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
월드 트리거. 구 아즈마 부대 첫 임무
네이버를 처음 갈랐을 때 깨달은 것은 이것들에게선 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쉬움을 느꼈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훈련 단계에서, 보더의 기술로 구현된 가상체인 건 알지만 실제와도 그리 다르지 않을―다르지 않게 설정되었을―굳기를 가졌을 흰 몸체에서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쓰러져, 행동을 멈추는 그것들에게서 전원 버튼을 누른 기계와 같은 ‘동작 정지’를 느꼈던 미와였다. 그 뒤엔 실제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그였다. 실제로, 실제로 마주한 그것들에게서도 프로그래밍 된 것 이상의 의지, 자의식, 어쩌면 지성 같은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미와였고, 그러나 실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에게 두 가지 사실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이것들을 부수는 데 지금까지는 물론 그럴 필요 따위 느끼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연민 같은 것을 느낄 날은 오지 않으리란 안심 내지는 무언가의 상실, 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날을 칠한 색채의 근원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이것들에겐 피가 없어서 이것이 입은 상처, 손상으로는 이것의 표면이 붉어질 일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날에야 그에게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다시 말하자면, 그날의 붉음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뜻이 되었다. 모두, 전부.
모두, 죽은…….
네이버를 처음 갈랐을 때 그 사실을 깨닫고 사정없이 휘두르던 호월을 잡아 멈춘 사람이 있었다. 미와는 그가 언제 제 곁으로 다가온 줄도 모르고 제 팔을 잡은 그를, 피와 살을 가진 본래 육신이었다면 실핏줄 두어 개는 터졌을 눈으로 올려다 노려보았다. 그인 줄도 모르고 노려보았다. 나중에 알기로, 미와와 같은 반응은 대침공 이후로 받은 첫 번째 기수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도 견딜 수 없었던 거외다. 왜, 어째서, 너희는 전부, 전부. 그리 소리 지르며, 참아내지 못하고 난도질하는 아이들과 미와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보통 훈련 단계에서 해당 반응을 보여 심사가 보류되는 아이들과 다르게, 미와는 이미 그 단계를 수료한 뒤인 B급 정규 요원이 되어 현장에 섰을 때 비로소 참아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장에서의 이성 상실은 부대원 전원에게 위협이 되기에 전장에서 강제 이탈시키는 쪽이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실로, 실전에서는 처음 합을 맞춘 카코와 니노미야조차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대장인 아즈마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들의 트리온 탄환이 겨눌 곳은 그들의 적이 아닌 아군이 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할 것이기에 고개조차 젓지 않은 아즈마의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아니, 내가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통신하지 않은 그는 미와가 그를 알아보고 당황하여 호월을 떨어뜨리는 순간까지 육성으로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뒤에 입을 열었다. 미와의 호월이 그의 왼팔을 붙잡은 아즈마의 오른손 옆으로 왼팔과 왼쪽 눈까지 베어낸 뒤, 빛을 잃은 눈으로 말했다.
“끝났다, 미와.”
“아.”
갈라진 상처에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날과 같은 붉음은 어디에도 없는 날, 다시 말해 오늘, 미와를 잡아 멈춘 그가 이어 말했다. 다시 말했다. 끝났어, 전부. 전부 끝났다고 조용히 선고했다. 차분히 확언했다. 알고 있다. 모를 리 있겠나. 그날도 사실 그날 전부 끝났다. 오늘엔 오늘만 있을 뿐 그날은 오래전에 끝나 여기 없었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는 분노는요, 풀리지 않는 분은요, 올려다보는 눈은 답을 찾아 흔들렸고, 무심하지는 않되 무진동한 눈으로 이를 내려다본 그는 괜찮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지 ‘괜찮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 답은 그 역시 내려줄 수 없었다. 다만 확인만 해줄 수 있었다. ‘오늘’의.
“수고했다.”
‘오늘’은 끝났다고.
울컥하고 가슴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지만 뱉어낼 수 있는 건 숨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숨 없이는 울음도 토해낼 수 없기에 그는 놓여난 팔로 제 머리를 동여맨 채 쉼 없이 숨을 토했다. 그렇지만 쉼이 없을 뿐 끝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른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숨구멍을 태우는 신물도 그예 멈출 것을,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그 역시 알 수 없어 제가 아는 사실을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않길 택하는 그였다.
오늘은 멈추지 않을 것은 알았다. 오늘은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끝날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함께 배웅해 줄 수는 있었다. 어른으로서.
오늘을.
“수고했어.”
숨이 있다면 울음도 토해낼 수 있었다. 소년은 그날 오래도록 울었다. ‘오늘’이 ‘그날’이 되도록, 그날이 더 먼 후일이 되도록. 그럴 수 있게 모인 그들이었으므로, 그는 그럴 수 있었다. 그날 내내, 오래도록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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