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

묵음 2

월드 트리거. 침묵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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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유품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실질적인 유지가 깃든 그것은 곧 그 자신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러기엔 그것과 더는 ‘소통’할 수 없었다. 소통의 단절은 죽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 어떤 변환도, 변화도 죽음을 극복하여 그것을 없던 것으론 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자체가 죽음을 가공한 것이기에, 생전의 유지대로 그 뜻을 따라 모형을, 형태를 조형한 사후의 유해일 뿐이었다. 블랙 트리거는 또 다른 죽음의 형태였다. 죽음의 증거였다. 그리하여 모래처럼 부서지는 육신에는 더는 죽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생도 없었다. 그러니 모래처럼, 무기물이 되어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생은 다 빠져나가 물기 하나 없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바닥까지 긁어모아 트리거에 쏟아부은 생과 사가. 그러니 그 안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모였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이기에, 빛뿐만이 모인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겐 희어질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블랙 트리거라고 불렸다.

뛰어난 트리온 능력자일수록 블랙 트리거를 생성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그런 능력자는 사이드 이펙트를 가질 가능성도 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사이드 이펙트를 가진 보더라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능력을 한 번쯤 생각하는 것이 드물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블랙 트리거를 만든다면 어떤 트리거를 남기게 될까? 그보다, 블랙 트리거를 남기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까? 블랙 트리거를 만들면 유해 수습도 불가해진다고 하는데. 과연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A급 3위, 카자마 부대의 어태커 키쿠치하라 시로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자신을 연상할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블랙 트리거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이란 평을 받고 원정대로 선발되기도 한 유능한 인재였다. 원정대로 선발된 그는, 솔직히 말해 그 나이대의 소년에게는 적절치 못할 만큼 죽음과 과하게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 자신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블랙 트리거를 고려할 만큼 위기를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부대이기도 하거니와, 원정대는 블랙 트리거에도 대항할 실력을 갖춘 이들을 원정대로 뽑았지, 블랙 트리거로 만들 요량으로 이들을 선발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선발 시험은 매 분기 철저하게 준비되어 시행되었다. 어느 해인가에도 키쿠치하라는 선발 시험을 통과해 원정대로 발탁되었고, 원정선에 올랐다.

그들이 탑승한 원정선이 미카도 시로 귀환하였을 때, 원정선에서 내리는 키쿠치하라의 손에는 떠날 적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검은 트리거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넣은 뒤 단 한 순간도 손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먼지투성이. 흙투성이. 평소라면 질색할 위생 상태인 채로 하선한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들리지 않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어느 해 어느 여름인가에 돌았던 소문이 있었다.

믿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그래서일까.

키쿠치하라 시로의 사이드 이펙트는 강화 청각이다. 그가 듣지 못하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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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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