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
나나남매
가설을 세우는 것부터 추리가 시작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산장에서 죽은 피해자가 사망 시점 당시 한 시간 전 쯤에 옆 투숙객과 이야기를 했다, 라고 했잖아. 피해자의 사망 원인 자체는 오른쪽 어깨부터 흉곽까지 이어진 칼로 길게 난 자상이었으니 알리바이가 가장 불분명한건 옆에 묵고 있던 투숙객이지. 사망 당시에 피해자와 가까운 곳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접촉한 것도 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곳 자체가 밀실이었지. 어떻게 밀실이 만들어졌느냐! 가 핵심이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가설을 세워야 하는 거야. 사실 이 방 안은 밀실이 아니었다. 라는게 첫 번째 가설인 거지. 우선 가장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인물을 이야기하자면, ..키요카쨩, 듣고 있지? .. 목소리가 멀어졌다. 키요카는 반쯤 가물거리는 시야를 여러 번 깜빡였다. 잠깐 상대의 어깨로 기울여졌던 고개를 바로세운다. 새어나오려는 하품을 꾹 눌러참고 키요카는 아주 건성으로 대답했다. 레이 씨, 저 진짜 안 잤어요, 집중했어요.. 변명과는 거리가 먼 맥없는 목소리가 바닥을 긴다. 그러니까 가설을 세운다는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뒤늦게 눈치를 보며 덧붙이는 말에도 책을 펼쳐들고 설명에 열중했던 상대가 탁 소리나게 책을 덮었다. 빈정이 상한 것인지 상대의 의욕 없는 목소리 때문일지, 자연한 수순으로 책을 들고 있던 레이는 책을 내려놓고 이제 막 고개를 든 키요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팔을 쭉 뻗어 가볍게 기지개를 피고는 서운한 듯 투덜거렸다. 정말, 키요카쨩이 먼저 이야기 해 달라고 해서 기껏 이야기해 준 건데. 어깨에 기댄 채 입술을 내밀고 속삭이는 것을 키요카는 가만히 듣고 있다. 쏴아아, 사방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면 파란이었고 어디든 물 속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어깨를 맞댄 채 한참을 있었다. 책을 넘기기에는 아까의 붕 뜬 이야기로 의욕이 휘발된지 오래였고 사방에 쏟아지는 햇볕 탓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으므로.. 키요카는 제 곁에 기댄 상대가 햇빛에 산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쪽으로 파도같은 머리가 선선한 바다바람에 나부낀다. 레이의 현실감 없는 하얀 손이 햇빛을 받아 희게 부서지자 키요카는 가만히 손을 움직여 손을 붙잡았다. 레이는 키요카의 어깨에 말 없이 기댄 그대로 잡힌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가느다란 손에서 오는 미약한 진동, 맥박.. 사방에서 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데도 키요카는 몸을 떨지 않았다. 손을 마주잡고 서로의 곁에 기댄 채 눈을 감은 키요카가 입을 연다. 그러면 저희도 가설 같은 걸 세워 볼까요? 대신에 피해자는 없는 거죠. 어깨에서 짤막한 숨소리가 들렸다. 피해자가 없으면 가설을 세울 수가 없잖아, 키요카쨩. 키요카의 머리칼 때문에 그늘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던 레이가 느리게 눈을 뜬 채로 답했다. 키요카의 얼굴은 흰 햇볓을 받고 있는 채여서, 레이는 시선을 올려도 키요카의 달싹이는 입술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열린 창 밖으로 파도가 지나갔다. 키요카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레이의 눈가를 간질였다. 옆의 여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들이쉬는 호흡조차도. 몇 번의 조용한 숨소리 끝에 달싹였던 입술이 문장을 만들어낸다. 피해자는 있으면 안 돼요, ..저희 둘이라서. 레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순간 붙잡은 손이 간단히 빠질 것 같아 레이는 오기로 키요카의 손을 꽉 붙잡는다. 레이는 태연한 듯 말을 받아 마저 이었다. 피해자가 없으면 추리 소설은 성립이 안 돼, 키요카쨩. 범인은 없어도, 피해자는 있어야 해. 가설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야… 레이의 말 끝이 점점히 늘어진다. 레이의 머리 위에서 키요카가 웃었다. 네, 역설이에요. 사실 가설이라기보다는 미래죠. 답하는 목소리가 순간 밀려든 파도소리에 잠겼다. 레이의 목울대가 침수된 것 처럼 울렁인다.
손 끝으로 느꼈던 미약한 맥박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는 그 말에 가만히 조소했다. 그렇게 피해자가 없게 된다고 하면, 어떤 가설을 세울 건데? 레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상대 같은 파도마냥 멀어지고 싶었다. 아니, 모순적인 것 또한 자신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싶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테니. 아까의 조소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던가.. 레이의 심장이 요란하게 울린다. 여전히 자신의 손을 붙잡은 상대는 어떤 미동조차 없다. 잔잔한 수면처럼 고조 없는 목소리가 살며시 레이에게 닿는다. 글쎄요, 오히려 그걸 가설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피해자는 없었다, 같은. 상대의 터무니없는 말에 레이의 몸이 잠시 흔들렸다. 조용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게 뭐야, 엉터리잖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끌어올린 입꼬리가 가라앉을 줄 모르고 떨렸다. 여전히 목 안에 덩어리진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건 가설이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의 기약 없는 미래가 되는 거잖아, 키요카쨩. 애초에 추리할 생각도 없었던 거지. 떨림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가 애써 평안을 위장해, 레이는 중간중간 잠긴 목소리를 숨기려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평소라면 꺼낼 리가 없는 이야기다. 타인의 가정도, 예정도, ..하물며 자신의 미래를, 본인보다 벅찬 타인과 더불어. 이상하게 맞닿은 손에 전혀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일까, 상대가 오늘은 바다 앞에서 지나치게 차분했기 때문일까. 그 이유로도 이건 다분히 꿈 같기도 하잖아. 레이는 꿈에서도 예정된 미래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옆에 있던 사람은 매번 본인이 하지 않던 기약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불가항력일지도 몰랐다. 레이는 천천히 키요카의 어깨에 기댄 고개를 들어 키요카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회색빛 눈에 노란 햇빛이 일렁였다. 눈을 마주보며 레이가 먼저 묻는다. 미래를 가정하게 된다고 하면 뭘 하고 싶은데? 키요카의 머리 끝이 흰 빛을 받아 희게 부서지는 포말이 된다. 키요카의 입술이 가만히 열린다. 레이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채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붙잡고 있던 손의 맥박은 여전히 느껴지지는 않지만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정면으로 들어온 햇살이 두 사람을 완전히 삼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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