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크블레/블레서크] 전교 2등의 고백 작전

2023.07.07

무농약 by ㅁㄴ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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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 다 고등학생인 시점이고 AU는 아닙니다

* 시점은 3월입니다... (이 글 쓰기 시작했을 땐 진짜 3월이었음...)

어느 평화로운 오후...

블레이크는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 같은 반의 아이들 몇몇이 쉬는 시간에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했다. 짐작컨대 그 소설은 전교 1등이 되고 싶었던 전교 2등이 1등인 아이에게 사랑 고백을 해서, 멘탈을 박살내어, 공부를 방해하고, 성적을 떨어뜨리는 작전을 실행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버서크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자신을 상상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와 버서크가 전교 1, 2등인 것은 아니었다. 버서크는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팀의 리더고, 그는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팀에게 매번 패배하는 팀의 리더였던 것뿐이었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시작된 이 관계는 10년이 더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대로였다.

며칠 동안 신중을 기해 작전을 구상해봤지만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려울 것이 전혀 없기만 했다. 하루종일 도시의 상공에서 치고박고 싸울 수도 있는데 사랑고백 한마디 하는 것쯤이야. 물론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렇달 뿐이었다.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면, 실효성 있는 일이었다면 며칠을 고민할 것 없이 벌써 실행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일을 고민하기에 혼자도 모자라서 같은 팀원인 베쉬, 브레이커를 데리고 회의 안건으로 얘기를 꺼냈다.

“블레이크,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 생각에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 반응은 대충 그도 예상한 대로였다.

“가짜로 고백하는 것까지는 한다고 쳐도, 버서크가 넘어오겠어? 걔가 평범한 학생도 아닌데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러다 역으로 당하는 수도 있어. 만에 하나 진짜 사귀게 되기라도 하면 너도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잖아.”

“베쉬 말이 맞는 것 같아.”

“...”

“그런데 왜 버서크한테 하려는 거야? 버서크는 연애에 관심도 없는 것 같던데.”

“버서크가 리더니까 당연히 버서크한테 해야 의미가 있지. 브랫이나 브루트가 누구한테 고백을 받든 말든, 버서크가 눈 하나 깜짝하겠어? 반대로 버서크만 잡으면 브랫이랑 브루트는 그 영향을 확실히 받을 거야. 버서크를 잡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렇구나.”

하지만 블레이크는 이미 혼자 충분히 고민을 해본 상태였다. 그는 베쉬와 브레이커에게 마저 설명했다.

그가 버서크에게 고백하는 걸 실패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버서크에게 고백하는 걸 성공하면 득실을 따져볼 수 있다.

먼저 버서크가 거절할 경우, 버서크의 심경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면 이득이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이득도 손해도 아니다.

다음으로 버서크가 거절하지 않을 경우, 버서크의 심경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면 이득이고 그렇지 않다면 역이용 당하는 것이므로 손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사귀기 시작하면 버서크의 손해다...

“뭐? 왜?”

“나는 버서크한테 마음이 없는데 버서크는 나랑 사귈 마음이 있다는 거잖아. 그게 날 좋아해서든,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든 난 버서크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버서크의 손해가 맞지.”

블레이크는 이외에도 자신이 생각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변수에 대한 대책을 읊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그렇게 하면 그를 신뢰하고 있는 팀원들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인다. 설득이라기보다는, 말려든 거겠지. 적당히 그럴 듯 할 뿐인 작전에 말이다. 블레이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를 하게 될 뿐이었다.

*

작전을 실행하는 날은 며칠 후 화이트데이로 정해졌다.

하필 이런 기념일까지 겹칠 줄이야. 블레이크는 화이트데이를 기다리는 며칠 간 자신이 진짜로 화이트데이에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하려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것은 그가 머리로 그렇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도 모르게 화이트데이와 관련된 화제에 귀를 기울이게 되거나 화려한 화이트데이 기획 상품에 눈길이 가거나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걸 실감하면 심장이 빨리 뛰거나 하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포장한 사탕 상자도, 고백 멘트도, 정해둔 장소를 어떻게 치워놓고 어떻게 버서크를 불러낼 것인지까지도 말이다. 그는 화이트데이가 오기까지 거의 매일 예행연습과 작전 점검을 혼자 진행했다. 작전 당일 실행도 혼자할 예정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끼면 그림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 모든 준비 작업도 작전의 일부였다. 겉보기에는 고백하려는 날에 앞서 고백 연습을 할 뿐인 모습으로 보이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을 뿐이지 실제로 본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부가적인 하루일과를 끝내고 평소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이유 모를 피로감과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장 많이 채우는 생각은, ‘나 진짜로 고백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방과후에는 히어로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그는 빌런인 버서크와 마주치기도 했다. 버서크는 내가 무슨 작전을 구상했는지 꿈에도 모르겠지. 블레이크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버서크의 이런저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바보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아니, 전혀 바보 같지 않다고. 반응을 예상하고 대응할 준비를 하는 일은 말이다. 블레이크는 일을 마치고(좋은 결과가 있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임기응변에는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었고, 사랑고백의 경험도 나름대로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버서크니까. 그는 혼자, 조용히, 눈을 감고 버서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쭉 지켜봐왔으니 블레이크도 버서크에 대해서는 꽤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말이 되는 소릴 하라며 받아칠지도 모르고, 바로 머리를 굴려서 그를 이용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버서크를 생각하며 웃었다는 사실에 블레이크는 스스로가 소름 끼쳤다.

제정신이야?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해도 괜찮을까? 괜찮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해야만 하지 않나…

“블레이크, 소파에서 자려는 거야?”

“…아니. 들어가서 자야지.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그러고보니까 내일이 그 날이네. 화이트데이.”

“맞아...”

“블레이크, 우리가 응원할 테니까 힘내!”

“잘 됐으면 좋겠네.”

“어, 그래.”

블레이크는 잠에 들며 다짐했다. 이 고백을, 아니, 이 고백 작전을 꼭 성공시키겠다고...

*

“저기, 너 1반이지?”

“나? 맞는데 왜?”

“1반에 블레이크... 알아?”

“에이, 우리 학교에 너희가 라우디라이트보이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래….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아? 지금.”

“응. 뭔데?”

*

화이트데이 당일, 블레이크는 잠을 설치고 수업에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체할 것 같아서 먹다 말았고 오후 수업은 무슨 과목이었는지도 기억 안 날 정도로 정신이 다른 데 팔려있었다.

온 신경을 이 작전에 쏟아붓고 있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블레이크는 컨디션 난조에도 계획했던 대로 버서크에게 방과 후 목표 지점(?)으로 나와달라는 쪽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며 버서크가 그것을 읽는 것도 확인했다. 그리고 준비한 화이트데이 선물을 잘 챙겨놓고 있었으며 멘트도 계속해서 복기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멘트를 계속 수정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블레이크는 종일 그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방과 후, 블레이크는 빠르게 교실을 나와서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봐두었던 목표 지점인 학교 뒤편 구석의 사람이 없는 곳을 주시했다. 버서크가 나타날 때까지... 심호흡을 하고 손에 든 사탕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기다렸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어쩌면...

“블레이크, 너 여기에서 뭐하냐?”

...어쩌면 버서크가 저 아래의 약속 장소가 아닌 그가 있는 옥상으로 바로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버서크는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그가 장난질을 친 것으로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블레이크는 태연히 버서크를 마주 보고 서서 입을 열었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나한테 쪽지 보낸 거, 너야?”

“응.”

“...”

평소 같았으면 곧장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고도 남았을 텐데... 말 한 마디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걸 보면 버서크도 싸움을 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준 모양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블레이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가 지금까지 심사숙고 하여, 가능한 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속으로 수백번은 더 시뮬레이션 한, 진심 어린 사랑 고백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버서크. 나 널 좋아해.”

*

“소설? 아, 아아~ 그 소설. 뭔지 알겠어. 그게~ 웹소설이라 책은 없고, 유명하지 않은 거라서 아마 검색해도 안 나올 거야.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

“블레이크는 그 소설의 전교 2등이 전교 1등에게 고백을 하기로 한다는 것까지만 들었다던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뒷내용이 궁금해서.”

“아, 그런 거였어? 에이~ 그거야 뻔한 거 아냐?”

“뻔한가...?”

“흔한 소재니까. 가짜로 고백하려다가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거. 아, 장르가 로맨스...였거든!”

“…….”

“아, 하핫, 몰랐구나. 그럴 수 있지.”

“응. 알려줘서 고맙다. 난 이만 가봐야겠어.”

“그래, 잘 가~”

“너도...”

베쉬는 말은 가봐야겠다고 해놓고선 넋이 나간 채로 가던 길을 가는 옆 반 학생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왜 그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까. 로맨스라니...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 작전이 소설 같은 해피엔딩이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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