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라만차의 대학생

2022.06.17.

俯瞰 by 승주

돈키호테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소설)

바로 오늘이 전공 강의 기말고사 치는 날임에도 나는 지금에서야 시험 범위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런 일도 한 번쯤 겪어 보는 편이 좋다. 당일에 공부 시작해서 얼렁뚱땅 시험 치고서 재수강 하는 거. 이게 다 대학생의 낭만이라네 친구여. 이랬더니 낭만이 다 얼어 죽었냐는 소리 들었다. 하지만 나는 무단결석도 자체휴강도 휴학도 자퇴도 전부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어렵고 재미없는 수업 D+ 받고 재수강을 하더라도 내겐 낭만일 뿐이다. 평소엔 염세의 극을 살면서도 이럴 때는 뼛속부터 낭만주의자가 따로 없다.

낭만, 로망스. 어쩜 이렇게 간질간질한 단어가 다 있을까 싶으면서도 문학 용어로서의 로망스를 떠올리고야 마는 것이 문학도의 비애다. 악당과 싸우고 귀부인을 경애하는 기사의 낭만. 기사의 명예. 기사의 모험. 기사의—기사도. 그 왜, 로판 소설에 자주 나오는 그거다. 레이디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소임이니 뭐니, 레이디를 지킬 수 있어 영광이고, 목숨 바쳐 충성하겠느니 어쩌니 하는 것들이 결국 다 로망스라는 거다. (로망스가 곧 로맨스니까,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로망스의 내용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한때 나는 그게 참 우스워서 대놓고 비웃기도 했다. 그들의 비상식적 행태가 공감이 안 되어서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창작물 속의 그 어떤 기사도—설령 유서 깊은 원탁 계모임의 그들이라 할지라도—나의 기사가 아니었으니. 내게 기사란 언제까지고 오직 단 한 사람, 라만차의 돈 키호테:돈 알론소 키하노뿐이었으니까.

알론소 그는 내 유년기를 지킨 기사인 동시에, 나를 가장 많이 울린 남자다. 나는 어린 시절 돈 키호테를 읽을 때마다 매번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키가 일 미터도 안 되는 꼬맹이 시절에 도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나는 알론소가 부상을 당할 때마다 안타까워했고 적과 맞설 때면 그의 무운을 빌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저 노망난 미치광이 귀족이라 여겨도 나는 아니었다. 나만은 그의 세계에 함께 했다. 그가 풍차를 두고 거인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야기 초반의 기사 임명식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그가 내 기사가 되길 바랐다. ("아아, 알론소. 토보소의 둘시네아를 섬기려거든 차라리 날 섬겨요. 물론 당신은 허리가 굽은 노년의 기사고 나는 동양인, 중에서도 평민 꼬맹이지만요. 농담 같네요. 전부 사실이고, 진심이지만!") 그리고 나는. 때때로 젊은 나날의 돈 알론소 키하노를 상상한다. 미쳐버리기 전의 총명하고 상냥한 알론소를.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알론소를. 혈색 좋은 장밋빛 뺨, 온 세상이 담긴 반짝이는 눈동자, 나풀거리는 갈색 곱슬머리를 가졌을 꼬마 알론소를. 세상 어느 무엇보다도 찬란했을 그 소년을.

왜 나는 알론소 그의 이야기에 눈물 흘렸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돈 키호테는 '끝'에 대한 이야기다. 로망스의 끝. 기사 문학의 몰락. 낭만 서사의 종말. 동시에 '시작'에 대한 이야기다. 노벨, 즉 근대 소설의 시작. 사유의 발단. 성장하는 인물이 내디딘 첫 발자국. 내 교수님께선 돈 키호테 데 라만차는 로망스를, 산초 판사는 근대 소설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댔다. 어리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돈 키호테는 무언가가 영영 끝나버리는 이야기라는 것을.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들, 그 수많은 것들을 노래한 이야기라는 것을. 내 오랜 친구인 알론소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그렇게 즐겁게도 달렸던 것이다.

돈 알론소 키하노는 아직도 가끔 내 꿈에 나온다. 나는 땅딸보 꼬맹이의 모습으로 뒤따른다. 떨떠름한 표정의 산초 판사와 용맹한 로시난테도 함께다. 우린 미리 약속하지 않고 만나서 모험을 떠난다. 찌그러진 갑옷을 돌로 내리쳐 평평하게 다듬고, 풍차(사실은 거인)에 앞다투어 몸을 던지고, 이발사에게서 빼앗은 놋대야(사실은 전설의 황금 투구)를 쓰고 싶어 우리끼리 결투를 하고, 도적떼를 무찌르려다 그들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로망스의 시대는 저물었어도 우리는 아직 그때를 산다.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해도, 과거의 순간에 머무르는 자는 곧 죽은 자와 같다고 해도. 그렇다면 차라리 죽기를 택하는 것이 나다.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내 심장이 라만차에 있다면 라만차로 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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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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