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변의 작용

가변의 작용 01

암시

월드 트리거 by 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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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가는 이제 슬슬 옥상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뜨기 시작한 무렵의 새벽, 타마코마 지부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맞이할 시각이었다. 쿠가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서 옥상 난간에서 가뿐히 내려왔다. 타마코마 지부의 옥상에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주변을 구경하다 보면 새벽 동안의 길고 고요한 시간은 금방 지나가곤 했다. 잠을 잘 수 없는 쿠가는 그 순간에 ‘휴식’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는 수면의 감각 대신 얻은 것이었다. 쿠가는 늘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밝게 빛나는 별이 잘 보이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하루의 일을 되새겼다. 그날의 일상을 되짚어보거나, 개인전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다음엔 어떤 전술이 더 좋을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렇게 다가올 내일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없을지도 모를 내일을 생각하며,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쿠가는 그 시간이 제일 좋았다.

쿠가가 옥상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때마침 1층의 부엌에서 누군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이 어제저녁에 먹고서 남은 코나미의 수제 카레였던 것을 기억해 낸 쿠가는 발걸음을 서둘러 1층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부엌에서 저를 반겨준 것은 아침을 준비하며 식기를 꺼내 들고 있는 키자키였다.

“좋은 아침, 유마.”

“레이지 씨, 좋은 아침. 오늘 아침은 코나미 선배의 카레였지?”

“그래. 유마, 괜찮으면 이 그릇들 좀 식탁에 놔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쿠가는 장난스레 손을 경례하듯 눈썹 위로 올렸다가 내려 키자키가 건네준 그릇들을 받아 들었다. 층층이 쌓인 그릇들을 쿠가가 이제는 익숙한 듯 식탁에 타마코마 지부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수만큼 하나씩 내려놓았다. 모든 그릇을 내려놓은 쿠가는 아침을 기다릴 동안의 다른 할 일을 찾다가, 수저 또한 각자의 자리에 놔두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이 밥 먹을 준비를 하고서 차례대로 1층으로 내려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들과 아침 인사를 가벼이 나눈 쿠가 또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키자키가 각자의 그릇에 부어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카레와 그것에 반쯤 덮인 새하얀 쌀밥은 언제나처럼 맛있어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그리 외치곤 수저를 들어 카레를 떠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면 한순간에 식탁은 떠들썩해지기 마련이다. 식사 시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잠은 잘 잤느냐, 오늘 저녁 당번은 누구였더라, 오늘 본부에 가는 사람 있느냐, 같은 이야기들이. 정말 소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지만 쿠가는 그것에서 안정감과 평화를 느낀다. 저가 또 내일을 생각하고, 즐기기로 다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쿠가는 우선 오늘을 즐기기 위해서, 일정을 다시 떠올려보기로 했다. 오후엔 미도리카와와 모의전을 하기로 하였고, 더 뒤엔 언제나처럼 카게우라와 무라카미와의 개인전이 있었다. 그것들 외엔 따로 약속을 잡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미카도시를 산책한다든가,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따라 달린다거나 등의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이들이 오늘의 일정을 위해 식사를 마치고 외출을 준비하면 쿠가는 그 사이에서 저 또한 식사를 마친 뒤에 밖으로 나서는 이들을 배웅한다. 그러고 나면 지부에 남은 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제 할 일을 시작할 것이다. 쿠가 또한 저의 방으로 돌아가 오후에 있을 모의전들을 위해 그들의 랭크전을 복습하기로 했다. 무언가 또 다른 좋은 전술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

수많은 데이터를 뒤지고, 보고, 분석하고. 새로운 전술을 떠올려보다가, 조금 전의 로그를 다시 돌려보고. 이 일련의 과정들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순식간에 몇 시간이고 지나가 버린다. 랭크전의 로그들을 보고 있으면 대원들의 새로운 전술이라든지, 그에 대한 파훼법이라든지를 알 수 있어서 쿠가는 열심히 그 정보들을 머릿속에 이미지화해서 집어넣거나, 또 다른 수법이 생각나면 상대방이 어떻게 대응해 올지 고민한다. 시간도 잊어버린 채 전술을 떠올리는 것에 몰두하던 쿠가가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아챈 건 미도리카와로부터 온 연락 덕분이었다.

「유마 선배! 오늘 모의전 잊지 않았지? (*⁰▿⁰*)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겨줄 테니까! ᕦ(ò_óˇ)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약속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 쿠가는 로그를 돌려보던 것을 멈추고 빠르게 외출 준비를 했다. 여기서 늦장을 부렸다간 약속 시간에 늦고 말 것이었다. 약속에 늦게 된다면 저를 기다리게 될 미도리카와에게 미안해지므로 쿠가는 더욱 속도를 내었다.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자,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우사미가 급히 나가려는 저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유마 군~ 어디 가?”

“본부에 개인전 하러 다녀올게.”

“그렇구나~ 잘 다녀와~”

저를 배웅해 주는 우사미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 쿠가는 신발을 신고서 타마코마 지부의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살과 상쾌한 바람이 외출하는 쿠가를 맞이해 주었다. 왠지 기분 좋은 날이다. 그리 생각한 쿠가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후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본부로 향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쿠가는 다행스럽게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앗, 유마 선배!”

“오오, 슌.”

C급 랭크전의 로비에 막 도착한 저를 발견하곤 미도리카와가 쿠가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랭크전을 한다는 사실에 언제나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 미도리카와에게 강아지 꼬리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이 흔들리고 있었을 테다.

“오늘은 반드시 이기고 말 거야!”

“호오, 기대하도록 할게.”

그렇게 쿠가와 미도리카와가 각자의 부스실로 들어가고, 둘은 어느새 일상이 된 모의전을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나 10판 승부.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마도 다들 알 것이라 생각한다.

*

“—선배, 듣고 있어?”

“……음?”

전혀 안 들었어?? 미도리카와가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쿠가에게 말했다. 쿠가는 현재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언제 저가 식당에 와 있었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제 손엔 포크가 들려 있었고, 눈앞엔 파스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엔 미도리카와가, 앞자리엔 어느새 요네야와 이즈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무언가, 이상했다.

“……흠?”

“쿠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이즈미에 쿠가는 재빠르게 답하곤 고개를 저었다. 쿠가는 제가 잊은 기억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테이블에 자리 잡고 넷이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점, 자신은 파스타를 이미 먹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미도리카와가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 쿠가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정말이지 털끝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저의 마지막 기억이란, 미도리카와의 랭크전에서부터였다.

——분명, 자신은 미도리카와와 10판을 열심히 즐기고 있었을 터였다. 전보다 좋아진 움직임에 쿠가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자신도 그의 로그를 잔뜩 챙겨보고 온 참이라 져줄 생각은 일절 없었다. 검을 몇 번 맞대다가 미도리카와의 트리온 공급기관을 찌르는 것을 성공한다. 미도리카와, 베일아웃. 그리하여 점수는 5 대 2가 되었다. 거기까진 순조로운 랭크전이었다. 기억도 온전했고, 미도리카와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 번 놀랐으나 그것도 곧 제게 막힌 공격이었다. 그렇게 쭉쭉 진행된 랭크전의 결과는 6 대 4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과 달라진 점수에 쿠가는 속으로 그가 성장했다고 생각했고, 자신 또한 더욱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랭크전이 종료되고, 부스에서 나와 이번에도 이기지 못했다며 볼멘소리를 내는 미도리카와에게 아직은 멀었구나, 슌. 하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없었다.

기억이.

 

어쩌다 식당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어쩌다 요스케와 이즈미와 합류해 식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터라 쿠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깊은 혼란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은 미도리카와가 저를 불렀을 때였다.

“유마 선배, 괜찮아?”

“아. 슌.”

“꼬맹이, 너 지금 완전 인상 쓰고 있던 거 알아?”

“흠, 내가?”

그래. 밥 먹다가 그러니까 좀 무서운데. 이즈미가 쿠가의 물음에 덧붙여 말했다. 저도 모르게 표정으로 나타난 혼란이었던 모양이었다. 쿠가는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별일 아니니 괜찮습니다–. 슌, 얘기하던 거 다시 한번만 말해줄 수 있을까.”

“응? 아아 그러니까 오늘 오전에 본부에서 진 씨를 만났는데!”

오랜만에 진 씨가 랭크전을 해줬어! 다시 한번 더 말하는 것일 텐데도, 미도리카와는 진과 개인 랭크전을 했던 일이 너무나도 좋았던 건지 잔뜩 신이 나 얘기했다. 역시나 진 씨는 대단하다며, 자신이 조금의 생채기도 낼 수 없었다며 진에 대한 숭앙심을 마구 뽐내기 시작한–요네야는 또 그 소리냐며 질려했다–미도리카와의 말에 대충 반응해 주며 쿠가는 포크로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겠지. 정말로. 쿠가는 애써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 씨를 보면 물어볼까, 같은 생각 따위를 하며 쿠가는 열심히 그릇을 비워갔다.

*

“난 이제 가야겠다. 오늘 부대 회의가 있거든.”

“하아… 나는 오늘 방위 임무라고. 진–짜 귀찮아.”

“어이어이, A급이 그런 말 해도 되는 거냐. 그나저나, 나도 이제 작전실로 돌아가봐야겠어.”

“유마 선배는?”

난 조금 뒤에 약속이 있어서. 쿠가는 그렇게 하나둘 떠나는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미도리카와는 부대 회의로, 요네야는 방위 임무로, 이즈미는 제 부대 작전실로 돌아가는 김에 요네야를 배웅해 줄 생각인 듯했다.

“….”

한 순간에 혼자가 된 쿠가는 약간의 침묵을 유지했다. 분명, 지부에서 나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게 되었는지. 물론 제게 일어난 알 수 없는 일 탓이겠지만.

일부분의 기억이 잘라낸 듯이 텅 비었다. 떠올려 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잊힌 기억에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을 것이라 예상한다. 같이 있던 이들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평범하게 활동하나 그 활동에 대한 기억이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현상들 뿐이었다. 쿠가는 눈을 감고 가볍게 숨을 한 번 내뱉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짤그락.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이 주머니 속에 동전들을 넣어놨던 것을 깨닫게 한다. 쿠가는 주머니 속에서 잡히는 대로 동전들을 꺼내 들었다. 흠. 잠시 동전들을 보며 생각하던 쿠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기분 전환으로 음료수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쿠가는 자판기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

쿠가는 자판기 앞에 서서 무슨 음료수를 마실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눈에 띄는 빨간 캔의 음료수는 저번에 마셔본 바로는 맛있었으나 지금 끌리는 맛은 아니었다. 바로 아래줄의 왼쪽에 있는 흰 페트병의 음료수는 전에 새로운 시도로 마셔보았지만 제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턱을 매만지며 쉽사리 정하지 못하는 도중에 옆에서 누군가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윗줄의 세 번째 칸에 있는 음료수 마셔봐. 가볍게 마시기에 좋아.”

“음? 아, 토키에다 선배. 안녕.”

“안녕, 유마.”

“흠, 그럼 토키에다 선배가 추천해 준 음료수로 할까.”

쿠가는 토키에다의 추천대로 가장 첫 줄의 세 번째 칸에 있는 음료수를 뽑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덜커덩. 커다란 소리가 음료수가 나왔음을 알린다. 몸을 숙여 파란 페트병의 음료수를 꺼내 뚜껑을 열어 한 모음을 마셔본다. 깔끔한 맛에 달달한 것이 기분 전환하기 좋았다. 토키에다의 말대로 가볍게 마시기 좋은 음료수였다.

“맛있어! 이 좋은 걸 추천해 주다니, 고마워 토키에다 선배.”

“천만에. 그 음료수로 기분 전환은 좀 됐으려나?”

“…기분 전환?”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 보여서. 토키에다의 말에 유마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겉으로 드러나 보였을까. 쿠가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음료수를 추천해 준 건 그것 때문?”

“뭐, 그런 거라고 해둘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니 아니, 딱히 별일 아닌데. 아, 혹시 토키에다 선배. 진 씨 봤어?”

“진 씨? 음…, 그러게. 오늘은 못 본 것 같네.”

그렇구나. 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카와의 말로는 오전에는 있었던 모양인데, 또 다른 어딘가로 암약이라도 하러 간 걸지도 몰랐다. 본부를 자주 돌아다니는 편인 토키에다가 보지 못했다는 건, 본부에 아예 없거나 아니면 어떠한 바쁜 일이 있는 것일 테다. 혹시나 볼 수 있다면 물어보려 했는데, 기회를 놓쳤나. 쿠가가 아쉬움에 음료수를 홀짝였다. 여전히 토키에다는 쿠가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는 이유를 말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쿠가는 얘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무렇게나 말하고 다니는 인물이 아니란 것은 잘 안다. 그저, 아직 추측뿐인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이것은 저의 몸 상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얘기를 꺼내면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정말 별일 아니야. 난 곧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토키에다 선배, 음료수 추천 고마워.”

“그래.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면 말해줘.”

쿠가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인사를 마친 후, 토키에다로부터 멀어지며 쿠가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카게우라와 무라카미의 약속 시간이다. 기억이 잘려 나가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쿠가는 아직 가득 차 있는 음료수를 한 손에 들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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