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신이 없는 땅

월드 트리거. 루카 이야기

비자림 by 비
1
0
0

마더 트리거를 가지고 망명했다. 게이트 너머로.

몰락한 왕가―다시 말해 그들의 가족은 그들의 별을 유지했던 마더 트리거를 어린 공주와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한 왕자에게 계승한 후 두 사람을 도주시켰다. 마더 트리거와 동화하여 아리스테라를 유지하던 ‘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더 트리거를 잃은 아리스테라의 대지와 창공은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볼 새도 없게 게이트 너머로 아이들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살아라, 살아라. 이는 그들의 유언이자 확정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별의 유언이다. 아기는 아직 말을 못 하고, 이제부터 제 나라의 말을, 망국의 언어를 아기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어린 소녀는 치맛자락을 꽉 붙잡으며 저희를 데려온 동맹의 군사들에게 물었다. 피를 다 닦아내지도 못한 어른들의 시선이 아이에게 꽂힌다. 어른들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파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또래의 소년도 있다. 바라본다? 노려보는 것일까? 악의가 있는가? 손에는 이전엔 존재조차 하지 않던 검은 트리거가 쥐여 있다. 과연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누군가의 안에, 속에, 내장 사이, 트리온 기관 속에 발현할 날을 기다리며 잠재되어 있지는 않았는가? 모른다.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은 그것과는 관계없다. 분명히. 필시 저를 걱정하여 앞을 막아서려 드는 이의 등을 손으로 밀어 옆으로 옮겨버린다. 저는. 아니. 자신 있게 말해야지. 나는. 울먹이지 말고 말해야 해. 이제.

“나는 이제 신이 되어야 하나요?”

마더 트리거가 가진 힘은 별을 운용할 정도다. 가만히 놀려 좋을 힘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그것을 돌볼 희생양을 요구하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을 책임질 사람으로 저만큼 마땅한 이가 없다. 동맹으로서 보호해야 할 후계라면 동생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저는 저희와 함께 무너진 그들의 재건을 돕는 데 역할을 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이의 생각에는, 판단에는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이미 신이 있는가? 두 명의 신이 있는 별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묻고자 하는데,

“아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보다 먼젓번 질문에 대답한 것은 검은 트리거를 손에 쥐고 뒤로 물러나 있던 소년이었다. 먼지가 잔뜩 달라붙은 얼굴에, 두 눈으로부터 두 줄기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소년. 그 한마디를 내뱉고 입을 닫은 소년이 다시 입을 열어 이어 말하기를, 너는 신이 되지 않을 거야. 그 말은 곧 앞으로도 너는 다른 것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들리니, 다른 것이 되지 않으리란 것처럼 들리니, 소녀는 괜히 반박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의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그는 공주도 아니다. 나면서 공주이기만 했던 이에겐 조금 충격일까. 절하된 존재의 가치가 땅으로 떨어지는 충격.

“그럼 나는 이제 뭘 해야 해?”

“일단 쉬어.”

수건으로 얼굴의 상처를 덧대고 있는 어른이 그들을 가로질러 잘라 말했다. 그래그래, 쉬자. 일단은. 다들 지쳤잖아.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어른도 그들 사이를 끼어들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아이들뿐, 이 자리의 어른들은 한 명도 쉬지 않을 것을 알아차리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대답해 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모여드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들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돌보는 몫을 맡는 아이들이다. 궁금한 게 있어? 그예 공주였던 아이가 질문했다. 궁금해. 궁금해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 세상에는 신이 있나요?”

이 땅에는 이 땅의 신이 없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의 신이 있는가? 세상을 운용하는 데 작은 존재의 슬픔은 그가 상관하기엔 너무 미소한가? 그를 움직이기 위해선 더 많은 희생양이 필요한가? 그 말에, 처음 질문에 대답했던 소년의 표정도 함께 일그러진다. 아까와는 대답이 달라진다. 확답했던 아까와는 다른 대답을 말한다. 소년은.

“몰라.”

모르겠어. 그런 건 보이지 않아. 그리곤 뚝, 하고 다시 뚝, 하고 영근 눈물을 떨어뜨린다. 몰라. 모르겠어. 몰라…….

“보이지 않아.”

이윽고 엉,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소년에 소녀의 울음소리도 따라 커진다. 그들을 달래야 할 어른들이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만, 그들 또한 너무나 지친 나머지 차라리 모두가 울다 지쳐 잠들길 바라고 만다. 울고 싶은 건 그들도 마찬가지라서 그렇다. 신을 찾고 싶은 건 그들도 매한가지라서 그렇다.

이 땅에는 이 땅의 신이 없고, 이 세상에는 이 세상의 신이 없다.

어디에도 신은 없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