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공혈
월드 트리거. 팬아트
* 팬아트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어떤 소설에는 양탄자에 가계도를 그린 어느 마법사의 가계가 등장한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으며 혈통에 집착했던 이 고풍스러운 가문은 젊은 이단자들이 가문에 나타날 때면 가계도에 새긴 그들의 이름을 담뱃불 지져 끄듯 지져 없애는 것으로 의절을 선언했는데, 이는 그들과 저희가 절연하였음을 세상에 공고히 공고하고 파기록을 기록하는 행위였다. 그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에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르는 이가 없는 소설을 이제 와 새삼 언급하는 것은 오로지 그 부분을 언급하기 위함이다. 양탄자에 그을음만을 남기고 사라진, 이름을 지져 없앤 검은 구멍을. 우리는 너희와 의절할 것이고 절연할 것이고 파문할 것이며 한때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함께했음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검은 선언 말인데, 이제 와 새삼 언급하는 것은 그래서 그 선언자가 누구였냐는 질문을 하기 위함이다. 누가 그런 선언을 하였나? 누가 그런 검은 구멍을 계보에 뚫어 놓고 자취를 감췄나? 남은 자들은 아니었다. 맹세코 남은 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승을, 동료를, 친구를 배신하고, 그들과 의절하고, 그들과 절연하고, 그들을 파문하고 떠난 이들이란 결국 떠난 이들이란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그는.
꼭 방아쇠를 당겨 낸 총구멍처럼 새까만 공혈 앞에 서서, 그는.
스스로 끊어낸 인연을 보고 있는가, 그는.
……스승을, 동료를, 친구를 배신했지만 하나만큼은 배신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는 가족만은 배신하진 않았던 것이다……. 가족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는 가족만큼은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마저 잃으면 남은 것이 없기에, 양탄자에서 스승도, 동료도, 친구도 지우지 않은 제 이름을 스스로 지우고 온 자신이기에…….
마주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볼 낯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특기인 입방체를 사각뿔의 형태로 조각낸 자가 던지듯 그 조각들을 앞으로 밀어둔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몸 앞에 두지 않는 것이 그가 속한 포지션의 상식이었다. 탄환 트리거를 장전하였을 때 저격당하면, 이젠 오래전이 되어버린 어느 날 아마토리의 메테오라가 그 자리에서 폭파한 것과 같이 트리온 입방체가 폭파하여 시전자에게도 대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모든 조각을 앞으로 밀어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겨눌 수 있는 유일한 물체를, 무기를 호기롭게 그 앞에 들이민 채 그가 취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쏠 수 있다. 당연히. 신체를 직접 겨누어 저격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의 장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마토리만큼은 아니어도 이자의 트리온이라면 트리온체를 파괴할 만큼의 파괴력을 낼 수 있다.
나의 장기로 당신을 직접 쓰러뜨리고 떠나라는 의미인가요?
하려면 할 수 있다. 할 수 있지만…….
너무하시네요.
그 말은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먼저 너무했던 건 자신이었기에, 그 사실을 알기에 그는 자신이 낸 공혈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꼭 방아쇠를 당겨 낸 총구멍처럼 새까만 공혈을.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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