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월드 트리거. 제3차 대침공 단문 모음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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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의 신화가 있다. 아홉 중 하나는 불사라 죽일 수 없지만, 남은 여덟도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는지라 머리 하나를 베어내면 그 자리에 머리 둘이 새로 자라났고, 이 무한히 증식하는 거대한 독사를 해치우기 위해 신화 속 영웅은 머리를 베어낸 자리를 불로 지져 재생을 막고 불사의 머리 하나는 바위로 짓뭉개어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전쟁도 이와 같았다. 제대로 끝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자꾸만 새로이 쳐든 고개가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니, 마무리는 확실하게. 불로 지져 다시는 새 머리가 돋아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요 불씨를 미리 밟아 꺼뜨리는 예방책이었다. 실로 이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베어낸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불로 지졌다. 이는 남은 자들의 사기를 꺾고 전의를 잃게 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너 역시 이처럼 불에 타리라. 너 역시 우리에게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거기에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전쟁에 익숙하지 못했다. 베어내는 것까진―트리온 병사를 파괴하고 인간형 네이버의 트리온체를 공격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불로 지지는 것은―트리온체가 아닌 본체에 위해를 가하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은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끝내 감추지는 못했다. 일부 그러한 전투에 익숙한지 몸놀림이 다른 자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물론 이 같은 방식은 블랙 트리거의 출현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제법 위험이 따랐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리턴 값에 주목하자면 위험도 제법 감수할 만했다. 이를테면 빠질 때만 잘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지휘관의 빠른 판단과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자 역시 지휘관의 후퇴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네이버 중 한 명이었다. 검과 비슷한 형태를 한 그의 트리거 끝에는 조금 전 비유적 표현으로 그가 지져낸 미덴의 병사가 쓰러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트리거를 사용하는 병사는 트리온 보유량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므로 이대로 트리온 기관을 회수한 후 돌아가면 끝날 듯했다.

“으아아아!”

그사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덤벼드는 병사를 향해 트리거를 휘두른다. 베어낸 가슴에서 치솟는 것은 트리온이 아닌 진짜 피, 붉은 피였다. 멍청하긴. 그리고 무모하긴. 그러나 생각보다 깊게 날을 찔러넣진 못했는지 다시 한번 트리거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팔이 보이지 않았다.

어?

팔이 아니라 머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은 날아간 머리가 빙글 돌며 제 팔을 보았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곧 제가 기습을 당했음을 알았지만 전투원으로서 나름 베테랑에 속하는 그였음에도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얌전히 붙은, 실은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원래의 제 목을 매만지며, 스텔스 기습에 당한 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트리온체가 파괴된 여파로 조금 밀려나긴 했으나, 여전히 그 장소 그대로라고는 말할 수 있었다. 긴급 탈출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미덴의 기술을 보고 개발한 긴급 탈출 기능은 그간 굉장히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트리거 사용자들의 높은 생존율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방해하는 기술 또한 함께 개발되었으니, 우세를 점하는 것이 보통인 본거지에서의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덴이 크게 밀린 까닭이 거기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너희를 보고 배운 건 우리가 먼저였어.”

그렇다고 이렇게 금방 따라와 개발해 낼 수 있는가? 그들도 이들이 베일 아웃을 흉내 내어 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에 대항할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울음을 삼키며 입가엔 잔뜩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눈앞의 병사는 이내 쓰러진 동료를 업은 뒤 절뚝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얇게 베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트리온체가 아닌 본체를 공격하는 것이 달가울 리는 없었기에 저질러진 실책이었다. ‘잘했다. 사사모리.’ 잠시 후 목에는 세 개의 칼날이 들이밀어지고, 모습을 감췄던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 사이에서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양손을 펼친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항복의 의미였다. 잠시 후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남자가 짧게 혀를 찬 뒤 입을 열었다.

“포로로 데려간다.”

*

“끝나면 복학을 할까 해요.”

태평한 소리를 한다고 책망할 만큼 이 젊은 청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복학을 해서 학교에 다니고 졸업을 한 뒤엔…… 저도 대학원에 갈까요.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그는 잘린 머리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옆에서 또 다른 머리가 불로 지져지는 모습을 본 머리. 아무 말이나 주워 삼키고 그대로 다시 입 밖으로 내어놓는 청년은 제대로 삼키는 법도, 소화하는 방법도 잊은 듯했다. 그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을 골라내어 고르게 다시 빚어낸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결정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하.”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는 언제나 재미난 이야기를 좋아했다. 지금은 그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재밌는 모양인지, 달리 말해 그 외 모든 것, 다시 말해 세상이 모두 빛을 잃은 탓인지, 빛 없는 세상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빛도 없다. 다시 깃들 날이 요원해 보일 만큼 텅 빈 목소리로 웃음을 멈춘 청년이 중얼거렸다. 손이 잘린 것 같아요.

“말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말과 함께 내 손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 말에 결국 청년에게서 눈을 떼었다. 그는 아마 부대를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비스듬히 잘린 머리는 자신이 직접 지져지지 않았음에도 가까이에서 뒤집어쓴 열기로 오그라들어 버렸다. 쉬렴. 한 마디를 중얼거리며 벽에 기댔던 등을 뗐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인 청년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가 이내 물러나 흩어졌다. ‘쉬어야겠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래야 했다. ‘지금은.’ 잘린 머리도 머리라고 전투원 한 명이 빠지면 생기는 구멍에 관해서 청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그 구멍을 메꾸러 갈 어린 청년을 뒤로한 채 그는 복도를 빠져나갔다.

*

지휘관의 머리에 총구를 겨는 남자는 이미 방아쇠에 검지를 걸어두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어 그 답을 들을 때까지만 적의 지휘관을 살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년 전에, 이곳을 침공한 것도 너희였나? ……년 동안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그때와 다르게 악몽의 재래에 맞설 힘을 얻었다. 사실대로 말할 이유가 없는 지휘관은 어떤 정보도 주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다만 말했다. 당겨라. 그는 트리온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관자놀이에 댄 방아쇠를 당기면 적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해도 좋은가, 하면 이리되어도 좋을 각오로 먼저 쳐들어온 그들 아닌가. 다만 좋은가, 하는 것은 이 어린 청년의 문제로, 이 어린 청년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옳은가, 하는 문제로, 그렇게 두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문제의 답으로 방아쇠를 당긴 자는 제가 되었다. 스코프를 통해 머리로부터 피 흘리며 쓰러지는 지휘관을 끝까지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렸다.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통하여 청년은 이곳에 제가 있어 다름 아닌 제가 방아쇠를 당겼음을 알 것이다. 알아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새삼스럽게, 뭘.

이들이 이것을 뱀 사냥이라고 일컫는다면 그는 가장 늙은 뱀의 머리라 할 수 있겠다. 돌로 치기엔 너무 늦은 머리. 그 위로는 뱀 부리는 자들만이 남아 있고 그 아래로는 땅 아래에서 길을 터는 자만이 남아 있다. 어린 뱀이 삼키기엔 아직 커다란 먹이다. 분명 탈이 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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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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