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무를 위해

Ecce

줄리엣 클락>일라이 뮐러

흰색은 놀람.

노란색은 기쁨.

검은색은 절망.

그리고 보라색은,

더 이상 의미 없어진 약혼반지를 쥐고, 당신에게 이것을 녹여 감정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장신구를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부탁했던 때는 올해 초봄이었다. 완성품을 받았을 때는 여름이었으며. 어떤 감정이 어떤 색으로 나타나는지는 착용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고 말했던 당신이 안경을 낀 나에게서 가장 처음 본 색깔은 조금 더 찬연해진 금빛이었다. 그때 알았다. 나의 환희는 노란색이라는 사실을. (결국 가장 처음 느꼈던 즐거움은 전부 나와 닮은 금색 눈동자의, 사무엘 클락의 앞에서였기 때문에.)

7년이 조금 덜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안에 편입되려 애쓰던, 그런 중에도 서로를 놓지 말자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을 걸던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얻었다.

의사 아버지와 순수혈통 정인의 다정한 창살 안에서 살기를 추구하던 나는 오래 전 벽난로의 불 속에서 죽었다. 때론 사무칠 만큼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제 나의 사랑은 로미오도, 파리스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베로나 전체로 존재해서, 그 시간들은 과거의 수첩 속에 남겨둘 수 있는 오래된 그림이 되었으며.

압력과 시선을 무서워하며, 집에 부끄럽지 않은 편지를 보내기 위해 미리 깃펜으로 정갈한 필체를 내는 법까지 교육받아 왔던, 호울러 한 장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아이는 그 손으로 불온한 사상을 휘갈기며 어른들을 향해 위험하게 눈을 빛내게 되었다. 이것이 한 순간의 섬광이라도 좋다. 여름밤의 짧은 미몽이라도 좋다. 마침내 행성이 정렬하여, 우리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근사近似한 목표로서 마주하였으니. 당신의 고해 끝에 죄 사함은 필요하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괜찮아, 일리. 정말로. 너는… 우리는 어렸어.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네가 도울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야- 과제를 하도록 잔소리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지(하지만 이건 나중에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꽤 큰 도움이 됐다고 인정할게). 실제로 날 말리거나 설득하려 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난 그때 그 세상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약속,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 우리가 각자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서로 섣불리 실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 선택이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아도, 비난받아 마땅할 것 같아도. 넌 그 약속을 지켰고, 그래서 결국 나를 지킨 거야. 그 시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내 친구였고,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여기에 남아 줬으니까. 너희가 있는 덕분에 내가 안정보다도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고 깨달을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엔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잖아. 우리 둘 다 조용히 사라지고는 싶지 않아진 바로 지금.”

내가 남몰래 계획하는 것은 어쩌면 조금 더 오래 지속될 작별이다. 인사를 했으니 슬픈 이별은 아니다 멋대로 정의한 행위다. 불은 여러 곳에서 붙을 수 있으나, 그 불씨가 되고자 하는 바람. 여전히 이 시계는 멈춤 없이 돌아가기에, 올해가 지나면 우리는 함께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과거의 추억에 머무를 수도 없으며 미래의 재회를 기약할 수조차 없다. 다만 남은 시간들을 거짓 없이, 후회 없이 함께하고 싶어서.

“우린,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거야. 마법부에 호울러를 보내든, 독립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우리의 이야기를 싣게 하든. 어쩌면 끝에 가서는 대연회장에 휘장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지…. 토론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고, 아이디어는 많으니까. 내가 우리 이모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던가?”

보라: 기어이는 세상이 우리를 돌아볼 테니.

-우리의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n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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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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