌓아 올렸던 배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츠무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아츠무 니는, 실력 좋은 세터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공을 올릴지 선택할 수 있고, 누구한테도 올릴 수 있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시합을 뛰고, 그러다 보면 분명 미야 오사무처럼 공을 올리고 싶은 재밌는 선수를 찾을지도 모르제.
“분명 잘할 거다.”
남 듣기 좋은 말을 꾸밀 줄 모르는, 항상 정론만 말하는 키타 신스케. 그래서 그 말은 더 위로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헤어지기 아쉬워 아츠무는 근처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에 들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 새 무릎 보호대를 살 때가 된 키타도 좋다고 했고, 구경하는 내내 공통 주제인 배구가 있어서 그런지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문제집을 살 게 있다던 키타를 따라 서점에 들렀고, 인형 뽑기랑 여러 게임기가 있는 게임방에 들리기도 했다.
손으로 하는 건 자신 있다며 승부욕을 불태우던 아츠무는 몇 번의 실패 끝에 금방 인형을 뽑았다. 이상하게 계속 눈에 걸리던 흰색 여우 인형. 막상 뽑고 나니 인형이 갖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어린 동생도 있는 키타에게 선물했다. 아츠무에게 말려들어 게임방에 들어온 키타는 아츠무의 예상대로 이런 곳은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아츠무가 먼저 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금세 조작에 익숙해졌다. 착실하게 정공법으로 플레이하는 모습이 키타 신스케 다웠다.
“왜 이렇게 잘해요??”
“그냥 마을 축제 같은 데서 많이 해 봤다.”
의외였던 건 사격 게임이었는데, 교과서에 그린 것처럼 완벽한 자세로 키타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아츠무가 가장 자신 있는 게임이라고 폼을 잡았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한낮의 무더위에 잠시 카페로 피신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더니 생각보다 꽤 재밌었다. 뭔가 평범한 데이트 같기도 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감상에 아츠무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메리카노 커피와 전통 차만 마실 것 같은 이미지였던 키타는 예상과 다르게 버블티를 주문했다. 버블티 좋아하세요? 차 즐겨 드시는 건 알았는데. 아츠무는 종종 오오미미와 차를 마시던 키타를 떠올렸다가,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노부부 같다’고 말했던 것도 생각났다. 왜 그런 말을 했지.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아츠무가 속으로 북 치고 장구 치는 것과 달리 키타의 표정은 평온했다. 최근에 처음 마셔봤는데, 식감이 재밌어서 좋다. 키타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빨대를 타고 타피오카 펄이 퐁퐁 올라가 사라졌다.
“키타 상은 진학반이죠?”
오늘 산 것들을 꺼내며 다시 가방 정리를 하다가 아까 서점에서 산 키타의 문제집이 보였다. 대학 입시 관련 수험서였다. 키타가 공부를 잘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진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 시기에 3학년들은 거의 진로를 정해서 부활동을 그만두고 다음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나 진학을 위한 수험 공부에 집중했다. 보통 운동부 학생들은 인터하이를 끝으로 3학년들이 은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배구부 3학년들도 감독님과 담임 선생님과 각각 면담을 하긴 했지만, 주장인 키타를 포함해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키타는 인터하이 끝나면 남은 방학 기간에 단기 강습을 들으러 간다고 했다. 그때 필요한 문제집이었다. 인터하이가 끝나도 배구부 연습은 계속 진행되니까 병행한다고 생각하면 제법 빡센 일정이었다.
“키타 상도 가고 싶은 곳 정했어요?”
아란은 프로 팀을 노리는 중이라 감독님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다른 선배들은 다 진학 준비를 한다고 들었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체육 쪽으로 가요? 아니면 다른 분야?”
“농학부.”
예상외의 답변에 아츠무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도 운동부 주장까지 했으면 선수가 아니라도 체육과 관련된 학과에 가산점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전 선수였던 아카키도 체육교육 쪽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농학부는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지였다.
“니도 뜬금없다고 생각하나?”
키타 신스케는 지금까지 늘 묵묵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무얼 하고 싶다거나 좋아한다는 개인 기호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3학년이 된 후부터는 조금씩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경우가 늘긴 했지만 아직도 키타 신스케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을 정도로. 그래서 좀 놀라긴 했지만, 뜬금없냐고 물으면-
“아뇨,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려서요.”
농학부라고 꼭 다 농부가 되는 건 아니라지만, 농사와 키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졌다.
“키타상은 항상 부실에 가장 먼저 오고, 남이 시키지 않은 청소도 하잖아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게으름 피우지 않는 거, 엄청 성실하다고 생각해요.”
“.....”
“동아리 후배 아프다고 그렇게 챙겨줄 정도로, 항상 주변 챙기는 것도 그렇고.”
미야 아츠무와 키타 신스케의 시선이 맞닿았다.
“뭔가를 키워내고 정성을 들인다는 거, 키타상이랑 잘 어울려요.”
몇 초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츠무가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키타의 눈이 커졌다.
“... 그렇게 말해주니까 좀 부끄러운데. 고맙다.”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제 입으로 털어놓은 기분이라, 아츠무도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황급히 가고 싶은 대학도 정했냐며 화제를 돌리자 키타는 국공립 대학을 노리는 중이라고 답했다.
“목표는 교토대 농학부인데.”
교토대를 목표로 말할 수 있는 성적에 감탄하기도 잠시, 교토, 고베, 도쿄, 큐슈, 나고야... 그 외 농학부로 유명한 국립대의 이름을 듣는 아츠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나마 교토와 고베는 가깝기라도 하지, 효고 현에서 오사카와 교토의 대학에 가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보다 더 먼 지역에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새삼스럽게 키타 신스케가 내년에 이곳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났다.
최근 혼자 들뜨고, 심란해하고, 기대했던 게 전부 바보 같았다.
그래봤자 키타 신스케에게 미야 아츠무는 동아리 후배에 불과할 텐데.
카페에서 더위를 식히고 나왔는데도 조금만 걸어도 더워져서,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매미 소리와 도로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바람이 불어도 후끈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더위에 지친 것처럼 아까보다 말수가 줄었다.
건널목에 도착하자 열차가 들어오는 경고음과 함께 안전바가 내려와 발걸음을 멈췄다. 아츠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키타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전철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아츠무는 되물으며 고개를 좀 더 키타 쪽으로 숙였다. 별 거 아니었다, 키타의 말이 흐릿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나중에 졸업해도 연락하자고.”
열차가 통과한 뒤 마지막 말이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손에 들린 막대 아이스크림이 녹아 바닥에 떨어졌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키타를 바라보는 아츠무의 뒤로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한여름의 폭염주의보처럼, 곧 마주하게 될 감정의 열기를 예고하는 듯 요란한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조만간 대학 입시 준비로 바빠질 사람, 내년에는 이곳을 떠나 어쩌면 멀리 있는 대학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사람, 항상 연락하던 친구도 아니고 졸업 후 동창회 정도에서나 안부를 물어보는 사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동아리 선후배. 이제 와서 감정을 자각한다고 해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랄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애매한 관계. 그렇게 생각했던 아츠무에게 키타의 한 마디는 어떤 허락과도 같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제는 참을 수 없을 거라고, 아마 나는 망해버렸다고.
미야 아츠무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폭염의 시작이었다.
긴 짝사랑의 시작, 그 열기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06. 열대야
[키타상, 저희 인터하이 예선 통과했어요]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아츠무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고작 예선 통과로 들뜰 레벨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키타상이라서. 전 주장이었던 키타에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선전포고한데다가 아츠무가 3학년이 되고 주장으로 코트 위에 서는 공식 대회이기도 했다. 물론 인터하이 예선은 가뿐하게 통과했지만, 저번 봄고가 첫 출장 시합에서 끝났던 기억은 제법 강렬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고, 매년 완전히 다른 팀으로 바뀌는 고교 배구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말이나 지난 대회에서 거둔 성적 같은 수식어들은 무의미했다. 결국 모두가 도전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작년의 이나리자키를 꺾은 것도 이타치야마 같은 강호교가 아닌 새롭게 등장한 카라스노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예선의 결승 시합에서 승패를 가르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키타상에게 이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응원하러 온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그냥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번 인터하이 예선 경기를 앞두고 키타는 시합을 보러 오고 싶었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온다며 문자로 응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이 화면 너머로 느껴졌지만, 그 연락을 받고 조금 섭섭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무 생각 없었을 텐데, 내심 키타상이 보러 와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받은 셈이었다.
아직 답장이 없는 화면을 올려 지금까지 주고받은 연락 내역을 훑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키타상과 이렇게 계속 연락을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학년 때는 졸업하면 얼굴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2학년 때도 무섭고 어려운 선배였던 키타는 기껏해야 배구부 동창회나 단체 채팅방에서 근황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졸업하고도 연락하자고 먼저 말한 것은 키타였다. 아츠무는 주장이 된 후 이런저런 사소한 상담을 했고, 그렇게 키타와의 연락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바쁜 시기에는 그 텀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키타는 항상 답장을 해줬다.
대학생이 된 키타는 여전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시절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는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뀌었다. 봄고에서 환하게 웃던 표정만큼 웃는 일이 늘었고, 가끔은 구분하기 힘든 농담도 던졌다. 키타와의 연락은 예전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더 이상 코트 뒤에서 압박감이 담긴 눈으로 지켜보던 엄격한 선배가 아니었으니까. 감기에 걸렸다고 우메보시를 챙겨주던 것처럼, 주변을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던 키타는 졸업 후에도 고등학교 후배의 고민 상담에 어울려주는 사람이었다.
봄고가 끝나고 차기 주장으로 임명된 뒤 인수인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벚꽃이 피는 봄 3학년들의 졸업식에서,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며 웃던 키타의 앞에서 아츠무는 울었다. 그 후로는 정신없는 한 학기였다. 그 등에 걸렸던 번호가 달린 유니폼을 물려받고, 그 낯선 숫자에 적응하기도 전에 후배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팀에 적응해야 했다.
아츠무는 지금까지 ‘세터’로서 플레이하는 배구는 자신 있었다. 스파이커도 본인의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토스. 어떤 팀에서도 제 역량을 뽐낼 자신이 있었고, 대회 성적과 청소년 유스 후보에 선택된 유망주라는 수식어로 실력을 입증했다. 중학생 시절 같은 팀원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타격은 없었다. 그 토스를 따라올 수 있는 강한 팀원과 함께 하면 강한 팀이 되는 거니까. 그러나 ‘주장’이 된 후 마주하는 팀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고민하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특히나 바로 앞에서 보았던 주장의 존재감이 강렬했다면 더더욱.
아츠무가 생각하기에 키타 신스케는 주장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정작 그가 주장이었고 함께 팀을 이뤘던 시기는 고작 1년이었는데도. 매년 다른 팀이 되는 학창 시절의 배구, 어린 시절부터 배구를 하면서 만났던 주장은 많았지만 가장 강렬했던 사람을 뽑는다면 키타였다.
그리고 그런 그와 정확히 정반대인 미야 아츠무.
차기 주장을 발표했던 날, 1번이 찍힌 유니폼을 받았던 순간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감독님은 3학년들 중 특히 키타가 자신을 차기 주장으로 추천했다고 말했지만, 그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키타 신스케의 생각은 읽기 어려웠다.
아츠무는 시합에서의 흥분이 가라앉고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감독님이 사준 밥을 먹고 귀가한 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확인하니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잘했네, 수고했어. 본선은 꼭 보러 갈게.]
6월 인터하이 예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되는 8월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아츠무는 문자 하나로 들뜨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짧은 메시지를 읽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인터하이 본선에서 이나리자키고교 배구부는 흐름을 탔다. 지난 봄고의 아쉬움을 털어내는 것처럼, 결승에 진출하며 명성을 되찾았다. 카라스노를 다시 만나 꺾어주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진출하지 못한 듯했다. 차세대를 이끌 세터로 주목받으며 함께 거론되는 카게야마 토비오, 언젠가 공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던 히나타 소요. 미야 아츠무의 배구에 새롭게 등장한 재밌는 녀석들. 배구를 계속하는 이상 그 둘은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봄고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일단은 이 시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에 꼭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이나리자키 합주부의 응원곡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아츠무의 서브 차례, 팔을 들자 웅장했던 응원곡이 일순간에 멈췄다. 미야 아츠무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독무대, 서브 에이스로 코트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여전히 날아다니네.”
“오늘따라 더 신난 것 같은데.”
아란과 아카키의 감상에 오오미미가 동의하고 키타는 웃었다. 첫 세트를 무사히 따온 후 코트를 교체하는 사이, 아츠무는 응원석 맨 앞에 있는 선배들을 발견했다. 아츠무의 잔뜩 들떠있는 표정이 키타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 밝아졌다.
올해의 인터하이는 이나리자키의 우승으로 끝났다.
인터하이가 끝난 다음 날 졸업생들은 감독님을 만나러 학교에 방문했다. 쿠로스 감독은 선수로 뛰고 있는 아란의 경기를 잘 보고 있다는 말과 다른 세 사람의 대학 생활 근황 같은 것들을 물어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온 김에 후배들 연습을 도와주겠냐는 농담 섞인 제안에 얼떨결에 팀을 꾸려 연습 시합을 뛰었고, 아츠무는 오랜만에 키타와 함께 코트에 섰다. 압박감이 느껴지는 듯한 시선, 하지만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존재감에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번 방학에는 계속 계시는 거예요?”
“응.”
함께 돌아가는 길에 키타가 이번 방학이 끝날 때까지 본가에 있을 거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교토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취를 시작한 키타는 입학 후 첫 학기부터 바쁘게 지냈다. 대학에서도 맡게 된 것들이 많아 방학이 된 후에도 바로 내려오지 못했기에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SNS를 활발히 하거나 본인 사진을 프로필로 해두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볼 때마다 대학생이 된 키타의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공부는 잘하고 있나, 키타의 질문에 시선을 피하는 아츠무였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까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건 다르던데. 빤히 쳐다보는 키타의 시선에 아츠무는 뜨끔거리는 기분이었다. 3학년이 되고 배구부 활동에도 더 열을 올렸지만, 저마다 부활동 외에도 신경 쓸 일들이 늘어났다. 오사무는 요리학원을 등록했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적 관리를 위해 그토록 관심 없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긴과 스나도 그 흐름에 합세하면서 성적이 많이 올랐다. 유일하게 성적이 떨어진 것은 아츠무 뿐이었다. 주장이면서 낙제점 위기를 간신히 면하고 있는 상황에, 아츠무를 꽉 잡아주던 키타의 부재를 감독님은 절실히 느꼈다. 아란과 마찬가지로 프로를 준비하고 있어서 성적이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무사히 졸업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경기 출전을 허락받으려면 최소한의 공부는 필요했다.
“내가 과외해 줄까.”
키타 신스케의 집은 마을버스를 타고 좀 더 외곽으로 나가는 곳에 있었다. 넓은 논밭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중에서도 가장 큰 전통 가옥이 키타의 집이었다.
“들어 와.”
키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아츠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시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여행 갔다. 직장에 다녀서 독립한 누나와 친구 집에 놀러 갔다는 남동생까지, 지금 집에는 키타 신스케뿐이라는 뜻이었다. 살짝 긴장한 상태로 들어간 키타의 방은 예상대로 깔끔했다. 대학교 전공 서적을 비롯한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 한편에는 고등학생 때의 흔적인 배구공과 이나리자키 교복, 체육복이 잘 개어진 채로 올려져 있었다. 작은방은 아니었지만 덩치 큰 남자들끼리 바닥에 책상을 펴고 앉아있기엔 애매해서 짐만 챙긴 후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평범했던 방과 부엌과 달리 거실은 다다미로 되어 있었다. 마루로 이어지는 문을 활짝 열어두어 작은 마당이 보였다.
문제를 푸는 내내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와 밖에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나른하고 좋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키타의 목소리와 탁자 위에 둔 보리차의 얼음이 녹아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한참 공부에 집중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키타가 가져온 수박을 먹었다. 아삭하게 베어 먹을 때마다 나오는 시원하고 달달한 과즙,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앞머리. 키타의 집에 오기 전까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막상 오니 시골 할머니 댁이 떠오르는 느낌이라 편안했다. 공부는 따분했지만 키타 신스케와 단둘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키타에게 단기 과외를 받는 동안 아츠무는 키타의 집에 몇 번 더 방문했다. 키타의 집에 갈 때마다 수박, 참외, 복숭아 같은 간식들도 얻어먹었다. 어떤 날은 아츠무의 집에 키타를 초대했고, 오사무나 긴, 스나와 함께 모인 날도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여름 방학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키타상,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가고 싶은 곳?”
아츠무가 키타에게 공짜로 단기 과외를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부모님은 아츠무의 등짝을 때렸다. 제대로 된 과외도 아니고 그냥 공부를 봐준 것뿐이라며 보상을 거절한 키타에게 부모님은 같이 놀러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고 용돈을 쥐여줬다.
“....바다?”
키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대답에, 다소 충동적인 바다행이 결정되었다.
“제가 보답하려고 한 건데....”
“됐다. 니가 데려다준다고 한 거였으면 바다 간다고 안 했지.”
조수석에 앉은 아츠무의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툭 튀어나왔다. 부모님한테 빌린 차였지만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모는 키타는 아츠무보다 훨씬 어른 같았다. 운전면허는 또 언제 딴 건지, 안전 운전으로 신호를 칼같이 지키느라 예상보다 도착 시간은 늦어졌지만 그래도 제법 능숙한 운전 실력이었다. 아츠무는 속으로 어른이 되면 바로 할 일 리스트 중에 운전면허 따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바다로 드라이브 가는 것쯤이야 언제든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차를 사기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금기와 습기가 가득한 바다 냄새가 났다. 미리 아츠무가 검색해둔 맛집 리스트는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아츠무가 찾은 마지막 후보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배를 채운 후에는 바다를 따라 걸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햇볕에 반짝이는 수평선이 멀리까지 보였다.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흔적을 남기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근처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고 나서 저녁 늦게 불꽃놀이도 한다는 걸 알았지만, 숙소를 잡고 온 게 아닌 당일치기 여행이라 늦게까지 있을 수는 없어서 불꽃놀이는 포기해야 했다.
“키타 상, 잠시만요!”
뭔가 생각난 듯 키타를 내버려 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아츠무는 곧 작은 불꽃놀이 세트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모래사장 위에 쭈그려 앉아 스파클라 막대를 꺼낸 아츠무의 표정은 신나 보였다.
“...근데 라이터가 없어요.”
들뜬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아츠무는 주변 사람들한테 빌려오겠다며 키타가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튀어나갔다. 저쪽에 보이는 관광객 가족에게 말을 거는 듯하더니 라이터를 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키타 상!! 해맑은 표정으로 뛰어오는 아츠무를 키타는 지켜봤다. 생각보다 불이 잘 붙지 않아 한참을 낑낑거리다가 간신히 불을 붙였고, 막대 끝에서 불꽃이 화려하게 튀었다. 싸구려 불꽃놀이 세트는 금방 불이 꺼졌다. 마지막 막대가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츠무는 고개를 들어 키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타의 눈동자에 반사되는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문득 주변을 보니 대부분 커플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그저 고등학교 선후배 출신인 두 사람이 단둘이서 바다까지 와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아츠무는 키타와 유지하고 있는 요즘의 미묘한 거리감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작년 여름에 키타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후로 아츠무는 지금까지 고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키타 신스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인정받는 후배’로서의 마음인지 ‘그 이상’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지나, 아츠무의 마음은 둘째치고 키타가 그 마음을 받아들여 다음 단계로 가는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마음을 접고 포기한 건 아니었으나, 지금 이 상태도 나쁘지 않아 만족스럽다. 아츠무도 키타도 각자 집중해야 할 일이 있었고, 엄격한 키타라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연애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살 차이라도 고등학생인 아츠무와 이제 어른이 된 키타가 사귀는 것도 선을 그을 것 같아서. 지금은 별로 승산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변명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키타에게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다. 그저 다정하게 대했을 뿐인 후배라는 걸 키타의 입으로 듣는 게 무서웠다. 당장 오늘 운전을 하던 키타도 그렇고, 대학생이 된 후 들려오는 키타의 근황도 그렇고. 저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된 키타 신스케에게 미야 아츠무는 챙겨줘야 할 후배, 동생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연애 대상으로는 멋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적어도 내년에 졸업하고 나서, 제 몫을 다하는 어른이 되면. 지난 봄고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랑할 수 있는 후배, 인정받는 사람이 되면. 그렇게 계속 미루고 미루는 고백이었다.
“키타상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갑자기 바다에 가기로 결정하고 바로 다음 날 떠난 것만큼이나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어딘가 홀린 것처럼, 일탈로 풀어진 긴장감과 여름밤의 바다라는 장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냥, 주변을 보니 커플이 많길래요. 키타상도 그런 쪽에 관심이 있나 싶어서.. 횡설수설 덧붙이는 변명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했다.
“있다. 예전부터 좋아한 사람.”
없다거나,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키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츠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인데요?”
“엄청 솔직해가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사람.”
솔직해서 표정에 다 드러나는 사람? 키타 신스케의 취향은 키타와 비슷한 어른스러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정반대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가. 예전부터 좋아한 사람이면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은 아닐 거다. 키타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열심히 떠올려 봤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바쁜 키타를 보고 대학 가서 연애라도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하던 아란이 생각났다. 아카키의 주선으로 소개팅도 했다고 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밤잠을 설쳤던 게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왜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대. 아츠무는 마음에도 없는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오늘은 즐거웠는데,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높았다.
“그럼 그 사람이랑도 이런 데 놀러 가고 그랬어요?”
“...놀러 오긴 했다.”
“고백은 안 해요?”
너무 캐묻는 느낌이려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보려고 노력했는데 금방이라도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숨 막히도록 길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던 키타는 결국 입을 열었다.
“걔가 고3이라, 아직 학생이라 안 된다.”
툭, 불꽃이 꺼진 막대 끝이 바스러져 모래 위로 떨어졌다. 시선을 피하고 있던 아츠무가 다시 키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키타는 아츠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착각하고 싶지 않은데.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도 뛰었다. 머릿속을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사고가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착각이 아니라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다면.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츠무,”
키타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오늘따라 부드럽게 들렸다. 이름 하나 불렸다고 잔뜩 긴장해서 떨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서운 잔소리일 가능성이 높아서 그랬었다. 지금 키타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 뒤에 이어질 말은 뭘까. 이 순간만큼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난 그냥 후배랑 둘이서만 이런 곳에 안 놀러 온다.”
키타 신스케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늘 여유롭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키타 신스케. 충동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감정 변화도 크지 않은 담백한 사람. 그런 수식어를 모두 잊어버릴 만큼,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는 키타의 눈빛은 조금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사실 키타 상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응.”
“지금 하면 받아 주실 거예요?”
아츠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허락을 구했다가, 키타가 답하기도 전에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역시 지금은 못 말해요.”
졸업하고, 더 멋진 곳에서 제가 먼저 말할 거에요. 지금은 얻어 걸린 느낌이잖아요. 그리고 고3이라 학생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못 받아주신다고 할 것 같고.... 횡설수설하는 아츠무 앞에서 키타는 알겠다며 넘겼다.
“기다려주세요.”
“알겠으니까 빨리 졸업해, 아츠무.”
아, 또 그런 표정이다. 눈을 접은 채로 푸스스 웃고 있는 키타를 보며 아츠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말하고 싶었다. 아직도 반년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길게 느껴지면서도, 이 이상한 유예기간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은 서투른 감정을 다듬어서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마침내 긴 여름이 끝나간다. 들끓는 감정에 잠들지 못했던 열대야가 끝났다. 이 여름이 끝나면 난 당신과 함께하는 여름을 기다릴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그리고 당신 곁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봄이 오기까지. 앞으로 다가올 여러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낼 기회를 주었으니,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게요.
그러니 이 여름이 지나간 후에도 만나주세요.
어떤 계절이든, 그 계절의 끝에는 나와 함께해 주세요.
07. 미야 아츠무
미야 아츠무는 여름을 닮았다.
눈부실 만큼 강한 여름 햇살처럼 강렬하고,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정작 그가 태어난 계절인 가을보다는 생기 넘치는 여름을 닮았다. 하루가 멀다시피 바뀌는 여름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늘 새로운 변화 속에 있는 사람.
쌍둥이 형제와 짝을 이루면 여름날의 더위를 떠올리게 되는 이름, 쨍하게 밝은 금발 염색 머리. 그가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배구에서도 언제나 화려하고 날뛰는 플레이가 눈에 띄었다. 아츠무의 플레이와 성격은 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늘 즐겁다는 눈을 하고 경기를 하는 아츠무를 보고 있으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그 애의 배구에는 계속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등 뒤를 지켜주고 싶다고, 그렇게 해서 더 오래 그 녀석들의 배구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부터 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미야 쌍둥이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대회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주전도 벤치 멤버도 아닌 배구부원으로 따라갔던 경기에서 응원석에 앉아있으면 관객들 사이로 오가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효고현의 중학교 배구대회에서 최근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강호교, 야코중학교. 중학생인데도 큰 키와 체격으로 유망주로 뽑히는 스파이커 아란과, 한 학년 아래의 미야 쌍둥이는 유명했다.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을 쿠로스 감독의 제안으로 이나리자키고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츠무가 입부했을 때 3학년 선배들 중 미야 아츠무가 건방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험한 말을 하고, 딱히 불만을 숨기지 않는 것 같다고는 생각했으나 키타가 보기에 미야 아츠무는 성실한 녀석이었다. 분명 재능도 있겠으나 연습에 매진하는 아츠무를 보고 있으면 그 실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종종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나쁜 쪽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강한 승부욕만큼 배구를 사랑했다.
“오버워크는 금지라고 했을 텐데?”
키타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바로 주전 자리를 따냈다. 첫 공식 시합을 앞두고 1학년들끼리 남아 추가 연습을 할 정도로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 연습을 주도하는 건 주로 미야 아츠무인 듯했다. 오버워크는 금지라는 규칙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에서 키타는 몇 번 그 연습을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의욕이 앞서 연습 시간이 과하게 초과되길래 주의를 주었다. 아츠무는 흐름이 끊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 후에 심한 감기에 걸렸으면서 연습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 날도 있었다.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고, 아츠무를 돌려보내는데 이상하게 눈에 밟혀서 감기에 좋은 음식들을 사다가 주기도 했다. 연습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돌아갔을 때 그 봉투는 없어져 있었고, 다음 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던 아츠무는 그전보다 유해진 표정으로 키타를 대했다.
아츠무와 지내면서 생각한 것은 감정이 풍부하고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라는 거였다. 특히 코트 위에서의 아츠무는 쌍둥이인 오사무의 말을 빌리자면 5살짜리 어린아이 같았다.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신나면 마음껏 신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미야 아츠무는 키타 신스케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배구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처럼,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그 감정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왔던 키타 신스케에게는 새로운 부류였다.
언젠가 재능 있는 후배가 있으면 괴롭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키타는 바로 미야 쌍둥이를 떠올렸다. 괴물들의 잔치에 초대된 인간이면 운이 좋은 것 아닌가. 평생 저와는 거리가 멀었던 충동적인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매 순간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는 기분이라 즐거웠다.
“수건!!! 수건 가져올게요!!! 잠시만예!!”
“됐다. 날도 더운데 금방 마르겠지.”
물론 미야 아츠무는 각종 사고를 몰고 다녔기에, 잔소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다가 아츠무가 물을 끼얹었을 때라던가. 동아리 후배들에게 마냥 편한 선배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제 딴에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도 바짝 긴장한 모습들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 앞에서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구는 그 모습을 보면 누가 아츠무를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아츠무가 건넨 겉옷은 키타에게는 조금 컸다. 배구부에서야 워낙 큰 녀석들이 많다지만 반에서나 가족들 사이에서는 키가 큰 편이라 별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저보다 더 위에 있는 시선과 품이 남는 체육복이 이상했다.
“니도 뜬금없다고 생각하나?”
농학부가 유명한 대학은 국립대에 몰려 있고 학비 부담도 적으니 억지로 다른 학과를 넣으면서까지 사립대학을 지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률이 높고 지금 성적으로는 사립대에 있는 인기 학과를 노려보기도 충분해서 선생님들은 말리는 분위기였다.
요즘 젊은 애들 중에 가업을 잇겠다고 다른 선택지도 생각해 보지 않는 게 애늙은이 같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효고에 사는 친척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고, 다른 선택지를 고른 부모님이나 누나와는 달리 키타는 이 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졸업한 후에도 배구를 할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늘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해야 하는 일을 했기에.
“아뇨,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려서요.”
미야 아츠무는 키타 신스케가 처음 듣는 답변을 내놓았다.
“키타상은 항상 부실에 가장 먼저 오고, 남이 시키지 않은 청소도 하잖아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게으름 피우지 않는 거, 엄청 성실하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그 말을 듣는 내내 기분이 울렁거렸다.
“동아리 후배 아프다고 그렇게 챙겨줄 정도로, 항상 주변 챙기는 것도 그렇고.”
키타 신스케와 미야 아츠무의 시선이 맞닿았다. 웃음기 없이 진지한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란이나 렌한테도 늘 놀릴 거리를 찾으면 놀려대던 녀석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노부부 같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를 키워내고 정성을 들인다는 거, 키타상이랑 잘 어울려요.”
항상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고, 할머니가 말한 그 누군가는 신이었겠지만 키타는 딱히 신을 믿지 않았다.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학교 내내 공식 시합에서 한 번도 서지 못했던 제게 감독님이 입학을 권유하고 주장까지 맡겼을 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노력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게 기쁘다는 걸 알았다.
키타 신스케는 미야 아츠무의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아츠무, 오늘 고마웠어.”
아츠무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키타는 그 대화 후로 복잡했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어쩐지 민망해져 전철이 지나갈 때를 노려 말했더니 아츠무는 듣지 못한 듯했다.
“전철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바로 옆에 있던 아츠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갑자기 줄어든 거리감에 키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별거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졸업해도 연락하자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뛰었다. 시선을 피하며 걷는 내내 목뒤와 귀가 화끈거렸다. 폭염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햇볕에 피부가 붉어지는 건 똑같으니까, 날씨가 더워서 다행이었다.
“말도 마라. 키타 니 없으니까 3학년들 사고 칠 때마다 난리다.”
인터하이 후 다음 날 학교에 찾아갔을 때 쿠로스 감독은 졸업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반년 만에 찾은 체육관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제는 3학년이 된 후배들의 활약상, 졸업생들의 근황 이야기, 쿠로스 감독의 농담과 진담이 반씩 섞인 투덜거림이 오갔다. 시합 후라 가볍게 몸을 푸는 날이었던 만큼 감독님의 제안으로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의 연습 시합이 열렸고, 키타는 오랜만에 코트 안에 섰다. 항상 코트 밖에서도 후배들의 시합을 지켜보며 소식은 찾아보고 있었지만,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코트 안에서 직접 보는 경기는 감회가 새로웠다. 등 뒤에서 본 미야 아츠무의 플레이, 아주 예전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모습을, 키타는 다시 눈에 새겼다.
키타는 졸업하고도 종종 아츠무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과대에 팀플 조장에, 정신을 차려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맡겨진 채로 첫 학기는 본가에 몇 번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여름 방학이 된 후에도 학과에서 농가에 가는 실습 겸 봉사 활동이 있었기에 간신히 약속했던 인터하이 본선 경기에 맞춰 효고에 갈 수 있었다. 남은 여름 방학을 효고에서 보내는 김에 감독님과 후배들의 걱정을 덜어줄까 해서 아츠무에게 단기 과외를 해주기도 했다.
“키타상,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마지막 과외 날 그런 질문을 하기에 그냥 지나가는 잡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츠무의 부모님이 공부를 도와준 답례로 어디 놀러 가거나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고 용돈을 얹어 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루 만에 충동적인 바다행이 결정되었다. 마침 쉬는 날이었던 아버지한테 차를 빌렸다. 졸업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가에 봉사 지원을 나갔을 때도 운전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어딘가에 놀러 가려고 운전을 한 건 또 처음이었다.
“키타상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키타는 아츠무의 질문에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키타가 아츠무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히 챙겨주고 싶은 후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미야 아츠무에게 키타 신스케는 어렵고 불편한 선배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졸업하면 동창회에서 근황을 주고받고, 아츠무가 선수가 된다면 경기를 찾아보며 응원하는, 그 정도의 관계로 남을 거라 생각했다. 손자 대까지 자랑하고 싶은 후배, 딱 그 정도의 감정만 남기자고. 그렇게 조용히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츠무는 늘 예상을 깨버렸고, 졸업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그냥, 주변을 보니 커플이 많길래요. 키타상도 그런 쪽에 관심이 있나 싶어서...”
해질녘과 밤의 경계에 있는 여름 바다,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꽃놀이. 분위기에 홀려 느슨해진 긴장감 속에서 들켜버린 것 같은 마음이 있었다.
“있다. 예전부터 좋아한 사람.”
그건 충동적인 대답이었다.
“어떤 사람인데요?”
“엄청 솔직해가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사람.”
지금처럼, 그렇게 표정에서 정답을 다 알려주는데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어.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아츠무의 표정을 보며 키타는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럼 그 사람이랑도 이런 데 놀러 가고 그랬어요?”
“..놀러 오긴 했다.”
오늘 것도 쳐준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백은 안 해요?”
몇 초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백을 안 하는 이유라, 작년까지는 아츠무에게 고백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졸업하고 조용히 정리하려던 마음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아츠무의 태도 때문에 여태껏 정리하지 못했다. 졸업식에서 서럽게 울었던 것, 다른 선배들도 있으면서 유독 제게 하는 연락이 더 많은 것, 학교에 다닐 땐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계속 둘이서 보는 날이 늘어난 것.
언젠가부터, 미야 아츠무가 보여주는 표정이 예전과는 달라진 것도.
그렇다고 해서 당장 뭔가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일단 아츠무는 고3이기도 했고, 충분히 프로 구단에서 제안이 들어올 실력과 실적을 갖추고 있지만 남은 경기들에도 집중해야 했다. 한 살 차이라도 이제 성인이 된 저와는 달리 아직 학생인 것도 걸렸다.
“걔가 고3이라, 아직 학생이라 안 된다.”
이렇게 다 불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적어도 반년은 더 참아보려고 했는데. 평소와 다른 일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츠무를 보고 있으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어서, 질문에 답변해 주는 것뿐이라는 핑계로 모든 걸 털어냈다.
불꽃이 꺼진 막대 끝이 바스러져 모래 위로 떨어졌다. 말장난 같은 대화를 끝낼 때가 된 것처럼, 이제는 시선을 회피할 대상이 없어졌다. 아츠무의 고개가 다시 제 쪽으로 향했다.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미야 아츠무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말을 최대한 꾹꾹 참아내는 듯, 그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아츠무.”
아마도 키타 신스케의 인생에서 몇 없을 충동적인 결정이다. 늘 해왔던 것들을 하면 실수가 없다. 키타는 제 장점이 그런 반복과 성실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 충동적이고 도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공격보다는 소극적인 수비라고 생각했다.
“난 그냥 후배랑 둘이서만 이런 곳에 안 놀러 온다.”
하지만 미야 아츠무와 있을 때는 최대의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저, 사실 키타 상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응.”
“지금 하면 받아 주실 거예요?”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츠무의 목소리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어서,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졸업하고 더 멋진 곳에서 제가 먼저 말할래요.”
얻어걸린 느낌이니까 지금은 무효로 해요.
그러니까,
기다려주세요.
기다리는 건 항상 자신 있었다. 딱히 결과를 바라고 좋아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막상 좋아하는 감정에 보답받는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기쁘면 그냥 기뻐하라던 친구의 이야기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겠으니까 빨리 졸업해, 아츠무.”
즐거웠던 여름이 끝나간다.
나는 이제 너와 함께할 내년의 여름을 기다릴 것이다.
키타 신스케에게 미야 아츠무는 여름과도 같았다.
충동적이고, 소란스럽고, 빠르게 변화하는 계절,
키타 신스케가 사랑하게 된 계절이었다.
- <열대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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