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월드 트리거. 팬아트
* 팬아트입니다.
제아무리 허황하고 말이 안 된들 허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꿈이기에 니노미야 마사타카는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지 못한 채 꿈속에서 헤매는 꿈을 꾸었다. 해바라기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꿈을. 현실의 니노미야는 그 키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꿈속의 키를 훌쩍 넘는 해바라기가 헤아릴 수 없이 피어난 밭 가운데에선 도무지 길을 찾을 방도를 찾지 못해 길을 잃어야만 했다, 니노미야는. 해바라기는 그 꽃잎과 잎사귀가 넓은 식물로 이토록 키가 크다면 늘어뜨린 잎새 아래 그늘이 져야 마땅하거늘, 꿈이기에 니노미야 위로 드리우는 그늘은 없었고 꿈이기에 니노미야는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 사방은 노란 꽃잎과 흑갈색 꽃의 중심―꿈이라서 그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과 녹색 이파리뿐. 해바라기는 흔히들 해를 따라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지만 꽃을 피우고 나면 줄기가 굵어져서 더는 몸을 돌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이가 제법 되는 듯하다. 니노미야 역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진 못했던 것으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꽃을 피울 때까지는 태양을 따라 몸을 돌리지만 피우고 나면 몸을 굳혀 더는 돌아보지 않는, 그럼에도 어린 날의 이름으로 한 해를 살고 시드는 한해살이풀. 그러나 몇 시간이고 헤맨 듯한데도 머리 위에서 옮겨가지 않는 정오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있자면 이들이 시들 날은 영원토록 오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다. 꿈이란 그를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내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거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막혀 오는 숨과 바짝 마른 입 속의 깔끄러운 목구멍 따위의 고통은 알 바 아니라는 걸까. 고통이 아니라는 것일까. 질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갈증으로 인한 죽음은 무어라 부르던가? 외부의 고열로 인한 죽음은? 꿈인 줄 모르는 채로 꿈속의 죽음이 저에게로 이르리라 생각하는 그때.
멀리, 눈앞에. 검은 옷을 입은 검은 머리의 그가 있어 니노미야는 제가 죽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제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본 곳에 있는 그였다. 그마저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고 꽃과 줄기와 잎 속에 반절의 자신을 감춘 채 뻗은 손은 이 땅을 빠져나갈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정 꿈이라면 빠져나가지 않아도 좋을 텐데도, 가만있으면 저절로 깨어나고 말 텐데도. 방향을 따라 발을 옮기는 것은 꿈이기 때문이리라. 꿈속의 자신이기 때문이리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오천 개의 태양이 일만 개의 아지랑이를 뿜어내는―아지랑이의 개수를 세는 법을 그는 꿈이기에 알고 있었다―땅을 벗어나는 까닭은 꿈속의 그에게 물어본들 제가 바라는 답은 얻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렷다.
마침내 그 땅을 벗어나니 내내 조용히 짓고 있던 미소에서 좀 더 웃음에 가까울 만큼 환히 웃는 그였다. 그의 이름을 아는가? 니노미야는 한 번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깨어나니 열대야였다. 얕은 잠에선 기억하지 못한 이름은 하토하라 미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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