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이지만 고삼입니다

우짜다가……

ㅎㅇㅌ by 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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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아, 나 프린트 제출 좀 늦을 것 같은데. 내 거 빼고 내면 난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

"최상엽이요."

"엉?"

"제 이름 반장 아니고 최상엽이라고요."

"아 그래, 상엽아. 급하면 먼저 내두 된다구."

"아녜요. 형 다 하면 같이 낼게요. 천천히 하세요."

상엽은 품에 끌어안고 있던 프린트 뭉치를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교과서에 적힌 필기를 베껴 적는 예찬의 손이 더 급해졌다. 진짜 천천히 내도 되는데. 상엽은 그냥 예찬에게 제 프린트를 내어줬다. 제 거 보셔도 돼요. 생색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조금 건조한 어투였다.

여기서 문제, 예찬과 같은 교실을 공유하는 동등한 학우 최상엽이 예찬을 형이라 부르며 존칭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

예찬은 복학생이었다. 고삼 수험생 딱지 갓 달게 된 아이들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도는 교실로 복학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스무살 나이에 고삼 딱지 달게 된 예찬이 생각하는 자신의 처지의 장점은 '공부할 시간이 더 많았다' 따위가 아닌, '합법적으로 흡연이 가능해 스트레스 해소가 효과적이다' 정도였다. 이딴 걸 장점으로 뽑은 걸 보면 예찬이 꼴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찬은 공부는 하지 않을 지 언정 가오, 꼰대질 이런 거 극혐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예찬은 그냥 한동안 복학생인 거 숨기고 저보다 한 살 어린 애들이랑 맞먹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제 나이를 오픈했다. 새학기 첫날이라 담임도 신경 쓸 게 많아서인지 따로 언질을 안 한 채로 그냥 한 반에 몰아넣고 알아서 자기소개를 시키고는 업무를 보러 가버려 생긴 불상사였다. 이미 예찬에게 야 예찬아, 하며 말 까던 고삐리들은 그냥 편하게 대하라는 예찬의 허락 하에 쭈뼛쭈뼛 말을 놓았다. 지금은 눈치도 안 보고 야, 신예찬 정도로 불렀다. 그들이 남고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씨발련아'가 호칭으로 굳어지지 않은 게 다행일 지도.

아무튼, 그렇게 예찬에게 존대를 하는 건 상엽만 남았다.

그리고 상엽은... 그냥 반장이었다. 그냥 학교 다니면서 반장 역할이나 할 것 같이 생겼고 대학 가면 과대할 것 같이 생겼다. 공부 열심히 하는 애. 수학 문제를 틀리면 답지를 보고 풀이를 통으로 외워버리는 애. 체육 수행평가 따위가 제 생기부 망가뜨리는 거 용납 못하는 애. 뭐든 잘하는 애. 입학식 때는 신입생 대표 선서도 하고 매년 장학금도 받았으며 너 주말에 뭐하냐 물으면 학원, 독서실 정도의 대답만 나오는 애. 그런 상엽에게도 아주 잠깐의 사춘기가 찾아오기는 했었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동안 자신의 개노잼 라이프에 한탄하기는 했었으나 이내 체념했다. 누가 시켜서 공부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대학 잘 가려고 하는 거니까 이겨내야지. 번아웃 비슷한 게 와서 무력감이 덮쳐도 그냥 수능에서 미끄러져서 최저 못 맞추고 지망 대학 떨어지고 재수하는 상상하며 버텼다. 그런 상엽에게 최근 생긴 곤란한 점이라면 그냥 같은 반 복학생 형이었다. 헐렁하게 굴다가도 왜 꿇었는 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형. 상엽은 그냥 잘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것 같아 최대한 그 선을 가늠하며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를 위한 노력 중 하나가 절대로 말 놓지 않기였다.

이왕 쓰는 거 지인짜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상엽은 예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어쩌다가 그 형을 스쳐 지나친 복도에서 담배향이 은은히 올라와서 그랬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는 페브리즈 향이 훅 끼쳐서 그랬다. 꼴에 쌤한테는 걸리기 싫은가 보지. 어떻게 보면 편견도 가졌으나 크게 밖으로 표출하며 티를 내지는 않았다. 반장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면 딱히 엮이고 싶지 않은 정도로만 그 형을 대했다.

그러니까 딱 그 날 전까지는 그랬었다.

야자가 끝나고 오랜만에 학원을 쉬는 날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교통사고가 작게 나서 하루만 수업을 빼야 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야자가 끝나고 문자를 확인했고 형식적으로 예의 갖춰서 답장까지 하자 시간이 텅텅 비었다. 아직 공강이란 게 없던 최상엽은 멍하니 교실 한 가운데 서서 뭘 해야 할 지 고민이나 했다. 이번 주 독서실 공사하던데. 스터디카페는 근처 중학교 학생들 때문에 좀 시끄럽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할까. 오랜만에 시간 비는데 나 이렇게까지 취미가 없었나. 괜히 손목시계나 한 번 내려다 보고 신발 코 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 등 뒤에서 어깨께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 반장? 혹시 시간 있어?"

뒤를 돌자 예찬이 서 있었다. 복학으로 인해 무수한 소문 달고 다니는 그 형. 수업시간 내내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조는 형. 점심시간이면 담배를 피우곤 페브리즈 향을 휘감고 돌아오는 형.

"네. 뭐 도와드릴까요?"

"아니 뭐 도와줄 건 없고. 혹시 시간 남으면 우리 공연 볼 생각 있나 싶어서. 내가 밴드부거든. 비공식적이지만."

그렇게 이끌려서 별관에 똑 떨어져 있는 밴드부 연습실까지 발을 들이게 됐다. 사물놀이부랑 같이 쓴다던데 안 불편한가. 아련하게 사랑 노래 부르는데 덩기덕쿵더러러얼쑤 하면 안 깨나? 잡생각하며 예찬의 뒤를 쫓다보니 연습실 앞이었다. 꼴에 방음문 비슷한 거 달아주기는 했는데 두껍기만 하고 그닥 방음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얘들아 내가 관객 구해왔어. 얘는 우리 반 반장."

예찬이 상엽을 밴드부원들 앞에 내세웠다. 상엽도 고개를 한 번 꼬박 숙이며 9반 반장 최상엽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렇게 즉석에서 관객으로 캐스팅 되어서 본 공연은... 솔직히 별 감흥 안 들었다. 예고도 아니고 일반고에서 무슨 기대를 하나 싶기도 했고, 심지어 저를 끌고 온 예찬은 옆에 빠져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형이 밴드부 부장이라면서요. 예찬은 그냥 옆으로 빠져서 박수나 치고 있었다.

"형은 안 하세요?"

상엽의 질문에 예찬이 머쓱하게 웃었다. 검지손가락으로 코 끝도 한 번 훔치고.

"나 아직 재활 치료가 안 끝나서 연주는 못 해."

그 말을 하는 예찬의 가슴팍에 큼직하게 구멍이 뚫려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로써 애써 웃고는 있지만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게 보였다. 아, 망했다. 나 방금 선 넘은 것 같은데.

상엽은 그날부로 예찬에게 얽매였다. 예찬은 아무 말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최상엽이 신예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묘하게 쓰게 올라가는 그 형의 입꼬리나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었다.

물론 시작은 그랬다.

그 뒤로 최상엽은 신예찬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녔다. 형 이번 시간 이동수업이에요. 그렇게 예찬을 챙겨서 다른 교실들을 오갔다. 심지어는 점심시간마다 찾아오는 예찬의 담타(...)까지 함께 해줬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상엽은 죄책감 탓이라고 치고. 그런 상엽을 보는 예찬은 어떠했는가.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는데 별 생각 안 하기로 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옆에 단어장이나 손에 쥐고 있는 애 세워두고 연초 피우기는 좀 양심이 찔린다는 점. 그래서 눈치 좀 보다가 그냥 전담으로 갈아탔다. 목 잘 쓰는 것 같던데 나 때문에 폐에 빵꾸나면 어떡하냐고. 쟤 과교과 쓴다던데. 그럼 목 평생 써야 할 텐데.

예찬이 그리 걱정하고 신경쓰는 최상엽의 목은 어차피 길바닥에서 담배 피우는 무개념 남성들과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아랫집 아저씨 덕에 간접흡연에 단련될 대로 단련됐지만 말이다. 신예찬은 모르는 일이니 넘어가자(안다고 했어도 더 보태기 싫어서 바꿨겠지만).

아무튼 상엽은 그렇게 예찬의 뒤를 따라다니며 예찬의 과거사라 하기도 어중간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들었다. 수증기 한 번 뱉고 이야기 하나 뱉는 식이었다. 어느 날에는 초등학교 때 리코더 동아리를 했던 얘기를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성인 되고 처음 술 마셨다가 의외로 안 취해서 같이 마시던 애들 다 집에 넣어주고 혼자 노래방 갔다는 얘기를 했다(혼자서요? 응. 뭐 불렀는데요? 붐바야).

그렇게 예찬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지 한 달쯤 된 날, 예찬은 대뜸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을 때 이야기를 했다.

"나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우리 엄마 취미가 바이올린이었거든? 거기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게 됐던 것 같은데. 처음 배울 때는 손이 진짜 너무 아팠어. 막 손이 진흙처럼 옴폭 패일 것 같았다가 감각이 안 느껴질 때까지 연습했어.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진짜 눈 앞이 깜깜하더라구. 그런데도 내가 손을 움직이는 대로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해서 계속 연습했어. 중간에 반항기도 겪기는 했지만..."

예찬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닦아줘도 되는 건가? 예찬의 눈가는 닦아주기도 애매할 만큼만 촉촉하게 수분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목울대를 꿀렁이며 감정을 짓삼킨 예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때 열심히 해 놓을 걸 싶네. 지금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예찬은 다시 필터를 입에 물었다. 이야기를 비워낸 만큼 니코틴으로 다시 채워넣는다. 상엽은 그런 예찬을 그저 물끄러미 구경했다.

"왜 못 하는 지 안 궁금해?"

"물어봐도 돼요?"

"당연히 되지."

"왜 못 하는 데요?"

그건... 예찬이 뜸을 들였다. 그닥 안 궁금한 척하며 단어장이나 뒤적거리며 딴청을 피우던 상엽도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고개를 들어 예찬을 쳐다봤다.

"네가 밴드부 무대 한 번만 서주면 알려줌."

상엽은 김이 폭 새는 느낌이었다. 힘이 쭉 빠졌다. 상엽이 그러거나 말거나 예찬은 꽤 진심으로 제안했던 건지 눈을 반짝이며 상황을 줄줄이 읊었다.

"우리 보컬이 펑크났어. 자기는 이제부터라도 정시 준비해야겠대. 근데 내가 쌤한테 싹싹 빌어서 체육대회 때 무대 따 놨단 말이야. 이미 따 놓은 무대는 해야 하잖아. 네가 한 번만 도와주라. 그럼 내가 다 알려줄게."

정 안 되면 말구. 다른 애들한테 빌어서라도 어떻게든 구해보지 뭐.

다시 그 머쓱한 표정. 검지가 다시 한 번 코 끝을 톡 건드린다. 다시 몰려오는 죄책감. 상엽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무슨 곡 연습 중인데요?"

그렇게 상엽이 질문으로써 수락을 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예찬의 사정을 아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망할 죄책감 때문이었다.

***

예찬도 보컬을 부탁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도 양심은 있다며 상엽에게 연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강요는 안 했다만 그래도 연습을 하기는 해야 하니 그냥 '상엽아 점심시간에 시간 괜찮아?' 정도로만 다가왔다. 예찬은 그렇게 단 둘만의 담타(원래도 담배는 예찬만 피웠지만)도 버리고 상엽을 이끌고 다른 부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상엽은... 그게 조금 아쉬웠던 것 같기도 했다.

상엽은 평소에는 물렁하고 격식없이 구는 예찬도 밴드부 부장이 되어야 하는 순간에는 의외의 카리스마나 리더쉽을 발휘해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찬은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 연습을 하는 순간에 동생들이 장난을 걸어도 별 말 없이 받아쳐줬다. 저래도 되나? 3학년 9반 반장 최상엽은 그런 예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 물렁한 분위기가 편안했다. 그렇다고 예찬에게 반말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예찬은 의외로 사람들에게 잘 파고드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어느 새 정신차리고 보니 3학년 9반 학급생 모두가 눈치보며 어색하게 붙이던 형 호칭을 내던진 상태였다.

"상엽아 그냥 편하게 반말 써두 된다니까?"

"전 이게 편해요."

"아! 내가 불편하다고. 형 소원임. 제발 나한테 반말 써주라."

"형 소원은 이미 들어드리고 있는 중인데요."

이런 식의 영양가 없는 대화만 반복되며 결국 예찬을 형이라 부르는 건 상엽만이 남았다. 야 엽아 넌 진짜 이상한 데에서 고집을 부린다. 그렇게 형 이겨먹으면 좋니? 너 말만 잘하면 다야? 엉? 이러다 대학 면접도 잘 보고 한 번에 합격하겠다? 엉? 이렇게 저주인 체 하는 응원을 마지막으로 반말을 주제로 하는 대화는 끊겨버렸다.

그런 예찬이 가끔씩 허를 제대로 찌르는 날도 있었다. 그날은 1학년 애들이 직업체험을 다녀온다고 연습이 없던 날이었다. 2학년 애들도 그냥 나오지 말고 쉬라고 했다. 그렇게 상엽과 예찬은 오랜만에 연습을 시작하기 전 루틴으로 돌아가 같이 급식을 먹고 학교 뒷편으로 몰래 빠져 담타를 가졌다. 형 그거 피면 좋아요? 상엽의 질문에 예찬이 기함을 했다.

"너는 꿈도 꾸지마. 계속 모범생 포지션 유지해. 원래 미성년자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학생이 몰래 숨어서 피는 거 진짜 지인짜 가오빠짐. 완전 최악이야. 나도 성인 되고 피운 거니까 너도 성인 되면 피우든가. 근데 웬만하면 피지 말고."

원래도 피울 마음은 없었다만 예찬의 말을 듣고 나니 호기심마저 싹 사라졌다. 그래도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 질문을 툭 던졌다. 그럼 저 성인 되면 형이 담배 가르쳐 줄래요? 결국 예찬이 물고 있던 필터를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주워요). 상엽아 날 말려죽일 셈이니. 내가 아기한테 그런 걸 어떻게 알려줘...

형이 저보다 더 어려보이는데. 굳이 내뱉지는 않고 그냥 삼켰다. 위아래 개념 없는 분위기를 선호하면서도 가끔씩 은근 꼰대처럼 굴 때가 있는 예찬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예찬이 형, 저는 수특보다 형이 더 어려워요. 멘트의 수신자인 예찬 또한 좆고딩이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좆고딩 연하남 같은 대사였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저 생각들을 예찬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엽아 지랄말구 가서 자이스토리인지 토이스토리인지나 풀어. 아마 그럴 것 같았다.

상엽이 열심히 단어를 외우는 척 딴 생각에 전념하고 있을 때 예찬의 질문이 뜬금없이 날아왔다.

"근데 담배는 왜?"

너 원래 나 별로 안 좋아했잖아. 양아치처럼 담배나 피고. 근데 왜 나처럼 담배를 피려고 하지? 예찬은 가끔씩 그렇게 예리해질 때가 있었다. 원래 예리한데 속 없는 척, 눈치 없는 척하며 숨기고 사는 걸 수도 있다. 타이밍을 놓쳐 아니라는 대답을 하기도 곤란해진 상엽은 눈동자만 데로록 굴렸다.

"눈치 볼 필요 없어. 나 같아두 별루였을 듯."

아차 싶었던 예찬이 다시 실없이 웃으며 자기비하를 곁들여 분위기를 풀어놨다. 실로 '형' 같은 면모였다. 성숙하고 인간관계에 능숙하고 담배 사면서 당당히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꺼낼 수 있는 형. 너그러운 포용력에 상엽은 안도감보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속이 근질거렸는데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어 그냥 넘겼다.

자, 여기서 문제. 그 기분이 무엇이겠는가? 상엽은 따돌려놓고 우리들끼리 얘기하면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가? 계속 보고싶고, 알아가고 싶고, 지금 뭘 하고 있는 지 궁금하고, 밥은 잘 챙겨 먹는 건지 걱정 되고, 전에 무슨 상처를 받은 건지 신경 쓰이고, 단 둘이 있고 싶고, 가슴이 간질거리고 뱃속이 간질거리게 되는 그 감정이 무엇이란 말인가?

전교 1등 최상엽은 졸지에 자신의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바보 같은 주인공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바보처럼 시간을 보내다보니 벌써 여름과 함께 체육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 상엽은 예찬과 장난도 주고 받을 수 있을 사이가 되었다. 자각 못하는 짝사랑을 시작한 상엽은 가끔씩 뻣뻣하게 굳어버리고는 했지만.

둘은 하교도 같이 했다. 따지자면 상엽이 예찬을 배웅하는 데에 더 가까웠다. 어차피 학교 근처에 학원을 다니는 상엽은 버스정류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나 꼬옥 굳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예찬의 하교길을 배웅했다. 형 들어가면 연락해요. 어차피 학원가면 핸드폰도 안 보면서 괜히 그랬고 예찬은 그냥 드문드문 '도착햇따!!ㅎㅅㅎ' 하는 문자를 남겼다. 집에 도착해서 기억나면 연락하는 거고 까먹으면 마는 식이었다.

그런 예찬이 가끔 먼저 연락할 때는 뜬금없이 길가에 민들레가 예쁠 때,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솜사탕 같을 때, 어느 새 푸릇푸릇해진 벚나무에서 떨어진 버찌가 머리통 위로 올라앉았을 때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연락을 주고 받고 밴드부원들과 몇 번의 연습을 반복하며 합을 맞추다 보니 체육대회 전날이었다.

[여뱌 내일 공연하니까 푹 쉬구ㅋㅋㅋㅋ 낼 보쟈!!]

엽이인지 여보야(이건 솔직히 좀 억지)인지 모르겠는 어중간한 호칭에 괜히 핸드폰을 쥔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간질거렸다. 몇 번 답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네.] 한 글자를 보냈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인 법이다. 그러나 고민하다가 그 끝에 덧붙여 보낸 건 손을 흔드는 카카오프렌즈 기본이모티콘. 그 이모티콘을 보낼 지 말지를 30분 같은 2분 동안 고민했다. 예찬은 상엽이 뭐라 답장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귀여워하긴 했겠지만.

***

체육대회 당일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등교해 마지막 연습을 하고 상엽은 반으로 돌려보내졌다. 어 엽아 수고했구 넌 이제 가두 돼. 나는 2학년 애들 좀만 봐주고 갈게. 그렇게 혼자 교실로 귀환해 반티인 환자복을 주섬주섬 주워입고 있으니 어느 새 온 건지 모를 예찬이 우하학 웃었다.

"야 엽아, 너 환자복은 지인짜 안 어울린다."

"그래요?"

"어엉, 다쳐봤자 축구하다가 넘어진 상처만 있을 듯."

"아닌데, 저 지금 되게 아픈데."

"어엉?"

상엽이 예찬의 앞에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바로 코 앞에 놓인 얼굴에 당황한 예찬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휘청. 넘어질 뻔 한 예찬의 팔을 상엽이 잡아채 제 쪽으로 훅 당겼다. 이자식 제법 건장한데. 혹시 마음이 아프니?

"저 어제 되게 긴장해서 한 숨도 못 잤거든요."

"그래...?"

"네, 저 그래서 눈도 되게 따갑고 아픈데. 선배가 호 해주실래요?"

상엽의 얼굴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버텼다.

호 해주세요.

그 끝에 결국 져준 건 예찬이었다. 호오. 예찬이 상엽에 눈가에 살살 바람을 불었다. 두 눈을 내리 감고 그 바람을 맞던 상엽은 다시 한 번 뒷목이 뻣뻣하게 굳으며 뱃속에 들어선 나비가 날개짓을 시작하는 걸 느꼈다. 간질간질. 두근두근. 낯선 설렘과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어금니 뿌리까지 근질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상엽은 마침내 이 감정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형, 저 형을 사랑하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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