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자.
겔펠이 또 염병을 ...
깃펜을 톡톡 두드리며 두터운 양피지 뭉치를 응시하던 게일은 끙, 하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오늘 계획했던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일거리를 집에 들고 온 것부터 문제였던 거지. 게일은 드물게도 서재가 아닌 침실에서 양피지와 씨름하는 참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외면한지도 어언 한시간 째. 게일은 눈동자만 도륵 굴려 탁상 위의 모래시계를 슬쩍 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펠은 진작에 잠들어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와는. 게일은 피로함이 묻어나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 정말로 간절히,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블랙스태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살아가는 것은 게일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강의 준비를 하고, 학생들을(저들을 위저드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게일이 보기에 그들은 비마법사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가르치고, 개인 연구를 하고, 그러면서도 펠과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것은 게일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거울상을 많이 만들어 일을 시켜 보아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두뇌를 써야 하는 일은 모두 본체가 꼭 필요했으니까. 게일이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소홀해진 것은 펠과 함께 보내는 일이었다. 점점 피곤해하는 게일을 보다 못한 펠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지금 네가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다고 해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괜찮아. 나는 네가 하고 싶은 연구는 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애도 아니고… 뭘 걱정해? 이 참에 나도 이 도시의 사람들과 친해질 시간도 가지면 좋지.
게일은 그 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됐는데.
걱정할 대상은 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었다.
“저, 펠…….”
게일은 너무나도 느리게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모래를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펠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냉큼 침대로 기어들어가 펠의 체온을 느끼며 꼭 붙어서 수마에 몸을 맡길 생각이었다.
“…다 끝냈어?”
졸고 있었던 듯,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아, 어쩌면.
“아직… 이제 그만 네 옆에 누우면 안 될까, 내 사랑. 응?”
“안 돼.”
단호한 음성이 돌아왔다.
“아까 약속한 거잖아, 게일. 네가 아까 서재에서 계속 밖으로 나오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같이 자고 있었을 거라고.”
게일은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반박할 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누구를 탓하랴, 세 시간이면 끝났을 법한 일거리를 가지고 집에 온 것도 자신이고, 서재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자꾸 펠이 보고 싶어서 괜히 나와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펠 주위를 알짱거린 것도 자신이고, 빨리 끝내고 와서 편히 함께 있자고 설득하던 펠의 어깨에 입술을 문지르다 결국 등짝을 한 대 얻어맞고 침실에서 감시 아닌 감시를 받겠다는 것에 동의한 것도 자신이니까.
게일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깃펜을 들었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을 사각이는 소리만이 채웠다. 모래가 점차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게일은 곧 연인이 기다리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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