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만드는 계란말이 레시피 上
“오랜만이네, 아마기 린네 군!”
먼저 인사한 것은 남자 쪽이었다. 그는 린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다행이도 아마기 린네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금방 기억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그 남자의 이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린네와 몇 번인가 함께 일을 했고 그때마다 곧잘 말을 섞었던 남자였다.
남자의 말대로 그와는 제법 오랜만에 만났다. 그야, 최근에는 린네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일도 자연스럽게 줄었다는 거다. 남자는 그런 린네를 조금 안쓰럽게 여기는 듯 했다.
“린네 군이야 실력도 좋은데다 훤칠하니 잘생겼잖아? 활동이 줄어드는 건 업계의 손실이라고.”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던 중에 그렇게 말한 남자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 말에 린네는 꽤 오래 전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명함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자가 원한 건 그 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대충 숫자를 적은 메모지를 찢어 린네에게 넘겨주었다. 얼결에 종이를 받아든 린네는 그 숫자를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메모지에 갈겨 적은 번호는 린네가 수첩에 끼워두었던 명함과는 번호가 달랐다.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번호인걸까. 급하게 연락처를 바꿨다면 메모지로 건넨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기 린네가 그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기 린네는 계속해서 아이돌을 하고 싶었고, 업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신인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해있었다. 누군가가 도와주겠다고 나선 상황에서까지 고고한 행세를 하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은 간단하게 잡혔고 남자와는 어떤 호텔의 일식 레스토랑에서 만나 식사를 했다. 곱게 꾸며진 차완무시는 달착지근했다. 계란이 가진 특유의 비린내에서 린네는 문득 니키와의 식사를 떠올렸다. 오늘의 일정은 일러두었다. 니키는 린네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하나 걱정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러니 린네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연락을 취한 것은 그저 린네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올 때마다 간단한 안내가 따라붙었다. 맛있는 요리일 것이 분명했지만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니키가 알면 주어진 음식을 소중히 하라며 화를 내겠지. 린네도 음식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인간이다.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젓가락 끝을 가지런하게 맞춘 린네는 구운 갈치에 곁들여 나온 송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은 비싸고 싱싱한 식자재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베어 물 때마다 혀 끝에 배는 향기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업계의 분위기가 화두에 오른 탓이었다.
“확실히, 정통파 아이돌은 사양세에 접어들긴 했어.”
남자의 말에는 저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억지로 송이를 삼킨 뒤에는 송이가 아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남자는 몇몇 아이돌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것들은 아이돌의 이름이 맞았으나 사람의 이름은 아니었다. 전부 ‘유닛’의 이름이었다.
혼자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 혼자 활동하는 아이돌보다 열등하다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무대에 오르고 말고는 실력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실력 외의 수많은 요인이 아이돌이 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마기 린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우수한 아이돌이 모여 하나의 유닛을 결성한다. 게다가 그들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아마기 린네가 혼자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다.
흐름은 분명히 새로운 형태의 아이돌을 향해있었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처음에는 남자의 대단하신 아이돌론에 호응해주던 린네도 끝에 가서는 완전히 잠잠해졌다. 속상하고 자시고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젓가락은 차마 내려놓지도 못한 채로, 테이블 위의 접시가 늘어만 갔다.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린네 군만큼 실력있는 아이돌도 드무니까.”
남자는 선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린네도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 그를 마주했다. 문득, 단단하고 매끈한 것이 발목 안쪽을 스쳤다. 무신경한 구두코에 흠칫 놀란 린네가 발을 무르고 남자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제 실수에 크게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끔히 빈 접시 옆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남자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며 말했다.
“나는 정말로, 린네 군이 활동을 이어나도록 도와주고 싶어. 이대로 잊혀지게 내버려두기엔 너무 아깝거든.”
그 말에야 겨우 웃는 얼굴로 굳은 입꼬리의 긴장이 풀어진다. 아마기 린네는 지금의 제가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그런 호의에 간단히 기대어왔다. 제게 호감을 드러내 준 이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웃는 얼굴을 꾸미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자, 그러면.”
남자가 기지개를 펴듯 테이블로부터 몸을 떼어냈다.
“올라갈까?”
린네는 그의 제안에야 비로소,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치 어떤 허락이 떨어지지 않고는 멋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방으로 올라간 뒤에 벌어진 일이야 기실 뻔했다. 아마도 아마기 린네만이 제게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카드키를 꽂아넣자마자 린네의 어깨를 쥐고 몸을 밀어붙였다.
남자가 대충 밀어낸 묵직한 문은 자석이 이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닫혔다. 모든 행위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애초 그의 행동도 밀어붙였다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부드러운 손짓은 에스코트 따위의 유도에 가깝다.
뒷걸음질을 치면 금세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게 된 린네에게 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해 고개를 돌리면 남자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지만 시선을 차단하는 정도로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허리를 더듬고 골반을 움켜쥐는 손길에 퍼뜩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를 멈추게 해야했다. 린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차마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섞였다.
“저, 저는, 이러려고 온 게…….”
그 말에 남자가 픽 웃었다. 대화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순진한 척을 하는 거야?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되돌아온 물음에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순진한 척이니 뭐니 아마기 린네가 실제로 몰랐을 것을 상정하지 않는 확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유가 넘치는 태도는 린네가 당연히 저를 받아들일 것을 전제로 한다. 어째서? 이런 행위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촌뜨기가 한 번에 성공하긴 쉽지 않지. 린네 군도, 그래서 도움을 받았던 것 아냐?”
도움이라면 받았다. 그것도 몇 번이나. 아마기 린네는 실력이 보증되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런 저를 무대에 오르게 도와줬으니 당연히 감사를 표했다. 무대를 마치고 상체를 꾸벅 숙여가며 인사하면 언제 한 번 식사라도 하자며 호의를 내비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호의에 린네가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준 적은 없었다.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그저, 먼저 귀가한 니키가 제 몫의 식사를 준비해주는 것이 좋았다. 쉽게 공복을 느끼는 니키가 제 귀가를 기다려주는 것이 좋았다. 니키와 함께 마주앉아 식사하는 것이 좋았다.
아마기 린네는 비로소 그가 거절해온 수많은 호의의 의도를 되짚는다. 만약 린네에게 향한 호의의 지저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의도가 감춰져있었던 것이라면. 도움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어떤 거래를 위해 내밀어진 패였다면. 순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던 것들이었다면.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옳은 행동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아는 것 없는 신인이라도 그 정도의 시비는 알고 있다. 이딴 거래에 응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몸을 내어주는 것은 종국에는 제 가치를 떨어트리게 되는 짓이다. 하지만.
“영리하게 행동해야지. 아이돌, 계속 하고 싶은 것 아니었어?”
남자는 굳이 귓가에 입술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머리카락을 헤치고 귓가와 어깨죽지의 피부에 스미듯 닿았다. 그럴수록 몸이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오싹한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남자는 린네가 그렇게 행동할수록 기세등등해졌다. 그의 뜨겁게 달아오른 손의 끈적한 가죽이 윗옷을 헤쳐 밀어올리고 등줄기를 더듬으며 기어올랐다.
남자가 말하는 영리한 행동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아마기 린네는 남자와의 우열에 대해 고민한다. 단순한 체력의 우열이라면 남자가 린네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원시에서나 통용되는 기준이다. 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 도시의 인간들은 언뜻 모두가 평등하게 보인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와 우열의 관계가 그 지저에 깔려있다. 그건 린네와 남자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기 린네는 결코, 남자를 이길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우열은 아마기 린네의 이해에 얽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기 린네는 눈을 꽉 감았다. 지금 하려는 행동은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아마기 린네는, 단 한 번도 옳았던 적이 없었다.
“사람을 쳐버렸다구여?”
린네의 고백에 조리대에 서있던 니키가 몸까지 돌려가며 린네를 확인했다. 니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린네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탓이었다. 평소라면 요리에 집중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린네를 걱정하는 것이겠지. 린네도 제가 대형사고를 쳤다는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린네는 무심하게 턱을 괸 채 펼쳐둔 책만 들여다보았다. 니키의 질문은 어떤 대답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가열대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니키는 냄비를 열지 않았다. 그저 린네의 손에 시선을 두기만 했다. 희고 기다란 손은 그저 빼곡한 활자들 위에 놓여있을 뿐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키가 침착한 투로 물었다.
“……혹시 도박 마작에서 졌어여?”
테이블에 앉았던 린네는 대답 없이 주먹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켰다.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서니 한 번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한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에 눈을 크게 뜬 니키가 황급히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우갹! 때리지 마여!”
“니키큥~ 나도 말야, 하루에 두 명이나 땅으로 돌려보내고 싶진 않으니까 적당히 눈치 챙기라고.”
니키의 말꼬리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기면 니키는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기어오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니키가 헐거워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린네를 흘끗 살폈다.
“그 사람, 살아는 있어여?”
이어지는 질문도 그리 섬세하지는 못했다. 그 말에 린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을 뭐라고 생각한 걸까. 니키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설마 진짜, 땅으로…….”
“그럴 리가 있냐.”
니키의 헛소리에 린네가 넌더리를 내며 덧붙였다.
“살아는 있을거야. 확인은 안 했지만.”
“우와……. 괜찮은 거예여? 내일부터는 뉴스를 제대로 확인해야…….”
“적당히 하지?”
“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아여.”
그제야 니키는 가열대를 끄고 육수용의 보리멸을 건져내었다. 그러고는 꺼내놓았던 가쓰오부시를 한 움큼 쥐어 그대로 물에 넣었다. 몸을 돌려 린네의 얼굴을 마주한 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린네 군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도 지금까지의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침대 밑에 숨겨줄게여~ 그럼 전 드디어! 침대를 혼자 쓸 수 있는 거예여~!”
묘하게 들뜬 기색이다 했더니 제 가슴까지 두들겨가며 그렇게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만족한 건지, 니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칼을 집어들었다. 가쓰오부시가 충분히 우러날 동안 다른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도마 위에 당근을 올린 니키가 능숙하게 칼질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여?”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울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자조하고 싶었고 자학하고 싶었다. 수많은 감정이 얹혀 입 밖으로는 도리어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언어의 뭉텅이에 숨통까지 막히는 듯 했다. 벌레가 피부 아래를 기어다니는 것처럼 온몸이 근질거렸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린네는 니키로부터 눈을 굴려 시선을 피하며 낄낄대었다.
“그냥,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농담으로 삼을 셈이었는데, 어째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높아진 목소리에 목을 긁는 쉰소리가 섞였다. 그 탓일까. 도마를 통통 두드리던 식칼의 소음이 멎었다. 예기치 못한 정적이 시작되었다.
니키는 둔한 편이니까 제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어쩐지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새 신물이 도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삼켜 겨우 억눌렀다. 그러면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위장에 쌓이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니키는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싱싱한 야채가 잘 벼려진 칼날 아래에서 서걱서걱 썰려나간다. 칼날이 도마를 울리는 맑은 소음은 우습게도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니키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래두 다행이네여. 그 사람도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들키고 싶지는 않을테니 쉬쉬할 거 아니에여.”
“……그렇겠지.”
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근을 가지런히 썰고 있는 니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행세에 공을 들이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져 움직임을 멈췄다. 어째 행동 하나하나의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삐걱대었다. 당근을 예쁘게 모아 한 쪽으로 밀어두며 니키가 웃었다.
“나하하, 그 사람도 안됐네여. 얌전한 고양이인줄 알았던 린네 군이 사실은 고릴라였던 거잖아여.”
짓궂은 농담에 진심으로 반응할 생각은 없었다. 린네는 오히려 니키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갑갑한 공기를 뱃속에 꾹꾹 눌러담은 다음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니키 이 자식~!”
“으히익! 폭력반대! 내숭 떤 린네 군이 나쁜 거예여!”
뺨을 잡아당길 생각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요리에 집중했던 탓일까. 저를 향해 뻗어온 손에 니키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장난스러운 의도를 가장할 셈이었던 손이 멈췄다.
“……린네 군.”
니키가 저를 부른 순간 린네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주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린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밝고 장난스러운 니키의 성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니키의 얼굴을 보고 나니 우습게도 갑작스러운 허기가 일었다. 제가 지금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시이나 니키의 앞에서라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거다. 긴장을 풀어도 괜찮았던 거다. 니키라면 분명 받아줬을 거다. 그러니까.
“……괜찮아여?”
그러니까 더더욱, 아마기 린네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괜찮지 않을 것을 상정한 물음에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모든 감정은 전염된다. 린네가 긴장을 풀고 불안을 드러내고 걱정을 표했다면 그 부정적인 감정들은 고스란히 니키의 것이 되었을 테다. 상냥한 니키는 그런 감정들마저도 온전히 품어줬겠지.
그건 결코, 아마기 린네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린네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홱 몸을 틀었다.
“하아, 칼로리를 소비했더니 피곤하구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온몸이 노곤했고 모든 일들이 피로하게만 느껴졌다. 눕고 싶었고 잠들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제 의지대로 생각의 회로를 끊어내고 엎어져 기절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린네는 툭 내뱉듯 중얼대었다.
“잘래.”
“엣, 식사는여?”
니키가 그렇게 물었다. 끼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니키다운 의문이었다. 눈치없이 다정한 질문에 얼어붙은 기분이 녹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도 니키와 시선을 맞추는 것만은 어쩐지 힘들었다.
니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건 린네를 걱정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린네의 불안이 옮은 거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떨어트린 린네는 어깨만 으쓱이고 대답했다.
“그 자식이 샀다니까.”
린네의 대답에 니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비싼 재료를 사용한 생선요리는 신선했고 비린내조차 없었다. 니키라면 분명 부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니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시선이 잠자코 따라붙는다. 그걸 떨어내듯 뒷머리를 한 차례 흩었다.
침실로 들어선 린네는 냅다 니키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침구로부터 풍기는 냄새는 이제 제 체취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가 있다.
린네는 니키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억은 눈꺼풀 안쪽을 영사막 삼아 필름을 돌렸다.
옆으로 고꾸라지는 남자를 신경쓸 새는 없었다. 그야, 힘조절은 못했어도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봤자 가벼운 뇌진탕 정도겠지. 옷을 대충 추스른 린네는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닦고 세수를 했다.
입술이 닿은 뺨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내고 난 다음에는 목덜미와 어깻죽지도 흠뻑 적신 손으로 문질렀다. 나름 차려입은 단정한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어깻죽지에 닿았던 숨결이 형체를 가지고 살갗에 머무는 것만 같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린네는 저도 모르게 어깻죽지를 쥐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남자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자연스럽게 구두 사이를 파고들어 안쪽 발목에 닿던 남자의 매끈한 구두코를 떠올렸다. 실수라고 생각해 발을 무르면 그도 끈질기게 들러붙지는 않았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조차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변기를 붙들고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웠다. 그러고도 위장 가득 더러운 것이 남아있는 것만 같아 손가락을 집어넣어 혓바닥 안쪽의 목구멍을 긁듯 눌렀다. 애초에 먹은 게 적었으니 비는 것도 빨랐다. 더 이상 뱉어낼 것도 없이 비어버린 내장으로부터는 역한 헛구역질만이 목을 타고 기어올라왔다.
생명체의 시스템을 억지로 거스르는 행위가 벅찼는지 끝내는 눈물마저 흘렀다. 아마기 린네는 물기가 느껴지지 않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잘못 맞아서 죽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을 했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죽었더라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려서, 방으로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이 CCTV에 녹화되어 제 용의가 특정된다면 차라리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전부 끝내버릴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린네는 제 물건을 챙기고 옷을 가다듬은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남자에게 무슨 짓을 당하는 것이 무서웠던 건 아니다. 니키가 말한대로다. 아마기 린네는 강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행세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행세에 불과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고 실제로도 간단히 뿌리칠 수 있었다. 맥없이 나가떨어진 남자의 존재는 결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마기 린네가 무서워하는 것은 실제 유일하다. 모든 불안과 공포의 근원은.
린네는 눈을 꽉 감았다. 감출 기색조차 없는 인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아아~ 린네 군 또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여~! 옆으로 가여! 훠이훠이!”
관객을 앞에 둔 독백극이라도 하는 마냥 니키는 혼자서도 열심히 떠들어댔다. 린네는 그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리를 비켜줄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내내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니키는 린네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린네 옆에 적당히 자리잡고 누웠을 뿐이었다. 침대에 무게가 더해지는 순간의 미미한 흔들림에 잠시 눈을 깜박인 린네는 다시 느리게 눈을 감았다. 체온이 전해지지 않는 거리가 다정하다. 니키의 고른 숨소리가 작은 공간을 울렸다. 니키의 존재는 신경을 거스르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팬레터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린네가 시이나 가의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게 된 것도 꽤 예전의 일이었다. 가끔 고지서 사이에 섞인 팬레터를 니키가 함께 가져오는 일조차도 이제는 드물어졌다. 누구도 아마기 린네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랬으니 남자의 제안은 아찔할 정도로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영리하게 행동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마기 린네의 행동은 영리한 것이 못 되었다. 그 자리에서 생각을 멈추고 눈을 꽉 감고……. 그렇게 죽은 것처럼 버텼다면 아마기 린네는 다시 아이돌로 빛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일찍, 어떤 호의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버려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기 린네 혼자서 아이돌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면 새로운 멤버들과 유닛을 결성하도록 도움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 양 힘없이 무너진 남자를 밀어내고 니키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아마기 린네는 내내 후회했다. 아이돌이 되겠다며 고향의 사람들과 소중한 동생을 버리고 떠나온 주제에 막상 저를 버리는 일에는 겁을 집어먹었다.
인내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영리하게 처신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모든 후회를 후회했다. 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각의 궤도는 끊기지 않았다. 제동장치가 망가진 기관차라도 되는 양, 비관은 멈추지 않고 도리어 속도를 높인다.
아마기 린네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한 사람이라도 저로 인해 웃어준다면 아이돌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이돌이 대중에게 잊혀지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게 무서웠다. 더 이상 잊혀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제안에 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아마기 린네는 동경했던 아이돌을 떠올린다.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관계를 기억한다. 린네는 모르는 그들의 사정을 상상한다. 그들은 어쩌면, 아마기 린네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만약 그와 다른 선택을 했기에 그들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아마기 린네의 선택은, 이번에도 옳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걸까. 아마기 린네의 불안과 공포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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