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수치, 타치카와
월드 트리거. 동창생의 회고
‘등을 다치는 건 검사의 수치래.’
또 무슨 만화책을 들여다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을 보면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급생―자신―의 눈에 비치는 소년의 평소 이미지가 어떤지는 구태여 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만하리다. 굳이 편견으로 대하려고 하지 않아도 손에는 이미 교과서 대신 만화책 한 권이 덜렁 들려 있는 소년이기도 했다. 예의상 왜, 라고 물어봐 주는 것이 옳을까. 고등학생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공부 따윈 깔끔하게 포기한 모양새로 가방에 만화책이나 넣고 다니는 녀석과 제가 왜 책상을 붙여 써야 하는지, 제비뽑기 결과를 이제 와 탓해봤자 소용없으니 말이다(실은 첫날부터 탓해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주변에 청자라곤 저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놓고 저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모른 척 무시하기도 조금 곤란하긴 하였다. 그래서 ‘왜?’ 썩 흥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귀찮아하는 기색이 과하게 담기지는 않는 투로 들리길 바라며 소년에게 질문했다. 말하고 나니 ‘왜?’보단 그냥 ‘아, 그래?’하고 넘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데. 그렇지만 이미 엎어진 물에, 신이 나서 설명하려 들 줄 알았던―소년의 평소 이미지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면 으레 그러리라 생각한 것뿐이다―소년은 조금 심드렁한 투로 그에게 대답했다. ‘글쎄.’
뭐야?
‘나도 잘 모르겠어.’
아니, 그럴 거면 왜 나한테 말을 꺼낸 거냐고.
‘뒤 좀 밟힐 수도 있지 수치까지야.’
그렇지만 그 말엔 저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동의하는지라 고개를 그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눈을 반짝이며 냉큼 동의를 구해오는 소년이었다. ‘네 생각도 그래?’ ‘어……. 수치는 조금 과하지.’ ‘그치?’ 꼭 뒤 좀 밟혀본 사람처럼 구는 소년이 어이없다가도 불량하고 불퉁할 것 같은 첫인상과 다르게, 또래와 그다지 다를 것도 없게 굴어오는 것을 보자니 경계심이 다소 누그러졌다. ‘어쩌면 조금 친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만화책에서 눈을 뗀 소년이 저를 바라본다.
“학교는 왜 빠지는 건지 물어봐도 돼?”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도 ‘그럼 그렇지’하고 넘길 작정을 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소년에 말문이 막힌 건 제가 되었다. ‘어차피 중간에 조퇴하니까 아예 결석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저는 가장 처음에 보여야 했을 반응을 그제야 늦게나마 보일 수 있었다. ‘아……. 그래?’
그날 오후 수업 중간에 조퇴한 소년은 그대로 이튿날까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몇 달 전 일어난 외계인들의 대침공, 그 후 등장한 수수께끼의 조직, 보더에 소년이 속해 있었음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보더와 각 교육기관의 제휴 및 협력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라 인정받지 못한 조퇴와 결석 기록으로 소년의 학생부가 이미 손쓰기 어려울 만큼 어지러워졌음을 알게 된 것은 후일이었다. 보더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일명 ‘경계 구역’은 형성됐으나, 그 안으로 ‘게이트’란 것을 유도하는 기기의 성능은 아직 불완전하여 경계 구역 밖에서도 심심찮게 게이트가 열리던 시절. 소년의 학창 시절을 공유하는 저 역시 소란에 휘말려 넘어졌을 때. 그리고 제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내 질끈 감았다. 그리고.
콰앙! 굉음이 울려 이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이. 야. 하고 아마도 저를 청자로 삼고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까보단 작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가 서 있었다. 굉음을 울려 그―네이버라 불리는 괴물을 막아선 자가. 소년이.
“타치카와……?”
“등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랬는데.”
그 말의 의미는 그가 뒤돌아 채 해치우지 못한 네이버를 마주했을 때야 알게 되었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등을 본 순간, ‘어이. 어―이. 어!?’ 등을 보였던 그 애가 고개만 슬쩍 돌려 다시 저를 보았던 것 같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대로 기절했기 때문에.
그날의 기억은 수년 동안 잊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이유는 불명이었다. 어떻게 자신은 네이버에게 습격당하는 기억까지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수년 후, 운 나쁘게 당한 뺑소니에 운 나쁘게 머리를 부딪쳤다가 운 나쁘게 이틀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구간을 거쳐 운 좋게 회복한 날. 뜬금없이 몰려오는 고등학생일 적의 학창 시절 기억에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어도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온 기억이었다. 돌아왔다고? 조금 이상한 표현이다. 그냥 단순히 잊어버린 걸 가지고 돌아오니 뭐니……. 그래도 돌아온 기억 덕분인가, 오래전 어린 시절의 불량한 짝꿍과의 일화를 기억해 낼 수 있어 그거 하난 좋았다. 그전까지는 TV에 나오는 동창을 보면서 내가 쟤랑 같은 반이었느니 어쨌느니 말하면서도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하면 ‘별로, 별일은 없었어.’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제는 ‘쟤가 내 목숨을 구해줬어.’라고는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거 하난 다행이었다. 다행인데. 그래서.
그날의 대화는 뭐였을까, 생각하면 역시 등 뒤를 밟혀 검사의 수치를 당한 건 본인이었을까. 그래도 이제는 그런 수치 따위 당하지 않을 만큼 자란 듯한 동창과, 동창의 옷에 달린 알파벳, 그리고 숫자를 화면으로 바라보며 냉장고에서 꺼내온 사이다 캔을 땄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잘됐네. 잘됐군, 잘됐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