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난제
나나남매
키요카가 대체로 책을 골라오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어찌저찌 도서관에 발을 붙이고 귀를 막다가, 몇 번 책장에 부닥치고 나서야 휘청이며 고개를 든다. 자리에 앉으라는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제야 퍼득 근처 섹션에 있는 책 중 아무거나를 짚어 얼굴에 덮어 쓰는 식으로. 키요카가 책을 고르는 방식은 거진 운세를 점치는 것만큼이나 모호해서, 도서부 몇몇은 키요카의 책 고르는 방식을 보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오늘은 800번대, 아니, 500번대. 숫자가 빗나가면 도서부원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탄식 같은 것이야, 이미 바다에 사로잡힌 키요카는 알 턱이 없는 것이다.
키요카는 3학년 한여름이 되고 나서야 도서관에서 그나마 구실은 갖춘 채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열린 창문 사이로 탁 트인 푸른 바다가 보였다. 창만 열면 사방에 온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 학교는 계절 상관없이 창만 열면 언제나 여름이었다. 키요카의 넘실거리는 눈 안에 활자가 돌아다녔다. 토기가 올라올 것 같다.. 유난히 운세가 낮은 날에 무작정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드는 습관 같은 건 언제 없어지려나. 키요카는 속으로 자조했다. 손 끝으로 활자 하나하나를 더듬어 읽어 내려가는 손 끝이 떨렸다. 그, 때, 그는, 해변가에, 누운, 시체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오물거리며 속으로 읽어낸 문장을 입모양으로만 뻐끔거리다, 옆에서 웃음을 무마하려는 헛기침 소리에 퍼득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가에 비치는 파란에 고개를 움츠릴 생각도 안 하고 키요카는 옆에 있는 인영을 인식했다. 부슬거리는 금빛 머리, 얄쌍하게 휘어진 눈가가 연신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나카이쨩, 책을 되게 재미있게 읽는 걸! 오늘은 추리소설이야?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잠시 파도소리가 귓가에서 밀려났다. 자신을 향해 기울어지는 상체, 오후의 햇빛에 금빛 머리가 가늘게 반짝여 빛이 키요카의 눈 위로 스쳐 키요카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멍하니 눈 앞의 상대를 바라보다가도 잠시 키요카는 제 행동이 상대에게 뻔히 보였다는 걸 깨닫자마자 얼굴에 확, 열이 올라 평소의 울상이 됐다.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다급히 상대에게 말을 건낸다. 나츠사키 씨, 저 혹시 소리내서 읽었어요? 읽던 책을 탁 덮고 키요카가 묻는다. 백색의 표지 위에 빨간 은박으로 가공된 글씨로 ‘네 시체를 묻어라’ 라는 제목이 형광빛에 반짝였다. 그제야 제목을 본 키요카가 질색을 했다. 옆에서 다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츠사키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아니, 듣진 않았는데 안 볼수가 없던데? 아마 나 말고 다른 몇 명도 봤을지도 몰라. 마주 본 나츠사키의 눈은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휘어진 채였다. 표정이 얄미운지 입술을 내민 키요카가 괜스레 뚱해진 목소리로 물으며 손 끝으로 제목을 몇 번 치며 물었다. 이것도 이미 보셨어요? 나츠사키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진다. 응, 봤지. 취향은 아니었지만 추리 소설이잖아?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나츠사키의 몸이 도로 바르게 펴졌다. 의자를 끌어와 키요카와 거리를 붙인 나츠사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마저 말을 잇는다. 추리 소설이라지만 지역 갈등요소가 주인 것 같기도 하고. 아.. 나카이쨩이 덜덜 떨 법도 했던 게 하필 해변가에 누워있는 시체를 발견해서겠구나. 나츠사키의 말에 키요카는 제가 더듬거리며 읽어내려간 문장을 겨우 기억해냈다. 그는 오후의 나른한 햇볓을 받으며 해변을 걷다, 해변가에 누워있는 시체를 발견했다.키요카는 질린 표정으로 이미 덮어져 있는 책을 손가락으로 죽 밀어 나츠사키 쪽으로 밀었다.
도서관 안은 간간히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오거나 몇몇 인원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채였다. 5교시가 지난 후 6교시에는 한주 간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그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오는 동아리 과제를 발표하고는 했었는데, 도서관에 올 때마다 거진 패닉 상태였던 키요카가 제대로 된 감상을 이야기 한 날은 거의 손에 꼽았다. 눈 앞의 상대는 그래도 매 주 다른 책에 대한 감상을 내놓았었다. 나츠사키가 늘 감상을 말하던 소설들은 추리소설이었다. 대부분의 문학에서는 화자의 감정에 집중하지만, 추리 소설의 경우 작가가 트릭을 어떻게 서술하는지에 따라 소설의 전개가 달라지기 때문에, 실제 살인 사건의 살해 방식이라던지 범인의 심리를 전문 용어에 빗대서 설명한다던지.. 키요카는 그 시간에는 다른 부원의 말을 경청한답시고 귀를 틀어막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어서, 쏟아지는 파도 소리에도 겨우 말을 기울이고 있자면 나츠사키는 매번, 그래서 이렇게 죽은 거지! 하며 추리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스포일러를 내놓았다. 나츠사키가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의 애정과 소설가로써의 자질은 일단 뒤로 하고, 키요카는 이미 범인을 알아버리게 된 탓에 나츠사키가 읽었던 추리 소설은 부러 찾아 읽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이번에 키요카가 얼결에 집어온 책은 희귀한 것일테다, 나츠사키 레이가 발표하지 않은 책이니까. 밀었던 책 쪽으로 잠깐 시선을 주었던 키요카는 잠깐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상대를 응시했다. 오후 2시경의 햇살 아래 있으면 사라질 것 같은 사람.. 마침 열린 창 틈으로 햇빛이 끼쳐들어와 두 사람을 집중시키듯 길게 손을 뻗어 키요카는 일순간 눈이 먼다. 잠시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상대가 사라져, 키요카는 손등을 눈가로 가져갔다. 상대도 눈부셨는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밀색 속눈썹 끝에 햇볓이 맺히는 것을 키요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잠시 태양이 사그라들었는지 둘 위에 비친 조명이 차차 어두워졌다. 잠잠해진 창가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눈 앞의 상대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 키요카가 나츠사키에게 묻는다. 나츠사키 씨는 왜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거에요? 나츠사키의 고개가 가만히 기운다. 웃음을 머금었던 입가가 수그러든다. 빛을 담은 눈동자가 잠시 키요카를 응시하다, 듣는 사람도 맥빠질 정도의 산뜻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글쎄, 갑자기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네. 그냥.. 어릴 때 부터 좋아해서 지금도 좋아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아까의 표정을 무마라도 하듯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키요카는 가만히 그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어릴 때 부터 좋아해서. 단순히 그런 이유일까? 지금까지 당신이 말했던 감상은 대체로 구체적이고.. 이미 죽은 사람이 나오는 내용 뿐이었는데. 키요카는 그것이 비극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제가 면접을 보았을 때 말했던 인어공주 같은 것. 키요카는 어쩐지 조금 더 집요해지고 싶어졌다. 상대의 웃는 얼굴을 무너트리게 될 지는 몰라도, 허점을 파고드는 것은 탐정이 아닌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키요카는 질문을 바꿨다. 나츠사키 씨는 그러면, 추리 소설에서 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세요? 범인? 피해자? 아니면 해결하는 당사자? 키요카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또렷히 나츠사키의 지척에서 들린다. 평소의 겁먹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나츠사키의 눈을 마주보고 있는 탓에 끝이 노랗게 빛내는 회색 눈동자가 나츠사키를 보고 있다. 나츠사키는 시선을 잠깐 피했다. 웃어서 피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기에, 나츠사키의 표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글쎄, 피해자 아니겠어? 사건이 생겨야 소설이 성립되니까. 인물 간의 심리 묘사가 중요하긴 해도 사건이 시작되어야 나머지를 구성할 수 있는 거잖아... 나츠사키의 말꼬리가 변명하듯 죽 늘어졌다. 눈 앞의 키요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 초 뒤의 침묵, 나츠사키는 왜인지 모르게 초조해져 시선을 틀어 키요카를 보았다.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듯 내려온 눈썹과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키요카의 입술이 달싹인다. ...그렇다면 나츠사키 씨가 가장 좋아하는 건 피해자일까요? 그 피해자는 이미 결말이 난 인물이니까. 저는요, 저라서 그런지 추리 소설을 읽어도 그 피해자를 동정하게 되더라고요. 시작부터 죽었다니 이야기가 진행되어도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이 확정된 거잖아요..추리는 결국 독자의 몫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동정하게 되면 웃긴 걸까요. 키요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아픈 난제고 무거운 미제가 된다. 순간 창가에서 들리는 유독 큰 파도소리 탓에 키요카는 질문하다가도 두 귀를 꽉 틀어막았다. 잠시 고개를 숙인 키요카의 파란 머릿결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고개를 숙여 올려다본 나츠사키의 입술이 움직여 무어라 중얼거려 급하게 두 귀를 막았던 손을 떼어냈지만 이미 나츠사키의 입은 다물어진 채다. 키요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죄송해요, 파도 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가라앉았던 회색빛 눈이 파도 위 수면처럼 일렁인다. 나츠사키는 입술을 끌어올려 장난스레 대답한다. 내 대답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은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 안 해 줄래. 원래 진상은 두 번 이야기해주는게 아니니까. 나츠사키는 웃다 가만히 아까 키요카가 자신의 쪽으로 밀었던 책의 제목을 본다. 나카이 쨩, 이 책 끝까지 읽어주면 안 돼? 피해자가 어떤 사인인지는 기억나지만 그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거든. 그러니까.. 나츠사키는 가만히 숨을 고른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평소의 자신답지 않아서인지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나카이 쨩이 이 책으로 발표해줘. 해변에서 시체가 나와서 어렵겠어? 놀리듯 농조가 섞인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녹아든다. 키요카는 그 말에 가만히 나츠사키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피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피해자의 최악에 대해 미루어보겠다는 말과도 같아서ㅡ 키요카는 눈을 바라본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음 시간에 꼭..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할게요. 키요카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그래, 나카이쨩도 이제 도서부원 노릇을 해야지! 장난스런 목소리가 키요카가 내뱉은 다짐을 흐트러트린다. 엑, 저 그래도 매번 성실하게 나오고 있는데요... 억울한 듯 항변하는 목소리가 오후 3시가 될 무렵인 도서관 안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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